당시 경찰이 가지고 있는 정보 자료로서 전과 기록을 통하여 사상범을 구분하고, 그 사상범 가운데 좌익 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를 구별해내기에는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신원증명을 해주기 어려운 정도를 넘어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말 많은 인간’이나 ‘유식한 불평분자’는 다 빨갱이로 보이는 터에 경찰에 특별난 기록이 없다고 해서 무작정 무책임하게 빨갱이가 아니라는 증명을 ‘남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육지책이면서 어디까지나 당분간 임시적으로 시행한 편법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우익 인사’로 인정되는 지방 유지의 신원보증을 받아오면 경찰서 발행의 신원증명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익 신문사 편집국장이면 경찰에서 우익 인사로 인정될 것이고, 그 인사의 신원보증이면 신원증명하는데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양수가 현준에게 청탁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현준은 그가 공산주의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지난 양력 정초에 확인했던 터인데 그는 그때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딴 사람 같은 표정으로 나타나 있는 게 솔직히 거북했다. 그러나 전혀 내색 않고 이왕 마주했으니 슬슬 과거를 캐는 청문을 해본 것이다.
그는 일제 시대 철부지였을 적, 한때 ‘상지까리(생디칼리스트)’였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유학하기 전에 함안댁과 결혼했었다. 고향 집에 아내를 두고 혼자 도일해서 음악 공부를 하면서 음악과 관련된 피아노 공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특수 강철로 만드는 피아노 철선을 주로 생산하는 곳에서 조율사로서 아르바이트 노동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장이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무슨 무기인지 강철로 된 아주 정밀 부품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군대식 조직과 체재에 묶여 노동해야 하는 비인간적 대우를 겪으면서 비밀리에 노조를 조직하려고 했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한 활동이 조국 독립에 기여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무정부주의자와 맑시스트와도 연계되기도 하다가 왜경에 주목의 대상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 고향 여학교 음악교사로 취직이 되었는데 거기서도 그냥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독서회를 만들어 은밀한 활동을 하다가 도망쳐 온 곳이 이곳 대구였고, 다오루 공장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