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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제
수학과 물리에만 ‘법칙’이란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인생에도 법칙이 있다니…, 어쩌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원칙이 아닌 법칙이 12가지라니 좀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귀담아듣지 않고서는 알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하버드대에서, 현재는 토론토대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조던 B. 피터슨’이 저술한 책으로, 그는 혹한으로 유명한 캐나다 앨버타주 북부 황량한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의 거친 환경에서 자랐다. 젊어서는 접시닦이, 주유원, 바텐더, 요리사, 양봉업자, 석유 시추공, 목공소에서, 철도건설 현장에서 인부로, 운전사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1982년 앨버터 대학에서 정치학 학위를 받고는 1년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면서, 전제주의와 세계대전이 유럽에 남긴 상처를 확인한 것을 계기로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연구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는 1991년 멕길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가 되었고, 하버대 대학 교수로 임명돼 최우수 교수에게 수여하는 ‘레빈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8년부터 현재는 토론토 대학에 재직하며, 학생들이 뽑은 ‘내 인생을 바꾼 교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9년 첫 저술 《의미의 지도》라는 책으로 인기를 얻었고, 2013년부터 강연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면서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한 40가지가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이 길고, 복잡하여 읽기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우선 제목을 보기로 한다. 제목이 나름대로 그럴듯해 보인다. [법칙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법칙2]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법칙3]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법칙4]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 [법칙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마라. [법칙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치워라. [법칙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 [법칙8]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 [법칙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법칙10]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 [법칙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법칙12] 길에서 고양이를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책에 대한 찬사와 추천사도 많은데 그중에서 이목을 끄는 한두 가지만 소개할까 한다. “피터슨은 아버지가 내게 해주었으면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지금이라도 나타나서 다행이다. 우리시대 한 줄기 빛이 되어줄 책이다.”- 시카고 트리뷴 - “피터슨이 제시한 12가지 인생의 법칙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진리다.”- 파이낸셜 타임스 -
“이 책은 그동안 내 모든 연구의 사색에서 얻어 낸 결과물이다. 처음에 나는 쿼라(유튜브)에 올린 마흔 개의 답글로 얄팍한 책을 써 보려고 했다. 출판사인 펭귄랜덤하우스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법칙 수를 스물다섯 개로, 다시 열여섯 개로 줄였고,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12개로 줄였다. 편집자 도움과 질책을 받아 가면서 꼬박 3년 동안 원고를 고쳤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라는 제목을 결정하는 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은 후보 중에서 이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단순함 때문이었다. 제목에는 원칙이 정리되지 않으면 카오스(혼돈)가 유혹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에게는 법칙과 기준, 가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마치 짐을 나르는 동물과도 같다. 우리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짐을 짊어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일상과 전통도 필요하다. 그런 것이 질서다. 하지만 질서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혼돈이 우리를 덮치고, 그 결과 우리가 혼돈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좁고 곧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12가지 법칙은 ‘그곳’에 있기 위한 지침이다. 그곳은 혼돈과 질서의 경계선 위에 있다. ‘올바르게 산다’면 지옥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세기에 진짜 지옥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 프롤로그에서 -
[법칙1]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여기서는 바닷가재와 굴뚝새, 닭들의 영역싸움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염성 조류 감염증(AI)이 새들의 세계에 덮치면 최하층에 속한 힘없고 스트레스받는 새들이 먼저 병들어 죽는다. 인간세계도 마찬가지다. 빈곤층이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고 사망할 확률도 높다. 가난한 사람들은 암, 당뇨, 심장질환 같은 비전염성 질환에도 취약하다. 부자들은 가벼운 감기로 끝날 수 있지만, 빈곤층은 폐렴으로 번져 죽기도 한다. 자신만의 영역이 중요하지만, 그 영역은 언제나 부족하다. 좋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충돌은 동물의 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다.
영역 싸움에서 이긴 늑대는 이제 상대를 무시한다. 쫓아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승자도 사냥을 하려면 협력자가 필요하기에 서열 싸움에서 패배한 적이라도 협력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다 밑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바닷가재도 예외는 아니다. 바닷가재는 천적과 자연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휴식하고 피할 수 있는 은신처가 필요하다. 게다가 성장하기 위해 뱀이 허물을 벗듯 탈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새로운 껍데기가 만들어질 때까지 안전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곳은 극소수다. 미리 패배를 인정하고 피하거나 꼬리 내리는 경우가 아니면, 덩치와 힘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이때는 죽자 살자 싸우게 된다. 상대를 뒤집지 못하면 두 녀석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참 뒤에는 승패가 갈라진다. 이때 패자는 거의 살아남을 수 없다. 패자가 승자의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처절한 응징을 당한다. 패자는 완전히 해체되거나 재형성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사랑을 잃거나 직장, 혹은 사업에서 실패를 겪은 후 고통스러운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바닷가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난 2015년 상위 1% 자산총액이 하위 50% 자산총액과 비슷했다. 상위 85명 부자가 하위 35억 명의 재산을 모두 합친 액수만큼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토록 잔인하고 야만적인 분배 원칙이 경제 영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는 매년 150만 종 이상 책이 출간되는데, 그중 10만 부 이상 팔라는 책은 500종에 불과하다. 클래식 음악시장은 더 심하다. 대다수가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꼽스키 작품이 연주된다. 바흐의 경우 1,0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겨 그가 남긴 악보를 손으로 옮겨 적는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자주 연주하는 작품은 극히 일부다. 다른 작곡자도 마찬가지다. 무수히 많은 작곡가들이 클래식을 남겼지만, 일부 작곡가에 의한 일부 작품만이 즐겨 연주된다는 것이다.
이를 ‘프라이스 원칙’(전체 종사자가 100명이라면 그중 10명이 전체 생산량의 50%를 담당하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 원칙은 과학에도 적용된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부의 분배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파레토 분배’라고 한다. 실제 이런 불평등한 분배 원칙은 정부 형태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에 적용되며 도시인구 분포, 단어의 빈도에도 이 원칙이 적용된다. 이 원칙을 ‘마태의 원칙’이라고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가혹한 가르침인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태복음 22장 29절)고 한데서 유래한다.
애초에 바닷가재는 힘이 약하면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지위를 감수하는 대신 팔다리를 온전하게 지키는 쪽을 택한다. 반면에 좋은 보금자리를 차지하고 안전하게 휴식을 취하며 편하게 배를 채우는 최상의 바닷가재는 틈만 나면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과시하려고 한다. 매일 다른 바닷가재를 찾아다니며 보금자리에서 쫓아내는 심술을 부린다. 그럼으로 자신이 대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려고 한다. 바닷가재가 서열을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힘만으로는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동물연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수컷 둘이 힘을 합치면 각자가 가진 힘의 4분의 3으로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정상에 있는 수컷도 낮은 지위에 있는 수컷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도움을 주고받는다.
바닷가재 이야기가 인생 법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6,500만 년 전에 사라진 공룡은 그 전에 2억 년을 살았다. 이에 비해 바닷가재는 지금까지 3억 5천만 년 동안 원시 그대로 살고 있다. 공룡의 삶도, 인간의 삶도, 바닷가재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바닷가재는 짝짓기를 위해 껍데기를 벗고, 암컷은 수컷을 유혹하고, 서열 구조를 유지하는 뇌와 신경계는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계급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신경 화학이 작동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열 구조가 생명체의 생존과 적응에 필수적이었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바닷가재의 생존에서 인간의 법칙을 찾을 수 있다.
서열 구조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다. 군산(群散)복합체도 아니고, 가부장제도 아니다.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문화적 인공물이다. 이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다. 서열 구조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영속적인 특성에 가깝다. 생명이 탄생한 이후에 ‘우리’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서열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서열 구조는 문화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 지구에 나무가 등장하기 전에도 서열 구조는 있었다. 인간의 뇌는 지각과 가치, 정서와 생각, 행동을 조절하고 의식과 무의식 등 모든 면을 지배한다. 그래서 패배나 실패를 경험한 인간은 서열 싸움에서 진 바닷가재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마음이 약해지고, 불안감을 느낀다. 만성적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활기 없고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강자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기 쉽다. 기본적 신경 화학 작용에서 바닷가재와 인간은 똑같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초기부터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 가해자는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특성이 있다. 능력 없고 힘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역시 쉽게 착취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한 몇몇 격언을 생각과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동양사람들이 공자·맹자·노자의 격언을 인생 지침으로 삼는 것처럼.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진심으로 남을 해치려 하는 사람은 없다.’‘물리적으로 힘을 앞세우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등등. 하지만, 이런 격언들은 뼛속까지 악의적인 사람 앞에서는 무참히 무너진다.
상황에 따라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격언은 바꾸어야 한다. ‘선한 사람은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냉혹한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의외로 괴롭힘을 당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견뎌낸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현실의 냉혹함을 깨닫게 되면, - 자신도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 스스로를 짓누르던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와 동시에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때부터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자신도 무서운 존재라서 저항하고 시련을 견뎌 낼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도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해 마음속에 묻어 둔 원한을 파괴적인 욕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어떤 억압에도 맞설 수 있고, 당연히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 모두는 모든 나쁜 습관을 다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쁜 자세를 타고났더라도, 집에서 나와 학교에서 구박받고 괴롭힘을 당했더라도, 계속 그렇게 살 이유는 없다. 상황은 끊임없이 바뀐다. 당신이 싸움에서 진 바닷가재처럼 축 늘어진 자세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당신의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도 감각류도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는 뇌 속 가장 깊숙한 곳의 서열 계산기가 당신의 서열 순위를 낮게 평가할 것이다. 몸짓 언어와 같은 순환 고리는 개인적 영역을 넘어 사회적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자세가 나쁜 사람들은 가슴을 웅크리고 고개 숙인 채로 다니는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왜소하고 자신감 없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자신도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느낌을 받는다. 주변 사람들 반응 때문에 무력감이 더욱 증폭된다. 인간도 바닷가재처럼 자세와 겉모습으로 상대를 평가한다. 반대로 당신이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한 자세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 역시 당신을 다르게 보고 그것에 맞게 대우한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는 있다.
‘몸을 똑바로 하라’는 말에는 정신 역시 똑바로 하라는 요구가 들어있다. ‘똑바로 선다’는 것은 존재의 부담을 자진해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삶의 요구가 자발적으로 응답하면 신경계가 완전히 다른 식으로 반응한다.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당당하게 앞에 나서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키우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삶의 엄중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혼돈을 질서로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죽음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낭만이 끝났음을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또한 의미 있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자신감과 용기를 찾는다면, 자신의 약점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좁고 험한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로운 운명의 길을 걷는 당신은 삶의 의미는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당신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면서도 그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싸움에서 승리한 바닷가재를 기억하라! 3억 5천만 년 동안 이어져 온 바닷가재는 삶의 지혜를 알고 있다. 가슴을 펴고 똑바로 서라!
[법칙2]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고통! 주관적으로 볼 때 고통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어떤 물질보다 그 의미가 크다. 이런 이유로 세계의 많은 문화권에서 ‘삶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라는 생각을 반박할 수 없는 진리라고 받아들인다. 이것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에서 물리적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보다 소설이나 영화에 더 가깝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극적인 사건이다. 아버지 죽음,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경험하는 비극이다. 첫사랑의 고통, 박살 난 희망, 자식이 성공한 기쁨 같은 것들도 주관적인 경험에 속한다.
우리가 살아남고 번식하려면 현실 세계와 부딪쳐야 한다. 현실 세계는 다른 생명체나 다른 사람을 말한다.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선, 그들이 속한 사회가 현실 세계다. 인간은 지적 능력이 향상되면서 호기심도 커졌다. 가족과 집단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씩 키워왔으며, 그것은 결국 바깥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로 개념화했다. ‘바깥’은 탐험하지 않은 물리적 영역뿐 아니라, 현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설명을 넘어 ‘처리하고 대처’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할 수 있다. 우리 뇌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을 분석하는 데 집중해 왔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언제나 혼돈과 질서 속에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이 두 세계에 서 있으려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발은 질서와 안전의 세계에, 다른 한발은 가능성과 성장, 모험의 세계에. 어느 날 갑자기 삶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언가에 몰입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혼돈과 질서의 경계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그때는 신경학과 진화론에 근거를 둔 본능적 자아가 반응하고 가장 내면의 목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생산적인 공간을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런 공간에 존재해야만 한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대부분 익숙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살지만, 그 주변은 언제나 생명체를 위협하는 사물과 상황이 둘러싸고 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도 하기 전에 한계치를 넘어서는 상황이 닥치면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 발은 이미 잘 아는,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땅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 그곳은 우리가 완벽히 익혀야 할 새로운 것과 더 나은 자신을 만나게 해줄 새로운 기회가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질서와 혼돈, 생명과 죽음, 죄, 희망, 노동, 고통들이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주요 주제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숙명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대재앙과 비극적인 사건이 이어지고 그 시대를 살던 인간들은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하나씩 얻는다. 그때 사람들이라고 지금 우리와 다를 건 없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도덕성이다.
개와 고양이는 포식자다. 원래 뭔가를 잡아먹는 동물이다. 키우는 동물이 쥐나 새를 잡아먹는 장면은 귀엽거나 예쁜 짓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아프면 약을 먹이고 수술도 시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개와 고양이는 포식자지만 그것은 그들의 본성일 뿐이다.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이유가 악해서가 아니라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더구나 녀석들은 사리 판단 능력도, 창의력도, 자의식도 없다. 분별력, 창의력, 자의식은 인간의 잔인함을 끌어내는 특성이다.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왜 다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이 자의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걸 안다. 또 고통과 자괴감,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안다. 고통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두려움과 괴로움이 어떻게 생기는지 안다. 이 말은 곧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지도 안다는 뜻이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학대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약점을 알고 있다면 깊은 상처와 굴욕감을 안겨 줄 수 있다. 모든 것은 자의식이 정교하게 발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인간만이 고문 도구를 생각해 내고 만들었다. 순전히 고통을 위한 고통을 줄 수 있다. 동물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어쩌면 인간은 애초부터 존재하면 안 되는 무엇’이었을지 모른다. 세상에서 인간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면, 모든 존재와 의식이 도덕적으로 순수한 동물들의 야만적 상태로 되돌아갔을지 모른다.
요즘 사람과 비교하면 2000년 전 기독교가 탄생할 즈음, 사람들은 무척 야만적이었다. 어디서나 갈등과 충돌이 있었다. 산 사람을 재물로 바치는 악습은 가르타고처럼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흔했다. 로마 원형경기장에서는 수만 명이 모여 목숨을 건 싸움을 구경했다.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거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는 두 가르침이 미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두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고 ‘남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나는 점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의미처럼 서툴고 부족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도와주는 것처럼, 나약한 당신을 스스로 포용하고 사랑하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한과 증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대부분은 고난과 실망, 상실과 부족함 속에서도 망가지지 않고 살아간다. 이것 역시 기적이라 할만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 내야하고 힘겨워한다. 모두가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도덕적으로 나약하고 국가의 폭정과 대자연의 약탈을 견뎌야만 한다. 어떤 동물도 경험해 본 적 없고 이겨낼 수 없는 실존적 상황을 인간은 겪고 있다. 때로 하느님이나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때도 있다. 우리 모두 존경받아 마땅하다. 당신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존재다. 당신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신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스스로 당신을 보살펴야 한다.
아이가 원할 때마다 사탕을 주면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사탕이 아이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행복’은 결코 ‘좋은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사탕을 줬으면 어떻게든 아이가 이를 닦도록 해야 한다. 추운 겨울날 외출할 때는 아이가 불편하다고 싫어해도 외투를 입혀야 한다. 항상 깨어 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남을 배려하고 정정당당하게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 자신을 보살핀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삶에서 혼돈을 줄이고 질서를 재정립하며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어야 한다. 또 당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결국 원망과 앙심과 잔혹성을 떨쳐 낼 수 있다. 당신만의 원칙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면 좋겠지만, 천국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천국을 앞당기고 다가가려면 하나님이 에덴동산 앞에 세워 좋았다는 화염검과 죽은 천사들에게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에게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각자의 지옥이 있다. 당신의 지옥이 무엇인지 철저히 파악하면 그런 곳은 받아들여 놓지 않을 수 있다. 내 삶을 바칠 수 있는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 부끄러운 자의식을 떨쳐내고 자연스러운 자긍심과 당당한 자신감을 찾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는 것, 그것이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법칙3]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나의 살던 고향은?
나는 지평선이 보이는 대초원 한복판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캐나다의 앨버타주 ‘페이 뷰’라는 곳인데, 생긴 지는 고작 50년밖에 안 되었다. 카우보이들이 드나드는 술집이 중심거리에 가게도 있었는데 거기서 비버와 늑대, 코요테 가죽을 사냥꾼들과 직접 거래했다. 3,000명 정도 살고, 가장 가까운 도시는 600㎞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당연히 없었다. 그런 곳에서 재미있게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5개월이나 계속되는 겨울이 문제였다. 한낮에도 영하 40도를 밑돌았다. 우리 동네 술꾼 중에는 추위 때문에 생을 일찍 마감한 이가 많았다. 술에 취해 얼어 죽은 것이다. 영하 40도에는 밖에 나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 밖에 나가 첫 숨을 쉬는 순간 차고 건조한 공기에 폐가 얼어붙는 느낌이 든다. 자동차는 밤에도 시동을 켜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터리가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자동차 뒷유리는 성애가 껴 이듬해 5월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끍어 내도 곧 생기므로 소용이 없다. 뒷유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낫다. 페이 뷰에서는 젊은이들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여름에도 없고, 겨울에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친구가 소중했다.
내 친구 이야기
크리스와 나는 ‘아서 클라크’등의 과학 소설을 좋아하던 터라 마음이 잘 통했다. 뭔가를 만드는 것도 좋아해 전자 장치 꾸미기와 톱니 장치, 모터에 관심이 많았다. 크리스는 확실히 공학자 기질을 타고난 친구였다. 부모는 친절하고 누나들은 똑똑했지만,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처럼 항상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크리스에게는 ‘에드’라는 4촌이 있었는데, 그는 매력덩어리였다. 잘 생기고 훤칠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들은 대마초를 손에 대기 시작했다. 캐나다 서쪽은 독일과 프랑스를 합쳐놓은 것과 맞먹을 정도의 크기로 우리는 차를 타고 달릴 길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차 타고 질주하는 놀이를 하지 않으면 파티를 열었다. 어른 들이 없는 빈집은 파티를 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학을 갈 나이가 되면서 당연히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자리는 많았다. 나는 1980년 합판공장에서 일하고 번 돈이 이후 20년 동안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서 번 돈보다 많았다. 돈이 없어 대학을 못가는 경우는 없었다.(내가 어릴 때와 차이가 많다.)
16살 때 나는 크리스와 ‘칼’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인구 60만이 사는 에드먼턴에 간 적이 있다. 캐나다에서 6번째로 큰 도시였다. 칼은 태어나 그런 큰 도시에 처음 와 본다고 했다. 그런 친구는 칼뿐 아니었다. 도시에 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좋았고, 시골을 벗어난다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두 친구는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나와 전혀 달랐다. 둘은 에드먼턴에 도착하자마자 대마초를 사야겠다고 떼를 썼다. 크리스와 사촌 동생 에드가 에드먼턴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에드를 내 하숙집으로 초대했다. 에드는 다른 한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대마초에 취해 눈이 휑한 상태였다. 그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인간이 처한 상황도 운명도 다르다. 스스로 변하려는 의지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능동적인 사람도 있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도, 늘 차분한 사람도 있다. 사람은 제각각 다르지만 한 개인 안에도 서로 다른 면이 공존한다. 성취지향적인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게으르고 나태한 자아가 있을 수 있다.
크리스는 오랫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다가 결국 30대에 정신질환을 얻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마초가 정신병을 악화시킨 것인지, 대마초를 치료의 목적으로 쓴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미국 콜로라도주처럼 대마초가 합법적인 지역도 있지만, 의사가 진정제로 처방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마음대로 행동하는데 공부가 필요할까? 범죄와 악행을 저지르는데 수행이 필요할까? 나쁜 짓은 쉽다. 삶의 무개를 외면하는 것은 더 쉽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것도 쉽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미래를 포기하고, 당장의 싸구려 쾌락에 빠지는 것도 쉬운 선택이다. 성공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실패는 쉽다. 나쁜 습관을 기르면 된다. 허송세월하며 복권 당첨을 기다리면 된다. 나쁜 습관으로 무장하고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의 운명은 뻔하다. 머지않아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 실현할 수 있는 꿈들은 사라지고 원하지 않았던 악몽이 현실로 다가온다. 인생이 무너져 내리지만 이제 돌이킬 방법이 없다. 자업자득이다.
희망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도랑에 빠진 사람은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 사람은 구하기 어렵다. 낭떠러지가 매우 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절벽 아래 떨어진 사람에게 남아 있는 희망은 크지 않다. 만약 내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면, 먼저 기다려야 한다. 그 사람이 진정 변화를 원할 때까지 말이다. 스스로 변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시간 낭비다. 데일 카네기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다리에 오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올라가게 할 수는 없다.”가족에게 소개하기가 꺼려지는 친구가 있다면서, 그 사람을 친구로 계속 두는 이유는 의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의리는 우직함과 다르다. 의리는 상대방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이다. 상호합의다. 도덕적으로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려는 사람을 지지할 의무는 없다.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그릇된 선택이다.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려는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행위다.
《구약성서》에 보면 골리앗이 40일 동안 싸움을 걸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아무도 그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다윗(다비드)이 그와 싸우겠다고 나섰는데 이때, 그의 형제들은 양이나 치라며 비아냥거렸다. 불가능해 보이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현재의 부족함과 미래의 가능성이 동시에 드러난다. 다윗의 형제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혼란에 빠질 것인가. 그들의 냉소주의와 게으름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걸 당신이 증명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망가진 이유가 세상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삶의 무개를 감당하기 싫은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점을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선하고, 착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은 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문제가 많고 질 나쁜 사람들과 지내는 것보다 어렵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사람은 그야말로 이상적이다.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면 강인한 의지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겸손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저자는 말해 주고 싶어 한다.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라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 이탈리아 피렌체 미술관
[법칙4]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라,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
당신이 100만 명 중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1,800만 명이 사는 뉴욕시와 2,100만 명이 사는 북경시에서는 당신 같은 사람이 20명씩이나 있는 셈이다. 현대인 대부분은 대도시에 산다. 그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수억 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잘난 사람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숨 막힐 듯한 미모를 자랑하는 헐리우드 여배우도 새로운 스타가 등장하면 백설공주를 시기하는 마녀가 되기 싶다. 당신은 어떤가? 하는 일은 재미도 없고, 의미 없이 따분하기만 하고 살림살이는 팍팍하고, 취향은 후지고 몸매는 내세울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제아무리 한국 대통령이라 해도 미국 대통령 옆에서는 관심을 받기가 힘들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능력과 결과는 평등하지 않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중요한 것 대부분을 창조하고 이끈다. 승리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진 못해도, 가장 많이 가진다. 밑바닥 삶은 언제나 황폐하다. 행복하지도 않고 쉽게 병들고, 사랑도 관심도 받지 못한다. 그런 의미 없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런 처지에 놓이면 내면의 비판적 자아는 현실보다 비관적이 되고 절망적인 말을 쏟아 내기 십상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죽으면 다 소용없다. ‘너보다 잘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라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는 허무주의의 상투적인 구호다. 그럴 때 ‘그렇지, 모든 게 부질없는 것이지’라고 반응하면 당신은 진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뭐냐?’라고 하면서 화를 내고 대들어야 한다. 매사에 부정적인 내면의 목소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따뜻한 목소리가 아니다. 합리성을 위장한 비열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원망과 오만, 기만은 악마의 삼 형제다. 이 3형제보다 인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마음에 원망이 남아 있는 경우는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거나 부당한 폭압을 당하고 있는 경우에 생긴다. 원망의 대상과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면 오히려 큰 화를 부른다. 부당하게 폭압을 당한다고 생각되면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고 저항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 침묵의 결과는 그보다 더 참혹하기 때문이다. 침묵해 갈등을 피하는 게 편하기는 하지만, 침묵은 결국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폭압과 독재는 침묵을 먹고 산다. 복수하고 싶을 때, 삶이 망가지고 있다고 느낄 때, 파괴와 파멸의 욕망이 상상력을 지배할 때, 그때가 바로 들고 일어날 때다. 프랑스 시민혁명도, 6.10사태 때도 그런 때에 터졌다.
영어 죄(sin)의 어원은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목표가 없으면 우리는 항해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끝없이 항해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A는 기준에 못 미치는 지점이고, B는 지금보다, A보다 더 나은 지점이다. 자신뿐 아니라 세상 역시 불충분한 상태로 보기 때문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뭔가를 시도한다. 만족은 잠시뿐이고 곧 호기심이 발동한다. 현재는 부족하고 미래는 더 낫다는 생각, 이것이 인간의 일반적 사고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미래를 보지 않으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세상은 바뀌어 왔다. 엉망인 현재를 미래에는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예지력과 창의력 발휘는 바람직하지만, 만성적인 불안과 불만을 유발한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늘 현재 상태를 목표와 비교한다. 목표는 너무 높거나 낮거나 얼토당토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목표를 이루지 못해 실망하거나 목표를 이루더라도 생각보다 못한 결과에 또 실망한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패한 인생, 쓸모없는 인생이라는 자책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점검’이다. 행복이란 산 정상에서 느끼는 잠깐의 만족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과정에 느끼는 갈망과 희망이다. 행복은 희망에서 온다. 지금 걷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희망이 있다면 불행하지 않다. 우리는 하루에도 오백 번의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창한 목표를 세우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능력에 한계가 있고 쉽고 편한 걸 좋아한다. 걸핏하면 자신과 남을 속이려고 하고, 잘 안 되면 세상과 남을 탓하고 어지간하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아침보다 조금이라고 더 나아진 내가 되자!’서툴더라도 결심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보자. 행동으로 옮겼으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따뜻한 커피 한 잔이라도 기분 좋게 마셔보라. 비교의 기준점이 매일 아주 조금씩 올라갈 것이다. 이것은 기적의 시작이다. 그런 날이 한 달, 두 달 1년, 2년 쌓이면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세상이 춤을 추려한다면 당신도 춤을 출 수 있다. 충분한 능력과 태도를 갖추었다면 세상을 이끌어 갈 수도 있다. 이것은 신학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니다. 경험적 지식이다. 경험적 지식은 마법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의식의 작용에 불과하다. 우리는 보려고 하는 것만 본다. 그 밖의 대부분 세계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다른 것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 정신은 잠자고 있던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다’라는 목표를 세우면 도움이 될 새로운 정보를 알려 줄 것이다. 그 정보를 활용해 움직이고, 행동하고 관찰하고,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또 다른 목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전진하게 된다. ‘더 좋은 삶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바탕으로 자신을 돌아봤다. 그런 반성에서 깨달은 것을 뽑아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형성된 지식은 각각의 문화권에서 근본적인 깨달음을 전하는 《도덕경》, 《베다》, 《성경》같은 고대 문헌에 압축되었다. 서구문화권을 대표하는 《성경》은 어떻게 쓰이고 만들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여러 시대에 걸쳐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이야기를 선별해 연대순으로 연관되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집단적 상상력이 불가해한 힘에 이끌려 기나긴 시간 동안 깊은 심연에서 끌어올린 지혜의 보고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가르침이 담겼다.
가장 높은 목표를 세워라. 그리고 오늘에 집중하라.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마음속에 희망이 가득하다면 여전히 높은 산길이지만, 그 길을 오르는 방법을 배웠다면 당신은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는 것보다는 여행하는 동안 즐거운 것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구하라 그래야 너희가 받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래야 너희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간절히 구하고 있는 만큼 힘껏 두드리면 비로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얻는다. 우리 개개인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면 세상도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것이다.
[법칙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어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재우느라 밤마다 45분 정도씩 의식 같은 일을 치른다고 한다. 밤마다 난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45분이 일주일이면 315분, 대략 5시간이다. 한 달이면 20시간, 1년이면 240시간, 주당 근로시간을 40시간으로 치면, 240시간, 1.5개월이다. 1년 12개월 중에서 1.5달을 아들을 재우는 일에 쓰는 셈이다. 이 시간을 아무 소득 없이 아들과 싸우느라 낭비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만 괴로운 게 아니다. 아들 역시 힘들어 했을 것이다. 둘 사이에는 원망이 쌓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중 누구에게 잘못이 있을까? 성격 문제일까? 사회적 책임일까?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 책임은 어른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나 사회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나쁜 아이는 없다. 나쁜 부모가 있을 뿐이다’는 말은 아이는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무척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위험하다. 유난히 까다로운 아이에게는 부모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무작정 사회 탓으로 돌리는 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문제해결을 미루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 구성원은 타락하지 않았는데, 사회가 부패했다면, 그 부패는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부패는 어떻게 확산된 것일까? 사회 탓이라는 주장은 한쪽으로만 치우친 이데올로기적 이론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큰 문제로 이어진다. 기존의 전통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를 포용해야 한다면, 안정된 전통을 해체하라는 시도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를 개혁한다고 개개인의 골칫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가 사회 안정을 해쳐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함께 사는 법을 익혀 왔다. 점차 복잡해 진 사회를 체계화해 왔다. 그래서 우리 생각과 행위 중에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회를 검증되지 않은 이론으로 뜯어고치려고 한다면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많은 문제를 양산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실제로 개혁조치들이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낸 사례들이 많다.
인간은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지닌 존재다. 맹자가 말한 성선설은 합당하지 않고 논리에도 맞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근본은 악함에서 시작되었다. 어린아이도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악한 면을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크면서 친절과 양심을 배워 정서적으로도 안정된다. 약한 사람을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일은 학교 운동장에서 자주 보이지만, 성인이 되면 확연히 줄어든다. 체계도 없고 규제도 없는 양육은 항상 방치와 학대로 이어진다. 요즘 부모들은 대체로 아이를 꾸짖거나 체벌하면 아이와 멀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자녀와 친구 되기를 바라고 자녀의 존경 따위는 기꺼이 포기한다. 과연 바람직한 생각일까? 자녀는 자라면서 많은 친구를 사귄다. 하지만 부모는 평생 엄마, 아빠 둘 뿐이다. 부모는 친구를 넘어서는 존재다. 자녀의 친구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친구의 권위는 잘못을 교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아이는 인지하는 능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질책을 받으면, 즉 교정조치가 취해지면 즉각적으로 분노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는 사회와 자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자녀가 다른 사람과 의미 있고 생산적으로 교류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녀 훈육은 책임이 따른다. 훈육은 잘못한 행위에 대한 분노가 아니고, 그릇된 행위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공감과 판단을 세심하게 결합한 행위다. 부모가 자녀에게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가 쉽지 않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올바른지, 또 왜 그렇게 구분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공정하고 올바른 훈육 전략을 세우기도, 자녀 양육에 관련된 모든 사람과 그 전략을 공유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자녀를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환영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는 훈육이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것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아이를 파괴하는 자기기만 행위로 절대 용납 해서 안 된다. 잘못된 합리화는 이뿐이 아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 훈육과 처벌을 두려워한다. 엄격한 훈육과 폭군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같고, 처벌과 고문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훈육과 처벌은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둘 다 양육에 꼭 필요하다. 물론 신중해야 한다. 처벌이 아닌 보상을 통한 훈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보상을 준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보상법의 단점은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이 지켜봐야 한다는 점으로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데는 실험실에서 만큼이나 제약이 따른다는 점이다. 인간은 어리석고, 쉽게 상처 입는 존재라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또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존재다. 죽음을 반기는 사람은 없다. 죽음이 좋은 것이라면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 손해를 보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손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실제로 비슷한 손해와 이익이 있을 경우에는 손해로 인한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 고통이 즐거움보다, 불안이 희망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회화가 안 된 아이는 원만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부모는 자녀의 사회화를 도와야 한다. 보상을 통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보상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 그것을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는 사람마다 기질이 달라 쉽게 답할 수 없으나, 사근사근한 아이는 상대를 즐겁게 해 주고 싶어 하지만, 갈등을 두려워하고 의존적인 성향이 있다. 강인하고 독립적인 성격의 아이는 도덕적이고 반항적이며 마음대로 하려는 성향이 있다. 규칙과 질서에 잘 적응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최소한의 통제도 못 견뎌 하는 아이도 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가 있는가 하면, 사실적인 것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아이도 있다. 이런 생물학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통제 기법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지 모른다.
전기 콘센트에 포크를 꽂으려 하는 아이가 있다면, 혹은 차가 붐비는 마트 주차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어떻게든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아이의 행동을 저지해야 한다. 안 그러면 상상하기 싫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예이지만, 사회적 영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처벌이 필요한 이유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처벌은 나이들수록 점점 가혹해진다. 다섯 살까지 사회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아이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사회적 처벌을 받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체벌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10대의 악마도 한때는 순박한 아기천사였다는 망상을 조장할 뿐이다.
자녀가 기질적으로 공격적 성향을 띠는데도 바로잡지 않는 것은 자녀의 장래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부모가 과자에 집착하는 아이에게 “안 돼”라고 제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이보다 힘이나 덩치, 지능,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네게 매우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어린아이를 때리면 아이에게 폭력을 가르칠 뿐이다’는 주장은 어떨까? 때리기(hitting)는 물리적 힘의 전 범위를 가리킨다면, 물방울과 원자 폭탄도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규모와 맥락이 중요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개에게 물렸을 때와 개가 씹고 있는 뼈다귀를 빼앗아 개에게 물렸을 때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규모와 맥락은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어떤 어른도 아이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참을성 있고 자상한 부모라도 아이가 동네슈퍼에서 못된 행동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면, 10분 전에 아이를 칭찬했더라도 이번에는 냉정하게 대할 것이다. 아이의 반항적인 행동으로 부모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아무리 이타적인 부모라도 화를 내고 원망하기 마련이다. 원망은 복수심을 낳는다. 그러면 자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줄어든다. 아이의 발전을 위한 노력도 귀찮아진다. 미묘하게 자녀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가족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가족 전쟁은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증오심으로 가족들이 물고 뜯는 수준까지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적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훈육과 처벌은 용서와 공정함의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 명확한 규칙과 적절한 훈육은 아이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며 확장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질서는 지하세계의 혼돈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지하세계는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암울한 공간이다.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은 올바른 훈육이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법칙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
양이 45쪽이나 되어서 이하 생략했다. 전체를 따로 붙였으므로 참고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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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