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25
10월29일[연중 제3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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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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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GKdDucxo9bY
[수원교구 김영복 리카르도(분당 성요한성당 제1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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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당신의 현존을 더욱 크게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인데, 비가 내리고 난 후, 2월 말이나 3월 초가 되면 갈릴래아 호수 인근에 노란 겨자꽃이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다는 표현을 할 때, 좁쌀만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겨자씨만하다고 합니다. 좁쌀도 작지만, 겨자씨도 실제로 보니 참 작더군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그 나라른 겨자씨만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8-19)
바꿔 말하면 그 작디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씨앗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는 나, 죄투성이인 내 안에도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더 작아 보이고, 더 큰 죄인처럼 여겨지는 이웃 안에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낮은 이를 총애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부르십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 시선으로 볼 때 작고 낮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루 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저녁이면 온몸이 녹초가 됩니다. 강도 높은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형제자매들의 처지와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체험하지 못할 작은 삶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넘어지면 상처나 충격이 만만치 않은데, 낮은 밑바닥에 있다 보니 웬만한 넘어져도 그다지 충격을 입지 않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바비큐 기계를 열심히 돌렸습니다. 기계를 본격적으로 돌리기에 앞서 대대적으로 숯불을 피워야 하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어찌 어찌 하다 보면 손이나 팔, 얼굴에 숯칠을 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깔깔대며 웃습니다.
한푼이라도 절약하겠다며 이런 저런 수리나 공사를 직접 하다가 비전문가이다보니 완전 엉뚱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헛수고를 되풀이하면서도 참 많이 배웁니다. 그 삶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더 작은 것들 안에, 더 낮은 장소에 더 당신의 현존과 사랑, 자비를 크게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더 작은 자가 될 때, 더 밑으로 내려갈 때, 더 확연히 우리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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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_qN49262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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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 46,1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에 20년 전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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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남부 사제 모임을 다녀왔습니다. 칸쿤에서 있었습니다. 9개 주의 사제들이 모였습니다. 숙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근처 성당을 찾아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서울교구 5명, 마산교구 2명, 청주교구 2명, 부산교구 2명, 인천교구 2명, 전주교구 1명, 수도회 1명, 이렇게 15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회의 중에 신심 단체의 담당 사제를 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꾸르실료, 성령기도회, 레지오, ME의 담당 사제를 정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미 꾸르실료의 담당 사제를 맡고 있었고, 신부님 한 분이 성령기도회 담당 사제를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ME와 레지오 담당 사제는 추후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담당 사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동북부에 있을 때는 담당 사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ME 당당 사제를 맡았습니다. ME 봉사자들과 주말을 함께했고, 코로나 시기에도 피정을 했습니다.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중남부에도 성령기도회 담당 사제가 정해졌으니, 내년에 성령 대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ME와 레지오도 담당 사제가 정해지면 더욱 활성화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사제들이 겨자씨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사제는 미사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공동체는 말씀과 복음 그리고 미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열매 맺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말씀의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복음의 줄기를 뻗어야 합니다. 부부는 기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자녀들은 말씀과 복음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열매 맺습니다. 사제가 권위만 내세우려 한다면, 한국에서 했던 방식으로만 사목하려고 한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부부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정에도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번 사제 모임을 통해서 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중남부 한인 공동체가 큰 나무가 되어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부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훈아의 ‘사랑’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나훈아의‘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때/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때/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참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볼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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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것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왔고, 들으므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가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겪으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 자녀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 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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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겨자씨와 누룩은 계속 자라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복음이 점점 많은 이에게 전파되는 것이 그래도 눈에 보였을 것이고, 사도들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뒤 중세와 근대에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교회가 점점 확장되었고, 아프리카(고대부터 복음이 전해진 지역들도 있다.)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물론 지금도 선교 지역들이 있고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지역들이 있지만, 그러지 않은 곳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유럽을 보면서 성장을 말하기는 어렵고, 아시아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상으로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도 실제로 느껴지는 교회의 활기는 수십 년 전보다 못하여 보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는 자라나고 있을까요? 반죽은 부풀고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커져 가고 있을 때 필요한 말씀들이 아닙니다.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게 여겨질 때 필요한 말씀입니다. 흙 속에 묻혀 있는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고, 반죽 속에 섞여 있는 누룩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래도 씨앗이 있고 누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들은 박해 속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무관심과 실망과 불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아직 씨앗들이 살아 있으니 희망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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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로 ‘내가’ 겨자씨이고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18-21)
1) ‘겨자씨의 비유’에서 연상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보잘것없는 떠돌이 유목민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또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모든 신앙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2) 신약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연상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하나니아스’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이 말씀에서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를 “내가 선택한 겨자씨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사도에 속한 제자도 아니고,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이 된 일은, 글자 그대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이 말을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뽑으셨고, 그의 영혼 안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한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인데, 그때까지 바오로 사도 자신도 자기 안에 무슨 씨가 심어져서 자라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성을 생각하면, 그는 이미 사도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그 안에 겨자씨를 심어 놓으셨고, 아브라함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던 때에도 하느님을 찾으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사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겨자씨로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겨자씨로 뽑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바오로 사도처럼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신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종교와 신앙을 갖고 싶다고 소망할 때, 또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할 때, 그때가 바로 숨어 있던 겨자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는 “내가 바로 겨자씨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중에 어떤 나무로 자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큰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여정의 끝은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신 안에 심어진 겨자씨를 잘 가꾸는 일이고, 자신이 받은 겨자씨라는 사명을 잘 수행하는 일입니다.
4) ‘누룩의 비유’에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라는 말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감화시켰고, 변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악한 누룩’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6) 만일에 교회가, 또는 신앙인이 세상을 복음화 하기는커녕 세속화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힘을 버리고,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버리고 멸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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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님]
현시대를 가리켜 ‘자기 PR(Public Relations) 시대’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튀어야 산다’는 말도 나왔으며, 평범함을 거부하면서 독특하고 희귀한 것만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등’만을 치켜세우고, 무엇을 하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매스컴도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다. 공부나 대학도 일류, 기술도 일류, 운동도 일류, 심지어 도둑질이나 사기도 일류가 되어야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판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소개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의당, 하느님의 나라는 광대무변하니 아무래도 그렇지. 겨자씨와 같다니. 아뿔싸. 겨자씨가 땅에 뿌려진다.(마태 13, 31-32에서는)
겨자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씨앗이 스스로 뿌려질 곳을 택하여 뿌려지는 법이 없다. 바람에 날리든, 사람이 땅을 갈고 뿌리든, 씨앗이 뿌려지는 데는 씨앗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자기는 좋은 씨니 좋은 땅에 뿌려 달라거나, 자기는 귀한 씨니 싹이 잘 트게 해 달라거나, 소출을 많이 낼 수 있도록 충분한 거름을 달라는 등의 ‘청원기도’를 올리는 법이 없다.
씨앗이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가시밭이든 기름진 땅이든 뿌려진 자리에서 뿌려진 대로 자랄 뿐이다.
그리고 씨앗을 뿌려놓고 언제 싹이 돋나 어떻게 자라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과정을 맨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파란 싹이 돋아나 밭을 가득 채운다. 새싹은 농군도 모르는 사이에 자란다.(참조. 마르 4, 26-29)
하느님의 나라도 그렇게 우리 마음 안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마음 안에서 소리없이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자라고 있다.
아,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시다. 아, 이제 누군들 하느님의 나라를 모를까 보냐?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무슨 성과를 거두어야 할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주님의 사명에 참여해야 하며, 주님의 자유를 나누어 지녀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자기 몸에 안고 태어나며 그 씨앗은 점점 자란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의 생명을 끝낸 다음 이미 들어가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모든 인생에 뿌려져 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모든 이들 안에 뿌려져 그 안에서 자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내 안에, 이 세상 안에 뿌려져 자라고 있다.
천국을 이야기한다면서 지옥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고, 천국에 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미운 사람, 악한 사람을 만들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멀리하고 있다.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미운 사람을 만들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불의한 자를 만들고, 선을 강조하면서 악을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마음으로 선과 악, 밤과 낮, 밝음과 어둠을 대하게 한다.
세상을 창조 그대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을 갖게 한다. 선과 악, 밀과 가라지를 가리는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도(마태 13, 30) 살게 한다. 선과 악을 가리실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누룩은 밀가루를 만나야 제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나 누룩은 누룩일 뿐이며, 밀가루는 밀가루 일 뿐이다.
누룩을 가져다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어줄 이가 있어야 한다. 사실 제 잘난 맛에 우쭐거리며 혼자서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 그분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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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1955년 12월 1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로자 파크스가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기사의 요구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은 버스 이용을 거부하며 항의하였고, 마틴 루서 킹을 중심으로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이 전개됩니다. 결국 법원은 로자 파크스의 벌금형을 무효로 하고 몽고메리 버스의 인종 차별을 없앨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듬해에는 공공 운송 수단에서 인종 차별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고, 1964년에는 공공시설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시민권법이 제정됩니다.
<로자 파크스>의 작은 행동이 많은 흑인에게 힘을 주었고 인종 분리법 폐지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조그마한 겨자씨와 같아서 처음에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정원에 심으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작은 실천 하나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겨자씨를 이 사회라는 정원, 우리 가정이라는 정원에 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심을 때 정녕 하느님 나라는 자라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몸소 겨자씨가 되시어 골고타라는 정원에 묻히시고 당신 스스로 썩어 없어지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십자 나무를 남기시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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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이라는 공통 주제 안에서 서로 밀접한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두 비유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남자는 겨자씨를 자기 정원에 심고, 여자는 누룩을 밀가루 서 말 분량의 반죽에 집어넣습니다. 정원에 심은 겨자씨는 어느덧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겨자 나무의 크기는 보통 1미터 내외지만, 예외적으로 2미터 이상 자라나기도 합니다.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은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쳐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밀가루 서 말은 무려 50리터가 넘는 분량인데, 이는 성인 150명이 거뜬히 먹고도 남는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 그리고 누룩과 같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아주 작은 크기 또는 적은 양 속에 숨어 있는 이들의 강력한 잠재력에서, 하느님 나라의 미약한 시작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힘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연속성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는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와 그 탄생을 목격한 가난한 목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루카 2,1-20 참조)
메시아로 기대되었던 그 아기는 커서 실망스럽게도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루카 23장 참조) 그러나 곧 반전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가 외치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퍼져 나갑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그리고 세상 곳곳에 퍼져 나가는 모습과 더불어 나날이 성장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그렇게 이천 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다다랐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며 성장시키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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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13,19)
요즘 어떤 도시에 있는 어떤 빌딩이 더 높은 가에 관심이 쏠리듯, 세상은 갈수록 더 높고 더 넓고 더 큰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고 높은 것이 참으로 완벽하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틈을 내서 제 고향에 있는 선암사를 다녀왔는데, 예전과 달리 공사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공간이 협소해져서 열림보다 닫힘, 편안함보다 답답함을 느끼며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듣자마자 먼저 다가오는 책 제목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 표현은 이젠 일반적인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광고를 비롯해 눈길을 끄는 표제어로 즐겨 사용되고 있으며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상징하는 문장으로도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3년 E.F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라는 책을 내기 전까지는 어떤 누구도 이 표현을 '당연하다'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열심히 선포하셨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에 보이는 결과도 미미하고 사람들의 변화 곧 회개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생각했던 하느님 나라와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차츰 낙담하고 실망하는 기색이 농후해지는 것을 예수님께서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 初心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되잡으시기 위해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13,18.20)라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시면서 오늘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겨자 나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많이 나는 일년생 식물이며 본디 들판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13,19)라는 표현에서 들판에 자라는 겨자를 자기 텃밭에 의도적으로 심었다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들판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겨자 나무가 아니라 농부, 곧 예수님 당신과 복음 선포자들이 정성 들여 자신의 정원에서 가꾸는 것이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농부가 정성 들여 가꾸고 돌볼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13,19) 성장한다는 것을 또한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거대하고 거창한 삼나무가 아니라 시작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 1mm도 채 되지 않지만, 정성을 들여 가꾸다 보면 2m가 넘는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루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씨앗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씨 안에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면, 햇빛과 물 그리고 거름이 주어지면,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가지에 깃들이는 새들은 굳이 추리해 보자면, 그늘이나 쉼터가 필요로 하는 곧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는 세상에서 작은 자와 버려진 사람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부류의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겨자씨의 비유는 남성적이며 일반적인 외적 노동으로, 누룩의 비유는 여성과 일상적인 가사 활동에서 차입했다고 강조하더군요. 이로써 예수님은 상당히 여성 친화적인 분으로써 여성의 가사 활동을 잘 알고 계신 것뿐만 아니라 이를 중요시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누룩의 비유의 메시지도 겨자씨의 비유와 동일합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사실 적은 양의 누룩을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넣으면 처음엔 전혀 보이지도 않지만, 누룩이 발효하기 시작하면 밀가루 서 말이 점차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처음에는 미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차츰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철저하게 퍼져나가고 확장해 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낙담과 실망에 빠진 제자들을 혼란에서 일으켜 세우는 희망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외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누룩은 내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쉴 곳을 찾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의 쉼터가 되기 위한 겨자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참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품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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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신학교 2학년 시절,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제가 군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고 성소에 대한 의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직접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 그 당시에 있었던 하프 마라톤 대회였습니다. 즉, 21.0975km의 마라톤을 신청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학년에서는 약 10명이 넘는 동기들이 마라톤을 신청했는데 대부분 축구를 비롯한 여러 운동을 좋아하던 동기들이었습니다. 반면 저는 운동보다는 책을 좋아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마라톤을 신청하자, 여러 동기들이 저를 걱정했습니다. 평소에 운동도 잘 안하던 제가 20km가 넘는 긴 거리를 뛰겠다고 덜컥 신청했으니 괜찮겠냐, 다쳐서 돌아오는 것은 아니냐 많은 걱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고 그렇게 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대회 당일 날이 되었습니다. 신호탄이 울렸고 수백명이 되는 사람이 함께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저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많은 신학생들 역시 신호탄에 맞춰 달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동기들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빠르게 성큼 성큼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저렇게 뛰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는 재빨리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저 친구들은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던 친구들이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 완주를 목표로 천천히 달리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빠르지 않게 그러나 너무 느리지는 않게 저의 속도를 유지하며 꾸준히 달렸습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제 자신에게 집중하며 뛰는 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보다 훨씬 빨리 뛰어나간 동기들이 중간 중간 주전 앉아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열명이 넘는 동기들 가운데, 꾸준히 마라톤 준비를 했던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제가 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달려 나가 절뚝이며 걸어오는 몇몇 동기들을 부축해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저는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결국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도, 의욕도 아니고 ‘꾸준함’이라는 사실을 몸소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공통점은 그 시작점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작다는 데에 있습니다. 겨자씨는 보통 1.5mm의 작은 크기 이지만, 한 철이 지나면 3미터가 넘도록 자라납니다.
누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밀가루 서 말의 양은 약 35리터이고, 이것이 부풀기 위해서는 약 2kg의 누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양을 빵으로 구우면, 그 백배가 넘는 227kg의 빵이 탄생합니다.
이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겉으로는 보잘 것 없지만 그 역할을 꾸준히 수행했을 때, 그 결과가 한 없이 크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개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행이 혹은 희생이, 세상에 혹은 나의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힘은 겨자씨와 누룩의 힘과 같습니다. 악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미움과 험담이 나의 삶에, 혹은 타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지만 그 파괴력은 어머 어마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소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차차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저는 제 마라톤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곤 합니다. 저도 모르게 쌓아나가는 하루하루가 마라톤 출발선에 서 있던 어린 시절 저의 발걸음 한 발짝 한 발짝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한걸음씩 쌓이다 보면 그것은 그 누구보다 더 위대한 한걸음이 되어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그 동안의 훈련도 개개인의 능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꾸준함. 그것 외에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아주 작은 것이 커다란 힘을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보잘 것 없는 화약이 불을 붙이면 폭음으로 세상을 가득 메우기도 하고, 얇은 종이 한 장이 위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도 합니다.
사소한 장애물이 물리적으로 큰 손해를 끼치기도 하고 한마디의 작은 말이 커다란 힘이 되어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작은 기도, 작은 희생, 작은 사랑의 실천이 장차 우리에게 상상도 하지 못한 커다란 힘을 가져다 줄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준다면 그것을 어찌 과연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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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류학자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반면 사람들의 생각은 더 짧아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햇수로는 훨씬 더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생각은 짧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삶을 살았지만,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 사상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누구보다 길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몇 년 전, 피정 중에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다가 지금의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겨우 33년의 세상 삶을 사신 예수님보다 훨씬 더 인간 세상에서 오래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시간을 정말로 길게 사셨습니다. 얼마나 긴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미와 영향이 이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이 짧아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통해 오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처럼 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여유로움 속에서 묵묵히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씨를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의 가지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고 하십니다. 사실 겨자씨는 정말로 조그마한 씨로, 유다 문학에서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이 작은 것의 상징을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가 와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전해주시는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서 변화되면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몫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들을 끌고 갈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대신 스스로 사랑의 삶을 살면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 또 누룩이 부풀어 오르듯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길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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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루카 13,18-21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그것은 누룩과 같다.”(루카 13,19.21ㄱ)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믿음을 먹어
믿음이 되고
날마다
믿음으로 먹혀
믿음을 돋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희망을 먹어
희망이 되고
날마다
희망으로 먹혀
희망을 피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사랑을 먹어
사랑이 되고
날마다
사랑으로 먹혀
사랑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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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일 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가 올 것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큰 나무 역할을 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그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될는지요.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역경과 시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을 향한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을 스쳐 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므로 내 생활의 동작 하나하나가 천상으로 치닫는 하나의 몸짓이고 자세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 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몫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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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여서, 부풀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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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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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고향집>
-구암리카페에서의 축제 음악회-
어제는 참 행복하고 만족한 하루였습니다. 100% 충만한 하루를,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날이었습니다. 과정마다 목적지였고 과정마다 만족했습니다. 어디서 마쳐도 완성된 하루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다음 행복기도 내용 그대로 였습니다. 늘 자주 외어보며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확인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발견이자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역시 기상하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만세칠창중 네 번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를 힘껏 외쳤습니다. 평화로운 하루 순례여정중 또렷히 부각되는 깨달음은 ‘결코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어나서도 안되겠고 일어나지도 않겠다 하는 생각을 평화로이 살아가는 분들을 볼 때 저절로 드는 확신이었습니다.
“산에
산을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은 산같은 분이예요.”
늘 산이라 자부하며,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산처럼 머물러 살다가 어제는 참 오랜만에 움직였습니다. 함께 했던 분에게 산을 움직였다며 믿음을 격찬했습니다. 산아래 모두 바뀌어도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변함없는 산이 있어 전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늘 거기 그 자리에 산처럼 정주해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했습니다.
어제 하루 휴가를 내어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같은 분들과 참으로 오랫만에 충남 예산 봉산의 고향집 순례를 했습니다. 하루 거룩한 순례피정을 다녀온 느낌으로 참 충만한 하루였습니다. 두분 자매님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의 “살아 있는 성경책”과도 같다 생각되는 분들이었습니다. 명실공히 다음 다산 어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분들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입으로 하는 자랑이 아니다. 본보기가 되고 싶다면 거쳐 온 세월로 증명하라.”
살아 온 생애 자체가 본보기가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저에겐 ‘신의 한 수’ 같은 하느님의 선물같은 분들이었습니다. 함께 편안히 나눈 식사도 좋았고 고향집 예쁜 구암리카페에서 머물렀던 시간도 참 평화로워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마냥 평화로워 마냥 머물고 싶었습니다. 참 아담하고 아름답고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카페로 평화로운 분위기에 저절로 젖게 하는 느낌이었고 함께한 자매님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했습니다.
고향집 근처에서 만난 분은 오직 한분이었지만 오랜만에 충청도 사투리로 친근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제 고향집 구암리카페 집자리가 좋다는 말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건 어머니도 살아 생전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여긴 좋은 집자리니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어머님 말씀을 들었다며 형수님은 좋은 집자리에서 제가 태어났다며 저를 지목했습니다.
태어나서 20년간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아온 고향집입니다. 저의 정서 8할은 여기 고향집 환경 영향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주마등처럼 무수히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어제의 절정은 구암리카페 뜨락에서 즉흥적으로 열린 음악회였습니다. 함께한 한분은 70대 자매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냈던 재원으로 노래와 기타에 능숙한 분이었습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열정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 분이었습니다.
두 분 다 공통적으로 뛰어나게 좋은 분들이고, 한분은 겸손과 진실, 한분은 순수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수도생활을 그대로 보답받고 있다는 느낌의 하루였습니다. 참 무수한 동요들을 함께 열창했고 그대로 하느님 나라임을 실감했습니다. 문득 떠오른 ‘일터로 가자’ 노래를 약간 개작해 불러도 봤습니다.
“낙원이 어디냐고 묻지 말게나
웃으며 노래하는 여기가 낙원이로구나
내 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 가슴엔 언제나 본바람 분다
어화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함께 한분들이 하느님 나라의 새일꾼 자매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참 기이할 정도로 카페에서 만났던 몇분의 손님과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분 한분외에는 면소재지에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텅빈 시골 땅에 건물들이었습니다. 그대로 구암리카페에 손님은 계속된다하여 기뻤고 친절한 분들이라 잘 될 것이란 예감도 들었습니다.
후에 자생 음악회 동안 카페는 비어 있었지만 비어 있는 그 모습도 참 평화로웠습니다. 카페처럼 지친 분들에게 늘 편안한 빈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두 비유입니다. 오늘의 은혜로웠던 추억에 잘 맞는 비유임을 깨닫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두 비유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성장하는 겨자씨 나무처럼 오늘의 보물같은 추억은 끊임없이 섬기고 나누는 풍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확장될 것이라 믿습니다. 더불어 내 자신이 성장하는 겨자씨처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길 바라는 마음 역시 간절합니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바로 어제 함께 했던 분들이 사랑의 누룩과 같은 분들었고, 그리하여 기쁨으로 부풀러 올랐던 하느님 나라의 분위기를 체험했습니다. 누룩은 참 좋은 효소입니다. 부패인생을 향기로운 발효인생 하느님 나라로 변모시켜주는 성령의 효소, 사랑의 효소입니다. 건물이나 자연환경이 만드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만드는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사람이 희망이요 참보물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겨자씨 나무같은 사람, 성령의 효소가 되어 안팎으로 발효시켜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부부공동체나 수도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아내와 남편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 원리는 다음 두 구절이면 충분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여기에 무수히 덧붙일 수 있습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나누십시오, 서로 존중하십시오, 이럴 때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도 소중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중해야 합니다.”
상호사랑, 상호존경의 하느님 나라 부부공동체입니다. 부부뿐만이 아니라 제가 몸담고 살아가는 요셉수도공동체 역시 그대로 하느니 나라의 실현입니다. 성규 72장은 사랑이 그대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수도공동체 묘사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람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명실공히 그리스도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얼마전 바티칸 고백사제들에게 주신 교황님의 당부말씀도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용서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논의하구요! 하느님의 부드러움을, 겸손을 배우고, 심리분석가가 되지 말고 연민의 경청자가,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제들과 이런 사제들을 보고 배운 이들의 공동체라면 그대로 하느님 나라 실현의 공동체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겨자씨와 누룩의 효소가 우리 모두 사랑으로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를, 발효로 숙성해가는 하느님 나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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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오늘 겨자씨의 비유를 읽자니 전에 저희 식당에 찾아오신 할아버지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연세도 구순 가까이 되어 보였고 행색도 초라한 할아버지였는데 식사하신 뒤 보답하는 마음으로 무슨 씨앗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차로 달여 먹으면 몸에 아주 좋은 것이니 꼭 씨를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제가 미심쩍어하는 태도를 보이며 선뜻 감사히 받지 않으니 그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제발 믿으라고 그리고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호의와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받긴 하였지만 저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오늘에서야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대비하면 저는 그 씨를 제 정원에 심지 않은 그 ‘어떤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지금까지 씨를 한 번도 심지 않았습니다. 모종이나 묘목을 사서 심은 적은 많았어도 씨는 심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왜 그런 사람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씨도 이렇게 심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래도 저는 여간해서는 잘 믿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특히 약이나 건강식품 같은 것은 효능이 전혀 없다고 생각진 않지만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그리 큰 믿음을 두지 않는 편입니다.
그것은 아마 제가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사람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믿을 텐데 제가 건강하기 때문이고,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않겠다는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불신의 관성이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까지 불신하는 것으로 이어지면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같다고 오늘 주님도 말씀하시잖습니까? 보잘것없어 보이는 거기에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가능성 없다고 믿는 거기에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잖습니까?
씨앗이란 겨자씨만이 아니라 모두가 작고, 작지만 거기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씨를 심어도 나지 않을 수 있고, 자라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씨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믿고 씨를 내 정원에 심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도 무엇을 하실 수 있고, 우리 눈엔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하느님께는 가능할 수 있지요.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하느님을 믿고 오늘도 우리 정원에 가능성의 씨를 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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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그것은 누룩과 같다."(루카13,19ㄱ.21ㄱ)
<하느님의 나라(天國)!>
오늘 복음(루카13,18-21)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루카13,18) 하고 물으시면서, 그것은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나라'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이고, 지금 여기에서 나를 통해 건설되어져야 하는 나라이며, 그리고 죽음 저 너머에서 완성되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는 아주 작고 보잘것 잆어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메시지와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크게 성장해 나가고,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게 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미소와 말 한마디'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작고 겸손된 나의 희생과 봉사'가 하느님의 나라를 만듭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우리를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오늘 독서(에페5,21-33)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순종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 충실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곧 천국이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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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 19)
큰 나무만
보고
작은 나무는
보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작은 나무
한 그루도
소중합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모두
아름답습니다.
작아도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무 많은 성장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라나는 성장과
넓혀가는
마음의
확장 사이에
겨자씨처럼
자라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나라는
기다림과
정성의
나라입니다.
겨자씨처럼
자아를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더디어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우리의 삶이
중요합니다.
겨자씨처럼
살아도
아름답습니다.
마지막까지
밀고 나가야 할
겨자씨의
정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큰 나무도
작은 나무도
모두 평등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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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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