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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거울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라
성 경 : 약 1 ; 23 - 25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몇 번이나 보셨습니까? 한 서너 번씩은 보셨을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음, 그런 대로 괜찮구먼, 봐 줄만해' 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면 볼 때마다 실망을 하셨나요?
거울이 없었다고 한번 가정해보세요. 저나 여러분이나 얼굴이 가관이었을 겁니다.
만약에 거울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기 모습이나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우리가 자기 얼굴을 보려면 반드시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거울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예화)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울이 희귀했었을 당시 자기 얼굴을 확인해볼 수 있는 거울이 없어 일어났음 직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갔다가 낙방을 하고는 힘없이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집을 향해 내려갑니다. 과거에서 떨어진 것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제나저제나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출세하기를 바라는 아내의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밟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남편을 위해서 손발이 닳도록 애쓰는 아내를 어떻게 위로를 해줄까를 고민하다가 그 동안 아껴 두었던 노자 돈을 털어 거울을 하나 삽니다. 아내가 기뻐할 생각을 하니 어느 정도 마음에 위안이 됩니다. 드디어 집에 돌아 온 이 선비는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거울을 걸어놓습니다. 때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발견합니다. 거울을 보는 순간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안에는 평소 보지 못하던 예쁜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아내가 얼마나 기겁을 했겠어요. 아내의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겁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이 사람이 보라는 과거는 안 보고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렇게 깜쪽 같이 나를 속이다니. 어이구 억울해라." 이런 엉터리 같은 남편을 믿고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아온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자 온갖 설음이 북받쳐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동네방네 떠나가라 소리를 내어 우니 시어머니가 웬일인가 싶어서 뛰어들어옵니다. "아가야 도대체 웬일이냐? 어니 아프냐?" "아니에요, 어머니, 이래도 되는 거예요? 저를 뭘로 알고 그러는지 정말 속상해요.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를 들여놓으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예요?" "아니 여자가 어디 있다고 그러냐." "어머니, 저기를 좀 보세요." 시어머니가 거울 앞으로 갑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안에 웬 쭈글쭈글한 노파가 하나 서 있는 겁니다. 그러자 며느리에게 한다는 말 "아가야, 걱정을 말아라. 너하고는 상대가 안된다. 내가 보니 다 늙었는데 뭐 그러냐. 별 일 없을 거다." 하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거예요. 시아버지가 다시 들어오더니 거울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더니 "아버님 소식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절받으십시오." 하더랍니다.
거울이 없었을 때는 이런 일도 종종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기 얼굴을 모르니까 다른 사람처럼 여기며 살았던 경우도 있지 않았겠어요?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바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의 생생한 모습을 보게 해 주는 역할을 바로 이 거울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보고,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점검해서, 아름다움을 가꿉니다.
그만큼 거울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거울은 크게 네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1)투사의 기능입니다. 물체를 보여 주는 대로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거울의 역할입니다.
거울은 보여 주는대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울이 하는 역할입니다. 거울은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거울은 사실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투사시켜 보여줍니다.
2)기능은 감시 기능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엿보려고 할 때에 거울이라는 반사체를 사용합니다.
사람이 거울 앞에서는 자신의 행동도 조심한다고 합니다.
상점에 거울을 설치한것도 이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는 거울이 감시하는 기능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3)기능은 비판 기능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쳐 주면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어디가 흐트러져 있는가를 지적해줍니다.
거울이 보여 주는 대로 거울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지
거울이 보여주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기능은 미적 기능입니다. 거울을 많이 보면 예뻐집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거울을 자꾸 들여다보노라면 자기 얼굴에서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예뻐질 것인가를 계속해서 연구하게 됩니다.
'어 광대뼈가 튀어나왔네. 좀 깍아내야지. 어 턱이 주걱같이 길구만. 약간 다듬어야지.
어 눈이 새우 눈같이 이렇게 작아서야 원. 쌍거풀 수술을 해야지. 어 피부가 거칠어졌네. 당장 오이 맛사지를 해야지.'
이런 식으로 거울을 자꾸 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가꾸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아름답다는 말을 듣게 되는 거지요. 이와 같이 거울에는 미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울은 우리의 겉모습만 보여 줄 뿐이지 내면의 세계는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겉 사람의 모습은 잘 보여 주지만 속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여주지 못합니다.
겉 사람을 향해서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는 하지만
속 사람에 대해서 ‘이거 고쳐야 된다’, ‘이거 변화해야 된다’ 그렇게 지적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거울은 우리의 외적인 모양새에만 영향을 줄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내면 세계를 살피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를 잘 가꾸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항상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때에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내어 보일 때에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자기자신이 아직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거울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거울 앞에 나가 자신을 비춰볼 때에 우리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내면 세계가 얼마나 빈약한 상태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지적해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있으면
우리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고, 왜곡되어 있고, 더러워져 있고, 추해져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경고하고, 권면하고, 지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조명해 줍니다.
그러기에 바른 나를 만들려면 말씀의 거울로 자신을 열심히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세밀히 비추어 보며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기에 그 말씀의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의 잘못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러난 그것을 재빨리 수정하면 바른 삶을 살아갈 수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금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119장 10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또 다윗은 시119:31-33에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의 거울로 날마다 자신을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옆사람과 인사합시다. = 거울만 보지 말고 말씀을 들여다보자)
2)말씀을 들은 대로 행동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은 ‘귀와 입만 커가고 있다’ 고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지식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데 삶은 형편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입만 살아서 말만 많다는 것입니다. 말은 많이 하는데 삶은 없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이 없고, 이해를 말하면서 이해하지 않고, 용서를 말하면서 용서 하지 않고
비판하지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수없이 남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참된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잇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고 하였습니다.
즉 말씀을 삶속에서 실천해야 진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울의 목적은 물체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당장 고칠 것을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네 모양이 이렇다, 지금 네 인생이 이렇다’ 라는 사실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이렇게 살아야 할 것까지도 자세히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끝나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도를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보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듣습니까?
고칠 것 고쳐가면서 듣습니까? 그렇다면 잘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말씀은 참 좋구먼. 그렇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는 못해.'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나는 나니까 내 식대로 살 거야.' ‘혹은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야‘ 라고 하지는 않는지요?
또는 이 말씀은 나보다는 저 사람이 들으면 좋겠구먼 하면서 듣지는 않는지요?
이러한 자세는 굉장히 교만한 자세입니다.-저는 설교를 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제 자신에게 비추어봅니다.
말씀을 전하지만 제 자신도 이 말씀에 찔립니다. 그래서 회개한ㄴ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거나, 고치려 하지 아니하고 또는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빗대면서도 자신은 도무지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고
그저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듣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 사람은 진리에서 왜곡된 사람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었을 때에 말씀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잘못을 그 즉시로 고쳐야 됩니다.
좀 더 있다가 하지, 다음 주에 다시 감동이 오면 그 때 가서 하지, 내일로, 모레로, 글피로, 한 달로 일년 후로 미루게 되면 결국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다 까먹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다 상실한 채 그저 밋밋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결국은 말씀에 대한 불감증이 걸리고 말것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과 부딪치는 분이 있습니다.
"어, 목사님이 오늘 나를 치네. 나를 때리네."
물론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 약점이 어떻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면 발끈할 수 있습니다.
또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기분이 좋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때린다, 친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면 그분은 어떤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돌을 던지면 안되듯이 말씀에 돌을 던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렘23장 29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을 일깨우는 불이요, 나를 두들겨 일깨우는 방망이가 됨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말씀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 방망이 같은 말씀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듣는 순간 깨달음이 오고 감동이 오고 은혜가 와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고쳐야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치 못하면 그 무엇으로도 은혜 받을 길이 없습니다.
설령 사람이 싫다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싫어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엄청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고 그들이 전한 말씀은 들은 대로 행하라 고 하였습니다.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우리들이 말씀을 대하는 좋지 못한 자세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여기 보면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보고(look at)' '가서(go away)' '잊어버린다(forget)'
보고, 가서, 잊어버리는 것이 늘 되풀이되는 사람,
이것이 습관화되고 만성화되어 고쳐야 할 것을 알면서도 고칠 줄 모르고,
변화되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변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을 보십시오.
아무런 축복도 받을 수가 없어요. 신앙의 성숙이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보고, 가서,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보고 가서 행동으로 옮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보고 가서라는 말은 가는 동작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대로 자기 자신을 고쳐 나가면 그 사람의 삶은 점점 더 성숙되어지고 성화 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고 나면 “나중에 하지, 한번쯤이야, 그 까짓 거 뭐, 그게 뭐 그렇게 큰 죄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늦장을 피우고 고치지를 않는다면
점점 더 횟수를 거듭하면서 영영 고칠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비극은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마음이 강퍅해지고 완악해져서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고
나중에는 말씀에 대한 불감증에 걸려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게 되는 것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로 자기를 비추어보고 자기를 다듬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호10장 12절 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땅, 딱딱한 땅을 갈아엎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삽이 되고, 곡괭이가 되어 내 영혼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 종소리 교회 성도들이 특별한 사명을 인식하고 이 자리에 모였으므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이 기경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 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 시키기전에 먼저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기경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변화 되어 온유한 사람이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섬김의 사람이 되고,
이해와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 우리가 일을 한다고 다니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매사에 갈등과 부딧김이 있을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먼저가 아니라 심령이 먼저 기경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라 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하라고 하셨습니까?
행1:4이하에 보면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일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식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만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은커녕 사람을 죽이고는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40년을 연단 받은후에 가시떨기에서 성령을 받은후에
지면에서 이보다 승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듣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이끌고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깨달음이 올 때 그 자리를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거울이 나를 보고 잘못됐다고 지적할 때 그 즉시 수정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돌이킬 것은 돌이켜야합니다.
나중에 하지, 돈 벌면 하지, 시간 있을 때 하지 하면서 뒤로 미루다가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그 순간의 은혜를 놓치지 마십시오.
고후 6장 1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가서 잊어버리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그 신앙생활은 이름뿐인 신앙에 불과 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변화된 삶 새로운 삶, 고쳐진 삶은 어떻게 해야 가능 할까요?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빛을 받아야 살고, 빛을 가까이 해야 성장을 합니다.
신앙성장 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과 신앙성장은 불과 분의 관계입니다.
25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들여다보고 있는 자(the man who looks steadily)는 보고 가서 잊어버리는 자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보고 가서 잊어버리는 자는 흘낏 보고 맙니다. 대충 보고 치워 버립니다. 그리고 가서는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서 봅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의 법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으로,
공동번역에는 '잘 살피고 꾸준히 지켜나가는 사람' 으로,
새번역에는 '잘 살피고 또 그 안에 사는 사람'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즉시 실천으로 옮깁니다.
들여다보는 사람과 보고 가서 잊어버리는 사람은 처음에는 표시가 별로 없을지 모르나
점점 살아갈수록,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 차이는 천양지차로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들여다본다는 말은 원어로 eij(에이스)'곁에서' 라는 전치사와 'parakuvptw(파라귑토)주목해서 구부려본다'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즉 옆으로 몸을 한껏 구부려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멀리 해서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이해하려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깨달음도 있고 은혜도 있고 변화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산(神算) 이창호 바둑 좋아하시는 분들 많으신데 우리나라 이창호 선수가 바둑두는 것을 유심히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그 선수가 바둑둘 때에 상대가 어떻게 두나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고 앉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상대가 수를 생각하면 자기도 열심히 수를 읽고 또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는 몸을 구부린 자세로 수를 읽는 진지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 이래서 최고가 되는구나 생각을 합니다. 그를 세계 최고의 정상 기사라 부르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실력이 얼마나 탁월한고 하면 불가사의할 정도입니다.
다른 시합을 관전할 때 내노라 하는 바둑의 고수들이 이런 수 저런 수를 두어 보면서 이창호 선수의 의견을 묻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직 초반에 불과한데도 '거기에 놓으면 나중에 한집 집니다.' 라는 식으로 대답을 합니다. 나중에 보면 그의 말이 신통하게 맞습니다. 그마만큼 계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마는 대국에 임하는 그의 자세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관심을 기울여서 가까이에서 그것을 들여다볼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듣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자세가 가장 겸손한 자세라고 생각되세요? -그렇다면 그 자세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오랜시간 않아계시면 힘이들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겸손히 않아 있는 것과 그냥 편한 대로 않아 있는 것과는 은혜가 다르게 옵니다.-- 사관 생도들 강의 듣는 것 보세요))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에 팔짱을 끼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전도사님이건 부목사님이건 누구건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듣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는가를 항상 관심 있게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전도사님이니까 누구니까 나이가 어리니까 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듣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 이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귀담아 들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최선을 다해서 겸손하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옛날 이야기 듣는것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들으려고 하지 마세요. 아주 진지하게 세심하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계시는가를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귀기울여 겸손한 자세로 들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의 복이 반드시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자 그러면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이 무엇일까요?
본문 25절 후반절입니다.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이 넘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기쁨이 넘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을 보십시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또 신28:1-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또한 . 딤후3장 16절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 들여다보듯이 늘 가까이 하시고
그 말씀이 나에게 지적하는 대로 말씀에 즉시즉시 순종하며 살아가시므로
하시는 모든 일이 주안에서 다 형통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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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힘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 하시길 기도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