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7강-1(46-49) 오늘『법화경』「분별공덕품」323쪽 46번부터 할 차례입니다.『법화경』을 그동안 쭉 이렇게 강의를 해왔는데, 이 법회에 오늘 또 처음 오신분들도 계시긴 합니다만은 또 이제 다음 시간에 오실 수도 있고 저기 끝에 가서 오실 수도 있고 하지만은, 우리 이 불자가 이 대승의 3대경전하면『금강경』,『법화경』그리고『화엄경』이렇게 이제 치는데 이 대승 3부경, 이것은 평생에 우리가 부처님 앞에 이제 귀의하고 불교를 믿는 불자로서 어떤 기회에서든지 공부를 꼭 해야하는 그런 그 경전입니다.
특히 이제『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것을 예고하시고 최후로 유언처럼 당신의 가슴에 묻어두었던 참으로 믿기 어려운 값지고 소중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이『법화경』입니다. 그래서『법화경』은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서사(書寫)하면은 공덕도 자기가 지니고 다니고 읽고 외우로 또 사경을 하고 그 다음 또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뭐 한 구절이라도 설명을 해주고 자기가 설명을 할 수 없으면은 설명을 하는 그런 그 법회에 인도를 한다든지, 소개를 한다든지 해서 함께 듣게 한다든지 하는 것 여기 이제 늘 그 말이 나오죠.
근래 보면은, 약자서(若自書)커나 교인서(敎人書) 그 말 있어요. 또 내 스스로 쓰거나 남을 시켜서 쓰게 하거나 또 스스로 읽거나 남을 시켜서 읽게 하거나 이렇게 남에게 권하는 것도 권선(勸善)이라고 해서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상당히 그 좋은일로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권하지 아니하면은 어떤 좋은일도 나누기가 어렵죠. 권함으로 해서 그게 나눠지는 것이고 나눈다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은 보시(布施)에요. 큰~ 보시죠. 안내해주고 알려주고 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내가 뭐 물질을 수억을 보시한 것 보다도 더 큰 보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근데 보시하면 복이 많이 생긴다는 그 사실은 알면서 왜 그런 큰 보시를 열심히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기독교인들은 그거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몰라도 그 권하는 보시 뭐 예배당에 오라고 하는 보시, 예수를 믿어라하는 보시 그런 것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합니까? 우리 불자들은 그 점이 좀 부족한데 사실은 어떤 물질적으로 보시를 못해가지고 그걸 늘 마음에 섭섭해하고 또 참 부담을 갖고 어디 불사를 하는데, 내가 다니는 절에 불사를 하는데 내가 뭐 기와, 서까래 하나라도 기둥하나라도 제대로 마음껏 못해가지고 늘 이제 미안해하고 아쉬워하고 이제 그런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좀 더 차원을 달리해서 정말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공부하는 곳에 권하는거. 이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보시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늘 우리『법화경』에서는 뭐 곳곳에 그런 그 이야기가 있어 왔습니다만은 특히 요즘에 우리가 공부하는 여기「분별공덕품」이 내용에 있어서는 더 이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이 권해서 한 분이라도, 두 분이라도 이제 자꾸 와서 이런 좋은 대승경전하고 인연을 맺고 또 거기에 이해가 깊어지고 거기에 어떤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거 얼마나 큰~ 공덕이 아니거든요.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내 복을 짓기 위해서 내 공덕을 닦기 위해서라도 많이 권해요. 많이 권하고 많이 알려야 되요. 그래서 한 분, 한 분 이렇게 소개해서 모시고 올 때마다 참 고맙고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늘 그러죠? 뭐 올 때 차표 드리고 일 년동안 회비도 내드리고 교재도 사드리고 그렇게까지 해서 만약에 일 년 공들여가지고 그 사람이 진실한 불자가 되기만 한다면은 세세생생 큰~ 복이 되는데, 일 년간 공들이는 일이 그게 결코 저기 저 비싼게 아니라구요. 그런 점을 우리 불자들이 자기 혼자만 복지을려고 하지말고 혼자만 공덕 닦을려고 하지말고 우리 모두 다같이 공덕닦자. 내가 향가에 그 양지스님 그 향가를 소개하면서 더러 말씀 드렸죠?
여기는 이제 말하자면『법화경』의 핵심이 되는 여래수량(如來壽量)에 대한, 여래의 생명에 대한 이치 그것은 곧 우리 사람사람의 생명에 대한 문제이고 그리고 알고보면은 모든 존재에 대한, 생명에 대한 그 이치와 그 가치 이것을 설명하셨는데 그 설명을 듣고 또 신심을 내고 또 이해하고 또 기뻐하고 한다면은 얼마만한 공덕이 있겠는가? 이 이야기를 여기 이제 쭉 해오는 중입니다.
잠깐 이제 그 앞페이지에 43번으로 다시 되돌아가면은,‘阿逸多야.’미륵보살이죠. 아일다야, 만약에 부처님의 수명이 아주 길고 길다고 하는 사실을 듣고 그 言趣를 이해하면은 그 말의 취지, 그 말의 취지를 이해할 것 같으면은 이 사람이 얻은 바 공덕은‘無有限量이다.’한량이 없다. 그래서 그 이해심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능히 如來의 無上智慧 부처님께서 터득하신 그 최상의 지혜를 내가 일으킬 수가 있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을 살려낸다하는 것입니다. 能起라고 하는 일으킬 기(起)자는, 일으킬 起자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일으킨다 이 말이요. 여래의 무상지혜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데 그것을 일으켜내는 것이다.
그런데 듣기만하고 그렇게 될 수가 있는데 하물며 다시 이 경전을 널리 듣고 만약에 교인문(敎人聞)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한다. 가르칠 교(敎)자죠. 뭐 가르칠 교자 그대로 해석하면은 다른 사람을 가르쳐서 듣게 한다. 딴 사람에게도 듣게 한다. 또‘약자지(若自持)’만약에 스스로 경전을 가져. 그런데 휴대용『법화경』, 오늘 새로오신 분들 휴대용『법화경』한 권씩 다 드리세요. 늘 안읽어도 좋으니까 가지고 다녀라. 스스로 가지고 다니고‘약교인지(若敎人持)’다른 사람을 시켜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가지게 한다 하는‘약자서(若自書)’만약에 스스로 사경을 하는, 쓴다 이 말이요. 스스로 쓰거나‘약교인서(若敎人書)’남을 시켜서 쓰게 한다. 또 몸살나게 그 쓰지말고 (하하)
아주 사경, 사경을 하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힘들다가 나중에는 재미가 나가지고 계속 몰입해가지고 쓰다 보니까 몸살이 나가지고 며칠씩 하하하 못오시다가 오늘 오셨는데 (하하하) 하여튼 뭐 어떻게 기쁘기도 하고 참 하 그렇게 이제 사경을 이제 해보니까 이해도 되고 재미도 있고 뜻도 깊어지고 글씨도 자꾸 자꾸 늘고‘이거 얼른 써서 또 도반들에게 스님들 또 보여야지.’하는 그런거도 또 있지. 그러다 그만 몸살이 나가지고 하하 두 달씩 앓고, 아무튼 이 고마운 일입니다. 이게 이제 우리 도반들, 법우님들 모두 다 같이 알라고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는거요.
얼마나 좋은일입니까? 내가 지난 시간에 그랬죠. 청량스님은『화엄경』을 만나서 내 죽을 곳을 얻었다.‘득기사소(得其死所)’참 얼마나 근사한 말을 했습니까? 내 죽을 곳을 얻었다. 그렇다고 죽지는 말고 (하하) 몸살나겐 하지 마세요. 몸 잘관리해가면서 서서히 서서히 천천히 쓰고 싶어도 조금씩 참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쓰고 싶어도 쓸려고 해도 쓰고 싶은 마음이 안나서 못쓰는 사람이 있고, 너무 쓰고 싶어서 쓰고 싶은 마음을 좀 이제 자제를 해가면서 써야 할 사람이 있고 그렇습니다.
에 보니까 그러네요. 스스로 쓰거나‘若敎人書하며’사람을 시켜서 쓰게한다. 하며‘약이화향영락(若以華香瓔珞)으로’또 꽃이나 향과 그리고 영락구슬. 당기, 번기, 증개(繒蓋) 이런 것은 다 깃발이죠. 깃발을 펄럭이게하고 아주 장엄하는데 그만이죠. 또 일산이라든지, 비단 일산 그리고 향유(香油), 소등(蘇燈) 그 옛날에는 등을 켜도 전부 기름을 짜가지고, 식물에서 기름을 짜서 그 기름으로 등불을 켰어요. 향유라든지 소등. 이런 것으로써 경권(經卷)을 공양할 것 같으면은
시인공덕(是人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해서 능히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낸다. 그래서 一切種智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 一切種智 그랬습니다. 종은 종자 종(種)자 아니겠습니까? 일체 것이 다~ 뭐 꿰뚫어 아는, 일체 것을 다 꿰뚫어 아는 뭐 한 가지에만 통달해 아는 것이 아니고, 뭐 경전만 알고 참선은 모르고 참선은 아는데 경전은 모르고 또 뭐 이 출세간일을 잘아는데 세상사는 모르고 그게 아니고 세상사도 잘 알고 뭐 출세간일도 잘 알고 또 경전일도 잘 알고 참선일도 잘 알고 행정도 잘 하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을 갖춘 一切種智 그게 일체종지거든요.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아는 그런 지혜를 낸다.
낸다라고 하는 것은 아까 그 기(起)자도 내가 설명을 드렸습니다만은, 이게 딴데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 내 자신속에 잠자고 있던 것이 살아난다 이 뜻입니다. 能生 여긴 아까 能起 그랬죠. 能起 누워있던 그 무상의 지혜가 일어난다. 일어나사 활동한다는게 起자고, 能生하는 것은 잠자고 있다가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거죠.
우리가 자꾸 이제 부처님의 그 위대한 경전을 자꾸 공부하다보면은 저절로 내 자신속에서, 어디서 주는게 아니에요. 참~ 불교는 이게 아주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또 이치에 딱 맞는 것입니다. 누가 문득 뭐 꿈에 무슨 뭐 신장(神將)이 와서 탁 머리를 쪼개고 그 안에다 뭘 뭐 그 저기 영어사전을 한 권을 집어 넣어주는게 아니고 내 자신속에서 그런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거요. 그러니까 내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거 이게 얼마나 값진 일이고 좋은 일이에요. 내 딴데 기다리고 있다가 뭐 그래가지고 그 저기 이치에도 안맞을뿐더러 그게 되는 날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개발해내는거죠.
그래 能生一切種智 참 좋은말입니다. 이것만 요 글자 여섯 자 요것만 하루종일 쓰고 있어도 좋아요. 그러면은 자기 속에서 이것이 하나의 저기 저 주력이 되고 주문이 돼가지고, 이 주문을 계속 쓴다. 能生一切種智 能生一切種智하면은 자신속에서 잠자고 있던 지혜가 꿈틀대고 일어나는거에요. 그겁니다. 그런 그 우리가 염불을 한다든지 화두를 든다든지 경을 공부한다든지 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 자신속에 이미 있는 것을 일깨워내는 것, 일깨워내는 것 그 얘기에요.
阿逸多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壽命長遠하고, 내가 말하는 壽命長遠 수명이 길고 길다라고 하는 것을 듣고‘심심신해(深心信解)’깊은 마음으로, 그냥 뭐 수박겉핥기식으로가 아니고 깊은 마음으로 저 마음 깊이 믿고 이해할 것 같으면‘즉위견(則爲見)’곧 보는 것이 된다. 爲見하는 것은 곧 보는 것이 된다. 무엇을 보는게 되느냐? 부처님이 항상 기사굴산에 계셔.『법화경』을 설하던 기사굴산, 영축산이죠. 영축산가보신 분 계시죠? 기사굴산에 항상 계셔서.
혼자 있느냐? 아니지.‘공대보살(共大菩薩)과’대보살들과 함께 그리고 여러 성문 대중들과 함께‘위요설법(圍繞說法)’에워 쌓여서. 큰 보살들 그리고 성문 대중들 이런 이들이 쭈욱 에워쌓여가지고서 설법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말이요.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게 몇 천년 전에 있었던 일이든 상관없는거요. 설사『법화경』을 설하던 그 순간 그 자리에 영축산에 부처님 코앞에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법화경』의 이러한 이치를 모르면은 그거는 부처님을 못보는거요. 눈으로 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없는거요. 부처님의 그 마음을 읽어야지. 부처님의 뜻을 이해해야 되는거죠.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고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하면은 어디에 있든지간에 어느 시대에 살던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든지간에 항상 부처님을 보는 것이 되고 부처님의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보는 것이 된다. 爲見 부처님의 이러이러한 영산회상 영축산에서『법화경』을 설할 때 그 불교에서는 가장 그저 좋은 광경을 영산회상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제일 좋은 광경을
왜 그러냐? 이『법화경』을 설할 때이거든요. 그럼 부처님도 연세가 70이 넘었어. 이제 80을 바라보는 연세야. 제자들도 무수히 많이 늘어났어. 그래 신도들도 무수히 많은 신도들이 있었어. 왕의 비호도 받고 무슨 뭐 주치의도 있고 그래서 그 불교가 부처님 일생중에서 가장 성할 때, 가장 왕성할 때 물론 그 뒤에 더 왕성했습니다만은 부처님 일생중에서 가장 왕성했을 때가『법화경』을 설하던 영산회상이다. 영축산에서『법화경』을 설하던 그 때를 일컬어서 영산회상 그래요.
그 불교에서는 그 절에서 무슨 깃발을 달고 막 풍악을 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여법(如法)하게 무엇을 행사를 진행을 하면은“아이고 영산회상이 벌어졌구나.”이런 표현을 해요. 영산회상이 벌어졌구나. 그 제일 좋은 찬사거든요. 그 사찰에서 제일 아주 근사한 행사, 제일 불교가 빛을 발하는 그런 행사를 한다. 그런 의미가 영산회상이다 하는 말 속에 있습니다. 이제 영산회상이 바로 어디 그때만 있느냐? 그게 아니라 이거여.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떤 처지에 살든지간에『법화경』의 이러한 이치만을 제대로 이해하고 산다면은 우리 앉은 이 자리가 그대로 영산회상이다. 그랬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 다음에 오늘 내용 이어집니다.
46 又見此娑婆世界 其地瑠璃 坦然平正 閻浮檀金 以界八道 寶樹行列 우견차사바세계 기지류리 탄연평정 염부단금 이계팔도 보수항렬 諸臺樓觀 皆悉寶成 其菩薩衆 咸處其中 제대누관 개실보성 기보살중 함처기중
又見此娑婆世界하대 其地瑠璃라 또 이 사바세계를 보대. 그 땅이 유리라.
이게 이제 땅은 흙으로 돼야 좋죠. 그런데 유리라고 하는 말은 이 칠보(七寶)중에 하나잖아요. 아주 값지고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내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설사 내 앞으로 등기된 땅이 아니더라도 내가 보는 이 산천초목 이 산하대지가 그대로 칠보에 들어가는 그런 값지고 소중한 땅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 사바세계가
그 땅이 유리라.
坦然平正하며 坦然平正하다고 하는 말 아주 평탄하다는 말입니다. 平자하고 坦자를 합하면 平坦이 되죠. 아무런 그런 구렁이나 무슨 언덕빼기나 그런게 없고 아주 평탄하게 끝없이 펼쳐져있고
閻浮檀金으로 以界八道하며 금이 이제 염부단금이라고 하는 인도에서는 아마 아주 좋은 금인데, 그런 아주 훌륭한 금으로써 실을 꼬아가지고 八道를 경계를 만들었다. 以界八道라.
줄이 이제 예를 들어서 사거리하면 상당히 번화가죠. 팔거리야. 이거는, 로타리가 있고 여덟 곳으로 길이 나있다 이 뜻입니다. 이게 八道라는 말은, 그 얼마나 번화하겠어요? 저기 아주 복잡한 서면가면은 그렇죠. 서면에 서면로타리에 가면은 정말 복잡하잖아요. 그 정도로 말하자면은 번화한 그 도시거리를 염부단금이라하는 그 금으로써 줄을 쳐가지고 경계를 만들었어. 그래서 사람들 많이 다니고 번화하니까 그렇게 이제 경계를 만들어야되잖아요. 그 경계를 만드는데 금으로 경계를 만들었다.
寶樹行列하고 여기 行列해놨는데‘항’이라고 읽어요. 줄할 때는 항, 걸어다닌다 할 때는 행 그렇습니다. 여긴 계신 분들 전부 유식하니까 이런것들도, 이렇게‘행렬’이렇게 읽거든“아이고 항렬이라고 읽지 행렬이라고 읽는거 아니라고”그렇게 가르쳐줘요. 하하하
보배로 된 나무가 줄을 쭈욱 이제 그 열을 지어가지고 줄을 서있다. 이 뜻입니다.
諸臺樓觀이 皆悉寶成이며 諸臺 저기 자성대같은 그런 뭐 높은데 대(臺)라고 그러잖아요. 거기다 의례히 거기는 뭐가 있다? 누각이 있죠. 그 누각을 樓觀 그래요. 왜냐? 누각에서는 바라보는게 기능입니다. 누각의 기능은 바라보는게, 관망하는 것이 기능이기 때문에 樓觀 그래 합해서 볼 관(觀)자까지 다 있어요.
곳곳에 대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산이 워낙 많은 나라라서 이 실감이 크게 안나는데, 저기 중국이나 인도같은데 평지만 있는 곳에는 조그만한 예를 들어서 100미터 높이 정도 되는, 해발 100미터 높이 정도 되는 그런 그 높은 뒷동산같은거 우리나라로 조그만한 뒷동산같은 그런 언덕만 있어도 이게 상당한 그런 그 대가 되요. 상당한게 됩니다. 그럼 거기다가 에잇 누각을 짓고 거기서 평야를 관망하고 하는 그런 그 풍습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이 경전에 보면 이 대를 아주 많이 해요. 보면은,
여러 臺 누각이 다 보배로 이루어졌더라. 그런 것들도 전부 보배로 이루어졌다.
其菩薩衆이 咸處其中하니 거기에 보살 대중들이 모두 그곳에 살고 있더라.
그러니까 저 높은 언덕이 있고 그 위에 대가 있고 그 위에 누각이 지어져있고 누각은 보배로 만들어져있고 근데 거기에 보살 대중들이 거기에 있으면서『법화경』을 공부하더라.
47 若有能如是觀者 當知是爲深信解相 약유능여시관자 당지시위심신해상
若有能如是觀者면 當知是爲深信解相이니라 만약에 능히 이와 같이 보는 사람, 이와 같이 관찰한다 이 말이요.
이러한 그 어떤 그『법화경』의 정신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어떤 장소에 처해있더라도 내가 아무리 뭐 좁은 그 아주 뭐 뭐 옥탑방에 있든지, 반지하 방에 있든지 뭐 전세방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다손치더라도 우리 정신세계가 이와 같이 되면은 말하자면은 이러한 것을 정신적으로 누린다 하는 것이죠.
만약에 어떤 이가 이와 같이 보는 사람이 있다면은 단지 마땅히 알아라. 이건 이제 이 사람은 깊이 믿고 이해하는 모습이다. 이해하는 본보기다 그런 뜻입니다. 정말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자기 환경에 아무런 그런 그 불편, 불만이 없고 무슨 뭐 공항을 어디다 짓든지간에 그까짓거 (하하하) 전혀 짓든지 말든지 그런데 관심없고 그저『법화경』이거 좋다하고 계속 쓰는거야. 뭐 쓰기 불편하면 저기하면은‘아이고 나 복잡해서 파이다.’싶으면은‘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만 써도 좋고‘능생일체종지(能生一切種智)’라고 하는 것만 계속 써도 좋고
내가 그전에 뭐라고 했죠? 종지용출(從地涌出) 땅으로부터 확 솟아 오른다. 난 그 말만 해도 몸에서 힘이 솟아요. 사경 그래 쉽게 생각하세요. 그 뭐 이거 다 이렇게 남들 그 해놓은 것처럼 근사하게 그렇게 할려고 하지말고 그저 한 구절 가지고 100번도 쓰고 200번도 쓰고 그러다 보면 이제 재미없으면 또 다른 구절가지고“또 한 구절 정해주십시오.”그럼 내가 얼마든지 정해줄꺼니까. 또 그것 가지고 이제 100번, 200번 그저 쓰고, 그럼 금방 느는게 또 이 일이라.
이게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하다보면은 세상사 그 얼마나 험악하고 그렇습니까? 그런거 아무 상관없이 그만 정말 영산회상을 스스로 누리고 사는게 되는거죠. 그게 이제 깊이 믿고 이해하는 본보기다. 그래야지. 세상에 그 복잡한 상황에 우리가 자꾸 따라가도 보면 끝도 없어요. 그 뭐 신문이나 라디오나 뭐 TV뉴스에 언제나 좋은 소식만 전해질까? 언제나 좋은 소식만 전해질까? 항상 안좋은 소식 그게 뉴스거든요. 우리나라 뉴스라. 안좋은 소식만 끊임없이 갖다가 언제나 좋은 소식 전해질까? 갈수록 안좋은 소식이 불어날뿐이지 좋은 소식은 없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그 자꾸 끌려다니고 관심쓰고 그래봐야 내 시간만 빼앗기고 내 정신만 상그러워지고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우리는 법화행자(法華行者)『법화경』공부하는 사람을 법화행자 그래요.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아주 그 참 그야말로 가슴에다 별을 하나 졸병으로 있다가 가슴에 별을 하나 착 붙이는거하고 같아요. 법화행자라. 오늘 이 순간부터 무조건 법화행자에요. 그 쫄병이 별단거하고 똑같다니까. 법화행자는 모름지기 그렇게 살아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48 又復如來滅後 若聞是經 而不毁訾 起隨喜心 當知已爲深信解相 우부여래멸후 약문시경 이불훼자 기수희심 당지이위심신해상 何況讀誦受持之者 斯人 則爲頂戴如來 하황독송수지지자 사인 즉위정대여래
又復如來滅後에 若聞是經하고 내가 아주 별을 또 세 개를 쳐놓은거 보니까 이게 또 무슨 뜻인고? 또 다시 여래가 열반하신 후에, 멸한후에 만약에 이 경전 설명한 것을 듣고
而不毁訾하야 起隨喜心하면 헐 훼(毁)자, 헐뜯는다 할 때 훼 자. 또 비방할 자(訾)자. 그렇습니다. 헐고 험담하고 비방하지 아니해서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은‘아 그 들어보니까 그 참 괜찮은거다.’이러한 마음이 난다 이거여. 거기다 좀 더 더해주면 기쁨이 생기는거야. 또 신심이 생기는거야. 자꾸 공부더하고 싶고 공부더하고 싶은 그런 그 환희심이 일어날 것 같으면
當知已爲深信解相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마땅히 알아라. 이미 깊이 믿고 이해하는 모습을 갖췄다. 깊이 믿고 이해하는 본보기가 됐는데
何況讀誦受持之者리요 하물며 어찌 하물며 讀 읽고 외우고 가지고 다니고 受持하는 사람이겠는가?
그렇죠. 설명하는 소리듣고 비방하지 않고‘아 그거 참 부처님의 가르침,『법화경』가르침이 아주 이 신기한 가르침이구나.’하는 이런 마음을 만약에 낼 것 같으면은
斯人은 則爲頂戴如來니라 이 사람은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데 만약에‘아 이게 좋다하고 한 번 더 읽어보자. 외우자. 가지고 다니자.’이렇게 하는 사람이겠는가?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을 如來를 이마에 이고 다니는 것이 된다.‘爲頂戴如來라.’頂戴 머리에 인다 하는 뜻입니다. 여래를 이고 다닌다 이 말이야. 부처님을 이고 다닌다. 최고의 그 공양이죠. 제일 존귀하니까. 그 저기 저 어린 아이들 그 대개 이제 사랑스럽고 좋으면은 목에다 이렇게 무등태우죠. 그 그러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합니까? 제일 아주 재밌어하죠.
여기 이제 여래를 이마에 인다하는 말은 제~일 존경, 존경의 극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 우리가 아주 불상을 모시고 불상을 그냥 천 불상, 만 불상, 삼천 불상 뭐다 그냥 모셔놓고 먼지가 꽉 앉아가지고 불상창고처럼 해가지고 그냥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절짓기 위해서 그렇게 불상만 잔뜩 창고처럼 해가지고 무슨 불상장사하는 창고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보십시오. 爲頂戴如來라. 부처님의 그 가슴 속에 있는 진정한 부처님의 마음,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하고 그걸 읽고 외우고 쓰고 그 사람이 곧 부처님을 가장 존경하는 일이고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래서 별을 세 개를 쳐놨구만 내가
참 그 다음에 넘겨서
49 阿逸多 是善男子善女人 不須爲我 復起塔寺 及作僧坊 아일다 시선남자선여인 불수위아 부기탑사 급작승방 以四事供養衆僧 이사사공양중승
阿逸多야 是善男子善女人은 阿逸多야, 미륵이여. 이 善男子善女人은 여기 모인 대중입니다. 선남자선여인은
不須爲我하야 부처님이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모름지기 나를 위해서, 부처님 자신 나를 위해서 不자를 기억하세요. 앞에 있는 아니 불(不)자 不須 안해도 된다 이 말이여. 뭘?
復起塔寺와 及作僧坊하야 以四事供養衆僧이니 다시 탑이나 절을 일으키는 것과 또 僧坊을 짓는 것 요사채 짓는거요. 승방을 지어가지고서 四事로써, 네 가지 일로써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하지 아니해도 되나니라.
그랬어요. 四事는 음식, 의복, 침구, 와구(臥具)라고도 하는데 그 다음에 탕약 이게 아주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입니다. 음식, 의복, 와구, 탕약 이 네 가지 일이에요. 이게 이제 신도들이 말하자면 사찰에나 스님들에게 또 부처님에게 그 이바지해줘야 할 네 가지 기본적인 것인데, 이거 안해도 된다 이 말이요. 그리고 스님들에게 공양 안해도 된다. 탑지을 필요없다. 절지을 필요없다. 승방도 지을 필요없다. 오로지 이『법화경』제대로 이해해라.『법화경』제대로 이해.
그러니까 사찰이 포교당이 됐든지 절이 됐든지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무슨 어떤 그 절이 됐든지간에 모~든 절의 존재이유는 모든 사찰이 존재하는 존재이유는 결국 뭐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특히『법화경』,『법화경』과 같은 이 대승경전, 최고의 경전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곧 말하자면은 절을 이 세상에 건립하게 된,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건립하게 된 이유다 하는 것이고 사찰을 만약에 건립했다면 당~연히 이와 같은 대승경전, 부처님의 진심이 녹아있는 이러한 경전을 반드시 공부하고 이것을 내 삶으로 내 인격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는 그런 그 가르침입니다. 이게
제67강-2(50-59) http://yumhwasil.linkone.co.kr/skc-v2/kyb/20110401bhk67-2.wmv 또『법화경』입장에서만 말한다면은 모든 절이란 오로지 이『법화경』을 수지독송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처로서의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부처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 법화행자는 따로 무슨 도량이 있을 필요가 없다. 도량이 딱 갖춰서 있다고 해서 거기서 부처님의 정신에 맞지 않게 살면은 그거는 이미 절이 아니죠. 그러나 내 조그만한 월세방 집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이『법화경』을 잘 공부해서『법화경』정신에 맞게 산다면은, 그 사람은 이미 어떤 큰 절보다도 더 나은 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이런게 얼른 이해안되죠. 가슴에 와닿지 않죠.‘에이 스님 그런 헛소리가 어딨냐고?’(하하) 이게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지 내 소리요 어데? 내가 조금 부연해서 하는 소리지. 이치는 그런거요.
50 所以者何 是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是經典者 爲已起塔 造立僧坊 소이자하 시선남자선여인 수지독송시경전자 위이기탑 조입승방 供養衆僧 공양중승
所以者何오 是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是經典者면 왜냐? 所以者가 何오?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은 이 善男子善女人이 이 경전을 受持讀誦하는 사람이면
爲已起塔하고 造立僧坊하야 供養衆僧이며 이미 탑을 세운 것이 된다. 이미 탑을 세운 것이 된다. 그리고 승방을 조립해서 요사채를 지어가지고서 衆僧 여러 스님들에게 供養하는 것이 된다.
이미 끝났다 이 말입니다. 그런 일을 다 해마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 말입니다. 또 이런말 들으면 하나도 절에 오시지 안올까 싶어가지고 부처님이 이제“아이야 겸(兼)하면 더욱 좋다.”그래 놨어요. (하하) 하하하하 뒤에. 그런데 겸하는데 순서가 있어요.『법화경』이치부터 알고 그 다음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육바라밀을 겸하라고 했지. 다른 것하고 나서 그 다음에『법화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거 알아야 돼요. 그 순서를 잘 아셔야 됩니다. 뒤에 이제 나와요. 곧바로, 겸행육도(兼行六道)라 해가지고 겸해서 육바라밀을 닦는 것. 그러면 금상첨화죠. 그야말로
아~ 지혜만 부처님처럼 높고 높은 것이 아니라 복도, 복덕도 한량없이 쌓여가지고 모든 것이 다 원만한 이(理)적으로나 사(事)적으로 전부 두루두루 원만한, 우리 저『천수경』에도 무슨‘무변승복개회향(無邊勝福皆廻向)’뭐 그런 말도 있죠. 또‘무변승복변장엄(無邊勝福遍莊嚴)’뭐 그런 구절이 있잖아요. 無邊勝福遍莊嚴 끝없는 수승한 복, 여러 가지 수승한 복을 두루두루 장엄해야지 한 가지만 딱 장엄에는 그건 이제 편협한 것이 되고 치우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은 늘 이렇게 원만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51 則爲以佛舍利 起七寶塔 高廣漸小 至于梵天 懸諸幡蓋 及衆寶鈴 즉위이불사리 기칠보탑 고광점소 지우범천 현제번개 급중보령 華香瓔珞 抹香塗香燒香 衆鼓伎樂 簫笛箜篌 種種舞戱 以妙音聲 화향영락 말향도향소향 중고기악 소적공후 종종무희 이묘음성 歌唄讚頌 則爲於無量千萬億劫 作是供養已 가패찬송 즉위어무량천만억겁 작시공양이
則爲以佛舍利로 起七寶塔하대 高廣漸小로 至于梵天하고 則爲 이미 된다. 곧 됐다. 이 말인데, 부처님 사리로써 七寶塔을 세우대. 칠보탑을 세우는데 어떻게 세우느냐? 아주 높고 넓게 해가지고 점점 이렇게 작게 이제 되겠죠. 그래서 밑에는 아주 넓게 하고 차츰차츰 작게 해가지고서 어디까지 높아 올라가는가 몇 천 미터 되는거요. 梵天에 까지 이르게 한다. 이 말이요.
내가 이 이 대목을 보고 절 이름 지어놓고 설계는 다 해놨어요. 절 이름은 보탑사(寶塔寺)라. 보탑 寶塔寺고 밑에 넓이가, 밑에 넓이가 한 천 평이나 이천 평 쯤 되게 하고 그것이 이제 위로 쭈욱 이렇게 올라가서 탑이 한 300미터 쭈욱 탑높이가 이제 그래 되면은, 그러면 이제 먼 데서 이렇게 보기만 해도‘아~ 저게 寶塔寺다.’그렇게 하고 저절로 이제 그 쪽으로 향해서 예배도 하게 되고 또 놓쳤던 염불도 다시 하게 되고 놓쳤던『법화경』도 다시 공부하게 돼. 그래서 설비까지 다하고 이름까지 다 지어놨는데 (하하) 할 필요가 없다 했어요. 여기보니까 (하하) 할 필요 없다 그래.
여기 보십시오. 칠보탑을 세우는데 高廣 아주 높게 하고 그리고 넓게 해서 그리고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작게 해서‘至于梵天이라.’범천에까지 이르게 한다. 저 구름을 뚫고 올라가기까지 그렇게 높이 한다.
요즘 뭐 저기 우리나라 건축기술이 좋아가지고 어디 외국에 가서 집짓는데 한 800미터 높이가 뭐 그렇게까지 짓는데가 있대요. 한 뭐 100층, 200층 보통 그렇게 짓드만... 그런 기술을 가지고 이런 보탑을 요즘 하~ 좋은 철재가지고 그 보탑 하나 지으면 아주 근사할 것 같아요. 하고
懸諸幡蓋와 及衆寶鈴하며 여러 가지 幡과 일산을 다, 그 저기 탑을 또 꾸며야지 멋없이 또 높게만 해놓으면 그렇잖아요. 그리고 여러 가지 보배방울 衆寶鈴 여러 가지 보배방울을 달아. 그런 것을 달고
華香瓔珞과 抹香塗香燒香과 꽃과 香과 영락구슬로써 하고 또 가루향, 바르는 향, 태우는 향. 향이 여러 가지죠. 인도에는 또 향이 발달해가지고 경전에는 이 향이 그래 많습니다. 가루향 抹香 뭐 燒香 塗香 우리나라도 요즘 향이 많이 유행을 하고 있죠. 태우는 향, 바르는 향
衆鼓伎樂과 簫笛箜篌와 種種舞戱하고 以妙音聲으로 또 여러 가지 북과 伎樂과 그리고 퉁소, 피리 뭐 箜篌 그리고 가지가지 舞戱와 춤추는 것 이런 것과 아름다운 음성으로써
歌唄讚頌하며 노래부르고 무슨 저기 범패하고 그 다음 찬송하며 또 하는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법화경』을 잘 공부하면 이렇게 근사하게 탑을 세운 것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할려고 안했... 할 필요가 없다 이 뜻입니다. 내용은 그거에요. 이 탑을 세우라는 뜻이 아니고 이런 탑을 안해도 된다 해놓으니까 요 이야기만 듣고 이런 탑을 세우는 데가 많아. 저기 태국이나 미얀마 이런데 가면은 탑을 어떻게 잘해놨는지 그냥 곳곳에 온 들판에 탑이고,『법화경』하라고 했지 이런 탑하라고 했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된다 이 뜻입니다. 이렇게
則爲於無量千萬億劫에 作是供養已니라 한량없는 劫에 이러한 공양을 지어 마친 것이 되나니라.
已자 제일 끝에 글자가 마칠 이(已)자, 완성했다 하는 그런 已자입니다. 作是供養已 그랬어요. 그래서 이미 已자, 이러한 공양을 지은 것이 된다. 한 번 한 것이 아니고 無量千萬億劫동안 한 것이 된다. 則爲 곧 된다. 爲자가 이럴 때 아주 중요한 글자입니다. 저 위에도 51번 바로 앞에도 보면은 則爲 곧 한 것이 된다. 그 밑에 내용 전체가 한 것이 된다. 여기도 則爲 無量千萬億劫동안 이러한 공양을 이미 해 마친 것이 된다. 마친 것이 된다 이 말이요. 이『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서『법화경』의 도리를 잘아는 사람은 마친 것이 된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이런 좋은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좋은 길을 제대로 불교 제대로 알고 이 대승경전을 이제 교재 삼아서 공부를 하게 되면은 그 좋은 길이 얼마든지 있어요. 조금만 하고도 복 크게 짓는 길이 있고
그 다음에 이제 여기는 이제 다른 것을 이제 겸하는 내용을 쭈욱 이제 이야기를 하는데
기독교인들은 그거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몰라도 그 권하는 보시 뭐 예배당에 오라고 하는 보시, 예수를 믿어라하는 보시 그런 것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합니까? 우리 불자들은 그 점이 좀 부족한데 사실은 어떤 물질적으로 보시를 못해가지고 그걸 늘 마음에 섭섭해하고 또 참 부담을 갖고 어디 불사를 하는데, 내가 다니는 절에 불사를 하는데 내가 뭐 기와, 서까래 하나라도 기둥하나라도 제대로 마음껏 못해가지고 늘 이제 미안해하고 아쉬워하고 이제 그런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좀 더 차원을 달리해서 정말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공부하는 곳에 권하는거. 이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보시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늘 우리『법화경』에서는 뭐 곳곳에 그런 그 이야기가 있어 왔습니다만 특히 요즘에 우리가 공부하는 여기「분별공덕품」이 내용에 있어서는 더 이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이 권해서 한 분이라도, 두 분이라도 이제 자꾸 와서 이런 좋은 대승경전하고 인연을 맺고 또 거기에 이해가 깊어지고 거기에 어떤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거 얼마나 큰~ 공덕이 아니거든요.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내 복을 짓기 위해서 내 공덕을 닦기 위해서라도 많이 권해요. 많이 권하고 많이 알려야 되요. 그래서 한 분, 한 분 이렇게 소개해서 모시고 올 때마다 참 고맙고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늘 그러죠? 뭐 올 때 차표 드리고 일 년동안 회비도 내드리고 교재도 사드리고 그렇게까지 해서 만약에 일 년 공들여가지고 그 사람이 진실한 불자가 되기만 한다면은 세세생생 큰~ 복이 되는데, 일 년간 공들이는 일이 그게 결코 저기 저 비싼게 아니라구요. 그런 점을 우리 불자들이 자기 혼자만 복지을려고 하지말고 혼자만 공덕 닦을려고 하지말고 우리 모두 다같이 공덕닦자. 내가 향가에 그 양지스님 그 향가를 소개하면서 더러 말씀 드렸죠?
여기는 이제 말하자면『법화경』의 핵심이 되는 여래수량(如來壽量)에 대한, 여래의 생명에 대한 이치 그것은 곧 우리 사람사람의 생명에 대한 문제이고 그리고 알고보면은 모든 존재에 대한, 생명에 대한 그 이치와 그 가치 이것을 설명하셨는데 그 설명을 듣고 또 신심을 내고 또 이해하고 또 기뻐하고 한다면은 얼마만한 공덕이 있겠는가? 이 이야기를 여기 이제 쭉 해오는 중입니다.
잠깐 이제 그 앞페이지에 43번으로 다시 되돌아가면은,‘阿逸多야.’미륵보살이죠. 아일다야, 만약에 부처님의 수명이 아주 길고 길다고 하는 사실을 듣고 그 言趣를 이해하면은 그 말의 취지, 그 말의 취지를 이해할 것 같으면은 이 사람이 얻은 바 공덕은‘無有限量이다.’한량이 없다. 그래서 그 이해심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능히 如來의 無上智慧 부처님께서 터득하신 그 최상의 지혜를 내가 일으킬 수가 있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을 살려낸다하는 것입니다. 能起라고 하는 일으킬 기(起)자는, 일으킬 起자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일으킨다 이 말이요. 여래의 무상지혜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데 그것을 일으켜내는 것이다.
그런데 듣기만하고 그렇게 될 수가 있는데 하물며 다시 이 경전을 널리 듣고 만약에 교인문(敎人聞)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한다. 가르칠 교(敎)자죠. 뭐 가르칠 교자 그대로 해석하면은 다른 사람을 가르쳐서 듣게 한다. 딴 사람에게도 듣게 한다. 또‘약자지(若自持)’만약에 스스로 경전을 가져. 그런데 휴대용『법화경』, 오늘 새로오신 분들 휴대용『법화경』한 권씩 다 드리세요. 늘 안읽어도 좋으니까 가지고 다녀라. 스스로 가지고 다니고‘약교인지(若敎人持)’다른 사람을 시켜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가지게 한다 하는‘약자서(若自書)’만약에 스스로 사경을 하는, 쓴다 이 말이요. 스스로 쓰거나‘약교인서(若敎人書)’남을 시켜서 쓰게 한다. 또 몸살나게 그 쓰지말고 (^^)
아주 사경, 사경을 하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힘들다가 나중에는 재미가 나가지고 계속 몰입해가지고 쓰다 보니까 몸살이 나가지고 며칠씩 하하하 못오시다가 오늘 오셨는데 (^^) 하여튼 뭐 어떻게 기쁘기도 하고 참 하 그렇게 이제 사경을 이제 해보니까 이해도 되고 재미도 있고 뜻도 깊어지고 글씨도 자꾸 자꾸 늘고‘이거 얼른 써서 또 도반들에게 스님들 또 보여야지.’하는 그런거도 또 있지. 그러다 그만 몸살이 나가지고 하하 두 달씩 앓고, 아무튼 이 고마운 일입니다. 이게 이제 우리 도반들, 법우님들 모두 다 같이 알라고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는거요.
얼마나 좋은일입니까? 내가 지난 시간에 그랬죠. 청량스님은『화엄경』을 만나서 내 죽을 곳을 얻었다.‘득기사소(得其死所)’참 얼마나 근사한 말을 했습니까? 내 죽을 곳을 얻었다. 그렇다고 죽지는 말고 (하하) 몸살나겐 하지 마세요. 몸 잘관리해가면서 서서히 서서히 천천히 쓰고 싶어도 조금씩 참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쓰고 싶어도 쓸려고 해도 쓰고 싶은 마음이 안나서 못쓰는 사람이 있고, 너무 쓰고 싶어서 쓰고 싶은 마음을 좀 이제 자제를 해가면서 써야 할 사람이 있고 그렇습니다.
에 보니까 그러네요. 스스로 쓰거나‘若敎人書하며’사람을 시켜서 쓰게한다. 하며‘약이화향영락(若以華香瓔珞)으로’또 꽃이나 향과 그리고 영락구슬. 당기, 번기, 증개(繒蓋) 이런 것은 다 깃발이죠. 깃발을 펄럭이게하고 아주 장엄하는데 그만이죠. 또 일산이라든지, 비단 일산 그리고 향유(香油), 소등(蘇燈) 그 옛날에는 등을 켜도 전부 기름을 짜가지고, 식물에서 기름을 짜서 그 기름으로 등불을 켰어요. 향유라든지 소등. 이런 것으로써 경권(經卷)을 공양할 것 같으면은
시인공덕(是人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해서 능히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낸다. 그래서 一切種智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 一切種智 그랬습니다. 종은 종자 종(種)자 아니겠습니까? 일체 것이 다~ 뭐 꿰뚫어 아는, 일체 것을 다 꿰뚫어 아는 뭐 한 가지에만 통달해 아는 것이 아니고, 뭐 경전만 알고 참선은 모르고 참선은 아는데 경전은 모르고 또 뭐 이 출세간일을 잘아는데 세상사는 모르고 그게 아니고 세상사도 잘 알고 뭐 출세간일도 잘 알고 또 경전일도 잘 알고 참선일도 잘 알고 행정도 잘 하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을 갖춘 一切種智 그게 일체종지거든요.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아는 그런 지혜를 낸다.
낸다라고 하는 것은 아까 그 기(起)자도 내가 설명을 드렸습니다만은, 이게 딴데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 내 자신속에 잠자고 있던 것이 살아난다 이 뜻입니다. 能生 여긴 아까 能起 그랬죠. 能起 누워있던 그 무상의 지혜가 일어난다. 일어나사 활동한다는게 起자고, 能生하는 것은 잠자고 있다가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거죠.
우리가 자꾸 이제 부처님의 그 위대한 경전을 자꾸 공부하다보면은 저절로 내 자신속에서, 어디서 주는게 아니에요. 참~ 불교는 이게 아주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또 이치에 딱 맞는 것입니다. 누가 문득 뭐 꿈에 무슨 뭐 신장(神將)이 와서 탁 머리를 쪼개고 그 안에다 뭘 뭐 그 저기 영어사전을 한 권을 집어 넣어주는게 아니고 내 자신속에서 그런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거요. 그러니까 내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거 이게 얼마나 값진 일이고 좋은 일이에요. 내 딴데 기다리고 있다가 뭐 그래가지고 그 저기 이치에도 안맞을뿐더러 그게 되는 날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개발해내는거죠.
그래 能生一切種智 참 좋은말입니다. 이것만 요 글자 여섯 자 요것만 하루종일 쓰고 있어도 좋아요. 그러면은 자기 속에서 이것이 하나의 저기 저 주력이 되고 주문이 돼가지고, 이 주문을 계속 쓴다. 能生一切種智 能生一切種智하면은 자신속에서 잠자고 있던 지혜가 꿈틀대고 일어나는거에요. 그겁니다. 그런 그 우리가 염불을 한다든지 화두를 든다든지 경을 공부한다든지 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 자신속에 이미 있는 것을 일깨워내는 것, 일깨워내는 것 그 얘기에요.
阿逸多여,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壽命長遠하고, 내가 말하는 壽命長遠 수명이 길고 길다라고 하는 것을 듣고‘심심신해(深心信解)’깊은 마음으로, 그냥 뭐 수박겉핥기식으로가 아니고 깊은 마음으로 저 마음 깊이 믿고 이해할 것 같으면‘즉위견(則爲見)’곧 보는 것이 된다. 爲見하는 것은 곧 보는 것이 된다. 무엇을 보는게 되느냐? 부처님이 항상 기사굴산에 계셔.『법화경』을 설하던 기사굴산, 영축산이죠. 영축산가보신 분 계시죠? 기사굴산에 항상 계셔서.
혼자 있느냐? 아니지.‘공대보살(共大菩薩)과’대보살들과 함께 그리고 여러 성문 대중들과 함께‘위요설법(圍繞說法)’에워 쌓여서. 큰 보살들 그리고 성문 대중들 이런 이들이 쭈욱 에워쌓여가지고서 설법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 말이요.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게 몇 천년 전에 있었던 일이든 상관없는거요. 설사『법화경』을 설하던 그 순간 그 자리에 영축산에 부처님 코앞에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법화경』의 이러한 이치를 모르면은 그거는 부처님을 못보는거요. 눈으로 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없는거요. 부처님의 그 마음을 읽어야지. 부처님의 뜻을 이해해야 되는거죠.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고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하면은 어디에 있든지간에 어느 시대에 살던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든지간에 항상 부처님을 보는 것이 되고 부처님의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보는 것이 된다. 爲見 부처님의 이러이러한 영산회상 영축산에서『법화경』을 설할 때 그 불교에서는 가장 그저 좋은 광경을 영산회상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제일 좋은 광경을
왜 그러냐? 이『법화경』을 설할 때이거든요. 그럼 부처님도 연세가 70이 넘었어. 이제 80을 바라보는 연세야. 제자들도 무수히 많이 늘어났어. 그래 신도들도 무수히 많은 신도들이 있었어. 왕의 비호도 받고 무슨 뭐 주치의도 있고 그래서 그 불교가 부처님 일생중에서 가장 성할 때, 가장 왕성할 때 물론 그 뒤에 더 왕성했습니다만은 부처님 일생중에서 가장 왕성했을 때가『법화경』을 설하던 영산회상이다. 영축산에서『법화경』을 설하던 그 때를 일컬어서 영산회상 그래요.
그 불교에서는 그 절에서 무슨 깃발을 달고 막 풍악을 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여법(如法)하게 무엇을 행사를 진행을 하면은“아이고 영산회상이 벌어졌구나.”이런 표현을 해요. 영산회상이 벌어졌구나. 그 제일 좋은 찬사거든요. 그 사찰에서 제일 아주 근사한 행사, 제일 불교가 빛을 발하는 그런 행사를 한다. 그런 의미가 영산회상이다 하는 말 속에 있습니다. 이제 영산회상이 바로 어디 그때만 있느냐? 그게 아니라 이거여.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떤 처지에 살든지간에『법화경』의 이러한 이치만을 제대로 이해하고 산다면은 우리 앉은 이 자리가 그대로 영산회상이다. 그랬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46 又見此娑婆世界 其地瑠璃 坦然平正 閻浮檀金 以界八道 寶樹行列 우견차사바세계 기지류리 탄연평정 염부단금 이계팔도 보수항렬 諸臺樓觀 皆悉寶成 其菩薩衆 咸處其中 제대누관 개실보성 기보살중 함처기중
又見此娑婆世界하대 其地瑠璃라 또 이 사바세계를 보대. 그 땅이 유리라.
이게 이제 땅은 흙으로 돼야 좋죠. 그런데 유리라고 하는 말은 이 칠보(七寶)중에 하나잖아요. 아주 값지고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내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설사 내 앞으로 등기된 땅이 아니더라도 내가 보는 이 산천초목 이 산하대지가 그대로 칠보에 들어가는 그런 값지고 소중한 땅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 사바세계가
그 땅이 유리라.
坦然平正하며 坦然平正하다고 하는 말 아주 평탄하다는 말입니다. 平자하고 坦자를 합하면 平坦이 되죠. 아무런 그런 구렁이나 무슨 언덕빼기나 그런게 없고 아주 평탄하게 끝없이 펼쳐져있고
閻浮檀金으로 以界八道하며 금이 이제 염부단금이라고 하는 인도에서는 아마 아주 좋은 금인데, 그런 아주 훌륭한 금으로써 실을 꼬아가지고 八道를 경계를 만들었다. 以界八道라.
줄이 이제 예를 들어서 사거리하면 상당히 번화가죠. 팔거리야. 이거는, 로타리가 있고 여덟 곳으로 길이 나있다 이 뜻입니다. 이게 八道라는 말은, 그 얼마나 번화하겠어요? 저기 아주 복잡한 서면가면은 그렇죠. 서면에 서면로타리에 가면은 정말 복잡하잖아요. 그 정도로 말하자면은 번화한 그 도시거리를 염부단금이라하는 그 금으로써 줄을 쳐가지고 경계를 만들었어. 그래서 사람들 많이 다니고 번화하니까 그렇게 이제 경계를 만들어야되잖아요. 그 경계를 만드는데 금으로 경계를 만들었다.
寶樹行列하고 여기 行列해놨는데‘항’이라고 읽어요. 줄할 때는 항, 걸어다닌다 할 때는 행 그렇습니다. 여긴 계신 분들 전부 유식하니까 이런것들도, 이렇게‘행렬’이렇게 읽거든“아이고 항렬이라고 읽지 행렬이라고 읽는거 아니라고”그렇게 가르쳐줘요. 하하하
보배로 된 나무가 줄을 쭈욱 이제 그 열을 지어가지고 줄을 서있다. 이 뜻입니다.
諸臺樓觀이 皆悉寶成이며 諸臺 저기 자성대같은 그런 뭐 높은데 대(臺)라고 그러잖아요. 거기다 의례히 거기는 뭐가 있다? 누각이 있죠. 그 누각을 樓觀 그래요. 왜냐? 누각에서는 바라보는게 기능입니다. 누각의 기능은 바라보는게, 관망하는 것이 기능이기 때문에 樓觀 그래 합해서 볼 관(觀)자까지 다 있어요.
곳곳에 대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산이 워낙 많은 나라라서 이 실감이 크게 안나는데, 저기 중국이나 인도같은데 평지만 있는 곳에는 조그만한 예를 들어서 100미터 높이 정도 되는, 해발 100미터 높이 정도 되는 그런 그 높은 뒷동산같은거 우리나라로 조그만한 뒷동산같은 그런 언덕만 있어도 이게 상당한 그런 그 대가 되요. 상당한게 됩니다. 그럼 거기다가 누각을 짓고 평야를 관망하고 하는 그런 그 풍습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경전에 보면 이 대를 아주 많이 해요.
여러 臺 누각이 다 보배로 이루어졌더라. 그런 것들도 전부 보배로 이루어졌다.
其菩薩衆이 咸處其中하니 거기에 보살 대중들이 모두 그곳에 살고 있더라. 그러니까 저 높은 언덕이 있고 그 위에 대가 있고 그 위에 누각이 지어져있고 누각은 보배로 만들어져있고 근데 거기에 보살 대중들이 거기에 있으면서『법화경』을 공부하더라.
47 若有能如是觀者 當知是爲深信解相 약유능여시관자 당지시위심신해상
若有能如是觀者면 當知是爲深信解相이니라 만약에 능히 이와 같이 보는 사람, 이와 같이 관찰한다 이 말이요.
이러한 그 어떤 그『법화경』의 정신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어떤 장소에 처해있더라도 내가 아무리 뭐 좁은 그 아주 뭐 뭐 옥탑방에 있든지, 반지하 방에 있든지 뭐 전세방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다손치더라도 우리 정신세계가 이와 같이 되면은 말하자면은 이러한 것을 정신적으로 누린다 하는 것이죠.
만약에 어떤 이가 이와 같이 보는 사람이 있다면은 단지 마땅히 알아라. 이건 이제 이 사람은 깊이 믿고 이해하는 모습이다. 이해하는 본보기다 그런 뜻입니다. 정말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자기 환경에 아무런 그런 그 불편, 불만이 없고 무슨 뭐 공항을 어디다 짓든지간에 그까짓거 (하하하) 전혀 짓든지 말든지 그런데 관심없고 그저『법화경』이거 좋다하고 계속 쓰는거야. 뭐 쓰기 불편하면 저기하면은‘아이고 나 복잡해서 파이다.’싶으면은‘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만 써도 좋고‘능생일체종지(能生一切種智)’라고 하는 것만 계속 써도 좋고
내가 그전에 뭐라고 했죠? 종지용출(從地涌出) 땅으로부터 확 솟아 오른다. 난 그 말만 해도 몸에서 힘이 솟아요. 사경 그래 쉽게 생각하세요. 그 뭐 이거 다 이렇게 남들 그 해놓은 것처럼 근사하게 그렇게 할려고 하지말고 그저 한 구절 가지고 100번도 쓰고 200번도 쓰고 그러다 보면 이제 재미없으면 또 다른 구절가지고“또 한 구절 정해주십시오.”그럼 내가 얼마든지 정해줄꺼니까. 또 그것 가지고 이제 100번, 200번 그저 쓰고, 그럼 금방 느는게 또 이 일이라.
이게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하다보면은 세상사 그 얼마나 험악하고 그렇습니까? 그런거 아무 상관없이 그만 정말 영산회상을 스스로 누리고 사는게 되는거죠. 그게 이제 깊이 믿고 이해하는 본보기다. 그래야지. 세상에 그 복잡한 상황에 우리가 자꾸 따라가도 보면 끝도 없어요. 그 뭐 신문이나 라디오나 뭐 TV뉴스에 언제나 좋은 소식만 전해질까? 언제나 좋은 소식만 전해질까? 항상 안좋은 소식 그게 뉴스거든요. 우리나라 뉴스라. 안좋은 소식만 끊임없이 갖다가 언제나 좋은 소식 전해질까? 갈수록 안좋은 소식이 불어날뿐이지 좋은 소식은 없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그 자꾸 끌려다니고 관심쓰고 그래봐야 내 시간만 빼앗기고 내 정신만 상그러워지고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우리는 법화행자(法華行者)『법화경』공부하는 사람을 법화행자 그래요.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아주 그 참 그야말로 가슴에다 별을 하나 졸병으로 있다가 가슴에 별을 하나 착 붙이는거하고 같아요. 법화행자라. 오늘 이 순간부터 무조건 법화행자에요. 그 쫄병이 별단거하고 똑같다니까. 법화행자는 모름지기 그렇게 살아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6)여래 열반후의 공덕 .수희의 공덕
48 又復如來滅後 若聞是經 而不毁訾 起隨喜心 當知已爲深信解相 우부여래멸후 약문시경 이불훼자 기수희심 당지이위심신해상
.독송수지의 공덕
何況讀誦受持之者 斯人 則爲頂戴如來 하황독송수지지자 사인 즉위정대여래
又復如來滅後에 若聞是經하고 내가 아주 별을 또 세 개를 쳐놓은거 보니까 이게 또 무슨 뜻인고? 또 다시 여래가 열반하신 후에, 멸한후에 만약에 이 경전 설명한 것을 듣고
而不毁訾하야 起隨喜心하면 헐 훼(毁)자, 헐뜯는다 할 때 훼 자. 또 비방할 자(訾)자. 그렇습니다. 헐고 험담하고 비방하지 아니해서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은‘아 그 들어보니까 그 참 괜찮은거다.’이러한 마음이 난다 이거여. 거 기다 좀 더 더해주면 기쁨이 생기는거야. 또 신심이 생기는거야. 자꾸 공부더하고 싶고 공부더하고 싶은 그런 그 환희심이 일어날 것 같으면
當知已爲深信解相이니라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마땅히 알아라. 이미 깊이 믿고 이해하는 모습을 갖췄다. 깊이 믿고 이해하는 본보기가 됐는데
何況讀誦受持之者리요 하물며 어찌 하물며 讀 읽고 외우고 가지고 다니고 受持하는 사람이겠는가?
그렇죠. 설명하는 소리듣고 비방하지 않고‘아 그거 참 부처님의 가르침,『법화경』가르침이 아주 이 신기한 가르침이구나.’하는 이런 마음을 만약에 낼 것 같으면은
斯人은 則爲頂戴如來니라 이 사람은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데 만약에‘아 이게 좋다하고 한 번 더 읽어보자. 외우자. 가지고 다니자.’이렇게 하는 사람이겠는가?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을 如來를 이마에 이고 다니는 것이 된다.‘爲頂戴如來라.’頂戴 머리에 인다 하는 뜻입니다. 여래를 이고 다닌다 이 말이야. 부처님을 이고 다닌다. 최고의 그 공양이죠. 제일 존귀하니까. 그 저기 저 어린 아이들 그 대개 이제 사랑스럽고 좋으면은 목에다 이렇게 무등태우죠. 그 그러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합니까? 제일 아주 재밌어하죠.
여기 이제 여래를 이마에 인다하는 말은 제~일 존경, 존경의 극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 우리가 아주 불상을 모시고 불상을 그냥 천 불상, 만 불상, 삼천 불상 뭐다 그냥 모셔놓고 먼지가 꽉 앉아가지고 불상창고처럼 해가지고 그냥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절짓기 위해서 그렇게 불상만 잔뜩 창고처럼 해가지고 무슨 불상장사하는 창고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보십시오. 爲頂戴如來라. 부처님의 그 가슴 속에 있는 진정한 부처님의 마음,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하고 그걸 읽고 외우고 쓰고 그 사람이 곧 부처님을 가장 존경하는 일이고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래서 별을 세 개를 쳐놨구만 내가
49 阿逸多 是善男子善女人 不須爲我 復起塔寺 及作僧坊 아일다 시선남자선여인 불수위아 부기탑사 급작승방 以四事供養衆僧 이사사공양중승
阿逸多야 是善男子善女人은 阿逸多야, 미륵이여. 이 善男子善女人은 여기 모인 대중입니다. 선남자선여인은
不須爲我하야 부처님이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모름지기 나를 위해서, 부처님 자신 나를 위해서 不자를 기억하세요. 앞에 있는 아니 불(不)자 不須 안해도 된다 이 말이여. 뭘?
復起塔寺와 及作僧坊하야 以四事供養衆僧이니 다시 탑이나 절을 일으키는 것과 또 僧坊을 짓는 것 요사채 짓는거요. 승방을 지어가지고서 四事로써, 네 가지 일로써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하지 아니해도 되나니라.
그랬어요. 四事는 음식, 의복, 침구, 와구(臥具)라고도 하는데 그 다음에 탕약 이게 아주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입니다. 음식, 의복, 와구, 탕약 이 네 가지 일이에요. 이게 이제 신도들이 말하자면 사찰에나 스님들에게 또 부처님에게 그 이바지해줘야 할 네 가지 기본적인 것인데, 이거 안해도 된다 이 말이요. 그리고 스님들에게 공양 안해도 된다. 탑지을 필요없다. 절지을 필요없다. 승방도 지을 필요없다. 오로지 이『법화경』제대로 이해해라.『법화경』제대로 이해.
그러니까 사찰이 포교당이 됐든지 절이 됐든지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무슨 어떤 그 절이 됐든지간에 모~든 절의 존재이유는 모든 사찰이 존재하는 존재이유는 결국 뭐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특히『법화경』,『법화경』과 같은 이 대승경전, 최고의 경전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곧 말하자면은 절을 이 세상에 건립하게 된,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건립하게 된 이유다 하는 것이고 사찰을 만약에 건립했다면 당~연히 이와 같은 대승경전, 부처님의 진심이 녹아있는 이러한 경전을 반드시 공부하고 이것을 내 삶으로 내 인격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는 그런 그 가르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