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1월 3일(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길 떠나는 우리들 성탄 축일에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대축일은 이 세상에 오신 그 생명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 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말은, 하느님에 대해 알려 줄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외면하였고, 먼 이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그분을 영접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활동하였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뒤 그분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박사라는 사람들이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 하는 사람인지, 몇 명이며 어디서 왔는지, 베들레헴에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등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할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복음서는 정확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박사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나서 배역을 마치고 사라지는 배우와 같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물이 셋이라서, 기원 후 500년경에 발생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자, 즉시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들레헴에서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 주어졌지만, 길을 묻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말씀을 만난다고 말하려는 마태오 복음서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모두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길을 갑니다. 돈과 권력을 좇아, 어떤 때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고 행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외면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 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 곧 그분의 생명과 연대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진흙, 곧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시게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여정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밤 하늘에 흔하디흔한 별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고, 회의에 빠져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이 준비한 정성을 바치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고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좇아 떠나겠다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지위가 꾸며 주는 온상에는 하느님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나은 지위를 얻어, 우월감을 가지고 살겠다는 마음에는 말씀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온상을 떠나서 만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길을 가는 우리가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약한 이웃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한 사람들이 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보살핌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우리의 보살핌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기심과 헛된 망상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하고 고통스런 약자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율사들 같이, 오늘의 종교 혹은 정치 지도자들이 하는 엉뚱한 주문이나,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맺힌 외침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그 삶의 숨결로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의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필 때,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말씀과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기원, 아버지이십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월 3일(주님 공현 대축일) 루카 마태 2,1-12 시작된 발걸음.... 오늘 복음의 흐름을 이끌고 가는 동방박사의 등장은 미지의 세계에서 구체적인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동쪽 어딘가에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움직인다. 움직여 나아가 다다르는 곳, 그곳에 한 아기가 있다. 그 아기는 장차 온 민족을 다스릴 분이시다. 동방박사가 페르시아의 현자이든, 사제이든, 또 아니면 점성가이든간에 그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에 그들의 존재가치는 소용된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께 경배하기 위한 그들의 발걸음이 그들을 변호하고 있다.
다른 한편, 오늘 복음은 또 다른 흐름을 이야기한다. 동방박사의 흐름과는 대조적인 흐름이다. 헤로데가 이 흐름의 중심에 있는데,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길을 떠난 반면, 헤로데는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게끔 한다.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들이 헤로데에게 나아갔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움직이던 지도자들이었다. 유대의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왕 헤로데가 유대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서로 어울려 문제 삼는 것은 동박박사들이 찾고 있는 그 아기가 아니다. 메시아의 문제를 끄집어 내고 있으되, 메시아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메시아의 탄생 장소를 애써 문제 삼는다. 다스리고 있는 이가 다스릴 분이 태어난 곳을 찾는 것, 헤로데의 말대로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헤로데가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다스림의 자리는 오직 자신이 머무는 데라야 마땅하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헤로데는 움직이지 않았다. 헤로데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왕국을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 내고 싶었다. 헤로데의 권력욕은 미카 예언자가 언급한 메시아의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을 메시아의 기쁨이 아닌 살육의 슬픔으로 덧칠해 버릴 것이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 앞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내어 놓는다. 이 예물들은 유대의 진정한 왕이 바로 아기 예수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옛날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이사 49,23; 60,3), 세상의 왕들이 이 아기의 탄생을 경배하듯 동방박사들은 예물을 내어 놓는다. 저 멀리 동쪽에서 이곳 작은 집, 소박한 아기 앞으로 세상 모든 왕권이 머리를 숙인다. 세상의 권력이 지향하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권력이 거들떠 보지 않는 베들레헴의 어느 촌락이었다. 화려한 궁궐에 살며 정치권력에 취해 버린 헤로데, 메시아를 기다리며 공식적인 종교 체제 안에서 제 자리를 탐하던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들.... 그들은 여전히 베들레헴을 거들떠 보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기 예수는, 그 아기가 설사 메시아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숨겨져 있고, 숨겨져야만 하는 걸림돌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경악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스스로 저주했다. 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까지 세상을 방치할 수 있는지 종교 역시 경악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바닥의 경험’ 속에 진정한 하느님은 또 다시 인식되고, 그것으로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을 섬기게 되곤 한다. 예컨대, 종교는 ‘케노시스’, 곧 비워 냄(필리 2,7)의 신학을 재인식한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느님의 초월성은 비워 내고 비워 내고, 또 비워 내는 곳에서 유의미하다는 것인데, 하느님은 사람들의 그 비참한 현실 안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죽어 가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함께, 늘 머물러 계셨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다. 동방박사들이 움직여 나아간 곳은 보잘 것 없는 집과 힘없는 아기가 있는 곳이었다.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그 곳에 세상의 모든 왕권이 놓일 수 있었던 건, 하느님이 거기에 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은 기존 세상의 질서(권력체계, 계급체계 등)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헐리우드 식 영화’에나 나오는 영웅주의를 바탕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세상이 알아 주지 않더라도,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더라도, 또한 세상에 온전히 억눌려 패배주의에 몸서리쳐지더라도, 하느님이 오셨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그 하느님 때문에 세상이 어떻든 나는,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면 된다. 그 발걸음이 동방박사 세 명의 것으로 시작되었으되,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 신앙의 후손들이 열 배, 백 배, 천 배의 발걸음으로 채워 나가면 될 일이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16.1.3)
천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현의 삶
주님 공현 대축일, 이사60,1-6 에페3,2.3ㄴ.5-6 마태2,1-12 내 삶의 여정旅程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 매해 주님 공현 대축일 때마다 늘 들어도 신명나는 가사와 곡의 화답송 후렴입니다. 오늘 하루 이 화답송 후렴을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면서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복음의 주인공 동방박사들의 순례여정을 묵상하던 중 강론 제목은 구체적으로 ‘내 삶의 여정’으로 택했고, 정현종 시인의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싯귀를 부제로 택했습니다.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한 고귀한 인생이자 살아있는 성경책입니다. 마지막 렉시오 디비나 할 대상이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얼마전 감명깊게 읽은 ‘신의 위대한 질문’이란 책 마지막 구절을 인용합니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기초다. 인간은 신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을 지닌 동료 인간들을 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신에 대한 사랑의 완성이다.” 요즘 산에 대한 관심이 각별합니다. 그러고 보니 산은 모두가 ‘하느님의 산’, 신산神山같습니다. 산을 소재로 한 책이나 영화도 자주 눈에 띕니다. 세상에 똑같은 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높이, 크기, 모양이 다 다르듯 사람도 그와 흡사합니다. 하나하나가 하늘 향한 산같은 존재의 사람입니다. 각자의 산을 올라 하늘에 닿는 등정(登頂, 登程) 중에 있는 각자 삶의 여정입니다. 과연 ‘나’라는 산의 높이는 어느 정도며 어는 지점의 높이에까지 올랐는가 자주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 독서 중인 ‘촐라체’ 소설의 저자 후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이런 본원적 낙관주의야말로 존재의 빛이 아닐 수 없다. 히말라야의 ‘촐라체’봉은 그런 의미에서 불멸에의 꿈이고, 살아있는 사람이며, 온갖 카르마를 쓸어내는 ‘커다란 빗자루’이다. 예컨대 내겐 평생 ‘문학’이 거대한 빙벽을 실존적으로 올라야 되는 ‘촐라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유한한 인생에서 가슴속에 ‘촐라체’ 하나 품고 살면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그게 지복至福이 아니겠는가.” 촐라체가 상징하는 바 우리에겐 ‘평생 탐구 대상’이자 ‘평생 올라야 할 산’인 하느님입니다. 이런 하느님 꿈 하나 품고, 하느님 산에 오르는 이들이 진정 지복의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촐라체 꿈, 하느님 꿈이 없다면 무슨 재미, 무슨 맛, 무슨 기쁨으로 광야인생 살아낼른지요. 아, 우리의 등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평생 하느님 찾는 등정 중의 우리들입니다. 등정 중 써나가는 날마다의 내 삶의 성경책 1쪽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인생사계人生四季입니다. 순례여정을 설명할 때 자주 예로 드는 말마디입니다. 긴 것 같으나 실로 순식간의 일생입니다. 내 인생을 하루로 압축할 때 하루 중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 묻습니다. 오전 인생인 듯하나 곧 오후 인생에 죽음의 귀가歸家 시간입니다. 수도원에 오래 정주하다보니 매해 계절이 지나는 것을 봅니다. 계절뿐 아니라 봄같았던 사람들 역시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됨을 봅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그 나름의 품위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과연 인생사계에 맞는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의 삶인지요.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를 격려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삶의 여정에 지친 예루살렘, 우리 영혼을 환히 비추시는 주님의 빛입니다. 탄생하시는 구원자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과거 모든 세대에 감추어졌던 신비가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계시되었고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의 빛이자 인류의 빛으로 계시된 그리스도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궁극의 평생 탐구대상이자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 영광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구도자의 모범, 순례자의 모범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계시되는 주님의 별입니다. 간절한 하느님 꿈이, 목표가 있었기에 주님의 별의 인도를 받은 동방박사들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객관적 실재의 주님의 별이 아닙니다. 똑같은 주님의 별은 하나도 없습니다. 간절히 찾을 때 은총의 선물처럼 나타나는 주님의 별이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찾지 않으면 곧 사라지는 주님의 별입니다. 아, 주님의 별이 상징하는 바 우리의 영원한 꿈이요 희망이요 비전입니다. 이 주님의 별 따라 항구할 때 성공적 순례여정입니다.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은 주님의 별을 따른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했기에 헤로데 임금의 거대한 장애물을 무사 통과하여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순례여정의 목적지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주님을 뵙고 예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께 예물을 드리는 우리들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늘 끝이자 시작입니다. 복음의 동방박사들 역시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갑니다. 이들 역시 다시 새롭게 시작된 주님을 향한 등정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예물로 봉헌한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등정에 항구할 수 있는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의 은총을 풍성히 내려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주님 공현 대축일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복음: 마태오 2,1-12
세상에 드러난 참 사랑
누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빅토르 위고 소설 ‘노트르담 드 빠리’의 뮤지컬 버전의 줄거리입니다.
1482년 온 세상이 뒤숭숭한 때 온 유럽의 거지 떼들도 빠리로 몰려듭니다. 그리고 이 거지 떼들은 빠리 성곽 밖에서 굶고 추워 죽겠으니 자비의 성모가 있는 성당(노트르담 성당)으로 들여보내달라고 농성(?)을 합니다.
그러나 노틀담 성당의 부주교는 그 청을 거절합니다. 게다가 성당 앞에서 거지떼가 활개를 치고 있으니 빠리의 경비대를 불러 이들을 바로 쫓아내버리라고 합니다. 노트르담 성당의 부주교 프롤로는 빠리 교구 노트르담 성당의 2인자이자 대단히 금욕적이고 엄격한 신부입니다.
거지들의 왕 클로팽에게는 에스메랄다라는 어여쁜 양녀가 있습니다. 방년 16세이고 집시들과 여행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사랑을 하고 싶은 착하고 예쁜 처녀입니다. 그런데 거지들을 쫓아내다가 젊고 잘 생긴 근위대장 풰비스는 한 눈에 에스메랄다의 미모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녀를 유혹합니다.
실상 풰비스는 외적으로는 완벽한 남자이지만, 이미 부잣집 여자와 약혼한 상태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바람도 피우고 사창가에 가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에스메랄다를 보고는 또 결혼에 대한 갈등도 하는 평범한 남자입니다. 에스메랄다는 이 남자에게 빠져 약속장소로 가기로 합니다.
어느 날 빠리에 축제의 날이 왔습니다. 일명 광인절이라고 하는 날인데 이 날은 가장 바보 같고 못생긴 사람을 뽑아서 바보들의 교황으로 올리는 전통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수많은 이상한 분장을 한 이들이 무대에 올랐고 콰지모도는 저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서라면 나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앞으로 나서게 되고 결국 콰지모도가 만장일치로 바보들의 교황에 뽑히게 됩니다.
콰지모도 역시 에스메랄다의 아름다움에 빠져 “내가 비록 오늘 하루만이지만, 비록 바보들 사이에서지만, 오늘은 교황인데 나를 봐 줄 수는 없나요, 에스메랄다?” 하면서 노래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괴물처럼 생겼습니다.
콰지모도는 꼽추, 애꾸,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에다 거인이었습니다. 길거리에 버려진 괴물 아이였는데 노트르담의 부주교였던 프롤로가 주워 길러서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릅니다.
큰 이후로는 양부이자 주인인 프롤로가 주선하여 노트르담의 종을 울리는 종지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주교 프롤로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불쌍한 이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재워주고 밥도 주지만 사랑은 준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개와 주인과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교 프롤로는 콰지모도에게 에스메랄다를 납치해 오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자신이 에스메랄다에게 빠졌다는 것을, 마녀가 군중들을 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마녀를 가둬 버려야 한다는 거짓말로 숨기면서요.
그러나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다 그만 근위대에게 잡히고 맙니다. 그리고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청하는데 도와주는 이가 없습니다.
오직 에스메랄다만이 자신을 납치하려고 했던 꼽추에게 물 한 모금을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며 에스메랄다에게 돌을 던지려합니다.
그 때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가장 안전한 곳인 노틀담 대성당으로 데리고 가서 피신시켜줍니다. 에스메랄다도 콰지모도를 믿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태양인 근위대장 풰비스를 찾아갑니다. 풰비스는 에스메랄다를 기다리다가 에스메랄다의 칼에 찔려 쓰러집니다.
에스메랄다의 칼이기는 하였지만 그를 어둠 속에서 찌른 것은 질투를 느낀 부주교입니다. 그러나 살인 혐의는 에스메랄다가 뒤집어씁니다.
갇혀있는 에스메랄다에게 부주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부가 되어주면 생명을 구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 주교가 꾸민 것을 알고 에스메랄다는 죽음을 택합니다. 그리고 부주교에 의해 풰뷔스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풰뷔스의 약혼녀가 에스메랄다를 위해 증언하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여 풰뷔스도 에스메랄다를 마녀라고 증언하며 그녀를 버립니다.
뒤늦게 에스메랄다와 그의 동료들이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안 콰지모도는 집시들을 탈옥시키고 에스메랄다를 구해냅니다.
그리고 그녀를 성당에 피신시킵니다.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구한 것이 기뻤으나 자신의 외모 때문에 그녀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을 슬퍼합니다.
이를 목격한 주교는 자신의 개와도 같은 꼽추를 믿으면서 자신은 싫어하는 에스메랄다에게 배신감을 느껴 그녀를 고발하여 다시 교수대에 서게 만듭니다.
이에 분개한 콰지모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인에게 반항하여 주교를 죽이고 이미 교수형 당해 죽은 에스메랄다를 안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도 그녀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납니다. 콰지모도가 죽어가며 부르는 마지막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엔 특별히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젊고 멋진 풰뷔스, 마흔이 넘어 처음 사랑에 빠진 주교, 그리고 꼽추 콰지모도입니다.
아마도 에스메랄다는 누구에게 마음을 주어야 하는지 몰라, 진정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찾기를 원하는 우리 자신들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진정 나를 사랑해주는 한 분 그분을 찾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를 대변하는 페뷔스가 있습니다. 국가는 자신이 진정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 국가발전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국가는 나의 희생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명의 위협에 빠졌을 때 나를 위해 희생해 줄 준비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상징하는 프롤로 주교가 나옵니다. 어쩌면 종교도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여 나를 받아들여주고 나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할 것처럼 생각이 들지만, 나를 이용하려는 모습도 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종교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죽이고 죽습니까? 종교 또한 나에게 무언가 희생할 것을 요구하지만 정작 내가 쓰러질 때는 나를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에스메랄다에게 사랑을 보여주었던 인물은 역시 꼽추였던 콰지모도입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녀가 자신을 유일한 사랑으로 사랑해주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작가는 이 볼품없는 콰지모도만이 우리 인생에서 유일하게 믿어도 괜찮은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보여준 그리스도이심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희생’의 모습이 아니면 느껴질 수 없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도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분의 공현을 체험해야만 우리 존재가치를 알고 그것에 맞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공현이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이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살아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 아들을 희생하여 우리 죄를 씻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종교를 믿지 못하겠다면 그 어떤 종교에서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 즉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그 사랑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이 드러났으니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연탄길 3권에 소개된 ‘등대’란 사연입니다.
수연이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의 반쪽이 마비된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했다. 중풍 후유증으로 언어 장애까지 생겼다. 말수가 없던 아버지는 병으로 누운 뒤 더 말이 없어졌다. 깊게 그늘진 눈으로 온종일 천장만 바라보았다.
어느 겨울, 수연이 오빠 성준은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아주 잘했구나. 성준아, 고맙다."
수연이 엄마는 기뻐했다. 그러나 엄마는 이내 쓸쓸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 병원비를 빚지고 있는 형편에 대학 등록금까지 마련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 자취나 하숙까지 해야 했다.
"성준아, 어미로서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등록금이 마련되지 않으면 어쩌지?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봉제공장에서 버는 돈으로 우리 식구 밥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하잖니. 아버지 병원비도 그렇고 말이야."
엄마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엄마는 허망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누운 아버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남들은 대학에 못 들어가서 난린데 우리 집은 왜 이래. 말도 안 돼. 이번에 등록금 못 내면 나는 집을 나가서 혼자 살 거야. 그런 줄 알라고."
성준은 목청을 돋우며 꼿꼿하게 말했다. 성준은 돌아누운 아버지를 흘깃 째려보고는 낯을 찡그리며 방을 나가 버렸다. 엄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서 정신 차리고 일어나야지요. 아이들에게 해 줄 일은 산더미 같은데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떡해요. 나 혼자 동동거려 봐야 밥 먹고 살기도 힘들잖아요."
엄마는 깡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꺽꺽 울었다. 수연이도 옆에 앉아 훌쩍거렸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엄마는 머쓱해진 얼굴로 아버지를 위로했다.
"여보, 괜한 억지를 부려서 미안해요. 당신이 왜 이렇게 된 줄 전들 왜 모르겠어요. 아까는 하도 속이 상해서 그랬어요. 마음 푸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집을 나간 성준은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성준 때문에 수연이네 집은 더 큰 슬픔 속으로 빠져들었다. 성준이 집을 나간 지 5일째 되던 날, 오후부터 질금질금 가랑비가 뿌렸다. 성준은 우산도 없이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왔다. 안방 문틈 사이로 아버지의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어 장애가 있는 아버지는 말을 더듬더듬 거리며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여……여……여보세요. 제……제가요. 시……신장을 팔 수 없나 해서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아버지의 힘겨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제 아들놈, 대……대학 등록금 때문에 그……그……그러는 거니까 꼭……꼭 좀 부……부탁드립니다. 꼭……꼭……이요."
마루에 걸터앉은 성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래전 학교 선생님이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사랑은 등대 같은 거야. 낮에는 태연한 척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어두운 밤만 되면 깜박깜박 제 몸을 밝히는 등대……. 아버지들은 침묵으로 사랑을 말하거든……."
가슴속에 꼭꼭 감춰 두었던 울음이 꽉 다문 입술을 비집고 자꾸만 자꾸만 터져 나왔다.
밤에 육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등대가 보이면 그 곳엔 육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이 진정 존재한다면 등대처럼 그 사랑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오늘 목격했습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온 세 명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그 빛을 따라 나아갑시다. 결국 인생이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그 분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빛이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이 사랑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의미이고 종착지인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 어쩌나] 325. 그냥 믿어야 하나요?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4> 24.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③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연대에 뿌리를 둔 윤리적 결정으로 ‘세계 공권력’의 확립이 시급히 필요하다 “21세기는…민족국가들의 약세 현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경제 및 금융 영역들이 초국가적 성격을 갖고 정치 영역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조직된 국제기구들을 설치하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175항).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그림으로 보는 복음묵상] 가치 있는 일 주인님이 그랬어요.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 2,2)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울대교구 직장사목부 담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