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范樟, 범세동 ? ~1395)은 고려 말기末期의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였다. 호는 복애伏崖이고, 복애거사로도 불리었다. 범장은 1369년(공민왕 18)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 간의대부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도학과 충절을 지킨 신라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한 책),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범세동은 원천석(元天錫,원동중)과 함께 편찬한『화해사전華海師全』(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책) 등이 있다.
고려의 충신이면서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던 운곡 원천석(원동중) 선생이 쓴 역사서 <삼성기(三聖紀) 下>가 있다. 원천석 선생의 스승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지은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1455~1528)이다.
<북부여기>는 복애거사 범세동(범장) 선생이 지은 역사서다. 범세동(范世東)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가 고향인 나주(羅州)로 돌아왔으며, 조선 태종(太宗) 이방원이 여러번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금성 범씨 대동보에 범세동의 <북부여기>가 실려있다는 것이다.
금성 범씨 대동보에 실린 <북부여기>
복애거사 범세동은 조정에 출사하기 34년 전 젊은 시절(1335)에 <단군세기>를 지은 행촌 이암 선생과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지은 이 명(李 茗)과 함께 경기도 천보산 암자에서 은거하던 소전거사(素典居士)로부터 옛 고서를 전해받았다.
그때 세 사람은 고려는 나라의 국호만 살아 있을 뿐 주권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을 통탄하며 반드시 한민족사를 되찾을 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이 '3인의 결의 사건' 덕분에 한국사 회복의 길에 서광이 비치게 된 것이다.
이후 범장이 쓴 책이 바로『북부여기』와『가섭원부여기』다.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여 고조선 → 북부여(열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사국 시대)→ 대진(발해) · 신라(남북국 시대)→ 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맥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발로에서 부여사를 저술하였다. 이암, 이명, 범장, 이 세 분이 우리 역사의 참 모습을 드러낸 공덕은 천추만대에 길이 남을 것이다.
『북부여기』는 고조선이 망한 후 열국시대로 옮겨가면서 복잡하게 전개된 우리 역사의 국통맥을 전해주고 있다. 기존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과 부여를 전혀 관계 없는 별도의 연원을 가진 국가로 생각하였으며 삼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이런 면에서 휴애거사 범장이 쓴 『북부여기』는 모호함 속에 감추어져 있던 북부여와 고구려, 동부여, 삼한의 연원을 드러내어 우리 동방역사의 뿌리를 밝혀주는 대단히 귀중한 역사서다.
한민족 9천년 역사에서 가장 복잡한 국통 내용이 바로 부여사의 맥이다.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의 성립 이전인 열국분열시대, 즉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시대의 약 200년 기간이 우리 한국역사에서 공백의 상태로 남아있다. 가장 알기 어렵고 복잡한 전환기적 시간대가 바로 이 시기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가야 사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고리인 북부여, 열국분열 시대의 역사가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왜곡 말살되고,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고리를『북부여기』에서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동방 한민족의 상고 시원역사 시대와 사국시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이 '부여사의 기원과 맥'을 밝혀주는 범장의『북부여기』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한민족 국통의 체계'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부식 (金富軾.1075-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철저하게 당唐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삼국사기의 서술 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우리 당태종)”이라고 칭하였다. 위징 등이 쓴『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조선은 개국 초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자치통감 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사서들은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하였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은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오늘날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이 책을 얼씨구나 하고 악용하여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고대사와 관련하여 ‘정사正史’로 인정되고 있는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부다. 두 책 모두 삼국 시대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서 고대사 역사서라고 볼 수도 없지만『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과 고조선을 이은 북부여와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 때 왕명으로 편찬된 역사서라고 하나 저자 김부식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이 곳곳에 배어 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명왕편’을 보면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을 해모수가 유화와 사통(私通), 불륜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의 4대손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새긴 북부여 해모수와 고주몽과 광개토태왕의 관계는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은 서력 414년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려 거대한 비석에 고구려 혈통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대목은 "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내용과 '출자북부여(出自北夫餘), 북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고구려의 원시조는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이다.
광개토대왕은 고주몽으로부터 보면 13세손인데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고구려의 태조로부터 17세손이라고 나온다. 광개토대왕이 태조로부터 17세손이라는 진실 속에 고구려 역사 900년의 비밀이 담겨 있다.
고구려 역사의 비밀은 조선 중종때 왕실의 사서를 관장하는 직책인 '찬수관'을 지낸 일십당(一十堂) 이 맥(李 陌)이 지은『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본기(高句麗 本紀)>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와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아시황천지자我是皇天之子”,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다’ 이런 말이 나오고, “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를 내려와서 널리 영토를 열어 호태왕(好太王)이 되셨다’는 것이다.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이 비석을 세웠는데, ‘우리 아버지 광개토대왕은 원 창업시조로부터 17세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고주몽으로부터는 13세손이다. 하지만 『태백일사』를 보면 북부여의 창업자 고주몽의 고조부 해모수가 있고, 그 아들 고진이 있고, 고진의 손자 불리지가 있고, 거기서 주몽이 나왔으니 광개토대왕은 창업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17세손이 되는 것이다. 『태백일사』의 기록을 통해서 고구려 건국 9백 년 역사가 증명되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과 전후 글을 요약하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북부여 해모수로부터 17세손을 내려와서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올랐다'라는 내용이다.
<삼성기 上>에서는 "사해모수(祠解慕漱) 하사 위태조(爲太祖) 하시고.... 해모수를 태조로 삼고 제사를 올렸다."라는 기록은 고구려의 원뿌리는 북부여의 창업자 해모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태왕들의 원시조가 해모수임을 밝혀주고 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모수 단군은 BCE 239(임술년) 북부여를 건국했다. 해모수 단군의 현손인 고주몽이 BCE 58년 북부여(졸본부여) 7대 단군으로 즉위하여 다물(多勿) 연호를 사용했고,
BCE 37년 나라 이름을 고구려, 연호를 평락(平樂)으로 바꾸었다. 장수왕은 광개토태왕비문에 아버지 광개토태왕은 19대 왕이지만,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시조로부터 17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다. 광개토태왕비문과 일치하는 역사서는 <환단고기>가 유일하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19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양종현 선생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19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초간본 환단고기가 분실된 내막은 무엇인가?
기존에는 한국전쟁 때 금산에서 화재로 소실되었다, 성남 거주 시에 큰 홍수로 분실되었다는 설들이 있었는데, 양종현의 증언에 따르면 그 전말은 이렇다. 1976년 의정부에서 살 때, 생활이 궁핍했던 한암당 일가는 집세가 5개월이나 체불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박창암 장군의 배려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군산에 사는 종친인 이공빈이 운영하는 병원(공안과)에 5일간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이를 야반도주로 여긴 집주인이 소장되어 있던 이유립의 책들을 모두 팔아버렸고, 그 와중에 초간본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오형기의 필사본이 남아 있어서 환단고기 전수 맥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이로 인해 한암당은 초간본을 내놓으라는 공격성 주장에 마음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환단고기 전수과정과 인물들에 대해 정리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몰랐구나 하는 자탄과 함께, 우리 민족이 얼마나 자존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가 우리 역사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내 삶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바로 우리 조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대충 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일은 나에 대한 정체성을 깨닫는 한편 자부심, 자존감을 새롭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은 정확한 뿌리 인식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 첫 작업은 역사를 공부하는 일인데,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이는 뿌리를 알지 못하거나 단절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뿌리와 단절된 삶은 생명력을 잃어버려 언젠가는 고사枯死하게 된다. 역사를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누구냐에 대한 고민 자체는 물론이고 그에 대한 답도 찾지 못한 채 천박한 현실만 살게 되는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북부여의 역사를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태백일사』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가 고주몽 성제의 친아들이라는 놀라운 내용이 있다. 고구려 고주몽성제 시절, 첫째 부인 예씨부인에게서 낳은 동부여에 있던 첫째 아들 유리가 고구려 2세 유리왕이다.
고주몽의 둘째 부인인 소서노召西弩에게서 낳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의 미래가 불리해지자 어머니 소서노는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따로 왕국을 세웠다(BCE 42). 그곳이 패대浿帶 지역, 옛 대방帶方 땅, 난하 유역이다. 그때 고주몽이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왕의 호칭을 내려 주었다.
이후 소서노가 죽자 큰아들 비류沸流가 계승하게 되고, 온조溫祚는 인천 미추홀, 지금의 문학산 쪽으로 내려왔다(BCE 19)지만 그 땅이 습해서 다시 하남 위례성으로 와서 백제를 세우면서 500년 한성백제 시대를 열게 된다.
이렇게 한성백제 시대가 계속되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475년에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熊津으로 내려와 웅진백제 시대를 이어 나가게 되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본래 고주몽의 아들이다. 그런데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은『삼국사기』에서 온조와 고주몽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왜곡해 놓았다. 또 대상大商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우태와 결혼해서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왜곡해 놓았다.
고구려의 고주몽과 고주몽의 아들 백제의 시조인 온조를 단절시킨 것이다. 하지만『태백일사』에서는 백제 역사의 원형을 체계적으로 잡아 주고 있다. 학계에서는 백제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 지역까지 강역을 넓혔다는 ‘대륙 백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륙 백제’를 뒷받침하는 기록이『태백일사』에 있다.
遼西地(요서지)에 有百濟所領曰遼西晉平(유백제소령왈요서진평)이오 江南(강남)에 有越州(유월주)하니
其屬縣(기속현)은 一曰山陰(일왈산음)이오 二曰山越(이왈산월)이오 三曰左越(삼왈좌월)이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 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中
[삼국사기]<백제본기> 고이왕 13년(246년) 조에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백제) 왕은 (낙랑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곳 주민을 빼앗았다”고 하였고, 분서왕 7년(304년) 조에도 “몰래 군사를 보내어 낙랑(군)의 서부 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는 이미 고이왕 이전부터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그 서부 현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서宋書』 원가元嘉 27년(451년) 조에, ‘서하西河(산서성 하동도 임분현) 태수에 백제가 풍야부馮野夫를 멋대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 사람들이 감정을 가지고 기록을 한 것이다. 자기나라 땅이었는데 백제에서 제후를 멋대로 임명했다고 한 것인데, 백제가 그 땅을 점령하여 옛 땅을 복원을 했으니까 그런 기록을 했다. 요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역에 분봉지分封地가 있었고, 부용국附庸國을 거느렸다. ‘반파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마련, 강시문, 하침라’ 같은 부용국, 제후국인데 지금 우리가 알 수도 없는 이름이다.
24세 동성왕(479~501)과 25세 무령왕(501~523) 때에는 이 담로와 같은, 거점據點 성城이 발달했는데, 이런 것이 중국 역사 기록에 있다. 「양직공도」에는, 이 담로는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다고 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큰 성은 고마固麻라 한다고 했다. ‘읍邑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는 말은『양서梁書』 「백제전」에도 나온다. 그러니까 동성왕과 무령왕 때,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까지 왕후를 임명할 지방행정 군현 조직이 대륙 백제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호칭이 바로 담로이다.
백제의 22담로가 있었는데 여기 광양태수, 오서군, 진평군, 청하태수, 서하태수, 성양태수, 광릉태수가 있던 곳에 담로가 있었다. 저 아래 광서성에도 담로가 있었다. 그런데 담로는 오키나와 유구국에도 있고, 대만과 필리핀에도 있고, 인도네시아까지 그 여러 나라에 있었다. 그런데 홍콩에서 수백 킬로를 가보면 거기 광서성에 백제역, 백제 마을, 백제 행정구역이 지금 그대로 다 있다는 것이다. KBS에서 얼마 전에 이것을 취재해서 보여준 적이 있다.
일본에는 담로도, 인도네시아 같은 데는 담수항, 저 위에 담수장, 저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데도 담로문화가 있었다. 이 백제는 동아시아에서 국제무역을 한 해양 대제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광서성 옆 광동성 같은 데에서는 ‘아빠담로’라는 말을 쓴다. 우리말하고 똑 같다.
대륙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사서들
중국의 『남제서』 「백제전」을 보면 ‘매라왕, 벽중왕, 불중후, 면중후’ 같은 왕과 제후, 즉 백제의 천자가 임명한 왕후王侯의 이름이 나와 있다.『구당서舊唐書』나『신당서新唐書』에 ‘백제왕은 동서 두 성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최치원’에 보면, 당나라에서 상관上官에게 올린 그 글에 ‘고구려, 백제는 강성할 때 백만 대군을 가지고 남쪽으로는 저 오월을 침략하고, 북쪽으로는 유주幽州, 연燕나라, 제齊나라, 노魯나라를 소란케 해서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고 했다. 최고운도 사대주의 정신이 있았다.
백제의 전체적인 역사과정에서 보면, 백제가 245년에서 580년대까지 한 340년 정도 ‘대륙 백제 시대’가 있었고, 이 시기에 중국 동쪽에 있었던 배달국, 단군조선 때의 영토를 복원했다.
대륙 백제는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백제의 영토 확장에 따라 식민지 접경 지역 국가들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당시 백제가 얼마나 막강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북제서北齊書> 후주기後主記에는 571년 "백제의 왕 여창餘昌(27세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황제의 신임을 표시하는 부절을 가졌다는 뜻), 도독都督(군사책임자), 동청주 자사東靑州刺史(행정책임자)로 삼았다.<以百濟王餘昌爲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라고 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가 백제 소유였음을 드러냈다.
단명한 왕조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220~589)에 한족漢族 정권은 중국 남부에서 남조를 형성하였으나 그 세력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 보려는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백제와 화친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관장하는 백제의 관리와 장수들에게 중국 관직을 제수한 것이다. 백제 또한 그러한 관직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중국 관직은 현지 한족과 토착인을 지배할 수 있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남제서南齊書],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백제와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백제 동성왕東城王 때인 488년과 490년에, 후위後魏의 기병 수십만 명이 백제가 통치하는 대륙의 영토를 침략했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갔고(十年, 魏遣兵來伐爲我所敗,([삼국사기]<백제본기>), 수훈을 세운 백제 장군들이 광양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 조선태수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南齊書]<百濟傳>)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는 한반도 남부, 호남을 차지했던 백제다. 하지만 백제는 단군조선 당시 중국 동부 지역의 위로부터 아래까지(번조선 땅)를 거의 다 지배했다.
실제 한반도보다 훨씬 큰 ‘대륙 백제’가 중국의 오른쪽,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온조의 아버지인 고주몽의 역사 통치 정신이 다물주의多勿主義이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영역을 다시 복원한다는 강건한 역사 정신이 백제 왕들에게 그대로 지속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근원은, 뿌리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다’라는 역사 정신으로 26세 성왕 때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꾼 것이다.
백제의 전체적인 역사 과정에서 보면 245년~ 580년대까지 약 350년 동안 산동성의 제나라, 노나라, 강남에 있는 월주(산음, 산월, 좌월)를 모두 회복한 ‘대륙 백제 시대’가 있었고, 이 시기에 중국 동쪽에 있었던 배달국, 단군조선 때의 영토를 복원했다. 백제를 떠올리면 가장 친숙한 단어가 ‘22담로’다. 그런데 백제를 통치하는 제도인 ‘22담로’가 대륙과 일본을 포함해서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했던 대륙 백제를 넘어선 해양 대제국을 건설했다
백제의 ‘담로檐魯’가 무엇인지 알 때 대륙 백제, 옛 대백제의 역사 정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6세기 중국 양梁나라 때 제작된 사신도使臣圖인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읍을 담로檐魯라 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으며 22담로가 있었다’. 백제가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의 부용국附庸國, 즉 제후국을 거느렸었다. 백제 24대 동성왕과 25대 무령왕 때에는 이 담로와 같은 거점 성城이 발달했는데 이 내용이 중국 역사 기록에 있다.
즉 동성왕과 무령왕 때,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 ‘중국 땅에 왕, 제후, 귀족을 임명한 국가 통치 지방행정 군현 조직이 22개 있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호칭이 바로 담로다. 그래서 일본에는 담로도, 인도네시아에는 담수항,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도 담로문화가 있었다. 백제는 국제무역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한 해양대제국이었던 것이다.
해양대제국이었던 백제의 실제 영토를 담로제를 통해서 살펴보면 중국의 동부와 중부 일부 지역, 남부 지역,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관하는 대국이었다. 삼신문화, 삼한문화 통치 방식으로 보면, 중국에는 한반도보다 몇 배나 더 큰 대륙 백제에 우현왕을 두어 통치하고, 일본에는 야마토 정권 당시 나라 지역에 좌현왕을 보내 통치했다.
이 담로제의 기원은 6세 달문 단군 때 구월산 상춘에서 당대의 대국, 소국, 읍락의 모든 제후들이 모여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기록이 있다. 그때 폐백을 바친 자는 대국이 2곳, 소국이 20곳, 읍락이 3,624곳이었다. 크고 작은 나라 22개국이 와서 문화 종주국인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같이 올렸다.
단군조선에서 백제 22담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백제국은 역사 광복, 문화 복원 다물주의의 강력한 의지를 단군조선에서 가져온 것이다. ‘백제, 신라는 매년 두 번씩 단군조에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의 역사서에도 있다.(『승정원일기』 74책, 영조 47년 10월 7일 기사 참조).
고주몽 성제의 가르침(유훈遺訓)
大辯經(대변경)에 曰(왈) 高朱蒙聖帝(고주몽성제)가 詔曰(조왈)
『대변경大辯經』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성제께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셨다.
天神(천신)이 造萬人一像(조만인일상)하사 均賦三眞(균부삼진)하시니
於是(어시)에 人其代天而能立於世也(인기대천이능립어세야)라
況我國之先(황아국지선)이 出自北夫餘(출자북부여)하사
爲天帝之子乎(위천제지자호)아.
하늘의 신(삼신)이 만인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三眞: 性,命,精)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하늘을 대행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天帝,상제님)의 아들이 아니더냐!
哲人(철인)은 虛靜戒律(허정계율)하야 永絶邪氣(영절사기)하나니
其心安泰(기심안태)하면 自與衆人(자여중인)으로 事事得宜(사사득의)라.
슬기로운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며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끊나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 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用兵(용병) 은 所以緩侵伐(소이완침벌) 이며 行刑(행형) 은
所以期無罪惡(소이기무죄악)이니라.
故(고)로 虛極靜生(허극정생)하고 靜極知滿(정극지만)하고
知極德隆也(지극덕륭야)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마음을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故(고)로 虛以聽敎(허이청교)하고 靜以絜矩(정이혈구)하고
知以理物(지이이물)하고 德(덕이제인)以濟人하나니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此乃神市之開物敎化(차내신시지개물교화)하야
爲天神通性(위천신통성)하며 爲衆生立法(위중생입법)하며
爲先王完功(위선왕완공)하며 爲天下萬世(위천하만세)하야
成智生雙修之化也(성지생쌍수지화야)니라.
이것이 곧 신시 배달 시대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天神)을 위해 본성(本性)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先王)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 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 교화를 이루느니라.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中
고주몽 성제의 유훈을 읽다 보면 그 내용이 모든 종교 성자들의 가르침 못지않고,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 근원적이기 때문에 놀랍기도 하다. 유훈을 보면, 아주 심원한 깨달음의 도통 경계에서 전하는 우리 역사 문화의 근본 주제가 들어 있다. 인간의 창조론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천신天神이 조만인일상造萬人一像하사 균부삼진均賦三眞하시니’ 즉 ‘하늘이 만인에게 한 가지 상像으로 창조하고 성,명,정(性命精) 삼진(三眞)을 고르게 부여하셨다’고 했다.
3가지 참된 것, 즉 조물주의 신성과 광명, 그리고 지혜를 모든 인간에게 고르게 다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들 내면에는 우주의 조물주의 삼신이 100%, 순도 100%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인간은 이렇게 위대하며 이토록 숭고한 존재다. 인간은 영원의 생명, 불멸의 생명을 담고 있는 지존의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고유 경전인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있다. 먼저 환국 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한민족의 우주론과 신관과 인간론의 정수를 기록한「천부경天符經」이 있다. 이「천부경」은 인류 동서 철학, 종교사상의 원형이며, 오늘날 0과 1을 근본으로 하는 컴퓨터 문화의 근원이다. 그리고 배달 시대에 동방 민족을 교화하기 위해 시조 커발한(거발환居發桓) 환웅께서 내려 주신 수행법, 수행의 원형문화 원전인「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으며, 단군조선 시대에는「참전경參佺經」과 「염표문念標文」,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있다.
일명 366사三百六十六事라고도 불리는, 「참전경」은 고구려 을파소乙巴素 때 360조로 정비되었다. ‘참전’은 참여할 참參 자에 신선 이름 전佺 자인데, 이 전 자는 사람 인人 변에 온전 전全 자를 했다. 그러니 ‘참전’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그 길에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곧「참전경」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계율을 기록한 경으로 우리 한민족의 윤리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그렇군요.
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