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확실히 학문보다
항문을 더 열심히 닦고 살았어
그래서 세상이 더 깨끗해진 것도 아니야
실제로 길 하나 따로 내지 못했어
달맞이꽃 하나 새로 피우지 못했어
나도 이제 학문을 닦고 싶어
조용히 등불 하나 밝혀 들고
저 어두운 숲길을 따라가다가
거기 조용한 그린벨트 안에
푸른 초막을 세우고 싶어
흐린 날이면 장수하늘소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걸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싶어
그러면 세상의 구린내가 많이 줄어들겠지
그러나 나는 오늘도 잘 모르겠어
항문하고 학문 중에 무엇을
더 깊이 닦아야 하는지
학문을 닦으며/ 문정희
학문과 항문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은 문정희 시인뿐만 아니라 치질 전문 수술의 많은 외과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른다. 호모는 인간이고 사피엔스 spiense는 wise, judicious이다. 즉 현명한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 현명한가? 대부분의 인간은 현명하지 못하므로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고 해야 되나? 사실 다른 동물에 비해서 지능지수가 더 높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노터데임 대학 라틴어 사전은 호모사피엔스를 ‘철학자 philosopher’로 덧붙여 놓았다.
지금 한국의 인문학이 처해있는 현실은 사실 도착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대학이나 전문 학계의 인문학은 돈은 되지 않고 힘들기만 하다는 인식으로 시들어가고 있는 반면 대중 사회의 인문학은 일종의 열풍이 부는 듯 유행하고 있다.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아닌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고 과시하려는 도구로 전락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인문학적인 철학을 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철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들이며 대부분 얼치기 전문가들이라 할 수도 있다. 인생 철학, 연애 철학, 운전 철학, 여가 철학, 경영 철학, 정치 철학, 현실 철학 까지 여러 부분에서 다 철학이란 이름을 접미사로 붙인다. 그러나 삶과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사색할 때 인문학이 필요해지고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깊은 사유가 없는 인문학은 자신들과 일반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말을 나누며 함께 고민하는 문제와 만날 때 인문학은 진정한 울림의 메아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함께 고민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할 때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함께 사유할 수 있는 텍스트가 없다면 요원하거나 무망한 일일 것이다.
진정한 인문학적 탐색은 삶의 현실이라는 텍스트와 그리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문헌 텍스트와 만나는 2중의 노력으로 가능할 것이다.
철학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한마디로 문, 사, 철이다. 즉 문학, 역사, 철학의 학문이다. 개인이거나 사회이거나 국가가 부닥치는 문제를 아무런 사유 없이 즉흥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사회와 국가의 흥망과 발전을 경험한다.
세익스피어와 괴테의 문학을 통하여 감성의 풍요함을 얻을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칸트와 니체를 통하여 서양의 철학을, 공자와 맹자 그리고 석가를 통하여 동양의 지혜를 얻음으로써 우리의 현실에 접목 유추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일반인들이 인문학의 공부를 통하여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는 것은 너무나 바람직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서양의 사상은 그리스에서 태동되었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는 유럽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脚註라고까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남의 사유룰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공자孔子를 필두로 한 유학儒學이 있고 정약용이나 최한기 등의 근세 철학자들도 있다. 우리의 것과 남의 것을 혼융하여 오늘의 현실에 대한 해법과 내일의 방향을 찾는 것이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근본 취지일 것이다.
각설, 우리가 인문학 공부를 할수록 내면의 즐거움과 풍요함은 상상이상으로 확대된다.
우선 처음에 인용한 문정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 여러가지 생각과 감흥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 사유하는 동물이 인간 Homo Sapiense이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