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성석제 맛있는 문장들
이문구 선생을 처음 뵌 것은 80년대 초 무렵이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이 마포경찰서 건너편 건물 옥탑방에 있었다. 그즈음 '자실'은 문학의 밤 행사 비슷한 것을 그곳에서 했었다.
이문구 선생은 출연한 강사중 한 분이었다.
강의 전 소주를 한 잔 하셨는지 얼굴이 불콰했다. 넓대한 얼굴에 눈썹이 짙었다.
듬성듬성 난 머리칼은 빈약한 잡초밭 같았다.
소심해서 많은 사람앞에서 말하려면 소주 한 잔은 꼭 마셔야 한다고 했다.
입을 여시는데 장강유수였다.
지난한 선생의 삶에서 나오는 문학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웃기는 말을 할 때는 개그맨 뺨을 서너대 때리고도 남았다. 좌중에 폭소가 자주 터졌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을 꼽는다.
서라벌예대 문창과 시절, 김동리 선생은 늘 이문구의 작품을 대표로 소개하였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선생의 문체는 독특했다.
'우리동네' 시리즈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보시라. (꼭 소리내시길~!)
70년대 초, 권위주의 정권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면소재지 부면장이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퇴비증산'을 독려하는 장면이다.
"그런디 교육에 들어가기 전에 지가 특별히 부탁을 드리겄습니다. 제발 퇴비 좀 부지런히 해 달라 이겝니다. 워떤 동네를 가볼래두 장터만 벗어났다 허면, 질바닥으 풀에 걸려 댕길 수가 읎는 실정이더라 이 얘깁니다. 아마 여러분들두 느끼셨을 중 알구 있습니다마는, 풀에 갬겨서 자즌거가 안 나가구 오도바이가 뒤루 가는 헹편이더라 이겝니다. 풀 벼서 남 줘유? 퇴비허면 누구 농사가 잘되느냐 이 얘깁니다. 식전 저녁으루 두 짐쓱만 벼유.
그런디 저기, 저 구석은 뭣 땜이 일어났다 앉었다 허메 방정을 떠는겨?
왜 왔다리 갔다리 허구 떠드는 겨?
꼭 젊은 사람들이 말을 안 탄단 말여.
야~~저런 싸가지 읎는 늠의 색긔...야늠아, 말이 말 같잖여? 너만 덥네?
저늠의 색긔...즤애비는 저기 즘잖게 앉어 있는디 자식은 저 지랄을 혀. 이중에는 동기간이나 당내간은 물론이구 한 집에서 둣씩 싯씩 부자지간이 교육을 받으러 나오신 분두 적잖은 줄로 알구 있습니다마는, 웬제구 볼 것 같으면 아버지나 윗으른은 즘잖게 시키느 대루 들으시는디, 그 자제들은 당최 말을 안 타구 속을 쎅이더라 이겝니다.
교육중에 자리 이사 댕기구, 간첩모냥 쑥떡거리구... 야늠아, 너 시방 워디서 담배 피는겨? 너는 또 워디 가네? 저늠의 색긔들...그래두 안 꺼? 건방진늠 같으니라구. 너 깨금말 양시환씨 아들이지? 올봄에 고등핵교 졸읍헌 늠 아녀? 너지? 건방머리 시여터진 늠 같으니라고."
('우리 동네' 민음사 1981)
저 말을 영어로 번역을 할 수 있을까?
토속적인 우리말의 감칠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나는 외국어로 절대 번역 불가한 문장이 김훈, 이문구 선생의 소설이라 생각한다.
이문구 선생은 1965년 단편 <다갈라 불망비>로 김동리 선생 추천으로 등단한다.
그 등단 소식을 잡지 광고에서 선생이 발견하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신문에 잡지 광고가 나 있었다. 남들이야 안 그러겠지만, 또 지금은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만사에 무심해져서 그러지 않지만, 추천 받기 전까지는 툭하면 삼류 작가의 작품을 입버릇처럼 헐뜯곤 했었다.
물론 그날도 광고에 난 소설들의 제목을 보면서
"이번엔 어떤 놈이 뭘 썼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 다음 이것은 아무도 곧이들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소설란 끝에 '다갈라 불망비'란 것이 눈에 띄자 무심코, 어떤 개새끼가 별 더러운 제목을 다 붙여 가지고.." 중얼거리며 필자를 보니 '추推' 자 밑에 내 이름이 있었다.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이문구' 27. 28쪽 돌베개 2004 )
선생은 문장 만큼이나 글을 써는 자세 또한 독특 했는데, 엎드려 배를 바닥에 깔고 글을 썼다.
이문구 선생은 2013년 2월 25일 하늘나라로 돌아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