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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수학의 역사. >
수학은 어렵지만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요한 학문임은 누구나 다 아실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조상님들은 지금 못지않은 어려운 수학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뿐 아니라 고대의 사찰의 건축물. 탑. 산성. 읍성. 가야고분출토의 신기한 칠두령. 그리고 세금징수. 인구조사. 군적관리.토지조사 등등 이 모든 것에 수학이 적용되었다고합니다.
심지어 2천년전에 방정식을 풀었고 원주율 파이 3.14를 알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조상님들의 수학실력은 대단하셨습니다.
그것도 실제 생활에 적용된 살아있는 학문이었습니다.
가까운 조선시대를 살펴볼까요.
문과와 무과는 양반이, 잡과는 주로 중인이 지원했습니다. 문과와 무과에서는 산학(지금의 수학) 시험을 보진 않았지만 잡과를 응시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산학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수학의 정석'처럼 입시를 위해 주로 보는 교재도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에서 출제되는 대다수의 문제는 중국에서 건너온 산학서를 기본으로 했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봤던 교재는 구장산술,상명산법, 양휘산법, 산학계몽, 입니다. 다루고 있는 내용과 난이도 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배우던 책은 상명산법입니다.
상명산법은 중국 명나라 수학자 안지제가 1373년 제작한 산학서로 곱셈이나 나눗셈 등 가장 기본적인 수학 개념이 서술돼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는것은 구장산술이 유일합니다.
세금을 관리해야 했던 조선시대 호조 산원들이 배워야 했던 필수 과목이었습니다.
산학은 고려·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으로서
고려시대에는 인종 때 국립종합대학교격인
국자감(國子監)에 설치한 경사육학(京師六學)의 하나로 8품관 이상의 자손 및 서인(庶人)을 입학시켜 산술을 교육시켰습니다.
여기에는 산학박사(算學博士:종9품)가 딸려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산학을 성균관에 설치하지 않고, 실무청인 호조(戶曹)에 설치하여 교육시켰는데, 양인자제(良人子弟)와 3품 이상의 첩 자손이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산학교수(종6품)와 산학훈도(정9품) 각 1명씩이 딸려 정원 15명의 학생을 가르쳤는데, 이들은 대체로 상명산법(詳明算法)·산학계몽(算學啓蒙)· 양휘산(楊輝算) 등을 배웠으며, 소정의 학업을 마치면 산학의 과거(科擧)가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산학취재(算學取材)를 통해 산학 기술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전의
연령호칭에서 이팔청춘은 8 × 2 라서 16세를 말합니다.
또한 과(瓜)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八`이 되는데 여자는 8+8해서16세를 과년이라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8×8로 64세를 말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때를 뜻하는 말입니다.
팔팔 64세를 - 파과(破瓜)라고 합니다
옛날에 구구셈이 있었냐구요?
백제 때 구구단표가 발굴되었지요.
'구장산술'이라는 고대의 수학책이 전해집니다.
진시황시대부터 있었다는군요. 2천년전에도 곱셈방정식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우리나라 구구셈은 지난 2012년 백제 사비성(현, 부여)에서 발견된 목간(木簡: 나무문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목간은 6-7C 경에 수학 공식을 써넣은 고대문서이자 최고의 수학사 관련 유물입니다.
글자를 판독한 결과
‘九六五十四’(9×6=54), ‘四四十六’(4×4=16),
‘四三十二’(4×3=12) 등의 구구셈 공식이 확인됐습니다.
당시의 구구셈은 오늘과 정반대로 9단에서 아래로 2단까지 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구법(九九法)은 1부터 9까지의 두 수를 곱한(9×9) 셈표를 가리키며 산수의 기본입니다.
처음에 九九八十一(9×9=81)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2계단부터 시작하는데 옛날에는 왜 어려운 九九八十一 (9×9=81)부터 거꾸로 시작했을까요.
이런 계산은 특수계급(귀족, 왕실)들은 알 수 있어야 하지만, 일반인은 몰라도 된다는 계급사회의 전유물이라고 봅니다.
요즘같이 어린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세금징수, 부역, 측량, 토목 등 계산에 필요하다는 것에서 비롯했다고 봅니다.
< 구장산술 >
<구장산술> 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중국의 고대 수학서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저자와 저작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나라 시대 어느 부인의 무덤에서 죽간에 쓰인 구장산술의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보아 엄청난 역사를 가진 책이라고 추측할 수 있어요.
후대 동양 산학서적의 모델이 된 이 책은 682년 신문왕 때 세워진 국학의 명산과 즉 수학과의 교과서였지요. 여기 출신 산관들의 실력은 대단했지요.
세금 매기고, 성 쌓고, 농지개량 등등에 수학이 적용되었습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아홉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1) 방전(方田) : 여러 형태의 토지의 넓이를 구하는 법(38문제)
2) 속미(粟米) : 속미(조)를 기준으로 곡물과 그에 관계된 것들의 교환에 관한 문제(46문제)
3) 쇠분(衰分) : 비례배분의 문제(20문제)
4) 소광(小廣) : 여러 형태의 토지의 넓이로부터 변이나 지름의 길이를 구하는 방법(24문제)
5) 상공(商工) : 토목공사에 관계된 입체의 부피를 구하는 법이나 인부의 수를 계산하는 방법(28문제)
6) 균수(均輸) : 조세를 거두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28문제)
7) 영부족(盈不足) : 과부족에 관한 문제(20문제)
8) 방정(方程) : 일차 연립 방정식을 푸는 문제(18문제)
9) 구고(句股) : 직각삼각형에 관한 문제(24문제)
총 246문제에 달하는 실용문제는 고대 사회 경제사의 사료로서도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답니다.
구장산술의 ‘방정’에서는, 요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연립 일차 방정식’으로 해결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이런 문제의 해법인 ‘방정술’에서는 산대를 이용해서 각 방정식의 계수와 상수항을 한 열 (산학에서는 이를 행이라 불러요)에 나타내지요.
산대가 나타내는 수를 인도 · 아라비아 숫자로 나타내 보면, 이렇게 됩니다(한문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작성됨).
실제로, ‘방정’은 ‘수들을 네모 모양으로 늘어놓고 계산하는 것’이란 뜻이에요.
이렇게 수들을 배열한 다음에 한 열에 있는 모든 수에 같은 수를 곱하거나, 한 열에서 다른 열을 대응하는 수끼리 빼는 과정을 반복해서 답을 얻지요. 물론, 이 경우에 답은 x=98, y=85, z=67이랍니다.
현대 수학의 용어를 사용하면, 이는 연립 일차 방정식에 대응하는 ‘확대 계수 행렬’을 만든 다음에 ‘기본 열 연산’을 통해 답을 구하는 과정과 같아요.이런 계산 과정에서 음수의 출현은 피하기 어렵지요. 구장산술에서 양수와 음수의 덧셈과 뺄셈 법칙인 ‘정부술’이 등장하는 것 역시 제8권 방정이랍니다.
실제로 구장산술에서는 방정을, “이것으로 양수와 음수가 뒤섞인 것을 다룬다(以御錯糅正負).”라고 말하고 있어요.
입체 도형의 부피를 다루는 것은 제5권 상공이에요.
이곳에서는 단면이 사다리꼴인 사각기둥 모양의 성, 담, 제방, 도랑, 해자, 개천 등의 부피 및 정사각기둥, 원기둥, 정사각뿔대, 원뿔대, 정사각뿔, 원뿔 모양의 돈대 또는 정자의 부피를 구해요.
이런 입체 도형의 일부를 잘라낸 도형과 이런 입체 도형들로 분해할 수 있는 좀 더 복잡한 도형도 다루지요.
이런 입체 도형의 부피는 현재와 같은 공식을 이용해서 정확한 값을 구하고 있어요.
물론, 원기둥과 원뿔의 경우에는 고법, 즉 π=3인 원주율을 이용하고 있답니다.
구장산술 제9권 구고의 20번에 해당하는 문제는 이차 방정식으로 다음과 같아요.
“정사각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인]마을이 있는데,
그 크기는 알지 못한다. 각 변의 가운데에 문이 나 있고, 북문을 나와서 20보 되는 곳에 나무가 있다. 남문에서 14보 나와서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1775걸음 걸어가면 나무가 보인다.
마을의 한 변은 얼마인가?”
해법은 다음과 같아요.
“북문에서 나온 보수에 서쪽으로 걸은 보수를 곱하고, 이를 2배로 하여 실이라 하자.
[북문에서 나온 보수에] 남문에서 나온 보수를 더하여 종법이라 하여 평방을 풀면 곧 마을의 한 변을 얻는다.”
여기서 ‘실’은 상수항, ‘종법’은 일차항, ‘평방’은 이차 방정식을 뜻해요. 그래서 이 해법은 다음의 이차 방정식의 근이 마을 한 변의 길이라는 말이지요.
2×20×1775=(20+14)x+x2, 즉 x2+34x-71000=0
마을 한 변의 길이를 x로 놓고,두 닮은 삼각형의 변의 길이 사이의 비례 관계를 이용하면 이 이차 방정식을 유도할 수 있답니다.
조선시대 대표적 수학자
조선말 학자 이상혁 이 쓴 '산술관견 算術管見' 과 남병철이 쓴 '해경세초해 海鏡細艸解'입니다.
남병철
<해경세초해>海鏡細艸解 는 조선시대 남병철선생이 쓴 수학 번역해설서입니다.
원나라의 이 야 라는 학자가 쓴 측원해경測圓海鏡을 해설한 책입니다.
天元術천원술 로서 이차방정식을 푸는 법이고
위 사진은 圓城圖式 원성도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병길
남병길선생은 조선 시대 철종 때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입니다.그의 형인 남병철과 함께 조선 후기 수학자 형제로 유명합니다.
선생은 1820년에 태어나 철종 때 이조, 예조 판서까지 지낸 대정치가이자 학자였습니다.
1869년 4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남병길이 지은 책은 무려 30권이나 됩니다.그는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천문학책도 많이 썼습니다.대표적인 수학책으로는 <구장술해> <구고술도요해> <산학정의> <집고연단> 등이 있습니다.
특히 그가 기술한 구장술해는 직각삼각형의 조선적인 풀이 ,원주율의 정의를 포함하여 우라나라 수학의 역사를 조사하는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역할을 한 인물이자 구고법, 방정식의 해법, 연립방정식의 해법, 면적의 계산법 등에 관한 동양수학의 접근을 연구하였습니다.
그 책을 보면 구고법(삼각법), 방정식의 해법, 연립방정식의 해법, 면적의 계산법 등에 조선적인 생각을 볼 수 있으며 당시의 수학을 천시여기는 상황에서 수학과 천문학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이순지
조선 시대 실학파 학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취적인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북경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면서 유럽 과학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지구 자전설을 논하기도 했습니다.경제 정책에서는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농민의 생활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학문과 재주가 많은 사람을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하고 과거제를 폐지하고 하급 교육 기관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를 제창하기도 하였습니다.
홍대용
1731(영조 7)∼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입니다.
대사간 홍용조(洪龍祚)의 손자이며, 목사(牧使) 홍역(洪櫟)의 아들입니다.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1765년 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60여 일 동안 북경에 머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갖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입니다. 북경 방문은「연기(燕記)」속에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醫山問答)』 역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였습니다.
지전설·생명관·우주무한론으로 전개되는 홍대용의 자연사상은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일관된 것으로, 그의 과학사상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 등은 상당한 독창성을 보이고 있지만, 서양 과학과 도교적인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서양 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썼으며, 여러 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농수각(籠水閣)이라는 관측소에 보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 였습니다.
조선의 수학자들은 이순지. 홍대용. 최석정. 구수략, 이상혁. 남병길. 남병철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마방진 칠정산, 제가역상집, 천문유조 담헌서, 주해수용, 구장산술(해법서), 수학산술, 수학통종, 수법전서 등의 저서를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