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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묵상글 (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 누가 덕을 지닐까? 누가 덕 농사를 잘 지을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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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4 04:12
- 누가 덕을 지닐까? 누가 덕 농사를 잘 지을까?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집회서의 시작은 지덕(智德)에 관해 얘기하고,
오늘 복음은 신덕(信德)에 관해 얘기하기에
오늘은 어떻게 덕들을 지닐까에 관해 묵상코자 합니다.
오늘 저는 덕을 ‘쌓을까’대신 ‘지닐까’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덕을 쌓는다고 흔히 얘기하잖습니까?
그리고 이는 한자어의 적선(積善)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적선을 말 그대로 풀이하면 선을 쌓는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선이나 덕을 내가 쌓는 것으로,
내가 농사지어 낟가리를 높이 쌓듯이 쌓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러니까 나의 수행이나 노력의 결실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는 덕과 선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들이라고 얘기합니다.
만선(萬善) 만덕(萬德)의 근원이신 하느님이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에서 그는 왜 많은 사람이 자기를 따르는지,
자기의 덕을 칭찬하는 맛세오 형제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그 놀라운 일을 위해서 그 이상 더 천한 피조물을 찾지 못하셨기에
나를 택하시어 이 세상의 존귀한 자, 아름다운 자, 강한 자,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그래서 만선만덕(萬善萬德)은 창조주 하느님께 오는 것이지 결코 피조물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며,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면
만선 만덕이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고,
모든 것은 모든 선이신 하느님께 나온 선들이라고 믿는 것이
프란치스칸 영성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믿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덕과 선을 어떻게 하면 지닐 수 있겠습니까?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주십사고 청하면 되고 기도하면 됩니다.
오늘 어떻게 하면 악령을 쫓아낼 수 있겠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청하려면 가난의 자세, 네겐 없다는 자세가 필수입니다.
오늘 아이 아버지가 믿음이 없다고 꾸짖음을 듣자 취한 태도,
믿음이 없으니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달라고 한 태도 말입니다.
사실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거나 지혜가 있다는 사람은 청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없으면서도 청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없지만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을 믿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가 없는 사람 중에서도 지혜가 없는 사람이고
우리가 흔히 무지막지(無知莫知)하다고 할 때 그런 사람입니다.
받아 지녀야 하는데 받지 않아 지혜가 없고 그래서 지혜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의 가난을 인정하고 청하는 겸덕(謙德)이 있는 사람이 지혜롭고,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지혜를 후하게 주신다고 집회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그것을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이것이 우리 교리에서 말하는 주부덕(注賦德)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리는 습득덕(習得德)도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쏟아부어 주신 덕(주부덕)을 매일같이 갈고닦아
그 덕을 내 덕으로 만드는 것이 제 생각에 바로 습득덕입니다.
하느님이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셔도 그것을 흘려버리지 않고
농사에 잘 활용해야 곡식이 영글듯 덕(德) 농사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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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라인 계곡의 신비주의자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2월 23일 일요일 (호명환 번역) 여덟 번째 주간: 라인랜드(독일)의 신비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고 고마움을 표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이번 주 묵상에서는 중세 때부터 20세기까지의 유럽의 라인 계곡 신비주의자들 몇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이번 주 주제를 다음의 글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도 많이 있지만, 저는 여전히 하느님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서구인이 비-이원주의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내면의 하느님 체험과 이 세상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 성령의 체험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행하고, 화해하고, 경계를 넘어서고, 이어주는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그런 가치들입니다. 이 가치들은 우리로 하여금 양분법적 정신 구조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정신 구조, 그리고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것과 같은 정신 구조를 넘어서게 해 줍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비-이원론적 생각은 우리의 이성적 정신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불의에 대항하여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비적이고, 관상적이며, 일치하는 의식 안에서 성장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성장을 이루어갈 때 우리는 세상을 더 넓고 깊고 현명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해 창조적인 해결책을 내는 데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온전하게 통합된 인격체의 모델인 신비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고마움을 표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1]
제 문화의 뿌리는 북유럽의 라인랜드에 있습니다.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은 대개가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그 지역에서 살았던 독일어권 영성 저술가들, 설교가들, 선생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중요성은 최근에 와서야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알프스 넘어"의 교회(로마에서 볼 때 알프스 북쪽에 있는 교회)는 단순히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늘 로마의 감독과 통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렸고, 그래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교회, 즉 "알프스 안쪽" 교회와는 다른 자료들과 영감들을 이끌어냈습니다.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은 용기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들의 창조적인 관점에서도 특출났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베네딕도회 수녀 빙엔의 힐데가르드(Hildegarde of Bingen: 1098-1179)와 대 젤뚜르다(Gerturde the Great: 1256-1282); 베귄 공동체의 막데부르크의 메흐틸드(Mechthild of Magdeburg: 1212-1282);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와 요한네스 타울러(Johnnes Tauler: 1300-1361), 그리고 하인리이 소이세(헨리 수소라고도 함: Henry Suso: 1295-1366)와 같은 도미니칸들; 쿠사의 니콜라스 추기경(Cardinal Nicholas of Cusa: 1401-1464) 등이 포함됩니다. 이 명단에 제가 포함시키고 싶은 최근의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는 신경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입니다. 그는 힐데라르드와 에크하르트 그리고 쿠사의 니콜라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개신교 개혁 이후에 신비주의자들의 길은 전반적으로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틴 루터(1483-1546)가 하느님에 대한 앎은 오직 성경에만(sola Scriptura) 있다고 강조했기에 이들이 더 억압받았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개인의 영적 체험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던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루터는 초기에 가톨릭교회가 과도하게 영성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것을 바로잡아 주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를 "이성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기여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이끈 개혁 전통 안에서도 나중에는 독일의 구두장이 야콥 뵈메(Jacob Boehme: 1575-1624)와 발명가 엠마누엘 스베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1688-1772)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나왔습니다.
그 이후의 시대에서 독일의 신학은 종교개혁 이후의 이성주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꽃을 피웠습니다. 신학 연구가 이 세상에 계속해서 막대한 선물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이런 신학에 집중하다 보면 경험이나 실천에는 별로 강조점을 두지 않은 추상적인 생각들을 갖고 하는 끝없는 논쟁에 쉽사리 갇힐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신비주의자들은 본질적인 신비 체험을 존중하고, 또 하느님을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자기들이 했던 신비 체험으로 초대해 주는 이들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호주의 한 평범한 프란치스칸으로서 언제나 기도 중에 강력하고 기억할 만한 체험들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왔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그런 특별한 내면의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를 주제로 하는(on Mysticism), 매일 묵상과 함께하면서 저는 제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거의 매 순간 제 안에 성령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비록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하느님 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사랑의 놀라움을 누려 보도록 합시다!
—Sue 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Need for Mysticism,” Daily Meditations, August 2, 2020.
[2]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Rhineland Mystics,” The Mendicant 5, no. 3 (2015): 1, 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gustin Fernande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과 더불어 이 땅의 식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우리도 이 위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관문에 발을 들여 놓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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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숨
2025.02.24. 05:23
믿음은 신뢰심 안에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일) 하실 수 있으면" 하고 자기 아이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신앙 생활의 여정 안에 이 "만일"이라는 것을 들여 놓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붙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 구멍이 얼마나 작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애쓰게 부은 물이 다 새 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만일)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하고 반문하십니다. 이는 마치 "양다리 걸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라는 말씀으로도 들리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있을 손해에 대비해서 양쪽에 다 내기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의 심리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여정에 "만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님께서 직접 해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은 확률을 계산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단어보다는 '신뢰'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두 단어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조금은 미묘한 차이를 지닙니다.
[믿음]에는 "예" 아니면 "아니오"의 대답만이 요구된다면, [신뢰]에는 여러 등급 혹은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신뢰함으로써 신뢰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니까 신뢰하고 또 신뢰함으로써 더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대개 아는 것이지만, 종교개혁 때 뭔가 잘못 이해했던 것이 가져온 크나큰 비극은 이 '신뢰'라는 것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fiucida인데 이것이 바로 마틴 루터의 신앙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는 말을 했을 때 이 [믿음]에는 [신뢰]가 핵심으로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루터가 '믿음' 혹은 '신앙'이라는 말을 했을 때 거기에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말하는 "희망"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은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창조해 주시면서 성장해 가도록 해 주신 법입니다.
오래 전에 법륜 스님이 어느 강당에서 강연을 하는 내용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강연에서 어떤 불자(자매)가 스님에게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년쯤 되었는데 가끔씩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기도 한다고 하면서 과연 극락이 있는지, 그리고 '만일' 극락이 있다면 어머니가 극락에 계신지가 궁금하다며 스님의 말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스님이 그 자매에게 이렇게 따라 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러자 그 자매가 따라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다." (제가 법륜 스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그 자매가 그것도 따라서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법륜 스님이 가만히 계시니까 그 자매가 "아니, 그것은 교회에서 하는 말 아닌가요?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는 말씀 아닙니까? 저는 절에서 스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여기 온 건데..."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아니, 지금 목사님이 아니라 스님이 말하고 있잖아요! 교회 목사님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스님'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습에 그곳에 모인 청중이 모두 웃었고 저도 많이 웃었습니다만, 가끔은 법륜 스님의 이 말씀이 진지하게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 해석은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저는 이 말씀이 그냥 그럴 것이니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다는 사실을 더 새기고 새기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신뢰]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신뢰심은 참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믿고 되뇌기도 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만, 정말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그 신뢰심을 드리지는 못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를 정말로 신뢰하고 새기면서 더 큰 신뢰심으로 성장시켜가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이원론적 논리, 혹은 흑백의 논리에 가로막혀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하느님 사랑을 받을 만한가 아닌가를 판단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복을 주려 하시는데, 우리가 먼저 그 사랑과 복을 가로막는 셈인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로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란 "하느님 뜻" 즉 "하느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희망과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 신뢰심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하느님께 신뢰심을 드리는데,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서 그 신뢰심을 꺾으실리야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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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교 다닐 때, 테니스를 치다가 허리를 삐끗했었습니다. 사실 많은 분이 테니스 치는 저를 향해 “자세를 똑바로 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탁구를 하다 보니 몸에 탁구 자세가 그대로 배어 있던 것입니다. 이 탁구 자세로 테니스를 치니 결국 허리에 큰 부담이 되었고 몇 차례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세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운동이 처음 배울 때 자세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자세를 갖추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세가 잘못되었거나 그리고 이 잘못된 자세를 전혀 고치려 들지 않는다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자세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발전 속도가 느린 것인데, 만약 상대방 때문에, 환경 때문에 등의 실패 원인을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세부터 고쳐!”
신앙인의 자세도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세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자세가 잘못되었는데도 그 점을 고치려고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만 문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왜 불공평하냐고….
이 믿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히 ‘믿겠다’라고 말만 해서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벙어리 영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시고,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믿음’이고, 이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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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면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삶의 외면도 바꿀 수 있다(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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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영이 든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망신당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스승을 망신시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스승을 욕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스승을 망신시키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단 말이냐?”(마르 9,19)
이는 우리가 ‘참 믿음’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고 참아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나마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로 머물 수 있음은 그분께서 참아주고 기다려주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계시고, 우리를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의 그 믿음과 그 희망에 의탁하여,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간청해야 할 일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여기서,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의탁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곧 ‘믿음’을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마르 9,23).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그는 ‘믿음’과 동시에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겸손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가 믿고는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겸손하게 믿음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믿지 않는 것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믿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도를 통하여 믿음이 옵니다.’ ‘믿음’(응답)은 ‘들음’(계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하시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따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누구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당신 말씀의 권능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말씀의 권능’을 깨우쳐주심과 동시에,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 9,28)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아이를 고친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이 없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곧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에게도 망신당하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아이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분의 믿음에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제 기도가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달려 있게 하소서.
당신이 제게 응답하기보다
제가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당신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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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를 맺는 기도
어느 날, “신부님은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얼른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실은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는 기도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기도를 소홀히 하였으니 속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실은 누가 기도를 부탁하면 “예, 기도해 드리죠.” 대답하고는 잊어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죄송한 마음으로 그 잊었던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11,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답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반신반의하는 태도로는 기도의 결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5). 그러므로 “기도할 때 온 마음을 기울여 기도에 집중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에도 기웃거리거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성 치쁘리아노). 따라서 기도 하려거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9,28-29).대답하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힘은 바로 기도에서 나오는데 기도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고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안에 파고드는 더러운 영의 세력, 즉 누군가를 향한 시기, 질투, 분노, 미움, 증오, 적개심, 탐욕, 교만 등이 느껴질 때 더욱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은 복음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니라 기복적인 믿음, 또는 신심 위주, 활동 중심의 믿음에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고, 그분의 도움을 필요하지 않게 되며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게 되고 내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힘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맺음하는 가운데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무던히 참아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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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좋은 글은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오늘은 제가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정채봉 선생님은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 만남의 종류를 5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생선과 같은 만남, 꽃송이와 같은 만남, 건전지와 같은 만남, 지우개와 같은 만남,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 있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말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말입니다. 가장 비참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버리니까 말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강석준 신부님은 사랑의 종류를 3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진흙과 같은 사랑, 물과 같은 사랑, 공기와 같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겁니다. 진흙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지만 이내 굳어 버려서 나의 ‘틀’에 맞추려고 한다고 합니다. 서로가 좋아서 사랑했지만, 이런 사랑을 추구하면 답답해지고, 한쪽이 숨이 막히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가부장적인 배우자는 이런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나의 뜻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면서 이내 굳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의 몸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손과 발이 부풀어 오르듯이, 결국은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사랑입니다. 공기와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면서도 상대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활력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금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의 능력일까요? 과거의 일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추론의 능력일까요? 아직 풀지 못했던 수학의 문제를 풀어내는 지능의 능력일까요? 솔로몬처럼 옳고 그른 일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지혜의 능력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기도가 참된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몸도 마음도 온전하게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하느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믿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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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삶은 늘 우리 마음대로 혹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계획대로 되는 삶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주님에 앞서 벙어리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주님 나라에 찬미와 영광도 되겠지만 자신의 업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했던 처음에는 제자들 역시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앞 못 보는 사람들이 앞을 보았고 벙어리가 말을 했으며 마귀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적을 행하던 제자들의 마음에 작은 유혹들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내게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는 거야.’
‘나는 참 훌륭한 사람이야.’ 등의 마음들 말입니다.
이런 마음들은 점점 커지고 커져서 기적의 은총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제자들이 오늘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기 모습을 본 제자들은 곧바로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신앙의 길에서도 우리는 유혹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유혹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총을 점점 말라버리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제 믿음을 도와주세요.
⭐깨진 유리창. 깨진 마음.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이라는게 있습니다. 어떤 공간의 깨진 유리창을 방치해 두면 그곳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나중엔 지역 전체로 확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빗대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깨져 있고 그걸 방치한다면… 아마도 신앙심보단 분심들이 확산해 점점 주님을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흔들릴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깨진 마음을 방치하는 게 아닌 촘촘하게 이어 붙이려 부단히 노력하고 다시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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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믿음의 여정
“지혜로운 삶”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공은 지어낸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길로 드러나는 것이다.”<다산>
산대로 살고 산대로 죽습니다. 요행이나 비약, 도약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삶의 여정에, 기도와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저절로 내공입니다.
“넓게 배우되 함부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 지식과 덕을 갈무리해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말라.”<예기>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내공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전 장면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기 전 예수님의 산상에서의 변모신비체험이 있었습니다. 외딴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처럼 바로 산상에서의 신비스러운 변모체험이 예수님께는 내적힘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내공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의 여정에 축적되는 내공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도움을 청합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일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세대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믿음의 내공입니다. 한결같은 기도와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가는 내공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자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주고받은 대화가 좋은 묵상감입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흡사 자비송 기도처럼 들립니다만 이 또한 겸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믿을 때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음의 한계를 느낄 때 마다 지체없이 겸손히 고백하며 바칠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통쾌한 악령 축출의 응답에서 주님의 내공이 빛을 발합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마라.”
곧이어 죽은 것처럼 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는 일어납니다. 그대로 부활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사랑처럼 기도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영혼이 살기위해 기도요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의 수행 역시 필수 선택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한결같은 기도가 제일입니다. 평생 배워 익혀야 할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내공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말씀의 전개와 배치가 고맙습니다. 제1독서 창세기는 일단 끝나고 오늘부터 사순시기 전까지 집회서가 이어집니다. 오늘 집회서는 시작으로 ‘지혜의 신비’에 대해 환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면 알수록 은총의 선물처럼 선사되는 사랑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옛 사막의 수도자들이 스승을 찾은 것은 살아 있는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자는 저절로 지혜를 추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성장하는 사랑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도와 믿음의 삶은 지혜로운 삶에 직결됨을 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더해 주며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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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되어 주게나>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마르 9,19)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나 그대 사랑하기에
내가 먼저 그대가 되었으니
그대 나 사랑한다면
그대 이제 내가 될 수 있는 것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그대가 내가 되면
언제나 어디서나
그대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니
나를 품고픈 깨끗한 사랑으로
나에게 바친 아낌없는 믿음으로
나와 함께하고픈 간절한 바람으로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언젠가 나는 떠나야하고
나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벗들은 어디에나 있으리니
나의 빈자리가
너무 아프게 느껴질
벗들의 곁에서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내가 되어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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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믿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 믿는다
믿음이 없다면 기도는 사라집니다. 믿지 않는 것을 청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기도하기 위해서 믿읍시다(참조; 마태 21,22; 마르 11,24). 또 우리가 기도하게 하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입니다”(요한 7,16).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도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나의 행위는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생명도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처신하는 방식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누리고 쌓은 모든 행복과 모든 완덕, 바울로 사도가 위험을 무릅쓴 결과로 누린 모든 행복,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로 받았던 모든 복은 그들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기쁨을 줍니다. 게다가, 나는 모든 성인과 모든 천사의 행적을 통해, 심지어는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행적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받습니다. 마치 그 모든 행적을 내가 이루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입니다.(338)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10,5-15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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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기도하는 삶으로 성숙한 믿음을 /
박윤식 [big-llight] 250223. 18:26 ㅣNo.180287
삼위일체 신비의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의 기도는 믿음을 드러내는 숨결이라나. 글로 적힌 기도문을 읽는 데 익숙한 신자들은 기도문에 담긴 인격적인 대화보다는 기도문을 읽는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갖는다나. 그래서 암기한 기도마저 바칠 시간이 없는 우리는, 진정한 믿음은커녕 기도할 줄도 모른다는 거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덫에 걸린 일일 게다. 사실 믿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에, 기도는 참된 믿음의 길을 걷도록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일인 것이리라.
예수님께서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영이 들린 한 아이를 치유하신다. 간질로 고통 속에 있는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가 직접 더러운 영이 들린 자식을 예수님께 데려 온 것이다. 아이 아버지가 ‘하실 수 있으면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으면 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 믿는 이는 모든 게 가능하다.’ 라고 이르셨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그 영을 엄히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더러운 영아,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손을 잡아 오랜 고통 속에 지낸 그 아이를 일으키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가 아니면 그 영을 결코 나가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믿음이 약한 제자들을 질타하시면서, “기도하며 믿는 이에게는 이것들이 가능하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 역시 그저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계획에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설령 우리 눈에 부당하게 보여도, 사랑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로운 것을 계획하실 리가 있으랴?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치는 대로 기적은 믿음의 결과이다. 병든 자식의 고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해보자. 저 놈 고칠 수 있다면야 무엇이든 못할까라는 믿음뿐이었으리라.
오늘 예수님의 더러운 영이 들린 어떤 아이 치유에서 믿음 없는 아이의 아버지와 기도가 부족한 예수님 제자를 본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된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는 믿기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믿는단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강하게 해 주니까.
사실 기도로 강하게 성숙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그 힘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한다. 이처럼 믿음을 가진 그 아이 아버지의 애정 어린 사랑이 그 어려운 기적의 출발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요구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 먼저 기도를 통해 믿음을 갖는 거다. 기도는 시간이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닌, 믿음이 있을 때 할 수 있기에. 기도도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다. 이처럼 하느님 만나는 믿음도 역시 기도를 자라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음성을 듣는 기도다. 이 기도의 순간, 변할 것 같지 않았던 내가 변화하는 놀라운 믿음을 체험하게 되리라. 우리는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이, 교만에 빠져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우리가 시기와 미움, 거짓과 중상이 커질 때 악마적인 것에 지배를 받으리라. 반면 편견과 위선이 사라지고 평화와 자비가 넘치면 성령 안에 머물게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기도만이 하느님 일을 할 수가 있단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믿음으로 주님 일 하는지를, 늘 사심 없이 기도로 돌아봐야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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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황홀하고 경이로운 체험을 하고 타볼산에서 막 내려온 예수님과 세 제자가 마주한 현실은 일상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 삶의 전형적인 그늘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은 그분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토록 믿음을 가르쳐도 딱히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답답하실 법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귀머거리 영을 쫓아내심으로써 더러운 영에 붙들려 자신을 잃어버렸던 아이를 본연의 자기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 앞에서 발악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고 그 아이의 몸속에 있는 더러운 영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살아가면서 죄와 악으로 그 모습이 더럽혀질 위협을 당합니다.
믿음과 기도, 이 두 가지가 더러운 영의 공격 앞에서 우리 안의 하느님 모습을 지켜 낼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믿음이, 제자들에게는 기도가 부족하였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결국 아이의 아버지와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가 다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겸손한 기도로 믿음을 얻고 해방된 아이를 되찾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는 믿기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말하면서, 기도하기 위하여 믿고 기도하게 하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합니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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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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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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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 24)
오늘 복음에서는
기도하는 부모가
되게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생활에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부모가
기도로 바뀌면
온 가족이
바뀝니다.
우리의 신앙도
성숙해지는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어른스러움이란
조르고 부탁하는
것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로
실천하고
이루어내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우고
깨닫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믿음은 기도로
드러납니다.
기도는
믿음의
실천이며
믿음의
생활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믿음을 딛고
일어서는
겸허한
삶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되는 것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극복해 내며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정화로
저마다의
가정과
공동체가
새로워지길
바라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가
이 하루를 엽니다.
기도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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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남은 인생 여정, 좀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출신 대학교 이름만 들어도 뒤돌아보게 되는 명문대 출신에다가, 그 어렵다는 통과 의례를 거쳐, 권력의 최상층 부까지 치고 올라간 사람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인생무상을 실감케 합니다.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들,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들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
거듭 고민을 해봅니다.
한 인생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적인 양성뿐만 아니라 인간적, 영적, 상식적인 교육도 골고루 받았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지적인 측면에만 투자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혜가 결여된 지식의 위험성을 오늘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 살레시오회에서는 사목자를 양성할 때 4가지 측면의 고른 양성을 강조합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인간적, 영적, 지적, 사목적 역량을 골고루 갖추어 균형있는 수도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숙한 식별과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로움을 갖추기를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째 독서로 봉독한 집회서에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음의 반의어는 지혜로움입니다.
학식을 갖춰 다방면에 걸쳐 유식한 것, 식별력이나 판단력이 출중한 사람도 지혜롭다고 하지만, 진정한 지혜는 좀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무엇이 영원불변한 것이고, 무엇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재물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재물을 주인이신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사람, 가난한 이웃들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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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14-29: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29절). 마귀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22절) 라고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3절) 하시며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셨다. 그 아버지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24절) 예수님은 아들을 고쳐주셨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인간에게 실망할 수 있지만, 항상 하느님께, 예수님께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가 실망했듯이 오늘날의 우리 신자들도 교회에서 일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그들의 약점을 보고 믿음에까지 실망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럴 때도 그 아이의 아버지처럼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을 넘어 그리스도 자신을 찾아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 안에 언제나 희망을 품고 그분께 매달릴 때, 그분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믿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기 위해 믿는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한다. 그리고 “기도 없이는 어떤 신앙도 보존되지 않는다.”라고 히에로니모 성인은 말하였다. 믿음은 기도를 샘솟게 하고, 샘솟는 기도는 믿음을 튼튼하게 해준다. 우리도 때로는 신앙의 길을 가면서 의심이 들 때도 있고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게을리하는 때도 오늘 복음의 그 아버지처럼, “주님, 나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의 삶이며 구원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늘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미리 끌어당겨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구원의 삶은 자연스럽게 영원한 구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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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이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신앙인 대부분이 그러하시겠지만, 저도 항상 어디를 갈 때 함께 가는 이들에게 묵주기도 5단을
하자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우리가 그렇게 안전하게 잘 다녀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했으니, 지켜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7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전에는 연옥에 당연히 갈 것이라 여겼지만, 하면서 연옥에 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점점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기도를 통해증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아버지가 예수님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장면을 마주합니다.
어찌 보면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라고 하심으로써, ‘믿음’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임을 강조하십니다.
영화 ‘사인즈(Signs)’ 속 그레이엄은 성공회 사제입니다.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귀여운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그레이엄은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째서 자기 아내를 데려갔느냐며 사제복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마을과 세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외계인이 침공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아들이 외계인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 그는 전혀 기도할 줄도 모른다는 걸
재인식하게 됩니다.
그래도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만을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아들은 살았습니다.
아들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레이엄은 대답합니다.
“누군가 널 도와주셨어.”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사제였으니 나는 당연히 한때 신앙심이 있었다.”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기도를 완전히 포기한 채 살아온 사람이 위기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결국 그레이엄은 아내의 죽음과 아들의 위기를 통해 비로소 다시 기도를 선택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믿음을 새롭게 작동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믿음 없음’이 아니라, ‘믿음이 이미 충분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께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계속
청합니다.
사실 이 고백 자체가 이미 믿음의 시작임을 보여 줍니다.
진정한 믿음이라면, 주님께 자기 부족함을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기도로 다시 불붙은’ 사례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들 수 있습니다.
데레사는 젊은 시절 수도원에 들어간 뒤에도, 한동안은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고 세속적 대화나
활동에 더 마음을 두었습니다.
스스로 “수도자이니 이미 충분히 경건하다.”라고 여기는 착각도 있었지요.
그러나 심한 병을 앓아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회복된 뒤, 자신이 “참으로 진지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철저히 기도 생활을 쇄신합니다. 매일 묵상과 침묵 속에서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소서.”라고 청하며,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기도를 다시 회복해 갔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깊은 관상과 신비체험을 하게 되고,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는 등 교회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바로 그 과정이 영적으로 메말랐던 자신을 회개시킨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여러 저술을 통해 기도의 중요성을 직접 역설하는데, 특히 《완덕의 길(The Way of Perfection)》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란 결코 다름 아닌, 친구 사이의 친밀한 대화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주님을 찾기 위해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성녀는 우리가 스스로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착각하지 않고, 날마다 ‘내가 부족하다’라는 걸 인정하며 기도로 나아갈 때 비로소 하느님 은총이 크게 드러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에 따라 “믿음이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라는 주제는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여기지 않고,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순간, 비로소 믿음이 기도를 작동시키기 시작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가 그대로 받게 될 것이다.”(마르 11,24)라는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움직일 때 기도가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다’고 좌절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충분하다고
착각’하여 기도를 소홀히 하도록 만드는 함정입니다.
마음 한구석의 불신, 혹은 잘못된 자기만족을
부추김으로써 영적 방심을 유도합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악마 웜우드에게 전하는 직접적인 충고를 인용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원수(하느님)’ 그 자체께 시선을 두면 우리는 패배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 돌려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면, 쉽게 기도에서 멀어지도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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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마르 9,14-18)”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8-29)”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마귀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고,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2-13).”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아주 넘겨주신 것이 아니라,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마귀들을 쫓아낸 일은, 자신들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한 일입니다.
2)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냈다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착각했는지, 어떻든 마귀들을 쫓아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서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도들이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음을 나타냅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과 예수님께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처음에 사도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사도들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착각하면, 누구라도 어리석은 교만에 빠지게 되고, 주님께서 주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도 아무런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믿음도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마귀들에게 호되게 당한 자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1-16).”
4) 마르코복음의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낼 때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시도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했거나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그냥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에 관한 말씀은 “믿기만 하면, 누구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주님을 믿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기적은 주님께서 일으키시고, 우리가(신앙인들이) 할 일은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겠다고 덤벼드는 모습은 교만이고, 반대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낙담하는 모습은 어리석음입니다.
사도들의 이야기나 성인 성녀들의 전기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은 주님께서 특별히 예외적으로 허락하신 일들이고, 사실은 주님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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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9,14-29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 복음은 기도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요. 하느님께 잘 부탁해서, 그분의 능력을 이용하여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 뜻이 나를 통해 실현되도록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진 유대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를 통해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과 능력이 나에게 흘러들어오지요. 그러나 기도를 소홀히 하면 그 유대의 통로가 막혀버립니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면 혈관에 지방에 잔뜩 끼어서 혈액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으면 내 욕심과 집착이라는 지방이 그분과 나를 연결하는 유대관계에 잔뜩 끼어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사랑이 나에게 제대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자기 아들을 붙들고 괴롭히는 ‘벙어리 영’을 쫓아달라며 찾아온 사람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왜 당신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하느냐고, 그런 걸 보면 예수라는 자가 더러운 영을 쫓아냈다던 소문도 다 헛소문 아니냐고 말이지요. 그런 상황이 너무나 속상하고 답답했던 제자들이 왜 자신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주체는 제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자기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뜻에 따라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그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인지, 그분 뜻에 합당한 게 맞는지를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내어맡겼어야했습니다. 심지어 더러운 영이 나가지 않고 그 사람에게 그대로 붙어 있더라도 그것 또한 하느님의 뜻임일 받아들이고 따랐어야했습니다. 그랬다면 내가 의도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속상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기만 하면 내가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내가 원하고 청하는 방식 이외에 다른 수많은 방법들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뤄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굽은 자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분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 뜻대로 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참된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신앙을 지닌 우리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의 놀라운 섭리를 이루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신앙의 의미를 발견하는 큰 기쁨이 되고, 하느님께는 영광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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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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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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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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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4. 연중 제 7주간 월요일.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실천하는 삶
<2025.2.24> 아침을 여는 묵상 (눅 6:27~38절)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실천하는 삶❞
❚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은 자로써 우리도 자비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이 있어야 합니까?
➲ 차별치 않고 축복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27~31절).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심지어는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내주라는 다소 당혹스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해서 손해 봐야 하며, 사랑해야 하며, 축복하는 말만 해야 하며, 주는 삶이어야 하며,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그렇다...’ 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나에게는 복이고,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당신을 죽인 원수들도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뺨도 맞으셨고, 발가벗겨지는 수치스러움도 당하셔야 했습니다. 나를 위해 당신의 생명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품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내 안에 있는 편견과 차별을 버리고, 누구라도 축복의 마음을 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2~36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관습과 윤리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삶이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내가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고, 받기를 바라고 꾸어주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칭찬받을 것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35절,새번역)... 그러므로 ‘...아버지의 자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36절)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말로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고, 저 하늘 높이 쌓아도 다 쌓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사랑이요, 자비와 은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만한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반응하지 말고 죄인을 위해 아들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이라도 바라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삶으로 살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바라보는 사람답게 말입니다.
➲ 아끼지 않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37~38절).
또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정죄하지 말라...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주라...’ 남에게 주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 주라는 의미입니다. 남에게 주되 후하게 주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그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후하게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요, 긍휼히 여기고 너그럽게 나누어 준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넘치도록 풍성한 방법으로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내가 뿌린 대로 그 결과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입술은 비판을 즐기고, 남을 정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조차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나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고, 나의 잘못과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내 자신 안에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가득 넘쳐나는 것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삶을 감싸 안음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조금만 더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바르고,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에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바라보는 사람답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허물투성인 내 자신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신 자비하심을 마음에 품어 참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크고도 놀라우신 사랑 안에 거하며, 그 놀라운 사랑을 나의 삶의 자리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6:27~3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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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믿음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 으로 인도하는 지혜 입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