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26
10월30일[연중 제3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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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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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iSkqCCZLxY
[서울대교구 윤상현 비오(청소년국 유아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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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 희생과 자기 포기, 인내와 사랑을 요구하는 좁은 문!>
참으로 특별한 이력을 지닌 우리 시대 탁월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가톨릭 신학자인 스콧 한(Scott Hahn)입니다. 그는 원래 미국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런 스콧 한이 198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가톨릭 신자로 회심했습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성경 학자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한동안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정신없이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변한 사람을 보고 주변 사람들 가만있지 못합니다. 다들 한 소리씩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저 양반 갑자기 왜 저러지? 뭘 잘못 먹었나?”
그는 당시의 고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한 지 약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하느님께 대들었다.
“주님, 저는 제 삶을 당신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친구들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무슨 처사가 이렇습니까?”
친구들은 갑자기 변한 저를 도무지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남기고 다들 떠나갔습니다.
“너는 변했어. 우리는 더 이상 너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 잘 먹고 잘 살아라!”(스콧 한, ‘영원토록 당신 사랑 노래하리라’, 바오로 딸 참조)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처음 직면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문 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상의 것들은 그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 참으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인내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포기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 번번이 실패하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모두 가뿐히 좁은 문을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참을 묵상해봤습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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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HvIaI5hh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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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은 십자가가 아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저는 좁은 문을 ‘십자가’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좁은 문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게 할 수 있도록 만드신 예수님의 작품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여닫는다는 것은 조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주어져 있는데 십자가를 지고 당신께 올 수 있도록 예수님게서 마련하신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니 트레호(Danny Trejo)는 괴로운 과거, 중독, 투옥을 극복하고 사랑받는 배우가 되어 회복과 구원을 체험한 놀라운 사람 중 하나입니다.
대니는 1944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폭력, 범죄, 마약이 만연한 가정과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약물을 시작했으며, 8세에 마리화나를 시도하고 12세에 헤로인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토레호의 삶은 범죄와 중독으로 더욱 악화하여 청소년 구치소에서 여러 차례 수용되었고 결국에는 성인 교도소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습니다.
1960년대 초에 당시 그는 헤로인 중독에 깊이 빠져 있었고 분노와 폭력에 시달렸으며 종종 싸움을 위해 독방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그는 변화하겠다는 개인적인 결심을 했고, 인도를 구하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렇게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었습니다. 이때 그를 이끌어준 영적 기반 회복 모델이 12단계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더 높은 영적 권위에 항복하고, 책임을 받아들이고, 보상하고, 공동체에서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이 트레호의 회복의 기초가 되었고 그의 인생관을 바꾸었습니다.
석방된 후에도 트레호는 절주에 전념했으며 AA(Alcoholics Anonymous) 및 NA(Narcotics Anonymous)에 합류하여 새로운 커뮤니티와 목적을 찾았습니다. 그는 빠르게 AA의 후원자가 되어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자기 경험을 힘과 공감의 원천으로 활용했습니다. 현재 트레호는 위험에 처한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학교, 교도소, 회복 센터에서 연설하면서 변화 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빌 윌슨은 AA(Alcoholics Anonymous)를 공동 창립자입니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알코올 의존증이 되었으며 각종 노력으로 되지 않던 금주를 한 가지 깨달음을 통해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윌슨은 여러 차례 술을 끊으려고 시도했으며 종종 짧은 기간 동안 금주를 경험했지만, 매번 재발했습니다.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년간 의학적 치료, 심리 상담, 자기 훈련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악화하였고, 일련의 입원과 뉴욕시의 타운스 병원에서의 회복 시도 실패 후 1934년에 바닥을 쳤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욕망을 못 박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혼자 힘으로 질 수 없습니다. 빌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에디라는 친구에 의해 술을 끊는 것도 믿음의 힘, 하느님께 항복하고 의존하는 노력,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윌슨은 알코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평안함과 해방감을 느끼는 강렬한 영적 경험을 합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으며, 더 높은 힘에 굴복하는 것이 중독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알코올 중독자 밥 스미스 박사와 함께 알코올 중독자 익명 단체(Alcoholics Anonymous)를 설립하여 공동 지원, 책임 및 영적 원칙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동은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획기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이미 편안해진 방식에 몸과 마음을 가두지 마라. 그러는 순간, 오직 그것만 원하게 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말은 영화 ‘아마데우스’, ‘백야’의 안무 총괄 책임을 맡았던 미국 무용계의 여왕 트와일라 타프(Twyla Tharp)의 말입니다. 리더십 전문가인 김남인 씨가 타프와 인터뷰할 때 가장 먼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정상에 오른 비결은 무엇인가요?”
타프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침 5시 반, 옐로캡(택시)의 문을 여는 순간이에요.”
그녀는 무용을 시작한 후 50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5시 반에 이미 예약해 놓은 ‘택시’를 타고 체육관으로 가서 온몸과 정신을 깨웠다고 합니다. 그녀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피곤할 때가 있고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울 때가 있지만 이미 와 대기하고 있는 택시의 문을 열고 앉으면 다시 이불로 돌아갈 수 없기에 일단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무용에 대한 태도가 그녀를 세계 최고 현대무용가로 만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연습을 하는 일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택시’라는 매개체게 없다면 이루기 불가능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지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접하게 됩니다. 운동하거나 공부할 때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더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적은 사람들이 함께 십자가의 길로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고해성사가 힘들고 성체성사가 지겹더라도 그것을 꾸준히 하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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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피아노를 배우면서 ‘운지법’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손가락 사용법을 정확하게 배워야 좋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어려운 곡을 연주할 때도 틀리지 않고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급한 성격인 데다가, 배우지 않고 연습했더니 어려운 부분에서는 자꾸만 틀리곤 합니다. 가전제품을 사면 사용법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용법을 꼼꼼하게 읽어봅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겼어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사용법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사용법을 찾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도 많았습니다. 운동을 배울 때도 기초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스키도 남이 타는 걸 따라서 배웠고, 중급 코스까지는 내려올 수 있지만 어려운 코스는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대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스쿠버 다이빙’입니다. 이론 교육을 받았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장비 착용법을 배웠고, 직접 바다에서 실습했습니다. 그렇게 배웠기에 깊은 바다에서도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신앙인이 지켜야 할 삶의 태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제는 부부의 관계를 알려주었습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순명했던 것처럼 남편에게 순명하라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남자와 여자는 신분이 달랐습니다. 우리의 문화 역시 ‘남존여비,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문화가 당연했음에도 부부는 동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남자도, 여자도, 어린아이도, 나이 든 사람도, 유다인도, 이방인도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인과 종의 관계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현세의 직책과 신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지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순명한 것처럼 순명하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좁은 문’을 이야기하십니다. 화려하고 멋진 건축물이지만 하느님을 찬미하고, 친교를 나눌 수 없다면 좁은 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독점하고, 권위를 내세우면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좁은 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익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좁은 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양 냄새 나는 목자가 없다면,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한다면, 빈부의 격차로 가난한 이들이 소외된다면 역시 좁은 문은 아닐 것입니다. 현실의 삶이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너무 좁게 느껴질 것입니다. 성공, 돈, 명예, 출세가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먼 훗날 가도 되고, 안 가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잠시의 쾌락과 경쟁에서의 승리 때문에 기도와 미사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 일 것입니다. 예전에 맹인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어린 시절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좁은 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사법고시 보듯이 공부를 해서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처럼 월등한 체력과 실력이 있어야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삼성이나 현대처럼 엄청난 재력이 있어야 가는 곳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뛰어나고, 능력이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좁게만 보이는 곳이 하늘나라일지 모릅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사람,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에게 하늘나라는 결코 좁은 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희생과 나눔입니다.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은 편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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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22-30: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4절)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적다 많다가 아니라 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의 의미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와서 미사 봉헌을 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 삶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셨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부름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하신 이유는 “불의를 일삼았었다.”라는 데 있다고 하신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해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일삼게 되면 그 하느님 백성의 자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실천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들만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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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은 적다는 말씀일까요, 많다는 말씀일까요?
문은 좁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지만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길거리에서 가르치실 때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도 당신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구원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이들 가운데서도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에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님께서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아마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는 그분을 본 적도 없던 이들이 들어와서 잔칫상에 자리를 잡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상반된 측면이 함께하는 것은, 누가 구원을 받을지 미리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일 듯합니다. 스스로 구원되리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쉽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것도 구원을 보장하여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그분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 알고 있다고 하여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만하지 말고 문이 닫히기 전에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일입니다. 언젠가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그 안에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이들이 먼저 그 잔칫상에서 첫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필리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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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 자신’이 구원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24-30)
1)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못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보다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많은가? 적은가?”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몇 명인지, 그 수가 많은지 적은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가?”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면, 전부 다 들어가고, 모든 사람이 회개를 안 하면, 전부 다 못 들어갑니다. 묵시록을 보면, 구원받은 의인들을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묵시 7,9) 만일에 ‘내가’ 그 큰 무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밖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경만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2) 26절의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 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주님 앞에서’ 했지만, ‘주님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외면했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을 외면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구경만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은 사람들, 또는 아예 말씀을 안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는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9)에 연결됩니다. 자기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자기들이 사는 길거리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셨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은 주님을 잘 알고 있고, 주님을 잘 믿은 신앙인들이라고 우기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자들입니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라는 말씀에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는 말은,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이 예수님의 나라에(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28절의 ‘너희’는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들이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들과 옛 성인들을 가리킵니다. 28절은 세례자 요한이 했던 말에 연결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29절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온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입니다. 29절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지위와 영예는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는 28절과 29절의 말씀을,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너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가 있는데, ‘너만’ 밖으로 쫓겨나 있게 되면, 그때 가서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4)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이지 소수의 사람들만 들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문은 ‘넓은 문’입니다. 활짝 열려 있는 아주 넓은 문. <지금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사람들에게는 ‘좁은’ 정도가 아니라 ‘닫혀 있는’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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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문을 닫은 집주인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두 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일이야 당연하겠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문밖에 선 이들은 집주인과 꽤 친분이 있어 보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식사도 함께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가르침도 즐겨 듣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 앞에서 오히려 단호하게 거부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우리는 성찬 전례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말씀 전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듣습니다. 미사는 우리의 구원 여정에 주어진 최상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미사 참례가 자동으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또 그분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과 그저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를 뿐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이 넓은 문이라면 참 좋겠으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애쓰며 노력하라고 주문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친분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결국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문밖에 서서 ‘울며 억울해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강하게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 들읍시다. 문 안팎의 온도 차가 매우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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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13,24)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성당 입구는 다른 성당과 달리 입구가 아주 좁은 편인데, 그 까닭은 십자군 이후 베들레헴을 점령한 사라센인들이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구를 좁고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더더욱 성당 내부의 예수님을 출산하신 후에 어머니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눕히셨던 ‘그 거룩한 자리’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좁은 문과 좁은 통로를 내려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만이 聖所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성소 중의 성소라고 할 수 있는 그 거룩한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과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이상하거나 거슬리는 부분은 없습니까? 먼저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13,23)라는 질문을 받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13,24)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는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13,23.24)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언급하신 좁은 문은 곧 구원받기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닫힌 문은 결코 어떤 누구도 닫힌 문을 여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로 들려옵니다. 결국 인간의 측면에서 ‘좁은 문’이라면, 하느님의 시선에서 ‘닫힌 문’인 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3,24)라는 말씀 속에 담긴 뜻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길 바라지만 전부가 아닌 그중에서 일부만 들어가겠고, 그마저도 한번 안에서 닫아버리면 아무도 닫힌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의 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문이 닫히고 나면 사람들은 문을 두드리면서,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13,26) 하고 애걸복걸하며 울부짖겠지만, 집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13,26.27) 하고 냉정하게 거부하실 거라, 뜻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냉정하게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거절의 이유인즉 그들은 평소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도 이웃에 어려움을 외면하고 “불의를 일삼은 사람들”(13,27)로서 뒤늦게야 구원받기 위한 선행 조건인 일상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고”(마태6,33) 실행하는 삶이라는 알게 되었지만 때는 늦으리라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구원)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라는 말씀을 통해 구원과 멸망은 이미 주어진 일상에서 어떤 시선에서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반복해서 예수님께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너희는 항상 깨어 살라, 는 말씀의 또 다른 가르침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예수님 이전과 이후 인생의 위대한 스승들 역시 두 가지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하나의 길은 어리석은 길- 죽음에로의 길- 넓은 길- 종살이 길- 눈멂의 길--俗人의 길이지만, 이에 반해 다른 길은, 지혜로운 길- 생명에로의 길- 좁은 길- 해방의 길- 눈뜸의 길- 聖人의 길로 구분 지었습니다. 예수님 역시도 두 가지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1)마태오 7,13-14 넓은 문과 넓은 길/ 좁은 문과 좁은 길; 2)마태오 7,24-27 어리석은 사람과 모래 위의 집/ 지혜로운 사람과 반석 위의 집; 3)마태오 6,24 재물 섬김의 길과 재물을 땅에 쌓아둠/ 하느님 섬김의 길과 재물을 하늘에 쌓아둠으로 구분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는 길과 문’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구원과 멸망의 길과 문은 지금 여기서 어떤 삶의 가치와 시선을 가지고 사느냐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시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시선을 갖고 사는 삶은 지금 당장은 힘들고 울겠지만, 훗날에 편하고 웃게 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13,30) 마지막 삶의 자리에서 웃고, 첫째가 되는 삶을 선택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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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90년대 초반, 노래방이 생겨나면서 친구들과 자주 들렀던 생각이 납니다. 시간제한이 있는 노래방에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약 1분이 채 남지 않았을 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렀던 노래는 꼭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노래방에 있는 노래 중에 가장 긴 노래였습니다. 이 가장 긴 노래를 함께했던 친구들이 한 소절씩 부르면서 마무리했던 것이지요.
이 노래가 끝난 뒤에는 시간을 초과하면서 놀았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 잘 부르는 노래, 의미 있는 노래 등으로 마무리합니다. 왜 바뀌었을까요? 시간을 연장하는 것보다 노래 부르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떠올리며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지금의 삶 자체가 중요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당연히 후자인 지금 삶 자체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 자체에만 집착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죽음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지금 삶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삶, 자기가 잘하는 삶, 또 의미 있는 삶으로 자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는 지금 삶에 특히 사랑하며 사는 의미 있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부분 건강, 재물, 성공이라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해서는 구원의 길로 향하는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통해 이 세상에서는 첫째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세상의 가치를 통해서는 꼴찌처럼 보이더라도,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때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지금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혹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면 어떨까요? 참으로 막막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잔칫상을 코 앞에 두고서 울며 이를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구원의 좁은 문을 향한 지금 우리 삶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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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뼈 있는 대화>
루카 13,22-30 (구원과 멸망)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뼈 있는 대화>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저희는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나는
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기만 한
그대들을 알지 못하고
나처럼
몸과 피로 먹힌
이들만 알고 있다네
저희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나는
나의 말을
듣고 배우기만 한
그대들을 알지 못하고
나처럼
말씀으로 들려진
이들만 알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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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힘써라>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다른 무엇에 앞서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사력을 다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애써 노력하듯이 우리도 구원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루카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루카8,21참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요한사도는“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24,13)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영적인 갈망으로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문은 좁지만 들어가면 있을 곳이 많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2)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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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던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을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는 어찌 들으면 참으로 모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문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닌 '좁은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부르심은 받지만 모두가 응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당신은 '문'이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두 번째 충격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또한 이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문이 열려 있으니 당장 들어오라는 다급함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문’은 내일 들어가야 하는 문이 아니라 오늘 당장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곧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충격은 지금과 그때에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과 그분의 눈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 출신이나 가문 혹은 세상의 출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첫째와 꼴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그렇습니다.오늘 우리는 이 모두를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급함과 절실한 요청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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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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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삶”>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자애로우시다.”(시편 145,12ㄴ)
태어나기도 좁은 문이고 내내 이어지는 좁은 문들의 연속입니다. 굳이 좁은 문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양상만 다를뿐 누구나 각자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도 잘 들여다보면 넓은 문일수 있습니다.
“이 선생,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 쉽게 살아!”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교사의 충고에,
“제겐 이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남보기에 힘든 좁은 문같았지만 이렇게 살지 않으면 못살 것 같았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부부생활도 결코 좁은 문이지 넓은 문일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진감래란 말도 있듯이 어제 고향집 카페에 함께 했던 두 좋은 분도 똑같이 좁은 문들을 통과해온 분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온통 좁은 문들뿐같습니다. 공동생활 역시 외관상 좁은 문같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수도생활도 밖에서 볼 때는 좁은 문이지만 이제 저에겐 역설적으로 날로 넓은 문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이런 진리를 분명히 밝힙니다.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감미로써 하느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성규 머리47-49)
규칙서 <7장 겸손에 대하여> 긴글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끝맺습니다. 머리말의 결론과 일치합니다. 겸손의 좁은 문들 열둘을 통과한 후에 펼쳐져 있는 넓은 문에 대한 묘사입니다.
“겸손의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자는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성규7.67-69)
새삼 좁은 문의 통과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좁은 문들 통과의 삶에 결코 값싼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삶은 평생 영적전쟁이라 하는 것이며 백전노장(百戰老將), 불퇴전(不退轉)의 ‘주님의 전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10월 중순 넘어 단풍 물들어가는 불암산의 풍경이 장관입니다. 요즘은 한국 어디서나 가을산 풍경은 이러합니다. 집무실 문을 열 때마다 되뇌는 두 편의 시가 좁은 문을 넓은 문으로 바꿔주며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1.“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2.“늘
눈앞에 있는 산
늘
눈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나름대로 좁은 문 통과의 비법을 알려줍니다.
“인생에 조급함이 닥쳐올 때마다 현자들의 이 한마디를 기억하라. ‘천천히 서둘러라.’”<다산>
“나는 관직을 맡은 후에 항상 네 글자를 지켜왔다. 바로 부지런함, 삼감, 조화로움, 느림이었다.”<송명신 언행록>
제가 자주 제기했단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물음도 바꿔 “삶은 넓은 문인가? 좁은 문인가?” 물을 수 있겠습니다. 답은 단 하나입니다.
“기도와 사랑이 있으면 삶은 선물이지만 기도와 사랑이 사라지면 삶은 짐이 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 기도와 사랑이 있으면 좁은 문도 넓은 문이 되겠지만 기도와 사랑이 사라지면 날로 삶은 무거워지고 문은 날로 좁아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값싼 은총은 없다는 것입니다. 저역시 날마다 매일강론쓰기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루 넓은 문의 하루가 펼쳐집니다. 하루하루 첩첩산중 산을 넘듯이 좁은 문을 통과하듯 써온 강론입니다. 온갖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오늘 복음의 주님의 충고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어지는 복음의 집주인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자 값싼 은총의 넓은 문 인생을 살아온 이들은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 하며 주님과의 친분을 과시하지만 완전 착각이었습니다. 주님을 상징하는 집주인의 반응이 참 냉정 단호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일방적으로 내 좋을 대로 하며 주님과 짝사랑 삶을 살아온 업보입니다. 한마디로 회개가 전무했던 삶입니다. 주님 앞에 일체의 기득권은 소용없습니다. 참으로 모두를 회개의 계기로 삼아 주님께 가까워지도록, 주님의 뜻에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세 사실에 놀란다 합니다. “내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 전혀 뜻밖의 사람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 꼭 천국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 셋입니다.
오늘 복음은 누가 하느님의 나라에 있는 지 실상을 보여줍니다. 바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과 더불어 동서남북 곳곳에서 나름대로 주님의 뜻에 최선을 다했던 이들이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합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 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한결같은 용기, 그리고 겸손과 진실, 정의와 선행의 삶에 항구히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어제 부부관계에 이어 오늘은 자녀와 부모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를 다룹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 주님은 좁은 문 통과의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즉흥적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사랑의 정신으로 대할 때 좁은 문은 넓은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꼰대가 아닌 존경과 사랑의 어른들이 될 것입니다. 종과 주인 관계는 요즘 없지만 이 관계의 진리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인 여러분, 종들의 주님이시며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종과 주인의 관계라지만 주종관계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차별하지 않는 주님 안에서 상호존중의 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회개를 통한 관점의 변화가,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 좁은 문 통과에 제일임을 봅니다. 좁은 문은 넓은 문이 되는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이, 한결같이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꺽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주시나이다.”(시편145,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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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 29)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어김없이
내려놓고
비워내는
잔치의
계절입니다.
단순한 행복
단순한 실천이
자신의 삶을
살아낸
고마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의
시작입니다.
하느님 없는
신앙은
공허하듯
하느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화답할 수 없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고마우신
하느님이
계시기에
시작도 있고
마무리도 있고
새로워지는
우리의
생활도 있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사랑의 실천을
지나야만
갈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의
잔칫상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아질 때
보게되는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입니다.
하느님 아닌
하느님을 많이
좇았습니다.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오늘도
최고의 선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동쪽도 서쪽도
북쪽도 남쪽도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쫓겨나지
않습니다.
최고의 선물은
사랑하며 살다가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가기에
가장 좋은 때는
지금입니다.
깨어있는 첫째
망설임의 꼴찌가
되는 내려놓고
비워내는
기쁜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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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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