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 창세기 49:16-28】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말씀 나눔】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자식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옆 사람과 나의 소유를 비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교 의식은 경쟁사회의 특징입니다. 학교에 가면 성적으로 줄을 세웁니다. 직장에 가면 연봉으로 줄을 세웁니다. 나이 들어서는 재산의 규모를 가지고 줄을 세웁니다. 끝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나보다 공부 잘하는 사람, 나보다 잘 사는 사람,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며 자신과 비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남이 가진 것을 보다가 정작 내가 받은 것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남의 것을 보다가 내 것을 잃어버립니다.
어쩌면 불공평하게 보이는 이 현실을 오늘 본문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임종 자리에서 열두 아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하나씩 이름을 부르며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 선언이 아들마다 다 다릅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열두 아들인데, 받는 말이 다릅니다.
그 차이 안에 오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지만, 야곱이 선포하는 내용은 모두 달랐던 것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른 분량과 다른 역할을 맡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단’에게는 어떤 선언을 했을까요?
16-17절을 보면,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단은 지혜롭고 기민하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의 백성을 심판하고 말굽을 물어서 말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다고 말합니다. 단은 상대를 기습하거나 약점을 공격하는 전술적 지혜와 민첩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단의 후손인 삼손의 활약이나 단 지파의 라이스 점령 사건을 이 특징을 잘 드러내 보입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단에게 축복의 말을 하다가 갑자기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약간 생뚱맞은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궁극적인 승리가 인간의 꾀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 고백이자 경고입니다.
사사시대 단의 후손인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한 것도, 그의 힘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단에 대한 선언에 이어 구원을 말하는 것은 ‘단이 뱀처럼 영리하게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 영리함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여호와께서 하신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이 단어가 오늘 본문 이곳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예슈아"(יְשׁוּעָה)입니다. 예수라는 이름도 바로 이 “예슈아”라는 단어와 연결됩니다. 야곱은 단과 갓 사이에서 갑자기 “주의 구원”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보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선임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은 갓에게 군사적인 용맹과 전쟁 승리를 선언합니다. 갓은 군대의 공격을 받아 쫓기는 험난한 상황을 겪을 것이나, 최종적인 승리를 누린다고 선언합니다. 갓의 후손인 갓 지파는 요단 동편에 정착했던 지파로, 성경에서 특히 “용맹한 전사들”로 묘사됩니다. 갓 지파는 역사적으로 “침략을 자주 받지만 끝내 반격하는 국경 전사 지파”의 이미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이야기입니다. 에릭 리델은 그 대회 100m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육상 선수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100m 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자신이 잘 달리지 않는 400m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나는 내 다리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합니다."
에릭 리델은 자신의 재능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했습니다. 야곱의 고백도 같은 맥락입니다.
단과 갓이 아무리 군사적으로 강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능력과 기도는 반대가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능력이 없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22-26절에 이어지는 요셉에 대한 축복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23-24을 보면,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요셉이 강할 수 있는 이유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 "네 아버지의 하나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요셉이 굳센 것이 아닙니다. 요셉을 붙드신 하나님이 굳세십니다. 갓이 반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갓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반격하게 하십니다. 각자의 분량 안에서, 그 분량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단과 갓에 이어 다음 야곱의 축복을 받은 아들은 아셀입니다.
아셀은 그의 후손이 비옥한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아셀 지파는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왕의 식탁을 책임질 정도로 풍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셀의 땅은 갈멜 산에서 시돈까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평야였습니다. 올리브와 포도가 넘쳤습니다. 아셀의 분량은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싸우는 사명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먹이고 섬기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납달리는 자유롭고 활기찬 삶을 축복받습니다. 그의 후손은 놓인 암사슴처럼 산악을 누비는 자유함과 민첩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후 납달리 지파가 자리 잡은 갈릴리 북부 지역은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납달리는 자유롭고 활기찬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납달리에게 주어진 분량은 자유였습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로 비유됩니다. 이리와 같은 호전성으로 악탈물에 의지해 살아갈 것입니다. 훗날 베냐민 지파는 초대 왕 사울과 사도 바울 같은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지만 역사적 영향력이 매우 큰 지파”로 인식됩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갓은 왜 아셀처럼 좋은 땅을 받지 못했을까요?
갓도 전쟁 말고 풍요를 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이는 전투의 자리에 서고, 어떤 이는 왕의 수라상을 차리는 것일까요?
오케스트라를 생각해보십시오. 수십 가지 악기가 있습니다.
바이올린은 공연 내내 활을 움직입니다. 수백 번 연주합니다. 그런데 팀파니 주자는 공연 내내 앉아서 기다립니다. 딱 한 번, 정해진 순간에만 칩니다. 그 한 번의 울림이 전체 음악의 흐름을 완성합니다. 지휘자는 그 한 번의 울림을 위해 팀파니 주자를 무대 위에 세웠습니다. 그 자리가 그의 분량입니다.
하나님의 오케스트라 안에서 어떤 이는 바이올린으로 부름 받고, 어떤 이는 팀파니로 부름받습니다. 갓은 전선을 지키도록 설계되었고, 아셀은 먹이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분량입니다. 둘 다 없어선 안 됩니다
28절에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같은 복을 준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맞는 복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계산 같은 형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분량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26절을 보면,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라고 선언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형제 중 뛰어난 자"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지르"(נָזִיר)입니다. 나실인을 가리키는 단어와 같습니다.
나실인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사람입니다. 요셉이 형제 중 뛰어난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구덩이와 노예 생활과 감옥이라는 자기 분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하셨습니다. 결국 요셉의 번성과 승리는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야곱의 집을 위해 애쓰고 힘쓴 만큼 전능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고 넘치는 복을 얻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 가운데 큰 규모와 세력을 가진 지파로 성장합니다. 이러한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량이 지금 내 앞에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 분량이 전선 같은 자리일 수 있습니다. 갓처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후방에서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것과 같은 자리일 수 있습니다. 아셀처럼 묵묵히 섬기는 자리일 수도 있고, 팀파니 주자처럼 딱 한 번을 위해 오래동안 기다리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분량입니다.
남의 분량이 더 커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남의 자리가 더 좋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야곱의 기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내 능력으로, 내 전략으로, 남의 분량을 탐낼 것이 아닙니다. 내 자리에서, 내 분량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가 내 분량입니다. 내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나의 분량입니다.
오늘 이 새벽, 내 분량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남의 분량을 바라보며 비교하지 마십시오. 내 자리에서 충실하십시오. 그 자리에서 야곱처럼 기도하십시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내 분량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 분량 안에서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분량의 자리에서 역사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어제 결단한 것을 실천했습니까?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②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십니까?
③ 오늘 나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분량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 자리가 하나님이 주신 분량임을 믿습니까?
④ 나는 지금 남의 분량과 내 분량을 비교하며 불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 오늘 내가 내 자리에서 내 능력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해야 할 구체적인 상황은 무엇입니까?
⑥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⑦ 기도문을 적고, 오늘 실천할 한 가지를 적으십시오
【추천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은혜의 찬양】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https://youtu.be/eYPkD_5j2RU?si=HM-gZf-HOOJwHgjn
【새벽예배 영상】
https://youtube.com/live/zrCbpPe7dU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