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경고이다. 바로 앞 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이런 자들의 경향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 영지주의적 경향의 사람들, 자기의 권위를 앞 세우며 추종자를 만드려는 세력 그리고 사적 이익과 명예를 추구하는 선생들이다. 이들이 공동체에 접근하는 방법은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여 순진한(≠순수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네 가지 유형의 공통성은 네 번째 유형의 사적 이익이다. 아무런 사적 이익이 없다면 그것은 좋은 동기이거나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바울은 그들이 '매끄럽고 아첨하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순진한(childish)사람들은 분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듣기 좋은 말을 선호한다. 그들에게 칭찬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반기며 직언하는 자들을 싫어한다. 그점을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며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보임으로써 대중을 열광시킨다. 바로 이점이 바울이 가장 염려한 점이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애써 만든 공동체가 분열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간다면 그야말로 죽 쒀서 남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별력이란 바울이든 누구든, 그가 사적 이익을 위하여 활동하는가의 문제이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사적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잘못된 착각에서 허구의 교리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시계탑의 역사를 조명할 때, 첫 회장인 럿셀은 아마도 사적 이익을 위하여 허구적 연대이론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럿셀의 성향은 연대 이론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사업가로서 성공을 이용하여 단번에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시한부 종말론을 끌여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의 결정적 증거는 1914년이 오기 한해 전에 법정에서 사적 이익을 위한 사건이 고발되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 기간 동안 그의 연대론을 확신에 찬 어조로 제법 다수의 사람들을 모았으나, 막상 그해를 앞둔 1913년에 이르러서야 보통의 밀을 '기적의 밀'로 광고하며 신도들에게 싯가의 60~300배로 비싸게 팔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1914년이 지나 그의 주장이 거짓됨이 드러나고 조직이 와해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이다. 그런데 1914년에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함으로써 그의 교리적 주장과는 매우 달랐지만 무언가 예언이 맞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오히려 그의 조직은 탄력을 받았으나, 하느님께서 그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기차 안에서 그를 데려 가신 것이다. 그는 그때 그의 나이 62세로서 자연사로서는 비교적 적은 나이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추측일 수 있으나 그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종말론으로 희망 고문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그의 비교적 짧은 인생은 가벼운 벌이었으리라. 그를 이어받은 러더포드는 비록 술을 좋아하고 독선적 성격이 강했지만 그가 럿셀의 뒤를 잇는 권위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미국 변호사 협회장으로서 충분히 생을 누릴 만한 신분이었다. 비록 그도 1926년이란 종말론을 발표하여 희망고문을 주었지만, 불발이 되자 솔직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다. 문제의 출발점은 시한부 종말론과 그 연대 이론에 있다. 아직도 그들은 착각인지 고의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허구 관념으로 신도들을 희망 고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전히 통치체 이사들은 어느 정도의 사적 이익을 즐거워하며 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다. 그들이 연합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한 세대 이론의 종말론에 의지하지 않을 때, 인간의 구원은 자력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자력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받도록 하는 현실적 방법이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자연과 분리된 초월 인격으로 사물의 존재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분을 요술 지팡이를 든 마법의 상자로 오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과 자연 안의 사물의 작용인 것이지 그것을 초월하는 능력은 없다 다만 모든 존재물은 존재 자체를 좋아하기 때무에 존재가 강화되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그것이 자연이 가진 생산성이고 하느님의 존재성(창조력)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