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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神市)배달’과 ‘청구(靑丘)배달’을 기록한 문헌들
‘신시(神市)’배달을 기록한 문헌
◆<삼국유사> 일연 1206~ 1289 <권1 기이1 고조선(왕검조선)>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 유희령 1480~ 1552 <권1 전조선>檀君 姓桓氏 名 王儉 .. 有神人桓因之子 桓雄 .. 謂之神市 在世理化
◆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홍언필 1530 <권54 평안도4 영변대도호부 고적 태백산)太佰山(古記 昔有天神桓因 名庶子雄 .. 謂之神市 主人間三百六十餘事)
◆ <기언記言> 허목 1595~1682 <권32 외편동사1 단군세가>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之神市 生檀君..
◆ <약천집藥泉集> 남구만 1629~1711 <제29잡저 동사변증 단군> 云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 受天符印三箇..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 且其五行治水之法과 皇帝中經之書가 又出於太子扶婁오 而又傳之於虞司空하고 後에 復爲箕子之陳洪範於紂王者가 亦則皇帝中經과 五行治水之說이니 則蓋其學이 本神市邱井均田之遺法也니라.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皇帝中經>이 부루태자에게서 나와 우사공虞司空에게 전해졌는데, 후에 기자箕子가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진술한 홍범구주 또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이다. 본래 그 학문은 배달국 신시시대의 구정법邱井法과 균전법均田法에서 전해 내려온 법이다. ([태백일사]<태백일사>)
‘청구(靑丘)’배달을 기록한 문헌
◆ <규원사화> 북애자 1675 <태시기단군기>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 曰靑丘國 宅樂浪忽'
◆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환웅께서 천하를 안정시키고 정하신 나라의 이름이다. 수도는 신시요, 후에 청구국으로 옮겼다. 18세를 전하니, 역년은 1,565년이다. <삼성기(三聖紀 下)>
◆ ‘神時之季에 有蚩尤天王이 恢拓靑邱하시고. 배달국 신시 시대 말기에 치우천황이 계시어 청구(靑邱)를 널리 개척하셨다.’ <「삼성기三聖紀 上」>
◆ 蚩尤起靑邱하시니 萬古振武聲이로다. 淮岱皆歸王하니 天下莫能侵이로다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누구도 침범할수 없었사옵니다. <단군세기(檀君世紀)>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符經)』,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 88쪽을 보면 ‘『천부경(天符經)』’ 의 유래가 나와 있다. 천부경은 “천제환국구전지서야(天帝桓國口傳之書也)”라. 천부경은 환국(桓國)에서 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한 글이라는 것이다.
환웅천왕의 배달국 때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해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신지(神誌)가 남긴 전고비문(篆古碑文)을 보고 작첩(作帖)을 복원해서 전어세자야(傳於世者也)라.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음양오행 문화는 역사성으로 보면 2, 3천 년이나 4, 5천 년 전에 나온 것이 아니다. 흔히 음양론의 원 뿌리, 연원을 하도河圖, 낙서洛書로 말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서 들어가 보면, 최소 1만 년 전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음양론이 정리된 첫 작품이 『천부경天符經』이다.
선사시대 때의 유물이나 사람들이 살던 주거 터, 동굴 벽화를 분석해 놓은 자료들을 보면, 태고시대의 사람들이 음양적 사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천부경』이 음양론의 출발점이며, 실제 그것을 문명화한 진리의 원본이 5,600년 전, 태호 복희씨가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받아 내린 하도河圖다. 그 하도河圖에서 팔괘 문화, 주역 문화가 나온 것이다.
천부경을 보면 1, 2, 3이 나오고, 운삼사運三四(3, 4) 나오고, 성환오칠(成環五七)에서 5, 7이 나오고, 生七八九 생 7, 8, 9가 나오고,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10까지 해서, 수의 원리가 1에서 10까지 다 드러난 것이다. 1만 년 전에 1에서 10의 수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다. 이 지구촌 인류문화사상 처음으로 1에서 10수의 자연수를 발명을 한 것아다. 이게 무슨 아라비아인들 또는 중동 인도 유럽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다.
지금의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24절후와 해시계 규표를 태호복희(BCE 3528 ~ BCE 3413)씨가 처음 발명한 것이다. 이것을 시간 공간의 구성 원리로 다시 한 번 계시를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다. 시간과 공간의 원리에 의해서, 1에서 10수의 구성 원리를 보는 것이다.
『낙서(洛書)』에는 1에서 9까지 수가 배열되어 있는데 2 7 6, 9 5 1, 4 3 8, 이것을 서양에서는 마방진魔方陣magic square이라 하며 교과서에도 나온다.
미국의 수학자 프랭크 슐츠F.Swetz는 『낙서洛書의 유산Legacy of the Luoshu』에서 ‘낙서洛書는 비단길을 통해 동서양을 왕래한 아랍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인도, 동남아, 중동, 유럽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서양 문명의 뿌리를 추적해 봤더니 이슬람 문화권에도 낙서洛書가 전달됐고 유대문화에도 낙서가 들어 있더라는 얘기다. 2,500년 전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이것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자연수의 체계에 눈을 뜬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오늘의 서양 과학문명은 끊임없이 피타고라스로부터 영감을 받아왔다고 했다.
서양문명의 뿌리는 동양이라고 말하는 서양의 학자들
서구 유럽의 역사왜곡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블랙아테나』이다.
유럽에서는 원래 유럽문명의 기원은 이집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이 19세기 후반 같은 아리안인종의 고대 그리스를 적극 발굴하여 유럽과의 연계성은 강화하고 이집트와의 연계성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문명과는 별도로 성장해온 독창적인 문명으로 그리스를 부각시켜 그 때부터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었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를 읽고서 그리스의 역사와 서양사, 그리고 세계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반성을 하였다. 그리스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2000~2500년 늦게 시작돤 문명이었으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나 페니키아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시켜왔으리라는 것이 순리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약소국인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이 될 사람들과 함께 크레타로 간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그리스신화는 이집트신화와 터키지역의 히타이트신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탈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솔론, 유클리드, 플라톤 등 그리스의 유명학자들이 이집트를 갔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보다 15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기원은 이집트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수학의 기원도 이집트라고 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많은 그리스신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말했다.<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볼프강 작스가 『반자본 발전사전』12쪽에서 이야기한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도 세계사, 사상, 학문은 서구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학자들이 수많은 역사왜곡으로 서구에 편향된 세계관을 만들어왔고 우리는 지금도 따르고 있다. “서구중심의 탈식민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오리엔트』는 일찍부터 서구가 앞섰다는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영국이 벵골을 식민지화하면서 인도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유럽은 중남미의 은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고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투자가 증가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다음에야 겨우 아시아을 앞섰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추월한 것이 1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양을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곳으로 낙인을 찍고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문명적인 곳으로 서양은 긍정적인 것으로 동양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동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자신들이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시키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현실 자체를 유럽학자들이 왜곡하여 거짓말을 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1820년대까지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서구가 세계사를 가장 발전시켜왔다고 배워왔고 따라서 근대를 서구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중세는 동양의 중세보다 뒤쳐진 암흑중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칼 맑스나 막스 베버 같은 학자들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은 서양이 우월하다는 관점에서 자료들을 해석하고 이론화 했기 때문이다. <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서양사는 아시아 문명이 모태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출처: 세계일보 2011년7월15일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가짜다.
리 오리엔트 = 다시 동방으로 !!
저자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하고 세계사에 관한 사고의 틀을 완전히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된 바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발전과 세계체제의 기원에 관하여 근본적인 재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랑크의 역작이다.
" 오리엔트" "빛은 동양에서".
세계 문명의 근원은 동양이었고 동양 역사의 시작이 곧 세계 역사의 시작이었다.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를 수정 하기를 요구한다. 우선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그 이전, 그러니까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 하고 있었다.
1800년 이전 변변한 자원도, 풍부한 자본도 없었던 유럽은... 자원과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1800년 이전 유럽은 아시아의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2003년 3월 07일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M. 홉슨 저 / 정경옥 역 / 에코리브르 / 2005년 1월/ 18,000원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동도동기(東道東器)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특징을 축약해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이 말은 동도동기(東道東器)로 바꾸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문명은 물론이고 기계문명마저도 그 발원지는 동양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이 서양과의 문명발달 경쟁에서 근소한 시간적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틀어 ‘숙련된’ 동양에서 ‘미숙한’ 서양으로 ‘모든’ 인문적 지식이 ‘전수’가 되었다는 의미다. 아울러 이 전수목록에는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거의 완제품 수준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료와 자료들은 충분히 치밀하고 방대하다. 따라서 구태여 저자가 존 M.홉슨이라는 전형적인 서양인 혈통이란 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문명발달의 원조 논쟁에 있지 않고, 인류문명에 있어서 동양의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던 문명사적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는지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서양이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부터임도 알게 된다.
동양은 ‘창조’ 서양은 ‘모방’
“서양 사람들은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가 문명에 혁신을 가져온 인쇄기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은 이동형 인쇄기에 사용하는 최초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적어도 50년은 먼저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서문 중)
흔히 인류의 3대 발명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라고 한다. 이 발명품들은 모조리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서양으로 전수되었다. 앞서 저자의 서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입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의 먼지를 털어 내어야 한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은 훨씬 오래 전부터, 아니 역사의 전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교류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은 늘 문명의 수혜자였다.
동양은 ‘창조’하고 서양은 ‘모방’했다. 사실상 근대까지도 유럽인들의 기술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동양에 비해 아주 조악했다.
한 유럽 지식인은 그의 저서 『위대한 우(禹)임금과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에서 ‘유럽이 17세기에 이르러 마치 ‘유전자 대혁명’을 겪는 것처럼 일대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뉴턴 등을 비롯한 대과학자들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양은 더 이상의 ‘창조적 지식’의 출현이 없는 까닭 모를 정체기로 빠져들게 된다
서양인들의 모방과 착취
문제는 서양인들이 주도권을 쥐자마자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약적인 발흥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지적인 부채에만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식민지화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확보라는 이중 삼중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동양으로부터 이러한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기술적인 모방까지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을 말함에 있어서 수학(數學)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오늘날의 십진법 수 체계 그 외에도 항해술, 조선술, 천문학, 도로망 등 세계를 이미 하나로 만들었던 교통수단은 그 어느 것도 동양인들의 지적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이라고 착각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작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이하 생략)
대만출신으로 일본 도카이대학 교수로 있는 사세이키가 쓴 『유럽 중심사관에 도전한다』에 따르면 “유럽중심 사관이 대두된 것은 17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서구가 직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을 확실하게 확립시켰고 이러한 발전의 최첨단에 서구가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정립되던 시기이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중심사관이 유럽을 우월한 모습으로 역사를 과장하고 왜곡하였다. 유럽에서 만든 세계사는 서구편향적으로 쓰여졌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유럽학자들이 주도하여 세계사를 유럽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왜곡하여 썼고 이러한 해석과 왜곡에 의존한 세계사가 현재도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수메르 문명의 연구학자인 S.N 크래머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에서 서양의 문명은 뿌리는 수메르라고 한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동방에서 왔다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의 모세 5경,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쓰여진 제사문화와 性문화, 그리고 율법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법조문(法條文)의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함무라비法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함무라비法의 기원은 바로 인류최초의 법전인 수메르법전이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거의 같다.
『구약』의 첫머리 「창세기」에는 뚜렷하게 다신관으로 나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 하여 하나님이 유일신이 아닌 ‘우리’라는 다신(多神)으로 나온다. 초기 성서는 다신多神 문화다.
또 기독교 성서(聖書)에는 하나님이 엘로힘과 여호와(야훼)와 백보좌 하나님 세 분이 등장한다. 「구약 성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서로써 유대인들의 조상신, 야훼(여호와) 하나님만 나온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야훼)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신약 성서」에는 백보좌의 아버지 하나님만 등장한다.
유대민족이 이집트 노예 시절을 겪으면서 고난에 처한 유대민족을 강력하게 통합시킬 힘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이에 모세는 유대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묶기 위해, 그들 민족의 하나님인 야훼와의 계약을 통해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 신앙을 선포하게 된다. 이말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관으로 인해 야훼 이외의 신들, 각기 다른 민족마다 자신들의 민족신(지방신)과 조상신을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다신관이 사라지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선교사들은 각 나라에 들어갈 때마다, 그 지역의 신神으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갔다. 야훼가 영어권으로 들어갔을 때는 God로, 중국에서는 천주, 상제, 神으로, 일본에서는 가미로, 조선에 와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은 하느님에 관한 신관이 인식되지 않아 야훼를 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에 오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관이 아주 발달되어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기독교가 쉽게 전파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야훼를 야훼라 소개하지 않고, 야훼를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포교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전략은 적중하여 손쉽게 한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서양종교가 도입된지 400년이 넘는 일본, 중국, 인도에서는 기독교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100년만에 전인구의 40%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신 여호와가 세계 절대신으로 바뀌게 된 계기
유대족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풀려날 때까지의 약 50년간(BCE 586~538)을 역사에서는 유대족의 바빌론 유수기라고 한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킨다.
페르시아 왕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은 거룩하신 주님의 은총이시다. 유대민족을 선택하신 여호와만이 전지전능하신 유일신이시다!”하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유대교를 정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첫째, 신은 여호와 한 분뿐이다.
둘째, 유대민족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
셋째, 인류의 종말이 오고 신이 메시아를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신다 하는 유대교의 메시아사상, 유일신 신관이 정립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동지역 유대족의 여호와가 인격신에서 초월신으로, 대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으로 신격이 변색되어 버린다. 신관神觀 자체가 중동의 지역신에서 우주의 절대자 신격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여호와신은 본래 중동의 지방신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신앙관을 그대로 계승하여 기독교인들은 여호와신을 우주의 조물주로 신앙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여호와신이 원 조물주이고, 창조주이고, 우주의 주관자로서 인간으로 올 수가 없는 초월신이다. 그 여호와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인 예수를 내보냈으며, 예수는 육화한 하나님으로서 심판의 때가 되면 믿는 사람을 건져 올리기 위해 다시 이 세상에 재림한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어떤 신인가?
구약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이 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애굽기 3:6) 이 내용은 상식으로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또 에스겔에는“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에스겔 34:30)는 구절이 나온다.
이 두 구절만 봐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족속을 약속의 백성으로 삼아 통치를 하는 유대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본래 아라비아 반도에 뿌리를 둔 유대족의 부족신이자 조상신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원래 전쟁 전문가인 군신軍神이다.
중동 지방의 족속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전쟁 신이다. 시편을 보면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편 24:8) 라고 찬양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라는 구절이 있고,
사무엘상에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사무엘상 6:19)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보면 여호와는 때에 따라 생명을 무수히 죽이는 전쟁신이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자기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길을 막는 자는 뱃속에 있는 애까지 다 도륙하라, 멸망을 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사무엘상 15:3)고.
얼마 전 가톨릭의 차동엽 신부는 <맥으로 읽는 성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구약을 읽어보면‘아니, 이게 무슨 하나님이냐. 제 백성을 위해서 남의 백성을 씨도 안 남기고 뱃속의 애까지 다 쳐 죽이라 하는분이 무슨 하나님이냐.’라고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신화의 아버지 조셉 캠벨은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프로에서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 가면 ‘가나안 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가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 한솥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지요.” 라고 했다.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이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었다. 오직 내 백성만 위하고 타민족은 적대시하는 살육적인 신관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는 것이다. 중동 전역에서 서로를 죽이는 참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외쳤는데 그분이 여호와인가? 여호와는 전쟁신이다. “씨도 남기지 말고 전멸시켜라”라고 하는. 전 인류 조상신 버리게 하고. 그 죄악을 한번 생각해 본다.
선교사들은 각 나라에 들어갈 때마다, 그 지역의 신관으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갔다. 야훼가 영어권으로 들어갔을 때는 God로, 중국에서는 천주, 상제, 神으로, 일본에서는 가미로, 조선에 와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2세기 중엽, 당시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상류층까지 전파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313년에는 국교로 인정된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삼위일체론은 확고하게 정립된 교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삼위일체의 인정 여부를 놓고,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258-336)파와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297-373)파가 대립하게 된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릴 것이라 판단하여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성자가 하나님 아버지다’라고 공인되면서 이후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곧 하나님 아버지라고 믿게 되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배 논리에 의해 예수님이 순식간에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본래의 애국가 가사는 “상제는 우리 황상(皇上)을 도우소서”라는 구절로 되어 있다. 대한제국이 1904년도에 공식 제정 선포하여 각급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했던 애국가이다. 이 애국가는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1945년 8·15 해방 이후에는 ‘상제님’이 ‘하느님’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애국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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