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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上帝) 문화를 외면한 “애국가”
1. 서론
현재의 “애국가”는 1937년 안익태(安益泰)가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작곡하였고, 작사가는 윤치호(尹致昊)·안창호(安昌浩)·민영환(閔泳煥) 등이라는 설이 있으나, 윤치호(尹致昊)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공인된 것이 없다.
2. 기독교인이었던 윤치호와 안익태
조선(朝鮮) 말기에 쇠퇴하는 국운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양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의 국토 개발 이권을 마구 침탈해 갔는데, 서양 제국주의는 그들의 앞선 문물과 문화를 앞세워 조선에 정치. 사회. 문화 및 종교. 사상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그들이 서구 문명과 더불어 서구 기독교 사상을 들고 왔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서 개화(開化) 운동를 하고, 독립(獨立) 운동을 했던 지도자들은 대개 서구 사상과 기독교 사상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윤치호(1865-1945년) 선생은 선교사 앨런의 주선으로 기독교 신학과 인문과학을 공부하고 1895년 귀국하여 총리대신(장관)이 되었으며, 1896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1910년 대한 기독교 청년연맹(YMCA)을 결성한 사람이다. 애국가의 가사는 윤치호의 기독교적 사상과 가치관 때문에 기독교적 언어와 사상이 짙게 베여있다. 특히, 동양(東洋)의 전통 역사 속에 뿌리깊게 내려오던 상제(上帝)의 명칭을 서양(西洋)과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윤치호가 <애국가>에 남겨놓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안익태(1906-1965년) 선생은 처음에는 기독교(신교)를 믿었는데, 나중에는 천주교(구교)를 믿었던 사람이다. 안익태 선생은 수많은 애국가 가사들 중에서 자신과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윤치호 선생이 지은 애국가 가사를 선택했고, 거기에 곡을 붙여서 새로운 "애국가” 모형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현재의 애국가는 윤치호와 안익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거의 무방하다. 그들의 크나 큰 공로를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 의해 동양 사상의 상제(上帝) 언어가 사라지고, 하나님이란 언어가 삽입됨으로써, 동양의 상제(上帝) 문화는 점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던 것이다. 결국, 애국가(愛國歌)는 기독교인들이 득세(得勢)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상제(上帝) 문화의 핵심 언어인 상제(上帝)라는 언어가 삭제되는 것이다. 애국가의 초창기 시절에는 상제(上帝)라는 언어가 많이 나왔다가 점점 기독교인들이 정치. 사회적으로 득세(得勢)하는 과정 속에서 상제(上帝)라는 언어를 외면한 것이다.
3. 상제(上帝) 언어가 삭제되는 애국가 변천사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1882년에는 미국, 1884년에는 영국ㆍ독일ㆍ이탈리아, 1889년에는 러시아와 프랑스, 1892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ㆍ덴마크, 1901년에는 벨기에 등과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와같이 세계 열강국과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됨에 따라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고, 애국애족의 사상과 더불어 서로 다른 애국가가 도처에서 쏟아지게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각종 애국가가 성창되기 시작하여, 1896년 무렵에 각 지방에서 불린 애국가 만해도 10여 종류에 이른다. 1896년 나필균의 <애국가>, 전경택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유태성의 <애국가>, 달성 예수교인들의 <애국가>, 새문안교회의 <애국가>, 최병희의 <애국가>, 평양 김종섭의 <애국가>,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이용우의 <애국가>, 배재학당의 <애국가> 등등이 그것이다.
1896년 11월 21일, 1896년 11얼 26일 : 처음 공식적으로 불려진 <애국가>는 독립문을 세울 때에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것이 시초이다. 이 <애국가>는 윤치호 선생이 작사하였고, 배제학당의 음악교사인 “버커어”가 아일랜드의 민요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 곡에 맞춰서 부르도록 한 것이다.
성조 신성 오백년은 우리황실이요, 산수 고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1절)
이쳔만 오직 한마음 나라 사랑하야, 사농공상 상하업시제 직분다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2절)
1898년, 독립협회가 독립문에서 가진 개국 506돌 경축식에서 “무관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영국의 국가(國歌)인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의 곡조에 맞춰서 불려졌다.
놉흐신 상쥬(上帝)님 자비론 상쥬(上帝)님 궁휼보쇼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쥬여 이 나라 보우 하쇼서. (1절)
우리의 단군(檀君)쥬 폐하 만세 만만세 만세로다.
복되신 오늘 날, 은혜를 내리사 만수무강케 하야 주쇼서. (2절)
1900년, “증보문헌비고”의 권 103 악고(樂考)에서의 <대한 애국가>도
위의 개국 506돌 경축식의 그것과 같다.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를 역사상 처음으로 작곡하였는데, 영국 국가(國歌)의 곡조와 비슷하였고, 주로 국가의 중요 행사 때마다 군악대에 의해 연주되었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개국 506돌 경축식의 그것과 같다.
놉흐신 상쥬(上帝)님 자비론 상쥬(上帝)님 궁휼보쇼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쥬여 이 나라 보우 하쇼서. (1절)
우리의 단군(檀君)쥬 폐하 만세 만만세 만세로다.
복되신 오늘 날, 은혜를 내리사 만수무강케 하야 주쇼서. (2절)
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에서는 “각급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하라는 문건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가사 내용을 보급하였고, 각급 학교에서 널리 불려졌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서.
성수무강(聖壽無疆)하샤 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갓치 사으소서.
위권(威權)이 환영(환瀛)에 덜치샤 오천만세에 복록(福綠)이 무궁케 하쇼셔.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를 도으소셔.
1905년(을사조약), 1907년(정미조약) 이후, 에케르트가 작곡한 곡에 가사 내용을 약간 달리한 <애국가>가 불려지기도 했는데,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뎨(上帝)여 우리나라를 도으쇼셔.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원히 번영하야
해달이 무궁하도록 셩디 동방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上帝)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1907년, 윤치호 선생이 펴냈고, 1908년에 보급된 '찬미가'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애국가> 가사가 실려 있다.
1절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후렴)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 남산 우해 저 소나무 철갑을 두룬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절 :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야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 후, <애국가>의 가사는 조금씩 달리하여 불려지기도 했지만, 아일랜드의 민요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 곡에 맞춰서 부르거나, 혹은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의 곡조에 맞춰서 불려졌다.
1914년, “최신 창가집”에 나와 있는 <애국가>에는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 내용과 비슷하며,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上帝는 大韓을 도우소서. .....”
1919년 3월1일, 일제의 칼날 앞에서 3.1 만세 운동을 할 때에도 우리 민중들은 아일랜드의 민요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 곡에 맞춰서 애국가를 불렀다고 선교사들은 기록하고 있다.
1936년, 안익태는 한국의 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불려지거나, 혹은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불려지는 것을 보며, 우리 민족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우리 실정에 맞는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현재의 애국가가 처음 불려진 것은 애국가가 작곡되던 1936년 베들린 울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을 찾아가 함께 부른 것이 처음이다. 안익태는 이 <애국가>를 주제로 하여 1936년 자신의 대표작인 교향곡 <한국환상곡>을 작곡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의 국가가 되었다. 정부 수립(1948) 이후부터 대한민국 국가로 준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곡은 형식이 간결하면서도 그 분위기는 장중한 것이 특징이다.
4. 안익태 선생과 애국가
안익태 선생은 1906년 12월 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안익태 선생은 6세 때에 동네의 “예배당(교회)”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특히 교회에서 풍금(올겐)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안선생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였다. 또 하나의 동기는 7살 때에 큰 형이 동경에서 사다준 바이올린 이었는데, 이 바이올린은 그로 하여금 더욱 음악에 매혹되게 했을 뿐 아니라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1914년에 평양 종로 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취주악대에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매료되어 아버지를 졸라 트럼펫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학예회 때 마다 으례히 한손에는 바이올린을 또 한손에는 트럼펫을 들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18년에 숭실 중학교 (기독교계 학교)에 입학하자, 교장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곧 바로 관현악단에 입단 시켰고,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음악부장이 되어 매주 한번 씩은 집에 있는 축음기를 학교로 가져가 음악 감상회를 여는 등 그의 음악 활동은 열정을 더해갔다. 이러한 안선생의 음악적 재능을 본 형님은 이번에는 '첼로'를 사다주어 여름 방학 때에는 서울로 올라와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의 주법을 익혀 첼로까지 연주하게 되자 그의 인기는 솟을 대로 솟아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가를 연주하는 등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안익태 선생은 어릴 때부터 자존심과 정의감이 강해 이러한 그의 의지는 숭실 중학교에서 당시 친일교사를 배척하는 주동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학 처분을 받게 되자,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익태 선생은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제 경찰의 쫓김을 받게 되었고, 결국 당시 숭실 학교 교장이었던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일단 위기를 넘긴 후, 다시 박사의 주선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숭실 중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일본 국립 음악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배웠다. 1932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제1첼로 주자로 활약하였다. 1934년, 헝가리로 건너가 작곡을 배우며 민족주의 정신과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지휘법을 공부하였고, 1936년에는 몇년 전부터 착상해 왔던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1940년까지 슈트라우스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독자적 지휘 활동를 하였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에스파니아 여인과 결혼, 에스파니아 국적을 얻었고,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 1957년 일시 귀국하여 자작곡 “강천성악(降天聖樂)” “한국 환상곡” 등을 지휘하였고, 1961년 다시 귀국하여 국제 음악제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1963년까지 3회에 걸쳐서 주관하였다. 1957년 문화포상을 받았으며,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65년 에스파니아에서 타계하였다. 작품으로는 <애국가><한국 환상곡><강천성악><애! 강산의 의기논개><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
현재의 애국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후렴)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절 :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출처] 애국가: 상제님이 하나님으로 바뀐 배경|작성자 강바람
이거도 어디선가 퍼 왔는데 주소 안 적어서 모르게네요
첫댓글 역학자님 ~
애국가에 대해서 이야기가 분분합니다 .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세요 ~
잘 보았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느님은 기독교적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극사상에서 따온 말이고(하나의님) 하느님은 하늘님의 원어가 ㄹ 이 탈락된 말로(아드님, 따님, 소나무, 버드나무,등과같이 ㄹ 탈락 현상 이고요.)하늘에 계신 모든조상을 뜻하는 보통명사 입니다. 상제니,천제니 하는 말은 살아계실제 부르는 존칭이고요. 돌아가신 모든 조상을 일컷는 말은 하느님이지요! 즉 하느님은 보통명사 입니다. 산은 보통명사지만 백두산은 고유명사 이듯이!! 기독교인이 무슨 뜻인줄도 모르고 숫개 이알듯이 중얼거리는 소리와는 다르지요! 즉 "하느님 아버지시여" 하며 몽유병자처럼 짖는 헛소리와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
한아님, 한알님, 한으님, 한을님...
@아나사마 예! 아나시마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한아님 알님,으님 을님 울님등으로 쒸여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의미는 같지만 지방 혹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 합니다만, 언어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하지요! 또한 새로운 의미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요는 현제 사용하고 있는 뜻과 의미가 이상한 방향으로 (예수 혹은 여호아)변천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 라는 요지 입니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고유의 의미를 이용해 잡신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이를 통해 세력을 확산 하고 있는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요즈음 자라나는 어린이 들이 마귀에 홀리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으로 치부 하기엔 안타까운 현상 이라는 것이지요! 마치 우리의 얼을 상실하는 아픔이기에 꽂감 접말 하는것이구요! 위의 상제라는 의미의 해석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조상을 한사람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이런 의미가 더 문제라는 것이지요! 마치 박근혜가 현제의 나라가아닌 통령이기에 박근혜에게 충성하라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