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禮): 하늘이 정해준 질서, 상례비요(喪禮備要) ~ 사계 김장생 선조 |
예(禮) 즉 하늘이 정해준 질서( 다시 말하면 대자연과 우주의 형성원리이며 동시에 인간의 구체적인 법도) 와 인간의 일상과 변하는 도리를 깨달아 실천함으로 인간다운 삶을 구현함.
*** 상례비요(喪禮備要) ***
김장생의 연보에 의하면 그의 나이 36세(1583년, 선조16)에 이 예학서를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김장생은 부친상(父親喪) 중 이였다. 김장생은 가례(家禮)의 연구에 모든 정력과 열의를 쏟았는데 그 중에서도 상례(喪禮)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의 서문을 보면 김장생이 상례를 중시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항상 말할 때 반드시 “관례(冠禮)와 혼례(婚禮),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대개 집안에서 날마다 사용하는 체재이고 길흉(吉凶)에 통하는 수요(需要)이니 진실로 하나라도 폐하여 익히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예의 쓰임은 평소에 길할 때에는 쉽게 행할 수 있으나 급하고 흉변(凶變)이 있을 때에는 많이 잃은 것이니 진실로 평소에 익힌 것이 아니라면 마땅함에 합당하고 절목(節目)에 응하기 어렵다. 하나라도 잃은 것이 있으면 후에 해도 잃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가 예를 반드시 다 하고자 하는 까닭이며 사례 중에 상례가 가장 중요하며 또한 간절한 것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실려 있는 바가 진실로 이미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나 혹은 옛날과 지금의 마땅함이 다르고 때에 따라 쓰임에 합당하지 않음이 있어서 시골의 선비들이 능히 그 중요함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변하고 떳떳한 바에 통달하지 못하여 이로써 병이 되었다.
내 친구 신의경(申義慶)은 예학에 깊어서 일찍이 경전을 널리 살펴 그 대요(大要)를 모아 책을 하나 편찬하였는데 이름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본으로 해서 고금의 예(禮)와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참고하여 일에 따라 첨가하고 보충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또한 시속(時俗)의 제도를 붙여 놓아서 실제 사용하는 자들에게 편리하게 절목(節目)이 매우 자세히 갖추어져 있다.
내가 이 책에 대하여 반복해서 자세하게 교정하고 대략적으로 더할 것과 뺄 것을 덧붙여 놓았으니 대저 규모와 조례는 모두 주자(朱子)의 뜻을 따랐으며 감히 나의 억측을 새롭게 만들어서 집 위에 침상을 더하는 것 같이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어리석고 공부하는 선비들로 하여금 책을 열면 명백하게 알아 갑자기 급한 일을 당했을 때 살펴보는 바가 있어 예를 잃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또한 혹시 이 책으로 인하여 학문이 시작되어 여러 가지로 통하여 굽은 것이 드러나며 끝내는 성인께서 예를 제작한 뜻을 살펴서 하늘이 정해준 질서와 인간의 일상과 변하는 도리를 알게 된다면 아마도 풍속과 교화에 만의 하나라도 보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뿐이노라.
위의 서문을 살펴보면 예에 대한 김장생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먼저 김장생은 상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 이유는 관례(冠禮)나 혼례(婚禮), 제례(祭禮) 등은 미리 예측하여 준비할 수 있으므로 예의 절차를 다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상례는 갑자기 당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 때 상례를 담당해야할 사람들의 심정이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서 평상심을 잃기 때문에 온전히 예를 갖추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김장생은 상례의 중요성을 극구 역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저술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바로 그의 벗인 신의경(申義慶)이다. 신의경(申義慶)은 그의 5대조와 증조만이 확인되고 진사(進士)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예학에 해박한 학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김장생의 존중을 받을 정도로 깊이 있는 학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처음으로 편찬한 사람은 신의경이였다. 그러나 김장생이 여기에 잘못된 것을 고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이 저술을 제 편찬하였으니 사실상 이 저술은 김장생과 신의경의 공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장생이 이 책을 완성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겉으로의 이유는 예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창졸간에 부모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때 이 책을 참고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상례를 잘 모시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차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김장생은 현실적으로 실천되는 예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장생은 예의 본질을 도외시 한 학자는 절대 아니다. 김장생은 예를 하늘이 정해준 질서, 곧 다시 말하면 대자연과 우주의 형성원리이며 동시에 인간의 구체적인 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상례비요(喪禮備要) 범례(凡例)에는 이 책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내용을 보충하거나 고친 것, 내용의 일반성에 따라 옮겨 놓은 것 등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내용을 보충한 것
㉠ 초종(初終)의 설치(楔齒)와 철족(綴足)
㉡ 습(襲)할 때의 모(冒)와 설빙(設冰)
㉢ 소렴(小殮) 후의 질대(絰帶)
㉣ 역복(易服)에서 심의(深衣)를 사용한 것
㉤ 길제(吉祭)와 개장(改葬)
∙ 우리 나라 풍속에 따라 고친 것
: 상복을 입고 있는 장자(長子)가 출입할 때 입는 묵최(黙衰)는 옛날의 제도 도 아니고 우리의 풍속도 아님으로 차라리 우리 풍속에 따라 방립생포직 령(方笠生布直領)을 쓰도록 함.
∙ 내용을 옮긴 것
㉠ 대상(大祥)에서의 음주(飮酒)와 식육(食肉)을 담후(禫後)로 옮김.
㉡ 대상(大祥)에서의 천주(遷主)와 복침(復寢)을 길제(吉祭)의 뒤로 옮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편술한 김장생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본 틀로 삼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거나 수정하여서 정리하였다. 이것은 김장생의 예학에서 가장 중추적인 사상인 합리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김장생은 전통적인 예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중시하였지만 그가 더욱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예의 정신을 살리면서 현실적으로 예를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그의 예학정신은 우리나라의 예학의 존재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그가 재정리해 놓은 예의제도는 지금까지 우리 후손들이 실천하고 있는 예의근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 논산문화원 간행, "영원한 선비 사계 김장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