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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엔 가을이 성큼! 오대산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다
2024년 9월 고을학교는 강원도 <평창고을>
평창고을은 백두대간을 품으며 해발고도 700m 이상인 곳이 전체 면적의 약 60%를 차지하는 고원지대입니다. 특히 동·서·북 3면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이 청정하고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고원에 가을이 성큼! 9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제111강으로 유서 깊은 문화유산들이 숨어 있는, 풍광 좋은 강원도 <평창고을>로 향합니다. 오대산의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며 천년 고찰 월정사와 상원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년 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라 기억도 생생합니다.
▲오대산 월정사 들어가는 길,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약 1km에 이르는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울울창창 뻗어 있다. ‘월정사’ 하면 ‘전나무숲길’ 할 정도로 힐링의 명소가 됐다.Ⓒ평창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1강은 2024년 9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1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코스는 서울-평창읍(평창향교/노산성)-대화면(청심대/수항리사지)-진부면(월정사/상원사)-봉평면(판관대/팔석정/봉산서재)-서울의 순입니다.
▲<평창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1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1,000m가 넘는 산들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북으로 오대산(1,563m)과 계방산(1,577m)을 경계로 홍천군, 남으로 삼방산(980m)과 절개산(876m)을 경계로 영월군, 서로는 태기산(1,261m)과 청태산(1,200m)을 경계로 횡성군, 동으로 백두대간의 청옥산(1,256m), 두타산(1,394m), 발왕산(1,458m)을 경계로 정선군, 강릉시와 접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운두령으로 홍천에, 동쪽으로는 진고개와 대관령으로 강릉에, 남쪽으로는 밤치재와 칠족령으로 영월에, 서쪽으로는 문재와 양구두미재를 통해 횡성에 넘나들었습니다.
물줄기는 오대천이 동강, 평창천이 서강이 되어 남한강에 합류합니다.
물줄기는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오대천이 남쪽으로 흘러 정선으로 접어들어 조양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동강이 되고,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흥정천과 대화천을 받아 안고 남서쪽으로 흘러 영월로 접어들어 서강이 되어,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듭니다. 특히 평창강은 읍내를 가로지르며 심하게 곡류하면서 유역에 평지를 이루어 주진리, 후평리, 약수리 등에 많은 농지를 만들었습니다.
▲가을빛 짙어가는 오대산 고요한 산사는 다양한 문화재를 품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고귀한 것들을 보듬어냈는지 신비로우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평창군
평창의 역사는 고구려 우오현에서 시작했습니다.
평창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영역에 속해 있어 우오현이라 불렸으며,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내생군 안의 욱오현으로 바뀌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는 757년(경덕왕 16)에 욱오현을 백오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시대는 940년(태조 23) 신라 시대에 쓰던 백오현을 평창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4도로 나눌 때 원주현에 속했고, 1299년(충열왕 25) 현령을 파견하고 원주에서 분리하였으며 1387년(우왕 13) 평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평창현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1392년(태조 원년) 태조의 5대조인 목조 비의 고향인 관계로 지군사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23)에 지방 관제를 고침에 따라 군이 되어 군내면 등 5개 면을 관할하였고, 1979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평창읍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거점 성인 노산성이 있습니다.
노산성(魯山城)은 평창의 진산인 노성산(해발 419m)에 축조된 산성으로, 성의 삼면은 평창강이 휘감아 흐르는 감입곡류 하천을 이루며 천혜의 절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여만리 일대가, 남쪽으로 중리, 하리, 천변리 일대가 관망됩니다.
구체적인 축조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여 평창 일대를 확보한 후 이곳을 거점 성으로 경영한 것으로 보이며 2004년 지표 조사를 통해 성내에서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기와 편, 토기 편, 도기 편, 백자편 등이 확인되어 적어도 통일 신라 시대부터 이 산성이 경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토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 시대까지 계속 운영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평창 군수 권두문이 지사함, 우응민, 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의 전체 둘레는 571m로,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바로 아래를 삭토하고 그 바깥쪽에 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성벽을 따라 편편한 내환도(內環道)를 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홍천 대미산성의 축조법과 같은 방식입니다.
서벽의 길이는 약 115m로, 비교적 잘 남아있는 구간은 길이 820cm, 높이 530cm 정도의 규모이며, 편마암을 이용하여 품(品)자 형태의 면석 쌓기를 하였습니다. 남벽의 길이는 약 334m로, 산 사면의 일부를 깎아 낸 후 폭 6m의 회곽도를 조성하였습니다. 동벽의 길이는 약 122m로, 이곳에도 내환도를 냈고 동벽은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성내 시설로는 여러 곳의 건물지와 산 정상 부근에 한 곳의 우물터가 있는데 규모가 7.7(동서)×8.5(남북)m이며 깊이는 약 2m입니다.
▲메밀꽃 필 무렵, 평창 일대는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한다.Ⓒ평창군
읍치구역에는 향교만 남아있습니다.
평창향교(平昌鄕校)는 1658년(효종 9)에 최창민과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1719년(숙종 45), 1729년(영조 5)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파손된 것을 1953년에 중수하고 1973년에 보수하였습니다. 현재는 2층 누각인 풍화루와 명륜당,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아있고 이 외에도 홍살문과 부속건물 3동이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율곡을 잉태한 곳에 봉산서재와 판관대가 있습니다.
봉산서재(蓬山書齋)는 율곡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가 중종 때(1530년대) 수운판관으로 이곳에서 18년간(1526~1543) 거주할 때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사당입니다. 1661년(현종 2)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 5리를 봉산서재의 위토(位土)로 하사받아 율곡의 위업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습니다.
1895년 이곳의 유학자인 홍재홍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1906년 유생들의 성금으로 중건되었으며 원래 봉산재라 하였으나 한말의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이 이곳에서 의병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서(書)’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곳을 창건할 때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태은 추성구 등이 조직한 강수계의 노력이 컸다고 하여 강수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원의 현판 또한 ‘講修齋’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의암 유인석이 쓴 글씨입니다.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잉태한 곳으로,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수운판관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를 따서 판관대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비문을 살펴보면 이곳 봉평면 백옥포리는 조선 시대에는 강릉부에 속했으며 양지동에서 흘러오는 흥정천이 판관대를 돌아 금당산 밑에서 속사천을 만나 큰 줄기를 이루는 산자수명한 곳으로, 예로부터 ‘산 태극, 수 태극’이라 이르는 곳이니 과연 동방의 성현이 잉태할만한 곳이라 할 정도로 명당이라 합니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이곳 봉평에 살았다는 기록과 함께 강릉에서 지내던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만나고 1536년 음력 2월 이곳으로 옮겼으며 당시 수운판관 직에 있는 이원수가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돌아와 신사임당과 합방하여 결국에는 율곡을 잉태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고원엔 가을이 성큼! 오대산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다
2024년 9월 고을학교는 강원도 <평창고을>
평창고을은 백두대간을 품으며 해발고도 700m 이상인 곳이 전체 면적의 약 60%를 차지하는 고원지대입니다. 특히 동·서·북 3면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이 청정하고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고원에 가을이 성큼! 9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제111강으로 유서 깊은 문화유산들이 숨어 있는, 풍광 좋은 강원도 <평창고을>로 향합니다. 오대산의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며 천년 고찰 월정사와 상원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년 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라 기억도 생생합니다.
▲오대산 월정사 들어가는 길,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약 1km에 이르는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울울창창 뻗어 있다. ‘월정사’ 하면 ‘전나무숲길’ 할 정도로 힐링의 명소가 됐다.Ⓒ평창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1강은 2024년 9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1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코스는 서울-평창읍(평창향교/노산성)-대화면(청심대/수항리사지)-진부면(월정사/상원사)-봉평면(판관대/팔석정/봉산서재)-서울의 순입니다.
▲<평창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1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1,000m가 넘는 산들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북으로 오대산(1,563m)과 계방산(1,577m)을 경계로 홍천군, 남으로 삼방산(980m)과 절개산(876m)을 경계로 영월군, 서로는 태기산(1,261m)과 청태산(1,200m)을 경계로 횡성군, 동으로 백두대간의 청옥산(1,256m), 두타산(1,394m), 발왕산(1,458m)을 경계로 정선군, 강릉시와 접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운두령으로 홍천에, 동쪽으로는 진고개와 대관령으로 강릉에, 남쪽으로는 밤치재와 칠족령으로 영월에, 서쪽으로는 문재와 양구두미재를 통해 횡성에 넘나들었습니다.
물줄기는 오대천이 동강, 평창천이 서강이 되어 남한강에 합류합니다.
물줄기는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오대천이 남쪽으로 흘러 정선으로 접어들어 조양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동강이 되고,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흥정천과 대화천을 받아 안고 남서쪽으로 흘러 영월로 접어들어 서강이 되어,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듭니다. 특히 평창강은 읍내를 가로지르며 심하게 곡류하면서 유역에 평지를 이루어 주진리, 후평리, 약수리 등에 많은 농지를 만들었습니다.
▲가을빛 짙어가는 오대산 고요한 산사는 다양한 문화재를 품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고귀한 것들을 보듬어냈는지 신비로우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평창군
평창의 역사는 고구려 우오현에서 시작했습니다.
평창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영역에 속해 있어 우오현이라 불렸으며,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내생군 안의 욱오현으로 바뀌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는 757년(경덕왕 16)에 욱오현을 백오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시대는 940년(태조 23) 신라 시대에 쓰던 백오현을 평창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4도로 나눌 때 원주현에 속했고, 1299년(충열왕 25) 현령을 파견하고 원주에서 분리하였으며 1387년(우왕 13) 평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평창현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1392년(태조 원년) 태조의 5대조인 목조 비의 고향인 관계로 지군사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23)에 지방 관제를 고침에 따라 군이 되어 군내면 등 5개 면을 관할하였고, 1979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평창읍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거점 성인 노산성이 있습니다.
노산성(魯山城)은 평창의 진산인 노성산(해발 419m)에 축조된 산성으로, 성의 삼면은 평창강이 휘감아 흐르는 감입곡류 하천을 이루며 천혜의 절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여만리 일대가, 남쪽으로 중리, 하리, 천변리 일대가 관망됩니다.
구체적인 축조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여 평창 일대를 확보한 후 이곳을 거점 성으로 경영한 것으로 보이며 2004년 지표 조사를 통해 성내에서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기와 편, 토기 편, 도기 편, 백자편 등이 확인되어 적어도 통일 신라 시대부터 이 산성이 경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토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 시대까지 계속 운영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평창 군수 권두문이 지사함, 우응민, 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의 전체 둘레는 571m로,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바로 아래를 삭토하고 그 바깥쪽에 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성벽을 따라 편편한 내환도(內環道)를 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홍천 대미산성의 축조법과 같은 방식입니다.
서벽의 길이는 약 115m로, 비교적 잘 남아있는 구간은 길이 820cm, 높이 530cm 정도의 규모이며, 편마암을 이용하여 품(品)자 형태의 면석 쌓기를 하였습니다. 남벽의 길이는 약 334m로, 산 사면의 일부를 깎아 낸 후 폭 6m의 회곽도를 조성하였습니다. 동벽의 길이는 약 122m로, 이곳에도 내환도를 냈고 동벽은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성내 시설로는 여러 곳의 건물지와 산 정상 부근에 한 곳의 우물터가 있는데 규모가 7.7(동서)×8.5(남북)m이며 깊이는 약 2m입니다.
▲메밀꽃 필 무렵, 평창 일대는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한다.Ⓒ평창군
읍치구역에는 향교만 남아있습니다.
평창향교(平昌鄕校)는 1658년(효종 9)에 최창민과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1719년(숙종 45), 1729년(영조 5)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파손된 것을 1953년에 중수하고 1973년에 보수하였습니다. 현재는 2층 누각인 풍화루와 명륜당,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아있고 이 외에도 홍살문과 부속건물 3동이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율곡을 잉태한 곳에 봉산서재와 판관대가 있습니다.
봉산서재(蓬山書齋)는 율곡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가 중종 때(1530년대) 수운판관으로 이곳에서 18년간(1526~1543) 거주할 때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사당입니다. 1661년(현종 2)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 5리를 봉산서재의 위토(位土)로 하사받아 율곡의 위업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습니다.
1895년 이곳의 유학자인 홍재홍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1906년 유생들의 성금으로 중건되었으며 원래 봉산재라 하였으나 한말의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이 이곳에서 의병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서(書)’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곳을 창건할 때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태은 추성구 등이 조직한 강수계의 노력이 컸다고 하여 강수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원의 현판 또한 ‘講修齋’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의암 유인석이 쓴 글씨입니다.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잉태한 곳으로,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수운판관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를 따서 판관대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비문을 살펴보면 이곳 봉평면 백옥포리는 조선 시대에는 강릉부에 속했으며 양지동에서 흘러오는 흥정천이 판관대를 돌아 금당산 밑에서 속사천을 만나 큰 줄기를 이루는 산자수명한 곳으로, 예로부터 ‘산 태극, 수 태극’이라 이르는 곳이니 과연 동방의 성현이 잉태할만한 곳이라 할 정도로 명당이라 합니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이곳 봉평에 살았다는 기록과 함께 강릉에서 지내던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만나고 1536년 음력 2월 이곳으로 옮겼으며 당시 수운판관 직에 있는 이원수가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돌아와 신사임당과 합방하여 결국에는 율곡을 잉태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고원엔 가을이 성큼! 오대산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다
2024년 9월 고을학교는 강원도 <평창고을>
평창고을은 백두대간을 품으며 해발고도 700m 이상인 곳이 전체 면적의 약 60%를 차지하는 고원지대입니다. 특히 동·서·북 3면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이 청정하고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고원에 가을이 성큼! 9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제111강으로 유서 깊은 문화유산들이 숨어 있는, 풍광 좋은 강원도 <평창고을>로 향합니다. 오대산의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며 천년 고찰 월정사와 상원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년 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라 기억도 생생합니다.
▲오대산 월정사 들어가는 길,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약 1km에 이르는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울울창창 뻗어 있다. ‘월정사’ 하면 ‘전나무숲길’ 할 정도로 힐링의 명소가 됐다.Ⓒ평창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1강은 2024년 9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1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코스는 서울-평창읍(평창향교/노산성)-대화면(청심대/수항리사지)-진부면(월정사/상원사)-봉평면(판관대/팔석정/봉산서재)-서울의 순입니다.
▲<평창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1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1,000m가 넘는 산들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북으로 오대산(1,563m)과 계방산(1,577m)을 경계로 홍천군, 남으로 삼방산(980m)과 절개산(876m)을 경계로 영월군, 서로는 태기산(1,261m)과 청태산(1,200m)을 경계로 횡성군, 동으로 백두대간의 청옥산(1,256m), 두타산(1,394m), 발왕산(1,458m)을 경계로 정선군, 강릉시와 접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운두령으로 홍천에, 동쪽으로는 진고개와 대관령으로 강릉에, 남쪽으로는 밤치재와 칠족령으로 영월에, 서쪽으로는 문재와 양구두미재를 통해 횡성에 넘나들었습니다.
물줄기는 오대천이 동강, 평창천이 서강이 되어 남한강에 합류합니다.
물줄기는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오대천이 남쪽으로 흘러 정선으로 접어들어 조양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동강이 되고,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흥정천과 대화천을 받아 안고 남서쪽으로 흘러 영월로 접어들어 서강이 되어,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듭니다. 특히 평창강은 읍내를 가로지르며 심하게 곡류하면서 유역에 평지를 이루어 주진리, 후평리, 약수리 등에 많은 농지를 만들었습니다.
▲가을빛 짙어가는 오대산 고요한 산사는 다양한 문화재를 품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고귀한 것들을 보듬어냈는지 신비로우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평창군
평창의 역사는 고구려 우오현에서 시작했습니다.
평창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영역에 속해 있어 우오현이라 불렸으며,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내생군 안의 욱오현으로 바뀌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는 757년(경덕왕 16)에 욱오현을 백오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시대는 940년(태조 23) 신라 시대에 쓰던 백오현을 평창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4도로 나눌 때 원주현에 속했고, 1299년(충열왕 25) 현령을 파견하고 원주에서 분리하였으며 1387년(우왕 13) 평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평창현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1392년(태조 원년) 태조의 5대조인 목조 비의 고향인 관계로 지군사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23)에 지방 관제를 고침에 따라 군이 되어 군내면 등 5개 면을 관할하였고, 1979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평창읍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거점 성인 노산성이 있습니다.
노산성(魯山城)은 평창의 진산인 노성산(해발 419m)에 축조된 산성으로, 성의 삼면은 평창강이 휘감아 흐르는 감입곡류 하천을 이루며 천혜의 절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여만리 일대가, 남쪽으로 중리, 하리, 천변리 일대가 관망됩니다.
구체적인 축조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여 평창 일대를 확보한 후 이곳을 거점 성으로 경영한 것으로 보이며 2004년 지표 조사를 통해 성내에서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기와 편, 토기 편, 도기 편, 백자편 등이 확인되어 적어도 통일 신라 시대부터 이 산성이 경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토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 시대까지 계속 운영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평창 군수 권두문이 지사함, 우응민, 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의 전체 둘레는 571m로,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바로 아래를 삭토하고 그 바깥쪽에 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성벽을 따라 편편한 내환도(內環道)를 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홍천 대미산성의 축조법과 같은 방식입니다.
서벽의 길이는 약 115m로, 비교적 잘 남아있는 구간은 길이 820cm, 높이 530cm 정도의 규모이며, 편마암을 이용하여 품(品)자 형태의 면석 쌓기를 하였습니다. 남벽의 길이는 약 334m로, 산 사면의 일부를 깎아 낸 후 폭 6m의 회곽도를 조성하였습니다. 동벽의 길이는 약 122m로, 이곳에도 내환도를 냈고 동벽은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성내 시설로는 여러 곳의 건물지와 산 정상 부근에 한 곳의 우물터가 있는데 규모가 7.7(동서)×8.5(남북)m이며 깊이는 약 2m입니다.
▲메밀꽃 필 무렵, 평창 일대는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한다.Ⓒ평창군
읍치구역에는 향교만 남아있습니다.
평창향교(平昌鄕校)는 1658년(효종 9)에 최창민과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1719년(숙종 45), 1729년(영조 5)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파손된 것을 1953년에 중수하고 1973년에 보수하였습니다. 현재는 2층 누각인 풍화루와 명륜당,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아있고 이 외에도 홍살문과 부속건물 3동이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율곡을 잉태한 곳에 봉산서재와 판관대가 있습니다.
봉산서재(蓬山書齋)는 율곡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가 중종 때(1530년대) 수운판관으로 이곳에서 18년간(1526~1543) 거주할 때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사당입니다. 1661년(현종 2)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 5리를 봉산서재의 위토(位土)로 하사받아 율곡의 위업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습니다.
1895년 이곳의 유학자인 홍재홍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1906년 유생들의 성금으로 중건되었으며 원래 봉산재라 하였으나 한말의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이 이곳에서 의병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서(書)’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곳을 창건할 때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태은 추성구 등이 조직한 강수계의 노력이 컸다고 하여 강수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원의 현판 또한 ‘講修齋’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의암 유인석이 쓴 글씨입니다.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잉태한 곳으로,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수운판관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를 따서 판관대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비문을 살펴보면 이곳 봉평면 백옥포리는 조선 시대에는 강릉부에 속했으며 양지동에서 흘러오는 흥정천이 판관대를 돌아 금당산 밑에서 속사천을 만나 큰 줄기를 이루는 산자수명한 곳으로, 예로부터 ‘산 태극, 수 태극’이라 이르는 곳이니 과연 동방의 성현이 잉태할만한 곳이라 할 정도로 명당이라 합니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이곳 봉평에 살았다는 기록과 함께 강릉에서 지내던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만나고 1536년 음력 2월 이곳으로 옮겼으며 당시 수운판관 직에 있는 이원수가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돌아와 신사임당과 합방하여 결국에는 율곡을 잉태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고원엔 가을이 성큼! 오대산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다
2024년 9월 고을학교는 강원도 <평창고을>
평창고을은 백두대간을 품으며 해발고도 700m 이상인 곳이 전체 면적의 약 60%를 차지하는 고원지대입니다. 특히 동·서·북 3면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이 청정하고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고원에 가을이 성큼! 9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제111강으로 유서 깊은 문화유산들이 숨어 있는, 풍광 좋은 강원도 <평창고을>로 향합니다. 오대산의 비경과 하얀 메밀밭과 울울창창 전나무숲을 거닐며 천년 고찰 월정사와 상원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년 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라 기억도 생생합니다.
▲오대산 월정사 들어가는 길,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약 1km에 이르는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울울창창 뻗어 있다. ‘월정사’ 하면 ‘전나무숲길’ 할 정도로 힐링의 명소가 됐다.Ⓒ평창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1강은 2024년 9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1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코스는 서울-평창읍(평창향교/노산성)-대화면(청심대/수항리사지)-진부면(월정사/상원사)-봉평면(판관대/팔석정/봉산서재)-서울의 순입니다.
▲<평창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1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1,000m가 넘는 산들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평창의 지형은 북으로 오대산(1,563m)과 계방산(1,577m)을 경계로 홍천군, 남으로 삼방산(980m)과 절개산(876m)을 경계로 영월군, 서로는 태기산(1,261m)과 청태산(1,200m)을 경계로 횡성군, 동으로 백두대간의 청옥산(1,256m), 두타산(1,394m), 발왕산(1,458m)을 경계로 정선군, 강릉시와 접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운두령으로 홍천에, 동쪽으로는 진고개와 대관령으로 강릉에, 남쪽으로는 밤치재와 칠족령으로 영월에, 서쪽으로는 문재와 양구두미재를 통해 횡성에 넘나들었습니다.
물줄기는 오대천이 동강, 평창천이 서강이 되어 남한강에 합류합니다.
물줄기는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오대천이 남쪽으로 흘러 정선으로 접어들어 조양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동강이 되고,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흥정천과 대화천을 받아 안고 남서쪽으로 흘러 영월로 접어들어 서강이 되어,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듭니다. 특히 평창강은 읍내를 가로지르며 심하게 곡류하면서 유역에 평지를 이루어 주진리, 후평리, 약수리 등에 많은 농지를 만들었습니다.
▲가을빛 짙어가는 오대산 고요한 산사는 다양한 문화재를 품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고귀한 것들을 보듬어냈는지 신비로우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평창군
평창의 역사는 고구려 우오현에서 시작했습니다.
평창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영역에 속해 있어 우오현이라 불렸으며,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내생군 안의 욱오현으로 바뀌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는 757년(경덕왕 16)에 욱오현을 백오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시대는 940년(태조 23) 신라 시대에 쓰던 백오현을 평창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4도로 나눌 때 원주현에 속했고, 1299년(충열왕 25) 현령을 파견하고 원주에서 분리하였으며 1387년(우왕 13) 평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평창현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조선 시대는 1392년(태조 원년) 태조의 5대조인 목조 비의 고향인 관계로 지군사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23)에 지방 관제를 고침에 따라 군이 되어 군내면 등 5개 면을 관할하였고, 1979년 읍으로 승격하면서 평창읍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거점 성인 노산성이 있습니다.
노산성(魯山城)은 평창의 진산인 노성산(해발 419m)에 축조된 산성으로, 성의 삼면은 평창강이 휘감아 흐르는 감입곡류 하천을 이루며 천혜의 절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여만리 일대가, 남쪽으로 중리, 하리, 천변리 일대가 관망됩니다.
구체적인 축조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여 평창 일대를 확보한 후 이곳을 거점 성으로 경영한 것으로 보이며 2004년 지표 조사를 통해 성내에서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기와 편, 토기 편, 도기 편, 백자편 등이 확인되어 적어도 통일 신라 시대부터 이 산성이 경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토 유물로 볼 때,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 시대까지 계속 운영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평창 군수 권두문이 지사함, 우응민, 이인노 등과 함께 백성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의 전체 둘레는 571m로,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한 곳에만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바로 아래를 삭토하고 그 바깥쪽에 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성벽을 따라 편편한 내환도(內環道)를 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홍천 대미산성의 축조법과 같은 방식입니다.
서벽의 길이는 약 115m로, 비교적 잘 남아있는 구간은 길이 820cm, 높이 530cm 정도의 규모이며, 편마암을 이용하여 품(品)자 형태의 면석 쌓기를 하였습니다. 남벽의 길이는 약 334m로, 산 사면의 일부를 깎아 낸 후 폭 6m의 회곽도를 조성하였습니다. 동벽의 길이는 약 122m로, 이곳에도 내환도를 냈고 동벽은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성내 시설로는 여러 곳의 건물지와 산 정상 부근에 한 곳의 우물터가 있는데 규모가 7.7(동서)×8.5(남북)m이며 깊이는 약 2m입니다.
▲메밀꽃 필 무렵, 평창 일대는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한다.Ⓒ평창군
읍치구역에는 향교만 남아있습니다.
평창향교(平昌鄕校)는 1658년(효종 9)에 최창민과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1719년(숙종 45), 1729년(영조 5)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파손된 것을 1953년에 중수하고 1973년에 보수하였습니다. 현재는 2층 누각인 풍화루와 명륜당,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아있고 이 외에도 홍살문과 부속건물 3동이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율곡을 잉태한 곳에 봉산서재와 판관대가 있습니다.
봉산서재(蓬山書齋)는 율곡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가 중종 때(1530년대) 수운판관으로 이곳에서 18년간(1526~1543) 거주할 때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사당입니다. 1661년(현종 2)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 5리를 봉산서재의 위토(位土)로 하사받아 율곡의 위업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습니다.
1895년 이곳의 유학자인 홍재홍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1906년 유생들의 성금으로 중건되었으며 원래 봉산재라 하였으나 한말의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이 이곳에서 의병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서(書)’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곳을 창건할 때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태은 추성구 등이 조직한 강수계의 노력이 컸다고 하여 강수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원의 현판 또한 ‘講修齋’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의암 유인석이 쓴 글씨입니다.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잉태한 곳으로,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수운판관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를 따서 판관대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비문을 살펴보면 이곳 봉평면 백옥포리는 조선 시대에는 강릉부에 속했으며 양지동에서 흘러오는 흥정천이 판관대를 돌아 금당산 밑에서 속사천을 만나 큰 줄기를 이루는 산자수명한 곳으로, 예로부터 ‘산 태극, 수 태극’이라 이르는 곳이니 과연 동방의 성현이 잉태할만한 곳이라 할 정도로 명당이라 합니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이곳 봉평에 살았다는 기록과 함께 강릉에서 지내던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만나고 1536년 음력 2월 이곳으로 옮겼으며 당시 수운판관 직에 있는 이원수가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돌아와 신사임당과 합방하여 결국에는 율곡을 잉태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