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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토 스키파, Tito Schipa
(27 December 1888 – 16 December 1965)
이탈리아의 테너 가수.
티토 스키파는 오페라 역사에 가장 뛰어난
리릭 테너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깃털처럼 가볍고
우아한 목소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유명한 베냐미노 질리,
조반니 마르티넬리, 아루렐리아노 페르틸레,
자코모 라우리 볼피등의 전설적인 명
테너들이 활동하고 있던 시대였지만,
티토 스키파는 그의 고유 영역인 리릭 레지에로의
레퍼토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령하였다.
그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노래투, 메짜 보체(mezza voce)와
피아니시모의 효과적인 사용법으로 그만의 독특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기의 목소리와 음악성,
표현력이 맞지 않는 곡이면 노래하지 않았다.
또한 건강등 자기관리에 철저하여
노년까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티토 스키파는 가수가 지휘를 병행하는데 대한
대표적인 옹호자였으며, 오늘날 플라시도 도밍고가
그 좋은 예라 할수 있다.
깃털처럼 가볍고 우아한 목소리.
20세기 최고 레지에로(leggiero)테너 티토 스키파.
디지틀 시대의 차고 시린 CD음만은 못하지만
낡은 복각 CD를 타고 흐르는 스키파의 목소리는
그 지직이는 잡음에 상관없이 너무나 맑고 또렷하고 아름답다.
섬세한 목소리와 함께 완벽에 가까운 딕션(발음) 덕분에
이탈리아에선 그가 노래 부르는 날엔 도무지
'리브레토'(libretto, 오페라 대본집)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노래만 듣고도 가사를 다 알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토 스키파(Tito Schipa)는 1889년 1월 2일,
이탈리아의 남부 레체(Lecce)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은
그의 생년월일을 1888년 12월 27일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전기를 쓴 Ranzo d'Andrea에 의하면
그는 그 해의 마지막에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병역을 연기하려고 그를 1989년 1월 2일에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웠고 당시 유명 가수의 출발이
대개 그러했듯 그도 노래 하나로 모든 상황을 극복했다.
성당 행사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주교의 눈에 띄어, 신학교에 입학한다면 학비를 대주고
노래공부까지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렇게해서 만난 스키파의 첫 스승은
알체스테 가룬다(Alceste Garunda)라는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이었다.
그는 스키파의 재능을 철석같이 믿고 3년을 가르친 다음
그 수익금 전부를 제자에게 주었다.
밀라노의 에밀리오 피콜리(Emiglio Piccoli)라는
더 좋은 스승에게 가라는 여비였다.
피콜리에게 2년을 더 배운 스키파는 이 두번째 스승의
주선으로 1911년,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데뷔했다.
이때의 성공을 바탕으로 2년동안 고향을 비롯한 각 지방의
오페라 극장을 돌며 20여곡의 레퍼토리를 확보했다.
1913년, 밀라노의 '달 베르메' 가극장이 당대 최고로 떠오르던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Amelita Gali Curci)의 상대역으로
스키파를 지목한 것이었다.
벨리니와 도니제티의 정통 벨칸토 오페라에서 찰떡 궁합을
자랑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황금의 콤비로 명성을 떨쳤다.
갈리 쿠르치와는 스키파 딸의 대모를
그녀가 맡을 정도로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스키파의 최초의 레코딩 역시 1913년에 이루어졌는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리골레토>, <라 조콘다> 등의
아리아를 부른 음원은 현재 님버스와 EMI 음반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최초의 해외공연 역시 같은 해에 경험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가극장이
그 무대였는데, 당시 메트로폴리탄이나 라 스칼라에 못지않은
세계적 극장이었으며, 성악가들에게 엘도라도로 여겨진 곳이었다.
그의 명성은 끝없이 올라갔고, 너무나 정확한 딕션마저 화제였다.
스키파의 너무나 정확한 딕션때문에 관객들이 따로
대본을 살 필요가 없어져서 밀라노의 인쇄업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우스개 소문이 돌 정도였다.
1914년에는 로마 가극장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
이듬해에는 1950년대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던
라 스칼라에 데뷔했다.
그에게 대 가수로의 기회를 열어준 달 베르메 극장에서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의 지휘로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와 함께 노래했다.
1917년에는 런던과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 진출했는데,
특히 스페인에서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때부터 그는 스페인을 제 2의 고향이요,
스페인어를 제 2의 언어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1917년은 푸치니가 <제비>를 초연한 해이기도 했다.
이 오페라의 주인공 루제로는 젊고 매력적으로 밝으면서도
열정적인 캐릭터로 스키파에게 안성마춤이었다.
이것을 안 푸치니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초연의
주인공으로 아직 20대의 젊은 티토 스키파를 선택했다.
바야흐로 스키파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1919년, 스키파는 시카고 시립 오페라에 데뷔했다.
반면 경쟁극장인 메트로에서는 이듬해 카루소가 떠난
자리를 베냐미노 질리가 채우게 되었다.
두 라이벌의 진검 승부가 비록 제 각기 다른 도시였지만,
미국에서 동시에 벌어진 셈이다.
스키파에게 유리했던 점은 아멜라타 갈리 쿠르치라는
최고의 파트너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의 미성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교감이 생긴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스키파의 인기는 당시 시카고 오페라 경영진의 중요 지시
사항이었던 앙코르 절대 불가 원칙마저 깨트렸다.
<마르타> 중 "꿈과같이" 를 부른 후, 청중들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앙코르를 요구했으므로 지휘자는 한번 더
지휘봉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극장측이 이를 문제삼아 지휘자를 해고하겠다고 하자,
스키파가 나도 함께 그만 두겠다고 고집을 하여
없던 일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티토 스키파의 메트로에의 데뷔는 뒤늦은
1932년에야 이루어졌다.
질리때문에 12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의 메트로 데뷔를 풀어준 것도 질리였다.
1932년 시즌을 앞두고 메트측이 대공황을 이유로 출연료
일괄 삭감 방침을 전달하자 자존심이 상한
질리가 유럽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시카고를 떠난 스키파는 질리가 거절했던 계약 조건으로
그 빈자리를 선선히 물려 받았다.
이미 충분한 부를 움켜 쥐었으므로,
"메트로폴리탄의 간판 스타" 라는
명예를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스키파도 무솔리니 때문에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뻔했다.
1941년 남미 연주회 도중, 무솔리니의 양자이자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치아노 백작의 권유를 받아
조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전시에는 라 스칼라와 로마를
위시한 이탈리아 극장에서 노래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패전 후 파시스트 정권에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다행히 적극적인 동조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
덕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별 문제가 없었다.
미국에서 스키파의 활동 기반이 처음에 시카고,
그 다음에 뉴욕이었을때도 그의 저택은 이보다 한참 떨어진
할리우드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지독한 영화광이었기 때문이었고,
주인공으로 직접 출연한 영화도 확실히 밝혀진 것이
세 편이나 된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제 7의 천국>이란 작품이 있는가하면,
남미 목동의 이야기인 <가우초>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탱고풍으로 곡을 만들어 직접 부르기도 했다.
그런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스키파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으며, 얼마나 큰돈을 벌었는지
1931년 나폴레옹 역으로 영화 출연 요청을 받았을 때
미련없이 거절했다고 한다.
(출연료가 무려 50만 달러였는데도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그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탕진했고,
자식에게는 큰 유산을 물려주지도 못했다.
그가 손을 댄것이 영화만은 아니었다.
두편의 오페레타와 한곡의 미사, 상당히 많은 나폴리 민요,
대중음악 등의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다.
직접 작곡한 나폴리 민요는 연주회에서
앙코르곡으로 불렀고, 녹음도 남아있다.
오페라 평론가 존 스틴이 카루소와 질리,
스키파를 비교한 글이 있다.
..." 카루소가 듣는 이를 굴복시키고,
질리가 명령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스키파는 청중들에게 무엇인가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키파는 자신의 장점과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성이긴 하지만 아주 맑게 퍼지는 소리가 아니었으며,
청중을 감복시킬만한 큰 성량도 갖추지 못햇다.
어떤 비평가는 스키파를 가리켜 ...
" 노래에 있어서 하프시코드의 정취"...라고 평했는데,
아기자기하고 날카롭고 가녀린 아름다움에서는
특출하지만 남성적인 카리스마는 찾을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옛 가수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의적인
해석과 멋대로 늘어지는 템포, 불안한 음정으로부터도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고아한 스타일', '세련된 매너', '무리없는
가창법'이 스키파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나는 절대로 오케스트라와 경쟁하면서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이와같은 그의 신조는 오페라 가수라면 항상 지킬 수는
없더라도 반드시 유념해야 할 지침이다.
연기와 음악이 충돌을 일으킬 때 스키파는 연기를 포기하는
편이었다는 사실도 그의 성향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오페라면 오페라, 영화면 영화, 대중음악이면 대중음악...
이렇게 여러 장르에 손을 내밀면서도 항상 진지한 태도를
유지한 인간적인 매력도 스키파의 전설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1953년, 스키파는 고향 레체에서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끝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했다.
그의 나이 64세 였다.
그러나 평생의 라이벌 베냐미노 질리가 완전히
은퇴한 1955년 이후에도 리사이틀은 계속했다.
1957년에는 노 대가의 따스한 음성으로 네덜란드와
동토의 땅 러시아를 녹였다.
1962년 10월, 뉴욕에서 마지막 리사이틀이 있었고,
3년후 그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질리가 세상을 떠난지 8년 후였다.
■ 앨범
1.Tito Schipa - Ave Maria, Torna Piccina, Core 'Ngrato, Vivere!,
Anema E Core, La Serenata, Comme Facette Mammeta,
Malia, I Te Vurria Vasa
2.Tito Schipa - Opera And Song Recital
3.Gaetano Donizetti - Don Pasquale /
Tito Schipa, Carlo Sabajno, Afro Poli,
Adelaide Saraceni,Orchestra
E Coro Del Teatro Alla Scala Di Milano
*.Stefano Donaudy(1879-1925) - O del mio amato ben / Tito Schipa
■ Stefano Donaudy(1879-1925)
프랑스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팔레르모 음악원에서 쭈엘리(G. Zuelli)에게 작곡을 배웠다.
음악원 입학 이전에 이미 오페라를 팔레르모에서 공연했는데,
음악원 졸업 후에는 몇몇 오페라와 가곡을 작곡하였다.
성악 작곡가로 이탈리아와 독일에 알려져 있다.
오페라 Theodor Korner,Sperduti nel buio,
La Fiamminga등과 예술가곡 Vaghissima sembianza 등의
작품이 있다.
O del mio amato ben - 오 그리운 내 사랑
- Stefano Donaudy -
O del mio amato ben perduto incanto!
Lungi e dagli occhi miei
chi m'era gloria e vanto!
Or per le mute stanze
sempre lo cerco e chiamo
con pieno il cor di speranze?
Ma cerco invan, chiamo invan!
E il pianger m'e si caro,
che di pianto sol nutro il cor.
Mi sembra, senza lui, triste ogni loco.
Notte mi sembra il giorno;
mi sembra gelo il foco.
Se pur talvolta spero
di darmi ad altra cura,
sol mi tormenta un pensiero:
Ma, senza lui, che faro?
Mi par cosi la vita vana cosa
senza il mio ben.
아, 내 사랑하는 사람과의 황홀함은 사라졌네.
내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그 사람은 있네.
내 영광과 자랑스러움이었던 그 사람.
지금, 이 텅 빈 방안에서
부푼 기대로 가슴 설레이며
그 사람을 불러 찾아보네
그러나 공허로움을 헤맬 뿐,
그저 흐느낌만이 나와 함께 할 뿐,
나홀로 흐느끼며 슬픔을 달랠 뿐이네.
그 사람 없이는 이 세상 어느곳도 슬플 따름,
나에겐 낮은 밤과 다름없으며
뜨거운 불 또한 얼음과 다를 바 없네.
하지만 때때로 나는 바라네.
내 스스로 나를 달랠 수 있었으면.. 하고.
상념 하나가 나를 짓누르네.
그 사람 없이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나에게 내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다면,
나의 삶은 헛 될 뿐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