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영(李萬榮)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장영(李長榮) : 문과(文科) 선조19년(158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휘항(李彙恒, 1695 乙亥生) : 문과(文科) 영조2년(172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희겸(李喜謙, 1707 丁亥生) : 문과(文科) 영조15년(1739)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윤신(李潤身, 1707 丁亥生) : 문과(文科) 영조22년(174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긍(李兢, 1707 丁亥生) : 문과(文科) 세종9년(1427) 중시 을과(乙科) 이함일(李涵一, 1562 壬戌生) : 문과(文科) 선조36년(1603) 식년시 병과(丙科) 이침(李沈, 1593 癸巳生) : 문과(文科) 인조13년(1635) 증광시 병과(丙科) 이정운(李貞運, 1747 丁卯生) : 문과(文科) 정조10년(1786) 별시 을과(乙科) 이정운(李貞運, 1747 丁卯生) : 문과(文科) 정조20년(1796) 중시 을과(乙科)등 모두 29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78명, 무과 14명, 사마시 199명, 의과 2명) <함평이씨 역대 주요인물>
이종생(李從生) : 1423(세종5)~1495(연산군). 조선의 무장. 자는 계지(繼之), 시호는 장양(莊襄), 극명(克明)의 아들. 내금위(內禁衛)에 속해 있다가 1460년(세조6) 무과(武科)에 급제, 사용(司勇)이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위장(衛將)으로서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졌다.
이해 9월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파저강(婆猪江)의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했고, 1468년(세조14) 영변부사(寧邊府使)에 승진했다. 다음해 영변에 진(鎭)이 설치되자 절도사(節度使)를 겸임, 1475년(성종6)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건주의(建州衛) 정벌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위장(衛將)으로 출전하여 야인들을 토벌하고, 1481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485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효원(李效元) 1549(명종4)~1629(인조7). 조선의 문신. 자는 성백(誠伯), 호는 장포(長浦), 우윤(右尹) 관(瓘)의 아들. 1584년(선조1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사서(司書)?승지(承旨)?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지내고, 1603년(선조36)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북인(北人)이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분열, 정권쟁탈이 치열할 때 유영경(柳永慶)의 소북파에 가담,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폐위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반대파인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여 유배케 했으나,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가 집권함에 따라 이듬해 삭직(削職)되고 거제도(巨濟島)에 유배,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13년 만에 풀려나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보직되었다.
이덕일(李德一) 1561(명종16)~1622(광해군13). 조선의 무신. 자는 경이(敬而), 호는 칠실(漆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은(?)의 아들.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문명을 떨쳤으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을 당하자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급제,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피난민을 모아 의병을 조직, 각처에서 공을 세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에게 인정 받고 그 막하로 들어갔다. 이순신의 전사 후 축성제구책(築城制寇策)을 논하여 이정귀(李廷龜)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광해군 때 국정이 문란해짐을 한탄, 시조 28수를 지어 충분(忠憤)한 심정을 읊었다. 함평(咸平)의 월산사(月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대원(李大源) 1566(명종21)~1587(선조20). 조선의 무신. 자는 호연(浩然), 1583년(선조16)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倭寇)를 추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적장을 포로로 잡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심암(沈巖)에게 바쳤으나 전공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신암의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미움을 샀다. 이어 흥양(興陽)에 왜구가 또 크게 침입하자 심암의 명으로 피로한 군사 1백여 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원병을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3일간 역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여 포로가 된 후 항복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했다.
이에 앞서 관찰사의 장계(狀啓)로 심암과의 관계를 알게 된 조정으로부터 심암 대신 수군절도사에 발령되었으나 이미 전사했으므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고향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흥양(興陽-전남 고흥)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춘원(李春元) 1571(선조4)~1634(인조12). 조선의 문신. 초명은 신원(信元), 자는 원길(元吉), 소자(小字)는 현지(玄之), 호는 구원(九?), 창(?)의 아들. 박순상(朴淳相)의 문인. 1590년(선조2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9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직되고,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광양 현감(光陽縣監)으로 남원(南原) 싸움에 참전했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13년(광해군5) 좌승지(左承旨)로서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병조 참의(兵曹參議)?우승지(右承旨) 등을 지냈다. 1617년(광해군9)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중 대북파(大北派) 일당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1620년(광해군12)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로 등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후 기용되었으나 사양하고 은퇴했다.
이배원(李培元) 1573(선조6)~1653(효종4). 조선의 무신(武臣), 자는 양백(養伯), 호는 귀휴당(歸休堂), 1613년(광해군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평안도 평사(平安道平事)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벼슬을 사퇴, 향리에 은거(隱居)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의 이듬해 광산 현감(光山縣監)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묘주(廟主)를 모시고 강화도에 호종(扈從), 뒤에 충원 현감(忠原縣監)에 전직되었다. 1634년 원주 목사(原州牧使)에 승진, 토포사(討捕使)를 겸직하여 지방에 횡행하던 도적들을 소탕하여 관찰사의 추천으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36년 비변사(備邊司)의 추천으로 황해도 관찰사에 특진, 마침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소수의 민병(民兵)으로 싸우다 패배했다.
이듬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해로(海路)로 강화도(江華島)에 가던 도중 화의가 성립되자 강화를 반대하는 과격한 상소를 하여 파직, 9년 후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회(李 ?) 조선의 문신. 자는 사연(士淵), 응성(應星)의 아들. 1605년(선조38)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고, 1613년(광해군5)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인조(仁祖)를 공주(公州)에 호종(扈從), 칠곡 부사(漆谷府使)를 지내고 70세에 죽었다. 호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해(李 ?) ?~1670(현종11). 조선의 문신.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0翁), 시호는 충정(忠靖), 숙종 때 충민(忠敏)으로 개시(改諡), 대사간 효원(效元)의 아들. 광해군 때 아버지와 형 정(瀞)이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大北)에 의해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함릉군(咸陵君)에 봉해졌다. 이때 공신에게 지급된 전지(田地)를 모두 반환하여 청백한 사람으로 칭송이 높았다. 이듬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특진, 1649년(효종3) 병으로 사직,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전임했다. 이 해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1669년(현종10)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지익(李之翼) 1625(인조3)~1694(숙종20). 조선의 문신. 자는 여휘(汝輝), 호는 계촌(桂村), 관찰사 춘원(春元)의 손자, 초로(楚老)의 아들. 1652년(효종3)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언(正言)을 거쳐 1661년(현종2) 지평(持平)으로 공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의 탐학(貪虐)을 탄핵하다가 파직, 이듬해 남구만(南九萬)의 신구(伸救)로 복관했다.
그후 성주 목사(星州牧使)?동래 부사(東萊府使)?광주 부윤(廣州府尹)?황해도 관찰사를 역임, 1674년(숙종 즉위)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처벌 문제가 일어나자 대사간으로서 그의 당론(黨論)에는 반대했으나 처벌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했다가 물의를 일으켜 사임, 이듬해 다시 대사간에 복직되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6년(숙종2) 예조 판서로 승진, 이어 대사헌?우참찬(右參贊)?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송시열을 변호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1678년 다시 기용, 공조?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80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그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함경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를 역임, 1689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그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고, 169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삼(李 森) 1677(숙종3)~1735(영조11). 조선의 무신. 자는 원백(遠伯), 감역(監役) 사길(師吉)의 아들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修學)중 병조 판서 김구(金?)의 권고로 무예(武藝)를 연마, 1705년(숙종31)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경종 때 소론(少論)으로서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 총융사(摠戎使)를 역임, 1725년(영조1)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었다가 노론(老論)의 탄핵을 받아 곤양(昆陽)에 안치(安置)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풀려나와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승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
그 뒤 소론 출신으로서 누차 이인좌의 일당이라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을 받아 무사했으며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무예가 출중하고 학문에도 뛰어났으며, 기계 제조의 방법과 도창기예(刀槍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이유신(李裕身) 1698(숙종24)~? 조선의 문신. 자는 덕중(德仲), 준상(寯相)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통덕랑(通德郞)으로서 1723년(영조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1735년 지뉘겸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7년 장령(掌令)이 되고, 1743년 진하 겸 사은사(陣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오고, 1746년 승지(承旨), 1749년 대사간, 이어 여주목사(驪州牧使) 1757년 강원도 관찰사, 1760년(영조36)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홍직(李弘稷) 1705(숙종31)~1796(정조20). 조선의 문신. 자는 계장(季章), 호는 개석헌(介石軒) 진사(進士) 준림(俊林)의 아들. 1735년(영조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38년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이 되었으나 얼마후 사임, 김재로(金在魯)의 천거로 전적(典籍)이 되고 예조와 병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 경상우도와 충청도의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그후 정언(正言)을 거쳐 1747년 장령(掌令)?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낸 뒤 사퇴, 1751년 헌납(獻納)으로 복직되고 군자 감정(軍資監正)을 거쳐 1759년 다시 헌납(獻納)이 되었다. 1761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비행을 자행하는 전라도 관찰사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려다가 상소 내용이 사전에 누설되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권이 수립되자, 이를 통탄하고 함평(咸平)에 은거했다. 1785년(정조9)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다시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
이창운(李昌運) 1713(숙종39)~1791(정조15). 조선의 무신. 자는 성유(聖兪), 경력(經歷) 수귀(壽龜)의 아들. 1738년(영조14)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이듬해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747년(영조23) 상원군수(祥原郡守)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1751년 삭주 부사(朔州府使)에 승진, 이듬해 안동 영장(安東營將), 1754년 동지중추부사(冬至中樞府事)가 되어 함평군(咸平君)을 습봉(襲封)했다. 1759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정조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포도대장(捕盜大將)?어영대장(御營大將)?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총융사(摠戎使)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했다.
이방운(李昉運) 조선의 화가(畵家), 자는 명고(明考), 호는 기야(箕野)?심재(心齋), 중국 남화(南畵)의 영향을 받아 온화하고 섬세한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산수화(山水畵)와 인물화(人物畵)에 뛰어났고, 거문고에도 능했다.
<현?근대 저명인사> 이계순(李啓純) 법학박사, 前농림부장관 / 이기수(李基洙) 법학박사, 前경남도지사 / 이병헌(李炳憲) 前국회의원 / 이우헌(李于憲) 前국회의원 / 이호범(李浩範) 前국회의원 / 이계호(李啓瑚) 농학박사, 서울대교수 / 이공범(李公範) 성균관대교수 / 이성헌(李星憲) 서울대교수 / 이재두(李載斗) 성균관 대교수 / 이정행(李正行) 농학박사, 서울대교수 / 이준범(李準範) 고려대총장 / 이계완(李啓完) 육군준장 / 이교헌(李校憲) 시사문화사장 / 이기행(李箕行) 대지토건사장 / 이도헌(李度憲) 원호처차장 / 이돈명(李敦明) 변호사 / 이석범(李錫範) 서울고법판사 / 이석범(李錫範) 주택은행감사 / 이성범(李成範) 범양사(주)회장 / 이성범(李星範)국세청기술연구소장 / 이자헌(李慈憲0 서울신문편집국장 / 이장헌(李章憲) 동해전력전무 / 이재기(李載驥) 대한지적협회장 / 이징범(李徵範) 의학박사, 목포적십자병원장. .... |
첫댓글 함평이씨에 대하여 잘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