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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묵상글 (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 섬김의 단계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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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5 05:34
- 섬김의 단계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첫째가느냐를 놓고 다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뒤에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때 자기 아들들이 주님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여 제자들이 불쾌해하며 자리다툼을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섬기려고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등에 업고 한 자리 차지하려고 주님을 따른 것이지요.
이런 제자들이 들으라는 듯 또 제자들과 마찬가지인 제가 들으라는 듯
오늘 집회서는 주님을 섬기러 나갈 때의 자세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그래서 저는 오늘 섬김의 단계에 관해서 묵상해봤는데
첫 단계는 시련에 대비하는 단계라고 집회서는 얘기합니다.
주님을 섬긴다면 제자들처럼 부귀영화를 기대하지 말고,
시련을 각오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기본자세이고 올바른 자세이지요.
이런 자세가 아니라면 앞서 봤듯이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 출세나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제자이고 종이면서
시련은 전혀 관심 없고 영광만 꿈꿔서는 안 되는 거지요.
둘째 단계는 실제로 시련 당하게 된 단계이고
이때 지녀야 할 자세는 인내와 단련의 자세입니다.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그렇습니다. 이때 지녀야 할 자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련을 단련의 기회로 삼는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시련과 단련이 실은 같은 거지만
억지로 당하면 시련이고,
스스로 겪으면 단련이지요.
이렇게 단련의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시련을 묵묵히 참고 견딜 수 있겠지요.
섬김의 세 번째 단계는 믿음과 희망의 자세를 지니는 단계입니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두 번째 단계가 자기 내면에서 자기와 싸우는 단계라면
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힘을 얻는 단계입니다.
오늘은 늦잠을 자서 여기서 미완성인 채로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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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빙엔의 힐데가르드: 하느님으로부터 다양한 재능을 받은 신비주의자!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2월 24일 월요일 (호명환 번역) 여덟 번째 주간: 라인랜드(독일)의 신비주의자들
성령의 힘이시여, 제 영혼 안에 - 당신의 지혜로 -
저는 해와 달과 별들 안에서 불타 오릅니다. 나의 은밀한 생명이 바람과 더불어 숨 쉬고 모든 존재를 충만한 얼로 붙들어 줍니다.
- 빙엔의 힐데가르드, 하느님 업적의 책(Book of Divine Works), 1.1.2
CAC의 객원 교수인 카르멘 아세베도 버처(Carmen Acevedo Butcher)는 빙엔의 힐데가르드의 범상치 않은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해 줍니다:
1098년 여름에서 1179년 가을까지 독일의 놀랄 만한 여성 한 사람이 81년의 삶의 살았는데, 당시는 이 생애의 절반만 살았어도 충분한 수명을 누렸다고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최고로 다재다능했던 여인이자 베네딕도회 수녀였던 힐데가르드는 두 개의 수녀원을 창설하였고; 최초로 여성이 주도하는 대중 설교 순례를 조직하여 실행하였고, 교황들과 황제들, 수도원장들, 수도승들과 수녀승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거의 사백 개가 넘는 대담한 편지를 썼고; 치유자요 자연 연구가, 식물학자, 영양 전문가, 구마자 등으로 활동했고;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과감한 음악을 작곡하였고; 끊임없이 놀라운 시를 지었고; 현존하는 최초의 윤리극을 썼고; 수십 년 동안 세 권의 신학 작품을 저술하였습니다. 비할 데 없이 위대한 힐데가르드를 한 번 만나 보십시오! 그녀의 이런 업적이 어느 시대건 감동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경력도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했던 그녀의 삶 자체에 비하면 별것도 아닙니다. [1]
아베세도 버처는 힐데가르드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녀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갈 수 있게 해 주는 통로였다고 말합니다: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던 힐데가르드는 저술가이자 미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음악을 통해 하느님께 바친 그녀 충성심은 그녀의 삶에 있어 계속적으로 드러난 가장 특별한 헌신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음악이 구원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음악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인간성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내 주는 요소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마인츠의 대주교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썼듯이, 힐데가르드는 인간 타락 이전의 한 인격체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고 싶다면 거룩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거룩한) 음악은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우리가 묘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을 평온하게 해 줍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우리는 이승의 귀양에서 벗어나 아담이 동산에서 쫓겨나기 이전에 천사들과 함께 노래부르며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었을 때 알았던 신성한 음악의 장소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아담이 하느님께 대한 향기로운 순종을 거부하기 전에 그의 목소리는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손가락이자 목소리인 성령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아담이 처음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런 아름다운 화음을 잃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모두 지니고 있는 약하디 약한 우리의 죽어야 할 운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본래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답고 웅장한 음악을 들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힐데가르드의 노래들은 대개 창조된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을 찬양하는 노래들입니다. 다음의 노래가 하나의 예입니다:
오, 저희를 위해 길을 닦으시는 거룩한 권능이시여!
당신은 하늘과 땅과 심지어 땅속 깊숙한 모든 것을 꿰뚫으십니다.
당신은 하나 안에 있는 모든 것이십니다.
당신을 통해, 구름들이 피어오르고 둥실둥실 떠다니며 바람이 저 하늘 위를 날아 다닙니다!
씨앗으로서 생명의 정수들이 떨어지고,
샘이 솟구쳐 올라 개울이 되며,
봄의 상큼한 신록이 - 당신을 통해 - 흘러나와 온땅으로 퍼져 나갑니다!
이와 같이 당신도 제 영을 충만함으로 이끄십니다.
거룩한 권능이시여, 제 영혼에 지혜를 불어넣어 주시고, - 당신의 지혜로 - 기쁨을 불어넣어 주소서!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호주의 한 평범한 프란치스칸으로서 언제나 기도 중에 강력하고 기억할 만한 체험들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왔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그런 특별한 내면의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를 주제로 하는(on Mysticism), 매일 묵상과 함께하면서 저는 제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거의 매 순간 제 안에 성령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비록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하느님 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사랑의 놀라움을 누려 보도록 합시다!
—Sue S.
[1] Carmen Acevedo Butcher, St. Hildegard of Bingen: Doctor of the Church; A Spiritual Reader (Paraclete Press, 2013), 1–2.
[2] Acevedo Butcher, St. Hildegard, 12–13.
[3] Carmen Acevedo Butcher, Incandescence: 365 Readings with Women Mystics (Paraclete Press, 2005), 131. Acevedo Butcher’s verse translates and modernizes Hildegard’s Sequence O ignis Spiritus paracliti [O fire of the Spiri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gustin Fernande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과 더불어 이 땅의 식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우리도 이 위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관문에 발을 들여 놓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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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숨
2025.02.25. 05:47
우리는 이미 역사의 현재라는 유리한 입지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죽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언젠가 '나'도 이와 똑같은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것들보다 내면 깊숙히 들어 있던 삶의 참된 가치 추구의 본능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장례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죽은 이의 관에서 풍기는 냄새는 다 비슷하다는 것을요....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에는 모든 것을 다른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해 주는 장엄함이 들어있는가 봅니다. 이 죽음 앞에서는 보통 마음에 두었던 신나는 일이나 실망스러운 일도 이전과 다르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턱없이 작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야망마저도요....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이제 '나'도 살 날이 앞으로 산 날보다 많이 적은데..." 등, 삶에 참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 추구가 무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당신에게 곧 닥칠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복음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들이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논쟁이 자기들이 스승이요 주님이라고 여기는 분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나서 했던 논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참 묘하죠?!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해 주시는데 제자들은 세 번 다 이 말씀에 깊이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을 그냥 외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마 맞을 겁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저자는 앞에서 제자들의 심경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요. 죽음이라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웠던 겁니다. 그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세상적 관심사, 즉 에고의 관심사에만 마음을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를 두고 다퉜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쩨 예고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길을 막고 따지고 들었고, 두 번째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높은 위치를 두고 싸웠으며, 세 번째 예고에서는 한술 더 떠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권력을 쥐실 때(?) 오른편과 왼편(우의정과 좌의정?)에 앉혀 달라는 청까지 드립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그 죽음이라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들 에고의 관심사에 몰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참 묘하지요?! 그런데 이게 우리 삶의 이야기, 아니 제 삶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성찰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에고가 주도하는 대로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에 큰 신경을 쓰고 살아가는 저의 모습을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마음에 다가온 것이 바로 이 "길에서"라는 말입니다. 이 "길에서"라는 말이 꼭 "우리 인생에서"라는 말처럼 저에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이 들더군요. "과연 나는 내 인생길에서 무엇을 위해 아둥바둥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면서 또 다른 질문들이 떠오르더군요. "뭔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가 되려고? 다른 사람들의 눈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내가 참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얼마나 추구해 왔는가?"라는 자문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걷고 있던 길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맞이할 죽음을 향한 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의 '현재' 안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의 현재라는 유리한 입지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유리한 입지에서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제자들보다 더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우리를 모두 당신 곁에 불러 앉히시고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두팔로 꼭 끌어안으시며 자상하고 인내심 깊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즘 방송 매체나 인터넷 등을 통해 계속해서 아이들의 학교 폭력이나 집단 따돌림 등과 같은 이야기들을 쉽게 접하게 됩니다.
어제 저는 미국의 어떤 가톨릭 방송에서 하는 "함께하는 자비기도" 들으면서 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자기 손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한 말입니다. 자기 손자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따돌림과 폭력을 겪고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아이가 몇 달 동안 그런 고통을 겪었는데도 집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화까지 나더군요. 그러면서 "왜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 저 아이들이 아직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저렇게 한 아이를 두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 인간 안에는 정말로 저런 악(?)이 근본적으로 존재하는가?" 등등의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 이건 우리 모두의 책임, 특히 우리 기성 세대들의 책임이이야. 우리 기성 세대들이 역사의 현재라는 유리한 입지에서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세상을 보기를 거부하고, 우리의 에고에 좌지우지되면서 나를 높이려 하고 헛된 야망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야!"
이제 우리는 이 역사의 현재라는 유리한 입지에 있다는 사실을 꼭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볼 것인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우리가 과연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예수님께서는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늘 이 역사의 현재라는 유리한 입지로 데리고 오셔서 세상을 보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보게끔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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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25 05:39
어떤 회사도 잘될 때만 있지 않고 잘 안되어서 큰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물론 계속 잘되어서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일만 계속되는 때는 없습니다. 분명히 나쁜 일도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낙하가 너무 가파르지 않게 잘 조절하는 사람이 훌륭한 경영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잘 안된다고 모든 책임을 물어 경영자를 퇴출하면, 회사는 더 큰 위기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만 생기지도 않지만 반대로 나쁜 일만 생기지도 않습니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그래도 인생의 그래프가 우상향하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강의 시간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선택이 됩니다. ‘나같이 무능한 사람은 필요 없어!’라면서 스스로 퇴출해도 안 됩니다. 나의 인생은 ‘나’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늘 깨어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잘될 때는 교만을 멀리하고 더 큰 겸손을 갖춰야 하고, 잘 안될 때는 되돌아보며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생각하면 주님의 ‘늘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이 떠올려집니다. 삶과 주님 말씀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보다 바른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특히 희망의 주님이시기에 절망과 포기의 순간에서도 커다란 힘을 주님에게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처럼 영광이라는 상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하강도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예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또 이에 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이 길에 서로 논쟁합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보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관점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기에 깨어 있어야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에 맞게 지금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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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명약, 그것은 진심에서 오는 배려다(메난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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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그 길을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도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 길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된다는 것’과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이요, ‘으뜸 자리’가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곧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나아가 ‘종’이 되대,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일입니다.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실현을 내려놓은 이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하는 일이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곧 어린이 같은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무력한 어린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게”(마르 9,31) 될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곧 그렇게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마르 9,37 참조)이고, 바로 그렇게 하는 이가 ‘첫째’가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 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서,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는 세속정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다스리는 ‘섬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곧 ‘섬김’은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나 다 같이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나 다 같이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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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아니 가장 크신 하느님을 내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러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 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숙하고 모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섬김이 필요한 때입니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커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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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6년 전에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며, 아이의 할머니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잠시 추억에 잠기며,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와 찍었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이도, 저도 해 맑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가장 좋은 추천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년이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16년 전의 사진을 보며, 배우 ‘손지창’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배우 ‘더스틴 호프만’ 닮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의 얼굴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건 저의 표정이 웃는 모습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 때문에 유명해진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저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원본을 보았습니다. 표정으로 유명해진 그림도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입니다. 뭉크의 절규는 얼굴이라기보다는 표정에 가깝습니다. 거울 보고 활짝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얼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표정을 통해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얼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갈망을 뜻합니다. 시편 27장 8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으니, 주님, 당신 얼굴을 찾나이다." 우리는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대면하며 대화했고, 그 만남 후 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즉, 예수님의 얼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얼굴은 더 평화롭고 기쁨에 차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얼굴과 표정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신앙인의 얼굴이 어두우면 다른 이들이 하느님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고,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아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슬픔을 겪으며 병고를 아는 이였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도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굶주린 이의 얼굴, 병든 이의 얼굴, 외로운 이의 얼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는 늘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정과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불친절한 얼굴이 아니라, 희망과 자비가 담긴 얼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남겨 주셨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빵을 떼실 때야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분과 깊이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을 증언하는 도구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은 두려움과 불안이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빛나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이웃을 향해 따뜻한 얼굴과 사랑의 표정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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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제자들의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십니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며 서로 논쟁하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복음에 드러나 있듯이 ‘누가 큰 사람인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큰 사람 몇몇을 만났었습니다. 마음이 큰 사람, 사랑이 큰 사람, 자비가 큰 사람, 나눔이 큰 사람 등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자들이 논쟁한 큰 사람은 제가 말한 이런 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큰 사람은 ‘첫째 자리’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제자 중 누가 주님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가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함께 걸었더라면 논쟁의 진행을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으련만 우리는 그저 상상으로 그 논쟁을 그려볼 뿐입니다.
누군가는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첫째 자리라고 말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주님이 먼저 뽑은 순서대로 자리가 정해진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가장 똑똑한 순서로 자리를 정해야 한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논쟁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주장만 늘어놓으니 당연히 논쟁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리, 순서, 서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나누는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
돈이 아주 많으면 행복할까요?
공부를 아주 잘해 높은 위치에 올라 권력과 명예를 얻으면 행복할까요?
어느 작가는 말합니다.
‘원래 낙관적이고 잘 웃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 나이를 먹어서도 행복해하더라.’라고 말이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행복을 모르고 자란 아이가 나이를 먹었다고 절로 행복을 알 리 없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하루도 스마일~~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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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
전쟁터같은 세상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며 갈망하지만 참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입니다. 인류사는 전쟁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싶습니다.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보면 정말 영원히 없어져야 할 전쟁입니다. 읽고 있는 두권의 책, <십자군 전쟁에서 배우는 평화를 위한 지혜, 철학자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과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눈에 띈 ‘전쟁’이란 말마디에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이미 예전부터 수도생활은 영적전쟁이요 수도자는 주님의 전사란 말이 정의처럼 쓰였고 저 또한 무수히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주님의 전사라고 말입니다. 이와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요, 이런 이가 역설적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하십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살아온 세월을 맹신하면 축적한 내공이 편견이 된다. 일가견을 이룬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찾아야 한다.”<다산>
“어른이란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맹자>
일가를 이룬 대가의 품격은 아이다움입니다. 마냥 순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유연하고 자유로움으로, 또 사랑의 지혜로 표현되는 아이같은 대가의 품격입니다. 전쟁터같은 세상에서 이런 품격의 어른이라면 평화의 사도로 손색이 없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이런 어른은 그대로 예수님께 해당된다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를 사랑하여 껴안으시는 예수님의 순수한 동심이 빛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결코 마냥 아이같은 순진한 것 같은 아닐 것이며 사랑의 지혜로 빛나는 순수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환대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자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란 놀라운 진리가 계시됩니다.
여기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순진함이 아니라 상처받기 쉽고 소리없는, 약하고 무력한 가난한 이들, 믿을 것이란 오직 하느님뿐! 하느님께 의탁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아나뵘입니다. 이는 앞서의 말씀에 대한 답이 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그의 형제자매들중 가장 작은 이들, 즉 약하고 가난하며, 상처받기 쉽고 소리없는 이들이요, 이들을 따뜻한 환대로 맞이하는 자들이 진정 가장 위대한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아나뵘의 영성’을,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사는 진짜 신자들이요, 이의 영원한 모범이 바로 우리 한가운데에 계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런 결론에 이르는 발단이 된 것이 예수님의 2차 수난과 부활을 예고한 후 논쟁입니다. 철부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몽의 오합지졸의 제자공동체가 예수님께는 참 환멸스러웠을 것이며 내적 외로움과 고독도 참 컸을 것입니다.
뒤늦게 잘못됐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묵묵부답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깨우치려 예수님께서는 종과 섬김의 영성을, 어린이를 받아들임의 깊고 깊은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의중을 깨달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새로운 충격적 참신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됐으리라 생각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종과 섬김의 영성’을 또 동심의 어린이성을 회복하여 어린이를 맞아들이듯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맞아들이는 ‘환대의 영성’을 살 수 있을런지요. 오늘 집회서가 답을 줍니다. 역시 섬김의 영성을, 환대의 영성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전쟁 같은 삶의 시련 중에도 주님을 경외하며 다음 집회서의 가르침을 실천 훈련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하기 아까워 오늘 제1독서 집회서 전문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말그대로 영성훈련의 필수요목들입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주신다.”
값싼 은총도, 값싼 영성도, 값싼 제자직도, 값싼 평화도 없습니다. 이런 부단한 영성훈련과 함께 가는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단히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을 훈련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버팀목 삼아 참고 견디며 버텨내야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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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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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4)
내적 성장 나무를 살펴보십시오. 높이 자라기 위해 우선 가장 낮은 자리를 찾고, 꼭지를 하늘로 뻗치기 위해 뿌리를 깊숙이 내립니다. 겸손에서 시작하지 않은 채 높이 오를 수 있겠습니까?(잠언 18,12참조). 그대는 사랑도 없이 드높은 것을 이해하려 하고, 뿌리도 없이 하늘 바람을 원합니다. 그것은 몰락이지 성장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인성’ humanity과 ‘사람 human being은 다릅니다. 인성 자체는 대단히 고귀합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인성은 천사들과 동격이고 신성과 천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이런저런 개인의 특정을 버리고, 나 자신을 ‘인성’ 으로 여길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이루신 최고의 일치를 나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외아들에게 주셨던 것을 내게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들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내게 주실 것입니다. 실로, 하느님은 내게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리스도에게 주셨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인성에게 주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버지는 그리스도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영원 전부터 아버지 안에서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38)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 신심의 계시.
자기 성찰을 위한 요점들
마음의 순결에 대해
1. 고해성사를 할 때마다 다음 고해성사까지 극복할 특별한 결점을 정해두고 있는가?
2. 매일 양심 성찰을 충실하고 유익하게 실천하면서 나의 결점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회개하며, 이를 수정하려고 노력하는가? 내가 가장 자주 저지르는 특별한 결점을 선택하고 그것에 대해 특히 성찰하는가?
3. 나의 감각을 지키고 있는가? 감각은 영혼에 죽음이 들어오는 창문이다.
4. 독서, 대화, 선택하는 친구, 자주 가는 장소를 조심하고 있는가? 이 중 어떤 것들이 나에게 죄의 원인이 되는가?
5. 여러 결점의 근원인 나태함을 피하는가?
6. 마음의 순결을 위한 두 가지 큰 도움인 신앙심과 절제를 사용하는가?
7. 위험한 생각을 기도하며, 지속적으로, 신속히 거부하는가? 위험한 생각은 지옥의 불꽃과 같으니, 난로에서 떨어지는 불꽃을 털어내듯이 털어내야 한다.
8. 간단히 말해, 거룩한 생각과 기도, 경건한 독서로 영혼을 양육하여 언제나 성체성사를 모실 수 있는 합당한 그릇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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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낮아질수록 높아지는 삶의 자세를 /
박윤식 [big-llight] 250224. 21:45 ㅣNo.180308
나이 열아홉에 급제해 스무 살에 군수가 된 맹사성은 조선시대의 학자다. 젊은 그는 나이 든 선비를 찾았다. “어른께서는 군수로서의 좌우명이 무엇인지요?” “그건 어렵지 않소이다. 나쁜 일 하지 않고 착한 일 많이 베푸는 겁니다.” “그거라면 삼척동자도 아는 이치 아니오. 먼 길 온 제게 고작 그런 말씀만 하시다니요?” 맹사성은 일어서려 했지만 선비는 차 한 잔 빌미로 자리를 붙잡는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런데 선비는 넘치는데도 자꾸 잔에 차를 따른다.
“어르신, 찻물이 넘칩니다.” 맹사성의 외침에도 선비는 계속 따른다. 그리고 화난 맹사성에게 말한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 적시는 건 알면서, 어찌 지식이 넘쳐 인품 망치는 건 모릅니까?” 이는 많이 안다고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나. 세상은 겸손하고 섬기는 이 찾는다. 안다고 자리 높아졌다며 우월감에 젖는 건 참 어리석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런 실수를 범한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라고 물으셨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로 서로 논쟁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고 엄히 이르셨다. 무한경쟁에서 성공은 남보다 더 일찍 자신의 능력을 보일 때 얻어지는 것이라나. 그러기에 첫째 되려면 꼴찌 되어 모든 이의 종이 되어보라는 예수님 말씀이 어렵게만 들린다.
첫째가 되는 길만을 가르쳐 온 삶에서 스스로 꼴찌가 되고, 이웃들에게 늘 종처럼, 학교에서는 왕따를, 직장에서는 실직을, 상점에서 손님들에게 늘 무시당하는 게, 어찌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제자들은 메시아의 수난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단다. 게다가 그분께서 정권을 잡으시면 자기들끼리의 서열 다툼까지 했으니까. 사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내 영이 맑아져 세상 것보다 하느님 일에 더 관심 갖는 게 어쩜 순리이지만, 세속적인 게 더 커지는 오늘의 모습처럼 당시 제자들마저 그렇게 되었다니!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남들에게 인정받거나 출세하려고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기를 학수고대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고 하시며 다른 이들,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기를 원하신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도와주는 이, 이웃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이, 자신을 낮추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이가, 참으로 당신이 바라는 ‘제자 모습’이라 이르셨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낮은 이로 오시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살피셨다. 우리도 예수님마냥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고 자신을 낮추어 봉사하는 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소박해지자. 우리 안에 솟아오르는 교만을 버리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자. 세상에 있되 거기에만 사로잡히지 않는 가운데 자유롭고 바로 사랑하는 것, 자신의 안위에만 집착하지 않고 작은 이 벗 삼아 사는 마음가짐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의 자세이리라.
내 안에 아직도 남보다 더 앞서려는 우월 의식이 있다는 건, 다른 이를 무시하며 사는 뜻일 게다. 더군다나 졸부를 뽐내며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한, 아직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뜻이리라.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모두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가르치신다. 지금 나는 낮아질수록 높아지는 삶을 사는지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꼭 둘러 봐야만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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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수난과 죽음 부분에만 머물러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진실을 알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아는 것에만 머물러 있고 싶은 유혹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세에서 지금 누리시는 존경과 권위에만 머물러 그분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세에서 지금 그분을 따르면서 큰 사람이 되려 하고 작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나무가 높이 자라려면 먼저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야겠지요.
낮은 곳에서 시작하지 않고는 높이 오를 수 없습니다.
그처럼 제자 직분은 낮아지고 작아지면서 성장하는 신비입니다.
일등이 되려고 모든 것을 거는 세상, 일등만 환호하는 세상에서 꼴찌가 되라는, 어린이와 같은 작은 이를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진정한 첫째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높고 훌륭한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면 거부감이 덜하겠지만 자신보다 작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죄인들의 종이 되라고 하면 선뜻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셨고(마태 25,40 참조) 죄인인 우리의 종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을 섬기시려고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분처럼 “모든 이”(마르 9,35)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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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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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마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도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부분이 있기에
제자들이 부활을 생각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자들의 혼란은
자기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화려한 영광 속에서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을 심판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을 것이라는 말은
구약이 말하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 본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들은 어렴풋이 갖고 있습니다.
구약이 말하는 모습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나
모습이 화려하게 바뀌었던 사건을 보면
예수님께서 구약이 말했던 사람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아들이
당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그 꿈도 물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세상이 주는 화려함이 아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을 선택했을 때
오히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화려함을 쫓아가는 것에서 첫째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에서 얻는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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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섬기시는
예수님과
모든 이들의
꼴찌는
친분이
깊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꼴찌가 세상을
바꿉니다.
모든 이들의
꼴찌가
우리에게
오십니다.
십자가의 힘은
모든 이를 섬기는
꼴찌의 힘입니다.
꼴찌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법 없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깁니다.
꼴찌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길을 찾아
나섭니다.
못 박히는 것은
언제나
꼴찌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꼴찌가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꼴찌의 본명은
예수님이십니다.
꼴찌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복음입니다.
꼴찌의 행복이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섬김의
행복입니다.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꼴찌입니다.
꼴찌의
미덕과 함께
가득해지는
은총입니다.
서로를 섬기는
섬김의 오늘
되십시오.
은총은
섬김으로
더욱
충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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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웅적인 순교의 비결!
돈보스코는 꿈의 성인(聖人)으로 불릴 만큼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꿈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그는 100년도 훨씬 전에 자신의 제자들인 살레시안들이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돈보스코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그를 향해 ‘약간 맛이 간 사람’ ‘지나친 몽상가’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20%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살레시오회는 160여 개국에 진출해서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지속해나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가 두 명의 살레시오 회원이 금으로 된 큰 성 잔을 들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안에는 피가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황하가 흐르는 중국이었습니다.
돈보스코가 꾸었던 그 꿈은 50여년 뒤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는데, 1930년 당시 중국에서 활발히 사목활동 중이던 베르실리아 주교, 카라바리오 신부, 두 살레시안이 공소 사목 방문 중에 악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으며, 시성되셨습니다.
베르실리아 성인 같은 경우 수도회의 꽃인 수련자들을 교육시키는 수련장 신부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제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큰 스승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그는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슬슬 뒤로 물러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인 루아 신부님께서 당시 베르실리아 신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그의 출중한 자질과 성덕을 파악하고 뭔가 부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 부탁이 뭔가 했더니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마카오에, 홍콩에, 중국 본토에 수많은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선교단을 좀 이끌고 가주셨으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교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중국이라...거의 지구 반대쪽 나라인데...경제, 정치, 종교, 교육 등등 모든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던데...
가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된다던데...사랑스러운 수련자들은 어떡하고...사랑하는 내 가족들은 또 어떡하지...
그러나 베르실리아 신부는 즉시 생각을 바꿉니다.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즉시 접습니다.
환하고 기쁜 얼굴로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루아 총장님, 그럼 제가 언제 떠나면 될까요?”
중국에 도착한 베르실리아, 카라바리오 두 분의 선교사는 홍콩,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 깊숙이 들어가 영웅적인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교리교사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려다가
안타깝게도 화적들의 총에 맞아 순교하십니다.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현실을 기꺼이 견뎌낸 배경,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 어떤 힘이 있었을까 묵상해봅니다.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임마누엘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신앙, 그것이 순교의 비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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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두 번째 들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크나큰 은총이 오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수난을 앞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지도 못하고 길에서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고 서로 다툰다(34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고 당신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신 분으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참된 봉사의 자세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신앙인이 된 이유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되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을 위해 우리가 초대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부르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섬기기 위한 봉사직무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된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에로의 초대이며 부활의 영광에로의 초대이다. 우리가 갖는 지위는 우위 다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해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모두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된 모습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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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악마가 되는 법: 마중물의 법칙을 어기면 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 사람이 심는 대로 거둔다”(갈라 6,7)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세상 모든 일에는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콩을 거두려면 손에 쥔 콩을 땅에 심어야 하고,
재물을 얻으려면 먼저 투자와 희생이 따르는 법이죠.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포기하거나 심지 않고, 단번에 열매만 얻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오늘은 이를 무시하고 파멸에 빠진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악마가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무한한 쾌락, 지식, 권력’을 얻고자 악마(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합니다.
그는 정당한 씨앗이나 희생 없이 손쉽게 열매를 따려 했습니다.
예컨대, 육체적 욕망을 버리지 않은 채 그레첸(마르가레테)의 마음을 얻으려 했고,
헬레나를 차지하고 아들까지 가지려 들었습니다.
게다가 재물마저도 악령의 힘으로 한 번에 얻으려는 욕심에 눈이 멀었죠.
그 결과 자기 방종과 탐욕에 빠져 주변인들을 파멸로 몰고, 스스로도 영혼을 악마에게 넘기는 처지에 이릅니다.
사실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을 뿌리는’ 기회가 늘 있었습니다.
그레첸을 진정으로 책임지려 하거나, 헬레나를 갈망하기 전에 헛된 욕심을 비우고 청빈과 성실을 지켰다면, 탐욕 대신 다른 결실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마중물을 붓지 않고, 단지 결과만 얻으려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듯, “아무도 심지 않고는 거둘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정의 시스템을 어긴 것이죠.
그것이 곧 ‘사탄이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악령과 결탁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씨앗은 지키고, 남의 결실만 취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오늘 복음(마르 9,30-37)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첫째가 될지 다투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스스로 가장 낮은 길을 택하십니다.
첫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희생 없이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모든 이의 종이 되라”(마르 9,35 참조)며 다시금 일깨우십니다.
반면,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아슬란이 배신한 아이 에드먼드의 죄를 대신
떠안고 돌탁자에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나니아 세계를 구원하고 “진정한 왕”이 됩니다.
자발적인 희생을 ‘마중물’로 써서, 더 큰 자유와 존경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실제 역사에서도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에 맞서 27년간 감옥에 갇힘으로써 물리적 자유를 내놓았고, 그 덕에 백인·흑인 모두의 신뢰를 얻어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던 희생이, 오히려 더 큰 평화와 존중을 낳은 셈입니다.
결국, 콩을 심지 않고 콩을 얻으려 하면 그것이 곧 ‘악마가 되는 법’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성취를 악령과의 계약이나 부정한 방식으로 단숨에 얻으려 하면, 파우스트처럼
죄책감과 파멸만 손에 쥐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마중물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어 인류를 구하신 그분의 길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정의 시스템을 제대로 지킨 사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영광이나 열매를 바란다면 먼저 그에 합당한 ‘뿌림’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씨 뿌린 이에게 열매를 배로 더해 주신다”(마르 10,30 참조)는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내 자유, 내 시간, 내 자리를 과감히 마중물로써 내놓는 사람이, 결국엔 더 큰 수확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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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0-37)”
1) 35절-37절의 말씀은, ‘높아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높아지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길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충실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가?”, 바로 그것 하나뿐입니다.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면, 하늘나라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역시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를 묻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높아지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라.
그리고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낮춤’과 ‘섬김’은 바로 ‘사랑’입니다.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이 말씀에 대해서 “그냥 사랑하면 안 되나? 꼭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만 사랑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랑’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사랑하는 이를 섬기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려가 주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는 내려가지 않고 상대방에게 올라오라는 요구만 한다면, 또 자기는 상대방을 섬기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섬기라는 요구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고, 그 경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빈말’을 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낮추어서 내려가 주고 섬기는 사랑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0-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낮추신 일이고, 우리를 섬기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는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라는 뜻입니다.
“꼭 그렇게 낮춤과 섬김과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 그냥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4)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진심으로 섬겨야 한다.
그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나를 섬긴다면 누구든지 보잘것없는 이를(‘작은 이’를) 섬겨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바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신다.”입니다.
5)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낮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낮추어야 하고, 섬긴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진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만일에 자신이 낮춤과 섬김을 실천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다면, 그 행위는 곧바로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낮춘다는 것, 섬긴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려야 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루카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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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9,30-37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두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이 두번째 수난예고의 내용은 첫번째와 전반적으로 비슷하지만,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유다 사회의 지도자들로부터만 배척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라는 점에서, 즉 예수님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주체가 유다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특권 계층에서 유다인 전체 곧 다수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나 위험성이 한층 고조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상황이 엄중한데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핍박받고 죽임 당할 거라는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며 그분의 제자들인 자신들은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묵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당신 나라를 세우실 주님이자 참된 임금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는데, 이제와서 당신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까지 당한다고 하시니 도저히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려고 예수님을 따른 게 아니기에,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자기들이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이기에 그 말을 듣기 싫어 귀를 막아버린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하느님 나라’와 제자들이 마음 속으로 바란 ‘하느님 나라’ 사이에는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크고 깊은 강이 자리잡고 있었나봅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돌아가셔도 딱히 상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기들이 예수님을 등에 업고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제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처럼,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처럼, 스스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돌아보게 하시려는,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시려는 부르심인 것이지요.
사실 ‘큰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큰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큰 권세를 누리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마음의 ‘품’이 크고 넓은 사람을 가리킨다면, 즉 하느님과 그분 뜻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큰 아량과 그분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굳은 의지를 가리킨다면 그건 오히려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장려해야 할 바람직한 덕목일테니까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웃에게 양보하여 기꺼이 꼴찌가 되려는 마음, 사랑으로 다른 이를 섬기려는 마음, 이해와 포용으로 어린이 같이 부족하고 약한 이를 품어 안으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지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고생을 감수하고 희생하는 따뜻한 마음, 그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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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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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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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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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5. 연중 제 7주간 화요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참 제자의 삶
<2025.2.25> 아침을 여는 묵상 (눅 6:39~49절)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참 제자의 삶❞
❚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위선적인 삶에서 벗어나 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듣고 실천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 겸손히 자신을 먼저 살피는 삶입니다(39~42절).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가식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정작 자신들은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일을 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결국 자기들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든 행위들이었습니다. 스스로가 맹인이면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내 눈에 들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정작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 자를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영적 맹인입니다. 영적 맹인인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겠다고 나서고 있지는 않은지 겸손히 우리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남을 판단하고 평가할 만한 자격은 없지만 혹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실지를 깊이 고려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목사 시절에 교구를 담당할 때, 심방 중에 위로를 한답시고 한 말이 오히려 듣는 집사님에게 큰 상처가 되어서 한동안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내 자신에게 먼저 사용하고 살펴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마음에 선함을 가득 채우는 삶입니다(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알게 됩니다...’(43~44절a). 예수님은 외적으로 선함을 가장하는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단호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들에 시간과 물질을 드리기보다 마음을 다스리고, 가꾸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45절)입니다.
우리 자신은 지금 삶에서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또한 우리 마음은 지금 무엇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가? 겉으로는 선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열매를 통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가식적인 요소들을 버리고, 참되고 진실하며,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양분으로 삼아 선한 열매를 맺는 참 제자의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삶에서 좋은 열매라고는 하나도 맺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에 대한 열정만 가득한 위선적인 삶을 버리고, 마음에 선한 것으로 가득 채워,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에 기초를 쌓고 행하는 삶입니다(46~49절).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46절)...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대로 선택하고 행하는 모순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듣고도 행함이 있는 자의 삶은 집을 지을 때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반대로 행함이 없는 사람은 주추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48~49절)고 말씀하십니다. 평상시에는 그 화려함의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홍수가 나서 물이 세차게 들이치게 될 때, 기초 없이 땅 위에다가 집을 지은 집은 곧 무너지되, 그 집의 무너짐이 엄청나게 됨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말씀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자는 불법을 행하는 자와 같습니다. 결국 천국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드러내야 합니다. 주 앞에 나아와 끊임없이 주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주님은 보여 주시겠다(47절)고 하십니다. 즉,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기만 하는 자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쾌하게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비율이 갈수록 놓아만 가고 있습니다. 공공의 안위와 평화에 큰 해를 끼쳤음에도 그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을 마치 영적 고난이나 핍박으로 생각해서 인내하자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신앙이요, 온전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 기초를 쌓아 말과 삶이 일치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선한 양심을 품고, 말씀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부끄럽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타인에 대하여 비난과 정죄의 말을 쏟아내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나에게 먼저 사용할 뿐 아니라 듣고 실천하는 삶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는 참 제자의 삶 그리고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6:39~4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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