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사상의 시대 배경
중국은 후한을 이어서 ‘위진남북조’라는 지극히 혼란한 시대를 맞이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소위 죽림칠현이라는 사람들이나타나서 은거하여 고담준론을 펼친다. 이들로 인해 청담사싱이 유행한다.
청담사상이 나타난 시대 배경을 보면, 세상이 극도로 혼란하였다는 것이다.
환란한 시대이지만 중국 문화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서진이 패망하고, 왕족과 귀족들이 양즈강 유역으로 도망와서 남경릉 수도로 세운 나라가 동진이다. 위의 조비가 제도로 만든 구품중정제로 동진도 관리를 뽑았다. 소위 인품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였지만, 귀족들이 갖추는 태도가 바로 고귀한 인품의 기준이었다. 귀족들은 관리직을 자기들끼리 돌려 먹을 수 있었다. 이 중에서 관리직을 거의 독식하다시피한 특정가문이 명문 귀족 가문으로 태어났다.
죽림칠현은 노장사상을 믿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탈속한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이들의 언행을 따지고 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기회만 오면 다시 속세로 되돌아 갔다.
한편으로 위진남북조 시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무장세력이 나타나서 정권을 잡았다. 이들 청담주의자들은 이들 무장 세력과눈 대립적이었다. 그들은 세속적 권리직을 통해 지위를 확보했다. 이들은 새로운 무장 새력과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청담과 은일을 하나의 풍조로 만들었다. 청담은 후한 말 때 환관이 득새하자 이들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청의’라고 하였다. 청담은 청의와도 닿아있다. 그들은 신흥 군주 세력과 갈등하면서,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청담, 은일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철학적 사색, 명목상의 은일, 세련된 품격으로 포장하여 , 무장 세력들과 단순히 품격으로 비교하여 자기들의 권위를 지키려 하였다. 그들은 지식으로 무장하여 단순히 무장만을 가진 집권 세력과는 대립적이기 하였다. 그들은 품격에 기반을 둔 엘리트 주의로 나아갔다.ㆍ
예술가들 중에는 은든하면서 마약을 하는 등 퇴페적인 생활을 하는 자도 많았다고 한다. 일부 청담주의자들의 생활도 그러하였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