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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해석
겔 17:11-24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너는 반역하는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
13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14 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거늘
15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16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17 대적이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 주지 못하리라
18 그가 이미 손을 내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19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20 그 위에 내 그물을 치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에서 심판할지며
21 그 모든 군대에서 도망한 자들은 다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니 나 여호와가 이것을 말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
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겔 17:11-24 / [비유의 해석]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셨다. 12) `너는 이 반항만을 일삼는 백성에게 이렇게 내 말을 전하여라. `너희는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그 의미를 내가 직접 설명해 주겠다.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왕과 고관들을 붙잡아 바벨론으로 데려가고 13) 그 대신에 이스라엘 왕족 가운데서 한사람을 택하여 협정을 맺고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이 땅의 쓸 만한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가 14) 이 새 왕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독립할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리고 단순히 나라를 존속해 나가기 위하여 협정이나 잘 준수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15) 그런데도 이 새 왕은 협정을 무시하고 애굽 왕에게 밀사들을 보내 많은 군마와 전차를 거느린 막강한 군대를 파견하여 자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니 그 일이 잘되겠느냐? 협정을 파괴하는 자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 그런 짓을 하고서도 형벌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 그가 자기 목숨이나 건질 수 있겠느냐? 16) 나 여호와가 확실히 살아있음을 걸고 맹세하지만 그는 절대로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자기를 왕으로 세워 준 바벨론 왕 앞에서 한 맹세를 무시하고 협정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 왕의 도시 바벨론에서 죽을 것이다. 17) 바벨론 군대가 밀어닥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장벽을 쌓으며 공격 진지를 구축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할 때에, 애굽 왕이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과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을지라도 전쟁에서 그를 살려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예 병력을 끌고 도와주러 오지도 않을 것이다. 18) 그런데도 이 새 왕은 자기가 한 맹세를 무시하고 협정을 파괴하였다. 그가 협정을 맺고서도 지키지 않았으니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9) 나 여호와가 확실히 살아 있음을 걸고 맹세하지만 그는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고 협정을 체결하고서도 지키지를 않았으니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게 바친 맹세를 무시하고 나와 맺은 협정을 파괴한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러므로 내가 그의 머리 위로 사냥하는 그물을 던져 그를 사로 잡겠다.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내 심판대 앞에 세워 놓겠다. 21) 그러면 그의 군대에 뽑혀 나온 자들도 모두 잡혀 죽을 것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때서야 이 모든 것을 선포한 이가 나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22) [시온산에서 다스릴 왕]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나는 또한 몸소 저 송백 끝에 돋은 순들 가운데에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이스라엘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어 놓겠다. 23) 이스라엘 한가운데에 있는 그 높은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고, 거기서 많은 가지들이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어 훌륭한 송백으로 자라게 하여 온갖 짐승들이 그 나무 밑에 깃들이다. 모든 종류의 새들이 그 가지의 그늘 속에 보금자리를 치게 할 것이다. 24) 그러면 그제서야 나 여호와가 높은 나무는 낮추어 놓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싱싱하게 푸른 나무는 말라 죽게 하되 마른 나무는 다시 싹이 나게 하였다는 것을 온 세상 모든 나무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이 말을 하였으니 내가 모두 이룰 것이다.'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를 전하고 난 후 그 비유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그 해석이 매우 중요합니다.
깨닫지 못하느냐(11-12a) 반역하는 족속에게 묻기를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앞서 말씀하셨던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함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듣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종용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11)라고 선포합니다. 비유를 깨닫기 위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다고 경고하십니다(마 13:19). 문제는 ‘반역하는 족속’이라는 언급에서 이미 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12b-15) 비유에 대한 해석으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가게 하고 왕족 중 하나를 왕으로 세워 대리 통치를 맹약하게 하고 능한 자들은 바벨론으로 옮겨 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언약을 배반함(16-21) 바벨론 왕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고 애굽에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구한다면 어떻게 형통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는 남 왕조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받은 후 바벨론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고 애굽에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청하여 독립하고자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바벨론의 재차 침공으로 토성을 쌓고 멸절하려고 할 때 애굽의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무리로도 그 전쟁을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본문에서 바벨론과 맺은 언약을 깨는 행위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와 동일시하며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루리라(22-24) 비유의 큰 독수리가 아닌 “내가” 즉 여호와께서 백향목 꼭대기의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 나무가 될 것이고 각종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서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분이시며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는 언약의 성취자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애굽과 바벨론을 의도하신대로 움직이실 수 있는 진정한 통치자라고 믿으십니까?
무엇이든 빈틈없이 정확하게 하려는 완벽주의는 결국 우리들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을 망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 어떤 일상에 가두지 말고 배우고 실수할 기회를 자신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뒤죽박죽 될 것을 각오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펼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실수할 것을 겁낸 나머지 아무 모험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프랑스의 도덕주의자 보브나르그의 말입니다.
< 설 교 >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계강현 목사
요즘 우리나라는 사면초과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경제에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WTO의 도움과 미국에 도움을 기대하고 있지만, 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형세다. 북한은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비행기가 영공을 침범하고 독도상공을 넘나들어 우리 비행기가 위협사격을 가하자, 일본은 또 다시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는 억지주장을 펼쳐 우리 억장을 무너지게 하고 있다. 적반하장이다. 미국은 중국을 향해 관세를 부과함으로 무역전쟁을 시작하더니 환율조작국이라고 비난하며 본격적인 전쟁을 벌일 모양새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에게 현재보다 5배가 되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우리나라 주위에 모든 강대국들과 불편한 관계가 펼펴지고 있는 셈이고, 모든 나라가 온통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정황이다. 6월에 한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조우할 때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한 달 새에 갑자기 돌변하고 있다. 힘과 경제력이 약한 우리나라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진퇴양난, 사면초과에 몰려 있는 모양새이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지금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길 원하십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의 문제만 그럴까? 우리 개인의 삶의 문제 가운데서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겔 17:1ff.를 보면 하나님이 어느 날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길,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내용은 두 마리 독수리와 포도나무 비유인데, 두 마리 큰 독수리 사이에서 포도나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비유에 대한 해석과 적용 부분이다. 이 비유의 해석을 살펴보면, 남 유대 나라가 멸망을 앞둔 시점에서 경험하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대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남 유대나라를 상징하고 있다. v3에 등장하는 독수리는 이 성경이 쓰이던 당시 북방의 강대국 바벨론이고, v7에 등장하는 독수리는 남방의 강대국 이집트이다. 포도나무가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은 유대나라 말기에 맨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이 친 바벨론 정책을 쓰다가 친 이집트 정책으로 갈아탄 것을 지적하고 있다. 시드기야 왕의 전 왕이었던 여호야긴 왕은 바벨론에 침략에 의해 폐위되었고 그의 숙부인 시드기야가 섭정 왕으로 세워졌다. 그러니 바벨론과 강제 동맹을 맺게 하고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는 조건으로 왕으로 살게 하고 나라를 지키고 보호해주겠다고 약속받은 것이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는데, 그만 시드기야 왕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바벨론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그 라이벌인 이집트와 비밀동맹을 맺고는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것이 발각되자, 분노한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쳐들어오고, 약속한 이집트는 군사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자, 결국 시드기야 왕과 남 유대나라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이 비유의 내용이다. 이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코앞의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언약을 파기한 시드기야 왕과 남 유대가 과연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vv14-15, “이것은 바빌로니아가 이 나라를 굴복시켜 독립하지 못하게 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만 명맥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려 한 것이다. 15 그런데도 그는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역하여, 이집트로 사람을 보내서, 자기에게 많은 군마와 군인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느냐? 언약을 어긴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느냐?” v18, “그가 맹세를 무시하고 언약을 깨뜨렸다. 그가 언약을 어기고 이런 모든 일을 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대국가 시대에 나라 간에 동맹조약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피의 맹약이다. 서로 간에 동맹을 맺고 피로 언약식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만일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피의 보복을 하는 것을 조약에 명시하기 때문에 그런 보복조치와 죽음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남 유대의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것이다. 결국 그 일로 파급된 유대나라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자.
1. 신앙인은 역사적 사건 배후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남 유대나라의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 나라와의 언약을 파기했다. 아니 사실은 남 유대는 그 이전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온 열방 가운데 세우시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이웃을 섬기라고 세워주셨다.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우상숭배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고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을 괴롭히고 착취하고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고 가산을 갈취하므로 언약을 어겼다. 선민사상에만 빠진 채 죄악을 범함으로 열국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열국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욕을 돌리는 남 유대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에는 바벨론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열국을 침략했다. 거기에 딸려서 남 유대나라를 이미 두 차례나 침공하였고 왕과 고관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국의 이익에 따른 역사적 사건 배후에는 유다나라가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따라 살지 않고 반대로 우상숭배와 강포와 불순종한 죄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고 계신 것이다. 겔 36:7, “너희는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거스르는 사람이 되어서, 내 율례를 따르지도 않고, 내 규례를 지키지도 않고, 심지어는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이 지키는 규례조차 따라 살지도 않았다.” vv18-19, “그들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려 그 땅을 더럽혔으며, 온갖 우상을 섬겨 그 땅을 더럽혔으므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다. 19 내가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그들을 여러 나라들 속으로 쫓아 보내며, 여러 나라에 흩어지게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일상의 사건 배후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여기 독수리로 나오는 바벨론이나 이집트도 뭐 대단히 의로운 나라가 결코 아니다. 언젠가는 심판받아야만 하는 나라이지만, 지금 남 유대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그런 걸 보면 우리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고민하고 해결해가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와 개인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과 행동을 똑바로 깨달아 알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행동하겠지만, 결국 그 일을 이뤄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에 닥친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건들을 영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고 묵상해본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향해서 경고하시는 것 같다. 우리 자녀들은 아이돌이 되겠다는 애들이 너무 많은데, 연예계는 성 동영상 파문과 마약, 도박사건 등으로 성적 타락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연일 교육계, 문학계, 종교계, 스포츠계 등 좀 성실하고 모범이 되어야 할 만한 그런 분야의 사람들에서 어울리지 않는 성폭력과 추행 소식이 들린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 계속 이어지는 자살소식으로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모양새다. 물질만능주의와 돈을 신으로 섬기는 배금주의 사상에 사회도 종교계나 교회조차도 타락되어 가고 병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경고하며 각성하라는 징계의 심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나가야 한다. 이런 때에 주변에 강대국을 의지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
시드기야 왕과 남 유대 관리들과 백성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당연히 하나님에게 우상숭배의 죄와 강포의 죄악을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야만 했다. 왜 하나님은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전하게 하셨을까? 돌이켜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사랑의 외침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바벨론의 침공을 다른 강대국인 이집트를 의지해서 해결해보려고 하고 있다. 그 일이 성공했는가? 아니다. 실패하고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만약 우리가 오늘의 이 난국을 미국이나 중국이나 WTO나 유엔 안보리나 다른 강대국을 의지하여 해결해 가려고만 고집한다면 어쩌면 시드기야 같이 헛 다리 집는 일일지 모른다. 먼저 우리 사회의 음란과 우상숭배와 폭력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은 강대국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엎드려야 한다. 대통령과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치하길 중보 기도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을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뭘 알겠는가? 우리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할 수 있겠는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문제를 바로 직시하고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가는 지혜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2. 인간관계에서 하는 행동이 곧 하나님께 대한 행동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과 맺은 언약 및 맹세를 무시하고 배반했는데, 과연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v15, “그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느냐? 언약을 어긴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느냐?” v18, “그가 맹세를 무시하고 언약을 깨뜨렸다. 그가 언약을 어기고 이런 모든 일을 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서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과 맺은 언약 및 맹세는 곧 하나님께 대한 연약 및 맹세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시다. v19,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그는 나의 이름을 두고 한 맹세를 업신여겼으며, 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깨뜨렸으므로, 내가 벌을 주어서, 그 죄를 그의 머리로 돌리겠다.”
왜 하나님이 이런 논리의 비약을 하시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과 언약을 맺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맹세했겠나? 당연히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신앙이 좋건 나쁘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런 바벨론과의 언약 및 맹세를 파기하고 이집트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게 그냥 넘어갈 일이겠는가! 그래서 바벨론에 대한 언약 파기는 하나님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되어 심판을 초래한 것이다. vv20-21, “내가 그물을 쳐서 그를 망으로 옭아 바빌로니아로 끌고 가서, 거기에서 내가 나를 반역한 그의 반역을 심판하겠다. 21 그의 모든 군대 가운데서 도망한 사람들은 모두 칼에 쓰러질 것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이렇게 말한 것이 나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코람 데오(Coram Deo!)를 주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신실함과 배반이 하나님에 대한 행동이 된다. 우리가 믿음이 좋던 나쁘던, 신앙이 강하던 약하든 결국 우리가 말하고 행하고 약속하고 그런 모든 일상의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우리가 잘못하면 예수님 욕 먹이게 되고 우리가 잘하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 결국 인간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 가운데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별개가 아니다. 하나님 관계 이웃 관계는 같이 가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서, 주린 자, 나그네, 가난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같은 약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한 행동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고, 그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요일 4: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까지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어떤 분들은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기도하며 눈물도 흘리고 그런다. 그런데 돌아서서는 배우자하고 항상 갈등하고 싸운다. 목장식구들하고 자주 갈등하고 다투고 불편해하고 미워한다. 위아래 집 이웃하고 막 부딪치고 다툰다. 그리고는 또 필요할 때는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한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가 아니라 같이 간다.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를 봐서 알 수 있다. 이웃과의 관계가 점점 좋아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다. 절대 분리하여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까지 하신다. 엡 6:6-7,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7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심지어 벧전 2:18, “하인으로 있는 여러분,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신 이유이다. 우리 직장생활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나타나야 그게 진짜 신앙이다. 우리 직장 동료들을 전도할 때 이게 진짜 전도다. “내 주위에는 전도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 얘기 하지 마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만, 구체적인 열매는 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 속에서 때때로 겪는 갈등을 질질 끌지 말고 빨리 해결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1) 차이점보다 공통점이나 보완점을 먼저 찾아라. 2) 참을 수 있는 일은 참아라. 3) 손해를 감수하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양보하라. 4) 오해를 풀기 위해 대화하라. “그건 제 실수네요. 사과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풀기 시작하면 의외의 결과로 풀릴 수 있다. 5)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회의를 하라. 6) 경우에 따라서는 접촉을 피하라. 어떨 때는 부딪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일 수도 있다. 피하고 좀 시간을 버는 것이다. 이럴 때 해야 할 중요한 것은 기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할 때는 우리만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마 18:18-19,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의 갈등을 해결하고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만 있으면 기도응답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 관계와 이웃 관계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고 따로 가지 않고 같이 간다.
3.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회복과 새 출발의 역사를 이루신다.
v24, "그 때에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주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대로 이루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v22ff.에서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만약 이 부분이 없다면 하나님은 파괴적인 정복자라고 왜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과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건설적으로 회복되게 하신다.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에 지배받는다. 우리 죄인인 인간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굉장히 쉽다. 여러분, 노력해서 미워해본 적이 있는가? 그냥 미워하기는 너무 쉽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에게는 진노하는 것이 엄청 힘들다. 하나님은 사랑이 본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조차 사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고이는 사랑이다. 웅덩이만 파놓으면 물이 모이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낮은 곳으로 고이는 사랑이다. 낮은 곳이 어떤 곳인가? 약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우는 사람에게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동적으로 쏟아진다. 하나님의 사랑은 낮은 곳으로 고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 유대를 심판하시는 거다. 우상숭배의 죄도 물론이거니와 남 유대는 죄없는 사람들, 고아와 괴부를 괴롭혔다. 그걸 하나님이 엄청 진노하신다. 겔 22:7, “성읍아, 네 안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며, 네 한복판에서 나그네를 학대하고, 네 안에서 고아와 과부를 구박하였다.” 낮은 곳으로 고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역행한 짓이다. 그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레 33:3,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외면을 못한다. 낮은 곳으로 고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고통당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자동적으로 쏟아진다. 사 42:3,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왜 그러실까?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이것을 알 때 신앙생활에 여러 가지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고 파괴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하시고 세워주신다. 결국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진정한 능력을 보여주신다. 이 본문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으시는데, 일방적이고 주도적으로 언약을 맺으신다. vv22- 24,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겠다. 내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 23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내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 24 그 때에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주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대로 이루겠다.”
하나님이 백향목 끝에 돋은 자기를 꺾어다가 심겠다고 하시는데, 백향목은 다윗 가문을 의미한다. 끝에 돋은 가시를 꺾어다가 심는다는 것은 다윗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하나님이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고 하신다. 여기서 연한 가지는 메시아를 나타낸다. 사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그 가지를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높은 산, 바로 예루살렘의 시온 산이다. 시온 산에 심겨진 나무는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어 생명을 선사하는 열매로 가득하며, 각종 새들이 깃드는 생명과 보호의 산실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 이것은 연한 가지인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예언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서 인용하고 있다. 마 13:32,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미 교회를 통해 성취되고 있고 마지막 재림을 통해 완성될 내용이다.
우리는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산다. 그래서 죽음 앞에 직면하면 슬퍼지고 낙심하게 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회복과 구원이 있고 부활이 있고, 새로운 출발이 있다. 옛 하늘과 옛 땅이 불에 녹아지고 사라지게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그렇다. 그것을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는 확연히 눈으로 보게 되고 누리고 만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꼭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뿐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그것을 맛보며 산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울 때에 고난의 때에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꼭 우리 기도한 대로 주시지 않을 때도 많지만, 반드시 가장 최선의 것으로 응답해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해피엔딩이다. 우리의 인생은 해피엔딩 이다. 이렇게 이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있는 동안에는 이 나라와 민족은 해피엔딩이다. 작금의 어려운 현실에서, 여러분이 처한 고난의 현실에서 회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새 출발하게 만들어주실 것이다. 그게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축복의 반열에 동참하여 그 주인공이 되라. 아멘.
열매를 맺은 연한 가지
겔 17:22 ~ 23, 고후 12:10 / 이성희 목사
건강이 이데올로기인 세상에 삽니다. 요즘에는 광고를 보면 인삼을 먹은 한우, 야생 쑥을 먹여 키운 한우, 마늘대를 먹여 키운 소, 복분자를 먹여 키운 돼지, 바나나를 먹여 키운 돼지, 홍삼껍질을 먹여 키운 돼지, 녹차를 먹여 키운 보성 웰빙 삼겹살, 뽕잎을 먹여 키운 돼지, 당근을 먹여 키운 백구, 유황을 먹여 키운 오리, 한약재를 먹여 키운 오리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사람보다 더 잘 먹고 사는 동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최근에는 동물의 배설물을 수거하여 조제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각 커피가 런던에서 한잔에 50파운드, 한화로 약 10만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카페 라로’라는 자마이칸 블루 마운틴과 코피 루왁 열매를 사용하여 만든 커피입니다. 코피 루왁 열매는 아시아 사향고양이가 먹은 뒤에 배설한 것입니다. 고양이가 커피 열매를 먹고 속살을 분해하여 배설하면 그 열매를 수거하여 똥을 씻은 뒤에 구워내 새로운 커피 맛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맛에 대한 욕심을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잎과 열매는 굉장히 중요한 식품과 음료의 재료입니다. 아마 이것이 없으면 큰 일 날 것입니다. 누가복음 6:43에는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유실수 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고, 열매를 맺되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먹지 못하는 돌감이나, 땡감이나, 탱자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열매는 과일로서의 가치는 없습니다.
성경의 열매는 내가 자의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내 능력으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으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 열매들은 문자 그대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에 의해 맺는 열매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약하고 연한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맺는 열매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에스겔의 예언의 내용입니다. 에스겔은 기원전 7세기 초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기원전 587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침공과 예루살렘의 황폐화를 말했습니다. 유다왕통이 끊어지겠지만 그루터기에서 메시야가 날 것을 그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가지의 모습을 가진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신 곳은 비천한 마굿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문과 지위는 비천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재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식으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연한 가지가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를 닮은 우리 모두가 연한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많이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연한 가지를 꺾어 높은 산에 심습니다.
22절에는 말씀합니다.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성경이 말하는 연한 가지란 그리스도의 미천한 출생을 의미합니다. 연한 가지는 보잘 것 없이 약한, 약하고 천한 존재로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심지어 제자에게도 업신여김을 받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메시야가 태어난다면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한 가지 같은 그리스도가 빼어난 산에 심겼습니다. 시온에 세워졌습니다. 시온에 세워질 때 열매를 맺고, 각양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각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8에는 그리스도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을 때에 한 없이 높아지신 것입니다.
봄이 되어 물이 오르는 계절입니다. 연한 순이 나와서 자랍니다. 연한 순이 자라 큰 가지가 됩니다. 가지에 무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연한 가지가 무성한 가지가 되고 여기에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하늘나라의 이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약해 보이는 연한 가지가 무성한 가지가 되고 열매를 맺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성군입니다. 전쟁을 잘 하는 왕이었고 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강하고 부할 때가 아니라 연한 가지 일 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가 간음하고 살인하였지만 나단에게 “내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가장 낮아졌고 이 때 하나님은 가장 높은 산에 심으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왕자로 있을 때가 아니라 이름 없는 목자로 낮아졌을 때 하나님은 높은 산에 심으셨습니다. 이사야는 겁 없는 선지가가 아니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자신을 낮출 때에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할 때 비로소 “네가 이제부터 사람을 취하리라”고 높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높은 말 위에서가 아니라 말에서 땅에 떨어져 꼬꾸라졌을 때 비로소 높은 산에 심겨졌습니다.
우리도 연약할 때 비로소 강해집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약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채우시고 높은 산에 심어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인간은 누구나 약할 때 가장 강해집니다. 약할 때 강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약할 때 함께 하십니다. 히브리서 4:15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약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찬송합니다.
오늘 성경은 “연한 가지를 꺾어”라고 합니다. 연한 가지가 꺾입니다. 왜 강한 가지를 높은 산에 심지 못합니까? 너무 강해서 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꺾이지 않는 가지는 높은 산에 심기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겨루려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이기려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야곱은 참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이기려고만 했습니다. 욕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를 만나러 오는 야곱을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게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꺾여야 높은 산에 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꺾어서 높은 산에 심어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꺾으실 만큼 연해지자 비로소 높아진 것입니다.
야고보서 4:10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6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합니다. 낮추고, 겸손하면 하나님이 직접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연한 가지를 꺾어 높은 산에 심습니다. 우리 모두가 높은 산에 심겨진 연한 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연한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23절에는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고 합니다. 연한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연약함은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하늘나라는 온유한 자의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것입니다.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의 것입니다. 소외된 자의 것입니다. 부자가 아니라 거지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연약한 자들의 것입니다.
이사야 53:2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산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분 때문에 평안하고, 먹고 사는 사람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무성한 열매들입니다.
의사 아들, 변호사 아들, 목사 아들, 셋이서 아빠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의사 아들이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한 시간 수술하면 1,000달러 번다.” 다음은 변호사 아들이 아빠 자랑을 합니다. “우리 아빠는 한 시간 말하면 2,000달러 번다.” 목사 아들 차례가 되자 잠시 생각하더니 말합니다. “우리 아빠는 30분 말하고 나면 여러 사람이 돈 걷으러 다닌다.” 아빠가 다 가지고 가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 예수님 덕에 살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누구 덕에 삽니까? 누구 덕에 이만큼 되었습니까? 다 하나님 덕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 때문에 잘 된 예수님의 열매들입니다.
우리 민족은 약점도 많고, 결함도 많고, 부족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연약한 가지 같은 우리나라를 강하게 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작고 가진 것도 없는 나라지만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어느 날 아침 기도회 시간에 서로 기도제목을 올리는 시간에 어느 미국인 학생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기도는 미국인들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인디언 보호구역’을 가지고 있는 인종분리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가 그런 기도를 할 자격이 있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 가운데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지배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약하기에 가장 유리합니다. 다른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어느 나라든지 다 들어갑니다. 우리나라 여권이 통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인 ‘론리 플래닛’은 한국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은 서쪽에서 한국을 압박합니다. 일본은 동쪽에서 계속해서 한국의 위협이 됩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한국은 본의 아니게 전쟁 게임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변국들이 아무리 한국을 삼키려 해도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습니다. 중국과 강 하나 사이에 있지만 한국은 중국과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기합니다. 중국에 소수민족이 56개나 있습니다. 그런데 소수민족으로 조선족이 있지만 한국은 엄연히 다른 나라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나라는 약하기에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하고 무지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무성하게,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사야 60:22에는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합니다. 여호수아 23:10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숫자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작고 약하지만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시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약해 보이는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삽니다. 병치레하는 사람과 병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장수합니다. 작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조폭 두목들은 한 결 같이 체구가 작은 사람들입니다.
열매는 가장 좋은 먹거리입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였던 에덴동산의 먹거리가 열매 즉 과일입니다. 마지막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그곳의 먹거리가 과일입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열매는 하늘나라의 먹거리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늘나라에 쌓은 먹거리가 됩니다. 요한복음 15:8에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열매 맺는 연한 가지가 됩시다.
결 론
고린도전서 1:27에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미련하고 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가지를 꺾어서 높은 산에 심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약한 우리로 하여금 강한 자들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높이 올라가는 나무는 그늘을 만들지 못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늘을 만듭니다. 혼자 높은 나무가 아니라 함께 그늘이 있는 나무가 좋은 나무입니다. 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입니다. 혼자 “주여, 주여” 만 외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함께 있어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혼자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남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다 약하지만 약한 자가 강한 것을 믿으세요. 연약한 가지를 높은 산에 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연약한 가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연약한 가지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올해도 많은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지에 많은 열매가 맺혀 무성한 나무, 풍성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여러분의 가지에 맺혀야 할 열매들이 누구인가를 잘 생각해 보시고 그들을 여러분의 가지에 열매로 맺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향목
에스겔 17:22-24 / 피영민 목사
서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입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즉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메시아의 예언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도 언 듯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선지서에 나타난 많은 메시아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상징적인 언어로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7장 2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저는 어렸을 적에 수수께끼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문제를 드립니다. 굴이 두 개 있는데, 기차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이들 코 흘리는 것입니다. 또 흰 여자가 소복 입고, 머리 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답은 연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직설적인 언어로 말씀하지 않고,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숨겨야 할 자(Conceal)에게는 숨기시고, 깨닫게 해야 할 자에게는 드러내기(Reveal)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0절과 11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비유로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들어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정확히 알아듣습니다. 군대 가면 암호를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아는 사람끼리 통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장교가 순찰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교의 집안 내력은 발음 중에 “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보초 서는 병사가 “암호?”라고 외쳤습니다. 이날 암호는 “고구마”였습니다. 이 장교가 대답하기를 “고구미”라고 답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죽으면서 오늘 암호가 “김진기(감잔가) 아닌가?”라고 말하고 죽었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유나 수수께끼는 통하는 사람끼리는 통하고, 통하지 않는 사람은 통하지 않기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7장의 수수께끼는 대단히 어려운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이 급하셨는지 해설을 모두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17장의 수수께끼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3차에 걸쳐서 침공했습니다. B. C 605년 여호야김이 왕일 때에 1차 침공을 하여 다니엘과 젊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은 폐위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의 속국 노릇을 해야 하는데 배반했습니다. B. C 598년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2차로 침공했습니다. 2차 침공 때에는 여호야긴 왕을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일만 명 이상 유다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유다에는 천민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에스겔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B. C 598년 포로가 되어 5년 뒤인 B. C 593년에 예언을 시작하고, 22년 동안 예언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야긴의 숙부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잘 드리면 살 수 있는 것인데 바벨론에 반역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의 도움을 청해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다가 느부갓네살 왕이 언약을 배반한 시드기야를 B. C 587년에 3차 침공하여 완전히 멸망하고, 시드기야 왕은 아들이 죽는 것을 봤고, 자신은 두 눈이 뽑혔습니다. 두 눈 뽑힌 채로 끌려가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에스겔 17장에는 2,3차 침공 때의 사건들이 수수께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독수리와 포도나무와 백향목의 비유입니다. 에스겔 17장 3절로 4절입니다.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채색이 갖추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되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서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고의 성읍에 두고” 큰 독수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레바논의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전을 지은 나무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왕궁을 지은 나무입니다. 이것은 유다의 왕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왕가는 다윗의 가문입니다. 즉 레바논의 백향목은 다윗의 가문을 의미합니다. 4절의 연한 가지는 B. C 598년에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을 말합니다. 백향목의 연한 가지를 꺾어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고의 성읍에 두었다는 말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에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다윗의 가문 중에서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 13장 3절로 4절의 수수께끼의 해답입니다. 에스겔 17장 5절로 6절입니다. “그 땅의 종자를 취하여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가에 심더니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의 아래 있었더라”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유다 땅에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포도나무는 시드기야를 말합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밑에 있어 속국 노릇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형벌로 정하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 포도나무를 큰 물가 옥토에 심은 것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 바벨론에 조공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다른 독수리가 한 마리가 나옵니다.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긴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발하고 가지가 퍼졌도다” 7절의 독수리는 애굽을 말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데 배반을 하여 애굽에 도움을 청했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배반하자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났습니다. 9절입니다.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긴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발하고 가지가 퍼졌도다” 언약을 배반한 시드기야를 포로로 끌고 가서 두 눈을 뽑고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볼찌어다 그것이 심겼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이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에는 동풍과 서풍이 불어옵니다. 서풍은 지중해에서 부는 바람입니다. 아주 좋은 바람입니다. 식물을 살리는 바람입니다. 동풍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기 때문에 뜨거운 바람이고, 식물을 죽이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는 두 눈 뽑히고, 자식이 죽고,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에서 죽었습니다. 에스겔 17장 1절부터 10절까지는 수수께끼이고, 11절부터 21절까지는 수수께끼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왕가는 영원히 끝나버린 것입니까? 사무엘하 7장 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의 사망으로 다윗 왕가가 끝나버렸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어기시는 하나님이신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본문인 에스겔 17장 22절로 24절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Ⅰ. 하나님은 백향목의 연한 가지를 꺾어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신다(Planting).
본문 22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높은 산에 백향목의 연한 가지를 심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백향목의 가지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큰 독수리인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나님은 연한 가지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높고 빼어난 산에 심기 위해서 취하신 것입니다. 백향목의 높은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두머리인 다윗의 왕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안을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연한 가지(twig, sprig)를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연한 가지를 취하여 높고 빼어난 산인 시온 산, 예루살렘에 심겠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B. C 539년 고레스 칙령으로 스룹바벨의 인도를 받아 돌아온 사람들이 다윗의 후손을 중심으로 나라를 재건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이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로 2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다윗의 가문에서 한 가지가 나올 것이며, 이 가지에는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로 6절도 같은 예언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메시아를 가리켜서 다윗의 집안에서 나온 의로운 가지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도 같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가지로부터 한 연한 가지를 심으시겠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메시아 대한 예언입니다. 메시아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가지요, 다윗의 집안에서 나온 한 의로운 가지요, 백향목 꼭대기에 취한 연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연한 가지입니다. 22절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예루살렘에 심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한 연한 가지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학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력서에 쓸 것이 없는 한 연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 가지를 통해 세상에 많은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가지로 말미암아 구원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있고, 그 선행이 쌓여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면 천국 가고, 선이 모자라면 연옥에 가고, 더 모자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선을 쌓아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애굽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힘으로 애굽에 나왔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벨론에 포로가 된 유다 백성이 스스로 해방되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심으신 백향목 연한 가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요나 2장 9절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Salvation is of the LORD)”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예루살렘에 심으신 연한 가지로 말미암아 사람은 구원받게 된다는 진리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의지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22절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예루살렘에 보내신다는 약속입니다.
Ⅱ. 이 연한 가지는 각양 새가 깃들이는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으로 성장할 것이다(Progress).
본문 23절입니다.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찌라” 이 연한 가지는 연한 가지로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한 가지가 자라 열매가 무성하고 각양 새들이 와서 깃들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예수님은 연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조롱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연한 가지처럼 보인다고 우습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연한 가지이고, 사람들이 침 뱉고, 때리고, 모욕하고,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망을 이기신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사망을 이길 능력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망을 이기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참된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것이 신화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사신 후에 40일 동안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후에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을 세상에 보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받은 것은 이 연한 가지가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받은 제자들이 설교했더니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그 다음 날 이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대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소아시아를 지나 유럽을 건너 신대륙으로 와서 미국에서 동남아시아로, 대한민국에 이르게 되고, 이제는 중국으로, 인도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이방인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연한 가지가 성장을 하여 아름답고 큰 백향목이 되었습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되었고,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많은 새가 날아오게 되었습니다.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 중에는 봉황새 만 수 문전에 풍년 새” 큰 백향목에 새가 날아듭니다. 수많은 이방인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의 그늘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31절로 32절에서 천국을 겨자씨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하나님의 교회는 약하고 작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창대하여 수많은 이방인을 포함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수를 멸시하고 교회를 핍박합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은 일찍 죽습니다. 유세비우스가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라는 책을 기록했습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로마 황제 중 교회를 핍박하는 황제치고 일찍 죽지 않은 황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연한 가지가 꺾이기는커녕 자신들이 꺾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확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연한 가지처럼 시작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크고 백향목이 될 것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Ⅲ. 하나님은 연한 가지라도 능히 큰 백향목이 되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Power).
본문 24절입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연한 가지가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는 그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들의 모든 나무는 열국의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주적인 영향(Universal Impact)을 미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외적인 영향(Outward Impact)과 내적인 영향(Inward Impact)을 줍니다. 외적으로 높은 나무는 낮아지고, 낮은 나무는 높아집니다. 내적으로 푸른 나무는 마르고, 마른 나무는 무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높은 나무 같던 바벨론, 앗수르, 헬라, 로마는 모두 낮아졌습니다. 헬라에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가 철학을 말했습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세웠습니다. 대한민국은 고조선 시대였습니다. 그리스가 문명을 꽃피울 때에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에 IMF가 찾아왔습니다.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금 올려달라고 시위를 합니다. 높은 나무가 낮아지고, 낮은 나무가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나무를 낮추시고, 낮은 나무는 높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푸른 나무도 말리시고, 바짝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만 하시고 이루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윗 왕가가 모두 방해 버린 것 같고, 시드기야 왕이 두 눈 뽑혀 끌려가고,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시온 산에 서시더니 큰 백향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셨기에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당신이 나를 높여 주셨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내가 당신의 어깨 위에 있을 때에 나는 강한 존재가 됩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내가 될 수 있는 가능한 것보다, 당신은 나를 높여 주셨습니다).
결 론
우리 인생에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내 인생을 어디에 깃들일 것인가입니다. 내 인생은 어디에 깃들고, 어느 그늘에 피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고 했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재물, 권력, 쾌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지할 것이 못 됩니다.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재물이 그늘이라 믿었는데 사라집니다. 권력과 쾌락이 그늘이라 믿었는데 없어집니다. 본문 23절 후반에 보면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찌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백향목 가지 그늘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에 거하는 사람은 멸망과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되고, 참 자유와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되고, 현세와 내세가 형통 할 줄 믿습니다. 어느 그늘에 거할 것인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낮은 나무와 마른 나무 같은 내 인생에도 소망이 있을까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높이시고, 무성하게 하시는 능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낮은 나무도 높이시고, 마른 나무도 무성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외적으로 높여주시고, 내적으로 무성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면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연한 가지를 심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연한 가지를 큰 백향목으로 성장시키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낮은 나무를 높이시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시는 능력을 갖춘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리라
겔 17:22-24 / 곽창대 목사
에스겔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과 환상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에스겔 선지자가 주전 597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5년 후인 주전 592년에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6년 후에 바벨론이 세 번째로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는데 그 때가 주전 586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얼마 전에 에스겔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것은 곧 살펴보겠지만 어느 정도 성탄절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들려주신 비유인데 이 비유의 중심 소재는 백향목입니다(22-23절). 백향목은 성경에서 70번이나 등장하는 나무입니다. 정식 명칭은 삼나무인데 소나무 과의 침엽수입니다. 외관이 매우 수려하고 장대합니다. 높이 40미터, 원 둥치의 둘레 10미터, 곁 둥치의 둘레도 3미터까지 자라는 아주 큰 나무입니다. 수명이 2-3천년이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깊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가물어도 나무의 수액과 진액이 마르지 않습니다. 눈이 덮인 높은 산지에서도 꿋꿋하게 자랍니다. 짙은 향기까지 풍깁니다. 수목의 재질이 견고해서 해충이 기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내구력도 뛰어날 뿐 아니라 아름답게 광을 낼 수 있어서 집을 건축하거나 선박을 제조하거나 악기를 제작할 때 자제로 쓰인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건축할 때 주목재로 사용했습니다. 달걀 크기의 솔방울을 맺는데 솔방울이 벌어지면 잣보다 훨씬 큰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번식합니다. 물론 씨앗은 먹을 수 있습니다. 힘찬 기상, 아름다움, 장엄함, 영광,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수목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백향목이 17:2-4에서도 등장합니다. 제가 읽을 때 여러분들께서는 장면을 연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친히 해석해주셨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3절에 등장한 큰 독수리는 베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그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이스라엘의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자기 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왕을 3-4절에서는 “백향목의 높고 연한 가지 끝”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그 백향목의 연한 가지 끝을 장사하는 땅, 상인의 성읍에 두었다고 하는데 그 장사하는 땅, 상인의 성읍이 바벨론입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고관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군대가 주전 597년에 두 번째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긴과 여러 고관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뜻입니다. 그 때 에스겔도 바벨론으로 잡혀왔습니다.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는데 13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드기야를 “그 왕족 중의 하나”라고 했는데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의 삼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5절에서는 비유로 말씀합니다. “그 땅의 종자”란 금방 말씀드린 대로 “그 왕족 중의 하나”인 시드기야를 뜻합니다. 13-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시드기야 왕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사이에 종주국의 언약을 맺습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잘 섬기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지켜줄 뿐 아니라 다시 번영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지만, 느부갓네살 왕을 배신하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5-6절을 보면, 비유의 소재가 포도나무로 바뀝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꺾어 큰 물가의 옥토에 심었지만 그 가지는 3절에서 언급한 큰 독수리의 보호와 지원 아래서만 성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을 잘 섬기면 이스라엘이 보존되고 다시 번영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7절을 보면, 또 한 마리의 큰 독수리가 등장하는데 더디게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가 그 큰 독수리에게서 물을 공급받으려고 뿌리와 가지를 뻗쳤습니다. 이 7절을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해석하십니다. 시드기야 왕이 애굽 왕 바로에게 바벨론의 침공을 막아달라고 원군을 요청한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애굽과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구책이었습니다. 그로써 이스라엘이 곧 패망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 9-10절과 15-21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패망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할 뿐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때보다 더 찬란한 번영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22절:
* 백향목: 유다왕국
* 백향목 꼭대기의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이스라엘의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으리니: 여호야긴 왕과 시드기야 왕 이후로 다윗 왕조의 대가 완전히 끊긴 것 같지만 후일에 한 왕의 등장으로 다시 다윗의 왕조가 회복될 것이라는 뜻임. 성경학자들은 이 왕을 다윗의 왕위를 회복할 만왕의 왕, 메시아를 뜻한다고 해석함.
다윗의 왕조를 회복할 이 왕이 누구인지, 종교개혁자 칼빈 선생이 자기의 주석책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본문은 유다왕국의 회복에 관한 예언인데 이 예언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통해 유다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셨지만 완전한 회복은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다백성의 예루살렘 귀환은 유다왕국의 회복의 시작으로서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유다왕국의 온전한 회복의 전조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왕국 즉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시작과 번성을 예언한 것이다.”
* 이스라엘의 높고 우뚝 솟은 산: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시온 산을 일컬음.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심,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심, 그 새 예루살렘이 신약의 교회임, 그러므로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서게 될 것을 뜻함
23절:
*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리라: 백향목의 왕성한 성장과 결실
* 그 백향목에 각종 새들이 날아들어 깃들고 그 그늘에 살리라: 세상을 선도하는 나라, 세상에 하늘의 복을 나누어주는 나라가 되리라,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성장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가 연상됩니다.
(마 13:31-32)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흥왕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의 본문에 담겨있습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4절:
* 이로써 하나님이 누구신지 들의 모든 나무(세상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이 누구신가?
- 높은 나무를 낮추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 낮은 나무를 높이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신다.
- 푸른 나무를 말리시는 하나님: 자기 힘으로 성공했다고 자기를 뽐내고 자랑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무너지게 하신다.
-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시는 하나님: 자기 힘을 의지함으로써 낭패를 당했다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회복하셔서 다시 번성하게 하신다.
*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만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24절 하반절): 약속(말씀)하신대로 실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성경의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졌습니까? 물론입니다.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외형만 따져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 도처에 퍼져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큰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큰 복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예수님을 통해 만천하에 흘러넘쳤습니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오늘 본문과 더불어 성경 전체에서 우리에게 최우선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주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주제인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예수님은 정말 겸손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셨지만 왕궁에서 나지 않으시고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겨자씨처럼 아주 미미하게 시작하셨습니다.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30년간은 우리와 별 다름없이 아주 평범하게 사셨습니다. 목수로 하루하루 일해서 가족들을 부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의 생애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53:2-3)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사셨습니다.
(빌 2:7-8)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높이셨습니다.
(빌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같은 역전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했습니다.
(사 11:1-5)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구약성경에서 예언한대로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큰 비전을 약속하셨습니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큰 비전을 약속하시면서 그때까지 팔레스틴 지방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막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님의 역사와 제자들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놀랍게 성장하고 확장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과 교회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정말 미약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결정적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12명의 제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 예수님의 제자들이 70명으로 불어났고 성령강림 시에는 120명가량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시자말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3천명으로 급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사역을 시작하신 지 불과 3년 만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확장되었습니다. 5천 명으로, 허다한 무리로 늘어났습니다.
주후 313년에는 그 당시 세계를 재패했던 로마제국이 천국 복음의 위력 앞에 굴복했습니다. 오늘날까지 계속하여 전 세계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외형적 성장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외형적인 성장만 아니라 내면적인 성장 또한 놀랍습니다. 사람 자체가 새롭게 됩니다. 변화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곳에 신선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정이 변합니다. 일터가 바뀝니다. 학문과 문화, 정치, 경제 할 것 없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에 의해 그 내면이 바뀝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적으로도 성장하고 발전하지만 내면적으로도 건강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만이 참된 행복을 누리고 나눕니다. 크게 번성한 백향목 나무와 겨자 나무에 많은 새들이 날아와 깃들듯이 천국 백성들도 세상에 시달린 자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복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결정적으로 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도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한밭교회요 세계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환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과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에스겔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백향목의 높고 연한 새 가지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밭에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름다운 백향목이 됩니다.
시편 기자도 비슷하게 말씀합니다.
(시 92:12-15) 『[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4]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1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여러분은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그래야 의인입니다. 그래야 성전에 심겨진 백향목처럼 번성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의 말씀처럼 낮은 나무, 마른 나무라도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면 다시 회복하여 높은 나무 무성한 나무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약 1:9-11)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하고 낮아져도 그것이 우리를 결코 비참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이미 하늘에 앉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부유하고 높아진다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별 것 아닙니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면 세상에서 가난할 수도 있고 부할 수도 있습니다. 낮을 수도 있고 높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존귀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하시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복음입니다.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 17:22-24 / 김흥규 목사
요즈음 우리는 다니엘 세이레 새벽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독교 윤리의 요약판인 까닭에 제가 꼭 해보고 싶었던 강해설교입니다. 정말 보배같이 귀하고 아름다운 말씀들이지요. 하지만 그 절대적이고 완전한 윤리 강령 앞에서 저는 매일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떨리는 말씀들입니다.
주님은 꼭 주먹으로 사람을 쳐 죽인 것만이 살인이 아니고 마음속에 누군가를 죽이도록 미워했으면 그것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꼭 육체적으로 간음한 것만이 간음이 아니라 마음속에 음욕을 품은 자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이런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설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다음에 반드시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마치신 뒤 주님은 그 유명한 '집짓는 자의 비유'로 말씀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 24).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듣고서 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듯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5: 26).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듯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은 그냥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런 윤리적 교훈이 있으니 알고 있어라", 이런 의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부족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 그 완전하고 절대적인 윤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내 왼 뺨까지 치십시오" 하고서는 왼쪽 뺨을 돌려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설교를 안 할 수가 없기에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설교는 했지만, 제 자신부터 실천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날은 도저히 설교를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은 날도 있었습니다. 정말 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신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충분히 말씀을 연구도 못하고 또 이 말씀대로 살지도 못한다고 체념하며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강단에 섰던 날, 오히려 더 힘 있는 말씀이 나오고 교인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날 오늘 새벽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 자신이 준비도 많이 하고 엄청난 은혜를 받아서 그 이튿날 새벽에 이 말씀을 전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렐 때가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고 참 신선한 통찰력도 얻었다고 생각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지만 오히려 교인들의 반응은 밋밋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의지하는 정도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 실력으로 준비한 설교는 성령이 개입할 틈새가 없지만 나의 부족을 통감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장하신다는 말이지요. 산상수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말씀들을 감히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깊이 체념하고 절망할 때 산상수훈은 더욱 더 우리 마음 속 깊숙이 박혀 들어옵니다. 그래서 저는 산상수훈을 여는 8복 중에 제 1복,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산상수훈 전체의 이해는 물론이고 실천을 위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지가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솔직히 인정하고 모든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푼 줍쇼!" 구걸하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부족과 결핍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 제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저 좀 도와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작고 연한 가지가 꺾이고 심겨지니>
영어에서 쓰는 수사법 중에 'Oxymoron'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모순형용법'이라고 부릅니다. 정반대되는 말을 나란히 병치시켜서 어떤 상황을 강조하거나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법이지요. 예컨대 "더럽게 예쁘다"는 말이나 "병아리 눈곱만큼 많이도 주네", '지독한 친절,' '작은 거인', '다 아는 비밀', '우둔한 천재' 등등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약할 때 강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복음성가에도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모두 다 모순어법이지요.
우리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모순어법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리석을 때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비어질 때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우리가 허물 때 하나님은 세워주십니다.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백향목 꼭대기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가지 하나를 꺾어다가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심었더니 큰 백향목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작고 연약한 가지에서 또 다른 큰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는 백향목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온갖 새들이 그 거목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예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백향목은 궁궐이나 성전을 지을 때에만 사용하던 최고급의 목재였습니다. 특히 레바논 지역에서 나는 백향목은 재질이 곧고 튼튼할 뿐 아니라 특유의 향내 때문에 벌레가 끼지 않고 썩지 않는 목재로서 유명했습니다. 백향목은 흔히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비유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백향목 역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어떤 백향목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 하나를 꺾어다가 세계산(世界山, world-mountain)인 예루살렘 성전산에 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작고 연한 백향목 가지는 크고 강한 백향목인 강대국 바벨론과 애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약소국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작고 연한 백향목 가지가 온 세계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심겨지는 날 커다란 세계수(世界樹)로 자라나 온갖 새들을 품는 은신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온 천하민족에게 도피처를 제공할 정도로 위대한 나라가 된다는 예언이지요.
이처럼 오늘의 비유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백향목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리고 순한 가지 하나가 세계의 중심에 심겨져 또 하나의 거목인 백향목으로 자라나 온 세상에 은신처를 제공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예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는다"는 말씀이 가장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작고 연한 가지가 장차 거대한 세계수 백향목으로 자라나 온 세상에 은신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꺾이고 심겨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크고 강한 가지는 잘 꺾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크고 강한 가지는 높은 산에 심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고 약하고 순한 가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손에 꺾일 때 여기 내리 성전에 심겨질 수가 있습니다. 크고 강하다는 자부심이 있을 때에는 잘 꺾이지 않습니다. 설령 꺾였다고 할지라도 무거워서 높고 우뚝 솟은 산 위에 까지 운반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작고 연약해 보이는 가지가 꺾이고 심겨져서 큰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나 애굽, 앗수르 제국과 같은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죽은 목숨이 되었습니다. 작아질 대로 작아졌고 약해질 대로 약해졌습니다. 이제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때에 하나님은 희망의 약속을 하십니다. 강대국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백향목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리고 순하고 연한 가지 같은 약소국 이스라엘을 꺾어다가 온 세상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산 꼭대기에 다시 심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연한 순이 크게 자라나 세계수 백향목이 되어 천하의 새들과 같은 모든 민족 국가들에게 보호처를 제공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작고 연약한 가지가 되어서 꺾이고 심겨지기 쉬울 때 주님은 이렇게 높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본문 24절 말씀처럼 주님이야말로 높은 나무를 낮추시고 낮은 나무를 높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꺾이고 심기기 쉬운 연약한 순과 같을 때 귀하게 쓰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가지 같았을 때 꺾어서 심고 거목이 되어 숱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80 노인이 되어 아무 힘도 야망도 없는 야인이 되었을 때 꺾어서 심고 출애굽의 영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바울 역시 가장 약하여 두려워 떨 때 가장 뛰어난 사도가 되게 하셔서 그 나무 밑에 모든 이들이 몰려드는 세계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이 그랬지요. 작고 연한 순과 같이 쉽게 꺾였고 심겨졌기에 온 천하의 생명들에게 구원의 처소를 제공하는 세계수가 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이 연약한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꺾이고 심겨지니 온 세상이 그 예수님께로 와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세계수 그늘에 들어오는 자마다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순어법으로 가득찬 생활입니다. 꺾이기 쉬운 연한 가지가 될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거목이 됩니다. 약할 때 강해집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슬퍼할 때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산상수훈의 말씀 앞에 납작 엎드려 절망할 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꺾이지 않는 가지는 옮겨심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꺾여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그리하여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꺾인 내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이 하시는 일이 됩니다.
이제 이번 주간은 새벽기도회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울려 퍼질 때마다 작고 연약한 가지처럼 여러분의 자아를 꺾고 주님께 엎드리십시오. 주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복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번성하고 무성한 가지가 되리라
겔 17:22-24 / 박용래 목사
언젠가 나무를 예쁘게 가꾸어 놓은 정원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정원사가 아름다운 장미꽃 나무 옆에 쓸모없는 가시나무를 정성스럽게 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쓸모없는 가시나무를 값비싼 장미나무 옆에 심고 있습니까? 그때 정원사는 옆에 있는 가시나무 가지를 예리한 전지가위로 사정없이 잘라 냈습니다. 그러더니 거기에다 예쁜 장미나무 싹을 접붙이고 있었습니다. 내년쯤엔 쓸모없는 가시나무에서 장미나무가 되어 아름다운 장미꽃이 만발하게 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큰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쓸모없는 가시나무를 베어버리고 장미꽃 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아주 아름답고 귀한 장미꽃이 만발하는 나무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만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쓸모없는 가시나무처럼 버려진 존재였지만 이 쓸모없는 나무에다 예수 그리스도를 접붙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값비싼 포도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오늘 아침 본문 말씀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에게 아주 소망이 넘치는 말씀을 나무라는 비유로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하는 민족, 힘없고 가난하고 무시당하고 고난 가운데 있는 가시나무처럼 절망 가운데 빠져 있던 작은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다시 귀하고 큰 나무처럼 회복되어 무성하고 번성한 가지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되라는 예언처럼 말씀입니다. 이 예언자의 말씀은 오늘 새해를 출발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자 합니다. 작은 나무가 큰 나무가 되고 꺾였던 나뭇가지에서 풍성한 열매로 가득 맺혀지는 기적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살아가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 때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가? 본문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
24절,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여 주리라.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여 주리라.
여기서 높은 나무는 강대국 바벨론 나라를 상징하고 낮은 나무는 힘없이 방황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나라 없이 방황하는 고난과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마른 나무, 꺾인 가지처럼 비유하고 있습니다.
푸른 나무는 힘과 권력으로 무장된 강대국 바벨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푸른 나무는 소망이 있습니다. 크게 라라서 재목으로 쓰임 받는 소망이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진 나무, 꺾여진 나무는 소망이 없습니다. 잘 자랄 수 있는 소망도 없고 재목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소망도 없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소망도 없습니다. 말라진 나, 꺾여진 나뭇가지는 가시나무처럼 볼품도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 시키셔서 큰 나무로 만들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로 만들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나라가 왜 말라버리고 꺾여져 버린 쓸모없는 나무처럼 되었나? 왜 이런 불행한 민족으로 전락했나? 이것을 깨닫는데 바벨론 포로생활 가운데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처음엔 마른나무처럼 꺾여진 나뭇가지처럼 되어 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불행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생활 가운데 선지자를 통하여 율법 책을 찾아내고 그 율법 책을 읽고 배우면서 말라버린 나뭇가지처럼 꺾여진 나뭇가지처럼 쓸모없이 불행한 민족이 되어버린 그 이유를 찾아내고 발견하고 회개운동을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보다 우상을 더 좋아하고 믿고 의지하고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 죄를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순종하고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것만 자랑했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한 해를 출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시는 선지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왜 말라버린 나무처럼, 꺾여진 가지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이 끊어져서 쓸모없고 소망 없는 가지처럼 살았는가?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것들을 더 믿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김으로 신앙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고집과 욕심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꺾여진 나무처럼 실패하고 살았습니다. 따라하세요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살자
그러나 쓸모없는 낮은 나무가 높아지고, 말라지고 꺾여진 나뭇가지에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는 기적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지키는 신앙으로 살 때 기적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새해를 살아가면서도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이 낮아지고 말라버린 가지처럼, 꺾여진 나뭇가지처럼 어렵고 힘든 세상에 산 다해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으로 살면 기적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과 은총으로 성공하는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
빌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눅 5장에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밤새워 고기잡이에 허탕을 치고 지치고 힘들고 피곤한 모습으로 그물을 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라는 말은 상식적으로 틀린 말이다. 새벽과 아침에는 고기떼들이 깊은 곳에서 얕은 곳으로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십 년간 어부생활로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라 명하셨습니다.
두 번째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밤새도록 수고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하여 더욱 피곤한 모습으로 그물을 깨끗이 씻어 놓았는데 깊은 곳에는 고기가 없는 줄 뻔히 알고 있는데 베드로가 그물을 다시 바다에 내린다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그물을 다시 씻으려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물을 바다에 내릴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고기를 잡으라. 고기 잡는 데는 예수님이 전문가가 아니십니다. 베드로가 전문가입니다. 경험이나 지식이나 무엇을 보든지 고기 잡는 일은 예수님이 비전문가이시고, 베드로가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한 베드로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서 다른 배에도 나눠줄 정도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과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했을 때 체험했습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난 2001년 1월 달 경북 영덕에 고기잡이 김상태 집사가 현대판 베드로의 기적을 체험하고 전국교회로 간증을 다니기에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장통합 구례교회를 섬기는 안수집사로서 성탄절을 앞두고 목사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50여명 모이는 교회인데 목사님 이번에 고기가 많이 잡혀야 성전을 수리할 수 있을 텐데요. 집사님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돈이 없어 20년 동안 한 번도 성전을 수리하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이브날 밤에 김 집사의 양옆에 있는 어장을 피해서 중앙에 있는 김 집사의 어장 그물에만 방어 떼가 몰려들어 평균 10kg짜리 16만 9천 원짜리 2,370마리가 잡혀 포항수협에서 4억 원이 넘는 돈을 한 순간 만에 벌어들이게 되어서 화재가 되었습니다.
김 집사님은 소원했던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가 아니라 다시 건축하게 되었는데 기적이 있은 후 1달 만에 다른 사람들의 어장을 피해서 다시 김 집사님의 어장에만 대형 밍크 고래가 걸려 5천만 원에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과 넘치는 축복은 일어나고 있다고 간증하고 그는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자기 욕심대로 고집하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마른 가지처럼 꺾여진 나무처럼 쓸모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려고 신앙을 회복했을 때, 말라진 가지들 꺾여진 가지들을 하나님은 다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언자의 예언대로 큰 마무였던 바벨론은 파사에게 망했고, 작은 나무 이스라엘은 고래스왕을 통하여 해방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새해를 시작한 성도여러분, 말라진 가지라도, 꺾여진 가지라도 무성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그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으로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