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27
10월31일[연중 제3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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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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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1LUSg5oNHko
[의정부교구 이동현 베드로(풍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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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 희생과 자기 포기, 인내와 사랑을 요구하는 좁은 문!>
참으로 특별한 이력을 지닌 우리 시대 탁월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가톨릭 신학자인
스콧 한(Scott Hahn)입니다. 그는 원래 미국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런 스콧 한이 198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가톨릭 신자로 회심했습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개신교 목사들과 성경 학자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한동안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정신없이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변한 사람을 보고 주변 사람들 가만있지 못합니다. 다들 한 소리씩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저 양반 갑자기 왜 저러지? 뭘 잘못 먹었나?”
그는 당시의 고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한 지 약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하느님께 대들었다.
“주님, 저는 제 삶을 당신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친구들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무슨 처사가 이렇습니까?”
친구들은 갑자기 변한 저를 도무지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남기고 다들 떠나갔습니다.
“너는 변했어. 우리는 더 이상 너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 잘 먹고 잘 살아라!”(스콧 한, ‘영원토록 당신 사랑 노래하리라’, 바오로 딸 참조)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이 처음 직면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문 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상의 것들은 그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 참으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인내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포기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 번번이 실패하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모두 가뿐히 좁은 문을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참을 묵상해봤습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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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TrxyRrE6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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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막연한 불안이 없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두려움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2-33)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에 집착하는 겁쟁이로 봅니다. 그래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정체성이 ‘예언자’라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 이전에는 죽게 하지 않으실 것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을 가지고 삽니다. 언제 죽을지,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로 예언자직을 수행하는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맥주 배달하러 간 한 남자의 실화를 그린 《지상최대 맥주 배달 작전》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1967년 뉴욕시 인우드에서 성당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치키 도너휴’가 주인공입니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한창 전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키의 친구들 전사 소식이 계속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치키와 가장 친했던 토미까지 행방불명이었습니다. 토니는 치키가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술김에 자신 친구들을 찾아 여전히 미국이 그들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맥주를 전해주고 오겠다고 소리칩니다.
이 소문은 온 마을에 퍼집니다. 치키의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전쟁터에 아들과 애인을 떠나보낸 이들은 그들을 만나게 되면 자신들이 주는 선물을 전해주라고 많은 양의 맥주와 선물들을 싸 줍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치키가 당연히 안 갈 것이라고 은근히 무시합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믿고 선물을 맡기는 사람들을 실망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베트남으로 떠나는 배를 알아봅니다. 혹시 자리가 없으면 핑계라도 대겠지만 3시간 뒤에 출발하는 배에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는 운명처럼 맥주를 들고 급유 담당으로 배를 탑니다.
2개월 후에 베트남에 도착하고 사흘 동안 휴가를 얻습니다. 혼자 친구들에게 맥주 배달을 왔다는 그를 군인들은 모두 CIA 요원으로 알고 도와줍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일로 전쟁터로 올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다른 친구를 찾으러 최전방까지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점점 그는 자신을 CIA로 믿고 도와주는 군인 장교들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물론 진짜 CIA에게 쫓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군 기자들보다 더 훤하게 전쟁의 상황을 파악해 갑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전쟁에 자신이 친구의 입대를 종용한 것을 후회합니다. 친구들은 처음엔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치키에게 화를 내다가도 나중엔 고마워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치키에게 거짓으로 보도되는 전쟁의 참상을 올바로 깨닫고 미국으로 건너와 그 사실을 알려 빨리 전쟁이 종식되게 하도록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명을 모르고 오히려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막상 전쟁터에 가자 불안과 공포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칩니다. 만약 이것이 하느님의 사명으로 인식했다면, 그는 그곳에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때와 장소는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베트남에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예언자직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면 지금 이 시각에 나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와 그 장소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물론 그때를 대비해 믿음을 키워가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하느님께서 주신 예언자직이 있습니다.
야누슈 코르착은 폴란드계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거의 고아처럼 자란 탓에 부모가 끌려가고 홀로 남은 유대인 아이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고아원을 만들어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독일군들이 들이닥쳤고 코르착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소풍을 가자고 했습니다. 독일군들은 고르착은 갈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위험할 때 부모가 자녀를 버리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며 그들과 함께 당당하게 가스실로 향했습니다.
비르짓다 성녀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죽기 한 달 전에 죽을 때를 알려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는 이 기도를 바치는 이는 예언자직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어떤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 사명이 끝나기 전까지는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완수되어 가면 ‘이젠 때가 되어 오는구나!’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이나 그 때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나를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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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성지순례를 5번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과달루페, 이스라엘, 그리스와 터키, 이탈리아, 한국으로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려면 준비물이 있습니다. 여권, 핸드폰, 지갑은 필수품입니다. 세면도구, 옷, 책, 노트북도 챙겨야 합니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안내 책자, 묵주, 제의, 성직자 증명서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외적인 준비를 마치면 내적인 준비를 하면 좋습니다. 신약성서를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준비하고 순례를 떠나도 막상 성지에 도착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곤 합니다. 시차 때문에, 음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순례자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날씨가 문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비가 내릴 때도 있고, 더위 때문에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런 질문은 하면 좋습니다. ‘나는 왜 성지순례를 왔는가?’ 성지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순례를 통해서 배우는 겁니다. 성지순례는 신앙의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 지켜온 신앙을 배우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떠나는 순례라고 생각합니다.
33년 사제 생활하면서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첫 부임지에서의 설렘이 있었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도 있었고, 자신 있게 갔지만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주파수가 맞으면 방송이 들리듯이, 같은 주파수를 공유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컴퓨터 통신이 등장하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동호회, 동아리 모임도 있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큰일을 맡아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수호천사가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혼자인 것 같았는데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 늘 있었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먼발치에서 응원해 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파수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제 곁에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음의 문만 열면 이웃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는 같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박해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2000년 전의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준비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준비물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진리, 의로움,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런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준비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권력 앞에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외로움도, 고통도, 죽음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우리들 또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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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13,31-35: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했건만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31절) 주님께서는 헤로데를 두고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32절) 이것은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언제 어떻게 육신의 죽음을 겪으실 것인지 다 알고 계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33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많은 예언자의 피를 흘리게 한 죄 많은 도시임을 밝히시면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도 빼앗기고,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져 자기들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가벼이 여긴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34-35절)
그분은 모세를 시켜 그들을 가르치셨고, 바른 몸가짐과 칭송받을 만한 삶의 인도자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그림자이지만 그 안에는 참된 경배의 예형이 들어있다. 그분은 거룩한 예언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타이르셨다. 그렇게 당신 날개 아래에서 당신의 권능으로 지켜 주려 했으나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축복을 잃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35절)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당신께서 고난을 겪으실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주님을 우리에게서 밀어내지 않고 그분의 뜻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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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계속 가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계속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의 의미는 뚜렷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이미 죽음과 부활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도 그러한 맥락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아십니다. 헤로데가 교활하지만 막상 힘은 없어 여우와 같다고 하시면서도, 예언자가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은 여우 같은 헤로데 한 사람의 탓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예언자의 운명임을 받아들이십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박해와 거부를 피하여 도망가는 것이고, 제1독서에서도 나온 표현을 빌린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에페 6,19) 선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6,19-20 참조) 이 ‘담대함’은 드러내 놓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비유를 쓰거나 모호하게 돌려 말하지 않고 숨김없이 밝히는 것,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뜻하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4,13.29.31 참조), 바오로(9,27.28 참조), 바오로와 바르나바(13,46; 14,3 참조) 등에게 적용됩니다. 특히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바오로가 로마에 잡혀가서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31)라고 말합니다.
죽음도 막지 못하는 담대함, 반대를 받는 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망설임 없이 죽음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살아야 할 때, 우리에게도 이러한 담대함을 주시기를 청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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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3,34-35)
1) 예언자들이 박해받고 살해당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운명 같은 것은 믿지 않는 종교입니다.>
만일에 예언자들의 회개 선포를, 또는 ‘심판의 경고’를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여서 모두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예언자도 살고, 회개한 죄인들도 살게 될 것입니다.(요나 3,10)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았고 살해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아니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의 범죄일 뿐입니다. 그렇게 살해당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목숨 바쳐 수행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살인자들은 준엄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됩니다.(루카 11,50-51)
2) 예수님의 경우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메시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당하신 일’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11) 그래도 예수님의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ㅠ만일에 ‘십자가’라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 없었다면, 즉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면,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신앙과 맞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수많은 방식과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수많은 방식과 가능성’을 모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의 결과만 해석할 뿐입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모두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믿고 회개했다면,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셔야만 했다는 표현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3)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뒤에, 백성들이 별로 동요하지도 않고,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아니면 여론이 자기를 지지한다고 착각했는지, 예수님마저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헤로데에게 전하라고 시키신 것을 보면,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고 소식을 알려 준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헤로데 쪽 사람들, 즉 헤로데가 예수님을 협박하려고 보낸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실제로는, “나의 영토에서 떠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라는 헤로데의 말을 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여우’ 라고 표현하신 것은, ‘간사하고 교활한 자’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 살인자들은 자기들이 신성 모독 죄인인 예수를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에 비하면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은 하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과 내일’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 시간을 가리킵니다. ‘사흘째 되는 날’은 예수님의 활동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33절의 ‘그러나’는 뜻으로는 ‘그렇기 때문에’입니다.>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라는 말씀은, 아무도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그렇게 협박하지 않아도 나는 갈릴래아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일을 완성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예언자가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사명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4) 34절-35절의 말씀은 예루살렘 멸망 예언인데, 확정된 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이고,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35절은,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나를 찾아도, 즉 살려 달라고 나에게 애원해도 소용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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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에페소서’의 마지막 권고 단락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들의 여정을 악의 세력과 전투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할 것을 주문합니다. 우리 몸에 갖추어야 할 무장을 조목조목 나열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갖출 요소들이 허리띠, 갑옷, 신발, 방패, 투구, 칼과 같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던 전쟁 도구에 비유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허리띠는 허리 주변의 옷을 동여맴으로써 전투 과정에서 신속하고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가르침으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영적 전투에 참여할 태세를 갖춥니다. 하느님을 닮아 정의롭게 되려는 노력, 곧 일상에서 “의로움”을 실천하려는 자세는 악의 공격에서 우리 몸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음에 비길 수 있습니다.(이사 59,17 참조)
발에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라 함은 악한 세력의 방해에 굴복하지 말고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정을 언제나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는 굳건한 “믿음”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 곧 악의 세력이 던지는 거센 유혹을 막아 내는 튼튼한 방패 구실을 합니다. 투구는 우리 몸에서 매우 중요한 부위인 머리를 보호하는 구실을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라” 함은(이사 59,17; 1테살 5,8 참조) 우리의 머릿속 모든 생각을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칼을 언급하시는데, 앞선 도구들이 방어하는 수단이었다면 칼은 공격에 쓰이는 도구입니다.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공격 수단은 성령의 칼로, 이는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을 통해서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비장한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여정 안에서 상대해야 할 적은 매우 강한 세력들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죄악으로 유혹하며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간계를 꾸밉니다.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진리와 의로움, 복음에 대한 열정과 굳건한 믿음,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무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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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셔야 할 일을 설명하시며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 해도, 피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셨던 일, 곧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쳐 주시는 일을 계속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결코 사람들의 손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으로, 하느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에 마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여정 속에서 그렇게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정이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끝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었지만, 동시에 하느님께 불순명과 배반으로 점철된 역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과 왕궁이 있는 곳, 곧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께서 뽑으신 임금이 머무르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에서 중심적인 장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았기에 결국 버려지리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느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하여 복음이 이스라엘 밖으로 전해져 온 세상 끝까지 전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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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13,33)
여러 곳을 여행하다 보면, 산이 높은 곳에는 항상 강이 뒤따라가듯 흘러갑니다. 산과 강은 어쩌면 떼래야 뗄 수 없는 한 쌍의 어우러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80년대 초반 광주 화정동 피정 센타에서 생활할 때, 가끔 비 오는 날 구례 가는 버스를 타고 압록강(=전남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 섬진강의 다른 이름)을 따라 여행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현경이란 분은 「산과 강」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산을 돌아 흐르는 강과 강에 제 모습을 비추는 산 항상 변함없어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오래 세월 흐르고 또 흘러 왔지만 강은 한 번도 같은 물을 담아 본 적 없었고 늘 말없이 그 강을 지켜봤던 산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새 움을 틔워 왔었지 산과 강은 변함없는 게 아니야 부지런히 제 할 일 다 하고 있었던 거야.』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멈추지 않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을 보면서 저도 때론 강을 닮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말없이 흐르는 강도, 때론 강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으려는 시도를 겪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부지런히 제 할 일 다 하고 있을 뿐이듯이 우리 역시도 그렇게 산과 강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삶이 마치 산과 강처럼 세상의 여러 변덕과 요구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셨던 것이 아닐까, 라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곧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쫒아내고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13,32)라는 말씀에서 자신에게 닥칠 고난과 죽음을 예감하였지만, 그 시간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 구원하는 일을 다만 묵묵히 수행하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 한다.”(13,31)라는 소식을 듣고도 의연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뜻을 깨어 살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 볼 수 있는 순간입니다. 할 일과 갈 길은 어쩌면 산과 강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역시도 같습니다. 분명 자신에게 곧 닥칠 위기의 순간을 앞두고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려고 다짐하듯이 당신이 가야 할 길 십자가의 길, 즉 어리석음의 길, 바보의 길을 막고 돌리려는 시도와 위협 속에서도 그저 예수님은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아셨기에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누구도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전 방영되었던 「나의 나라」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서 있으면 땅이지만, 걸으면 길이 된다.』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예수님은 멈추지 않고, 걸으셨기에 스스로 길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13,33)라는 말씀에서 비장함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어제 이미 그 길을 걸어오셨듯이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가실 것입니다. 어제에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설사 어렵고 죽음이 기다릴지라도 매일 쉼 없이 걸어서 마침내 골고타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묵묵히 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보다 마음 깊이에 간직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서 ‘박노해’ 시인의 「굽이 돌아가는 길」을 잠시 들어 봅시다. 『올곧게 뻗은 나무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아름답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 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 시를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주님, 당신처럼 저희 또한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가야 할 길을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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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무인도에 책 세 권을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입니까?’
이 질문은 뉴욕의 유명 문학잡지 ‘파리 리뷰’가 작가들에게 물어본 질문입니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마이클 세이본은 ‘모비딕’, ‘율리시스’ 그리고 이런 책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코코넛으로 진짜 비행기를 만드는 법’을 가져가겠다고 재치 있게 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책을 가져가겠습니까? 저의 경우, ‘성경’ 하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담겨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성경에는 모든 장르가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한 권만으로도 많은 책(실제 73권이지만)을 들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참으로 놀랍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미사 때만 듣는 성경이었지만, 신학교에 들어간 뒤 지금 사제로 25년 넘게 살면서까지 계속 가까이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지루한 것 같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우리 삶 안에서 힘차게 울려 퍼집니다. 그래서 일상 삶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체험을 늘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하느님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 삶이 새롭지 않고 지겹고 힘들다고만ㅠ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는 늘 부족함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아무리 짧은 순간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지금 삶에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그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생각해서 했던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방해할 의도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과 사명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2.33)
죽음의 위협이 가득한 예루살렘입니다. 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예언자를 거부하고 박해했던 예루살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이 이제는 하느님을 거부하고 박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위협에 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지금의 당신 길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고통과 시련에 피하려고만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 뜻을 찾으면서 그 뜻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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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이 있습니다>
루카 13,31-35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다)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길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 사람이 처음 내었던
거칠고 투박하지만
삶 내음 가득한 길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뒤따라 걷기에
넓어지고 부드러워진
걸을 맛 나는 길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걷는 이마다 쉬운 길 내려
제멋대로 덧씌운 샛길에 덮여
첫 모습 희미해진 길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여전히 따라나선 많은 이들이
온갖 탐욕 깃든 정성으로 가꿀수록
참 모습 감추는 길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과 하나 되는 이
기쁘게 품에 안는
첫 모습 참 모습
결코 빼앗기지 않을
영원한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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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마리 여우>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카 9,7 이하)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견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간교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랍비문학에서 여우는 간교함의 상징입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카 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미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포기에 직면하게 될 때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일지라도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 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이요,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은 아닌지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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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에 직면하신 장면’과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신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바리사이들의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예수님께 호의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여행을 방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고 지칭하시면서 그에게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루카 13,32)
예수님께서는 그 어떠한 인간적 장애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계획과 당신의 사명수행을 관철’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가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말씀은 그분의 뜻에 따라 ‘당신의 삶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자진하여 당신의 길을 가심’을 밝히십니다. 곧 담대하고 의연하고 결연한 의지로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실 것을 밝히십니다. (마치, 최초의 불교경전 숫파니파타에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라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연상시켜줍니다.)
그것은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면서도 이루지 못했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지만 이루지 못했던, ‘당신의 죽음’을 이제 스스로 이루시러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제시하고 있는 길을 먼저 예수님께서 가신 것입니다. 곧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는 길입니다.’(에페 6,13-17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명수행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에페 6,1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야겠습니다.”(루카 13,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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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주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가야할 길을 계속 가게 하소서.
자신이 죽어 타인을 살리는 길을!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야할 길을 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순종의 길을 가오니,
당신이 하고자 하신 바를 이루소서.
당신 안에서, 제 삶이 완성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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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전쟁>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오늘은 묵주기도성월 10월의 끝날이자 내일은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이자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입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입니다. 어느때 보다도 ‘한반도가 전쟁의 위기를 맞고 있는 시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절박한 시절입니다.
강론쓰기전 인터넷 뉴스를 일별하면 온통 어둔 소식들에 힘이 빠지는 느낌입니다. 국내외가 온통 전쟁이야기들이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무지의 어리석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평화를 희구하는 인간이지만 역설적으로 인류와 함께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사는 그대로 전쟁사처럼 생각됩니다. 며칠전 교황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부단히 성령의 선물인 평화를 역설하여 전쟁중단을 호소하는 교황입니다.
“누구도 전쟁에서 승리는 없다. 모두가 잃는다. 전쟁은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패배다. 세계 많은 나라들에서 전쟁에 희생된 이들이 참 많다. 아이들과 가정들이 첫째 피해자들이다. 오늘은 10월29일이고 지난 19일 동안 필레스틴에서는 770명이 죽었다.”
얼마 전 일간지 컬럼에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서로가 공멸이요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는 내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나쁜평화가 좋은전쟁보다 백 배 천 배 낫다는 생각입니다. 남북이 폐허에서 일어나 간신히 좀 살게 되었는데 서로 파괴하는 전쟁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국가지도자의 우선적 책무가 국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전쟁금지임을 절감합니다.
인간내에 잠재해 있는 선성과 더불어 폭력성, 잔인성, 공격성의 악성입니다. 참으로 물리적 폭력의 전쟁을 영적 전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성서영성, 수도영성이 보여준 진리이자 지혜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이요 우리 믿는 이들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수도사제생활 초창기부터 무려 35년 동안 강론에 참 많이 인용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평화의 전사요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강론을 통해서도 많이 깨닫는 진리입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제 강론도 참 많이 반복됩니다. 반복도 깨달으면 늘 새롭게 들립니다. 다음 담쟁이란 26년전 이 자리에서 썼던 시도 참 많이 반복하여 나눴습니다. 지금도 수도원 곳곳에서 여전히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담쟁이들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정주의 영성이다”<1998.6.3.>
늘 새롭게 시작하는 정주의 영성은 그대로 파스카 영성입니다. 밖으로는 한결같은 정주의 산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바로 ‘산과 강’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정주의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영적전쟁,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 그대로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반영합니다. 제1독서 에페소서는 오늘 끝납니다만 마지막 주제는 영적투쟁이고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입니다. 에페소서 내용 전부가 단숨에 읽힙니다만 일부만 인용합니다. 지옥은 텅 비어 있고, 악마들은 모두 뛰쳐나와 세상에서 활개치고 있는 세상이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인내를 다하고 깨어 있으십시오.”
그대로 영적승리를 위해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한 주님의 전사, 바오로 사도의 모습입니다. 바오로 사도뿐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인 모든 사도와 성인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평생 영적전쟁 중에 영적승리로 이끈 장엄한 전사가 순교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는 우리들의 신원 역시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한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십자가의 길 예루살렘 도상에 있는, 죽음에 직면한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의 단호한 결의가 또렷합니다. 해로데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어서 이곳을 떠나 피하라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전갈에 대한 주님은 지체없이 헤로데를 여우로 지칭하며 그에게 다음 말씀을 전하라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로서 결연한 전의가 진하게 와닿습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가야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니 다른 곳에서 죽을수야 없기 때문이다.”
평생 휴식이 없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순교로 전사하는 그날까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책임을 다했던 영원한 현역의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완전히 무장시켜 주시어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다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마지막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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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주적(主敵)?>
주적(主敵)이라는 말을 군사적으로 씁니다. 요즘 와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고 합니다.
미국과 일본은 동맹이라고 하고 북한을 주적이라고 하니 이것은 너무도 잘못된 주적 개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도 적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지만 굳이 적을 둬야 한다고 해도 동족을 주적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주적 개념입니다.
북한이 먼저 남과 북은 이제 더 이상 동족이 아니라고 선언했지만 그것은 김정은이 그렇게 선언한 것이니 우리는 철부지가 선언한 것이라고 치고 여전히 동족이라고 해야 하는데 우리도 같이 주적이라고 하여 똑같이 철부지이고, 북한이 우크라이나에 전투 병력을 보낸다고 전선을 한반도를 넘어 우크라이나까지 그리고 러시아까지 넓히려는 우리 정부의 권력자들이 철부지이고 악의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적 개념을 잘 가져야 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신앙적으로도 주적 개념을 잘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가 인간이 되어선 안 됩니다. 아무리 우리 인간이 서로 찌르고 상처 준다고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은 인간을 원수로 여기지 말라는 말씀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에 여러 번 얘기한 적 있듯이 가까이 있기에 서로 찌르는 것입니다. 멀리 있으면 찌르려고 해도 찌를 수 없잖아요?
그러니 가까운 부부가, 형제가, 이웃이 상처를 가장 많이 주고받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상처를 주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말이고, 바로 이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요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적은 인간이 아니고 상처 주는 가까운 이웃도 아니며, 이들을 원수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악한 생각과 악한 세력입니다.
어제는 수녀님들과 미사를 드리는데 가장 중요한 성찬의 전례 중에 정말 너무도 느닷없이 어떤 형제와 안 좋았던 것이 생각나면서 분심이 들었고 떨쳐버리려고 해도 그 생각이 계속 나 이것은 악령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미사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순간에 잡생각이나 나쁜 생각이 드는 경험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악령의 짓이라는 생각이 점점 들었고 굳어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간을 주적으로 삼지 말고,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들을 주적으로 삼아야 하고, 죄 중에서도 미워하게 하는 악의 세력들을 주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하게 하는 것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생 이것을 놓치지 않고 산다면 이런 우리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아닐 것이고, 그러기에 하루하루 그리고 오늘 하루 이것을 놓치지 않고 살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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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13,33ㄱ)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
오늘 복음(루카13,31-35)은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과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 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2-33)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심'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이제와 영원히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통해 전해져 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에게 배척을 받아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하시고 발현하시고 승천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환희의 신비), 땀을 흘리시고(빛의 신비), 수난하시고 죽으시고(고통의 신비), 부활 승천하신(영광의 신비)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입니다.
'항상 본질을 기억하고, 본질을 따라가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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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 33)
죽음도 삶도
십자가의 시간입니다.
비참함과 영광은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자신이
중심이 되는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 중심이 되시는
은총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시간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는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우리의 죄를
보게 됩니다.
섬김도 예언도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없이는
오늘도 내일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주님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 삶의
가장 깊고
가장 아픈 곳을
십자가로
품어 주십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십자가가 우리의
내면을 우리의
거룩한 성전까지
정화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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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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