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법을 전하는 대상은 살아있는 인간이 우선되어야 한다.
죽은 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사자(死者)의 영(靈)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좌우되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의 영(靈)이란 방황하고 있는 영(靈)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살아 있을 때,
지상에 집착을 가져서,
저승에 돌아가서도 지상에 미련을 두어
속칭 성불(成佛)할 수 없는 것이다.
성불할 수 없으면 지상의 인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지되는 인간이 미숙하면,
저승의 영(靈)은 언제까지나 미혹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다.
승려가 사자에게 경(經)을 올려 인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저승을 모르는 승려가,
어떻게 해서 인도하는 힘이 있겠는가!
인도한다는 것은,
사자의 영혼을 방황하지 않게 하여 헤매지 않고
저승으로 왕생시키는 것이며,
또 이승과의 관계를 끊는 것에 있는데,
왕생시키지 않고 장사 지내면,
사자(死者)는 아직 '나는 살아있다' 고 생각하고
가족이나 연고자에게 기대려 한다.
헤매고 있는 영(靈)이 빙의하면 어떻게 되는가.
나의 저서 『악령(惡靈)』을 읽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방황하는 영(靈)이 다가와도,
살아 있는 인간이 법을 알고,
법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
기대려고 와도 빙의할 수 없고,
또 그들이 저승에서 그 사람의 생활 행위를 보고,
자기의 헤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어,
왕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일은 살아 있는 인간이 의식하건, 하지 않건,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4차원에서는 3차원을 모두 보고 알고 있어서
자박령(自縛靈)으로서
영원히 어두운 생활을 보내지 않아도 구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살아있는 인간이
법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선결(先決)이다.
현상계가 조화되면, 저승의 지옥도 조화된다.
특히 헤매는 영(靈)의 에너지는,
지상 인간들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성립하고 있다.
그들 세계에는 빛이 닿지 않는다.
지상 생명의 에너지원은 태양인데,
저승에서는 영태양(靈太陽)이며,
신의 빛이다.
그러나 그들 세계는 암흑이기 때문에,
지상의 인간을 매개체로 하지 않으면,
지옥계를 형성할 수 있는 에너지를 확보할 수 없다.
지옥계의 에너지는
인간의 마음에서 발생하는 악(惡)의 마음이다.
자기 보존의 이기심의 에너지가
그들의 생명원이다.
이와 같이 되어 지상에 악이 번성하면
지옥계는 보다 더 번화해져서,
지상은 점점 나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사자(死者)의 영혼을 깨우치는 것보다
지상 인간의 깨달음이 중요하다.
정사(精舍)의 목적은
살아 있는 인간의 깨달음에 있다.
죽은 자는 아니다.
오늘날은 사자(死者)에게 지향되어,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없어졌다.
더구나 슬퍼해야 할 일은,
인도해야 할 승려가 그런 힘을 가지지 못하고
경을 올리고, 계명을 쓰는 것만으로 끝내고 있다.
저승에 가보면 경문이나, 계명이 쓰인 위패가
산더미처럼 버려져 있다.
자기 마음이 조화되지 않으면,
그런 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절은 살아있는 인간의 도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간이
법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전도의 거점으로 해야 한다.
2,500여 년 동안에,
불교는 살아있는 가르침에서
죽은 가르침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불교는 죽고 말았다.
말법(末法)이란 법의 죽음을 의미한다.
현대는 확실히 말법의 세상이다.
불교가 장례, 관광 불교로 타락하고 말았기 때문에,
빛으로 넘친 지난날의 불교는 형태만이 남아,
생명이 없는 미이라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뜻에서 절은,
본래의 정사인 옛날로 돌아가야 하리라.
아니,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 인간석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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