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월 20일 (금) 맑음 연두 중앙관서 순시 개시, 오전 10시 경제기획원. 오후 1시 30분 재무부 방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종사원에게 봉급을 물어보았더니
작년 12월에는 4만 4천원이었는데 1월부터 7만 7천원 정도라고,
상여금을 합치면 월평균 8만여 원이 된다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현재 물가 표준으로 배만 더 보수를 인상하여 줄 수 있다면
극히 만족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4,5년 내에 그러한 수준까지 향상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1976넌 5월 7일 (금) 맑음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출발 강릉행. 대관령에서 점심을 들고
오후 2시 정각 오죽헌(五竹軒) 정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오죽헌 중수공사는 약 2 개월 만에
규모 있고 아담하게 잘 시공이 되고 조경도 잘 가꾸어졌다.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참배하고
우리의 위대한 조상으로 올바르게 소개하고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오늘에 사는 우리들이 조국을 위해서 여하히 봉사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손쉬운 일부터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마음의 다짐을 하자는 것이 이 오죽헌을 정화하는 참뜻이 될 것이다.
1976년 5월 16일 (일) 흐름 5.16혁명 15주년 15년전 오늘 새벽에 이 나라의 젊은 군인들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궐기했다.
오늘 새벽 동녘이 틀 무렵 혁명군 부대가 결사의 각오를 굳게 간직한 채 새벽바람 찬이슬을 마시며 숙연히 한강대교를 도강했다.
고요히 잠든 수도 서울은 역사의 새로운 장이 바뀌는 이 순간까지
적막 속에 초여름의 피곤한 잠을 이루고 있다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패와 부정과 무능과 안일, 정체와 무기력으로 기식(氣息) 암암하던 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와 소생의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몽롱한 깊은 잠결에서 잠을 깨고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5시 국영방송을 통해서 혁명공약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새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줄기차게 진행중에 있다.
가지가지의 고난과 저항과 훼예포폄(毁譽褒貶)을 들어가면서
5.16의 완성은 우리 나라를 선진 공업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자주국방 자립경제를 달성하여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1980년대 초에는 이 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확신한다.
1976년 6월 25일 (금) 흐림 6.25 26주년이다.
대역(大逆) 김일성 도당들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도발한 지 26주년이 된다.
조국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수십만의 동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소위 남조선 해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처럼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반만년 역사상 동족끼리 이처럼 처참한 살육전은 없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들의 죄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천추에 씻! 을 수 없 는 이런 엄청난 죄를 지금도 또다시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이 만고 역적들을 여하히 치죄해야 하나.
길은 하나뿐이다. 전력을 경주하여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는 길이다.
역적 도당들에게 천벌을 가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길러서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애국선열, 전몰군경, 반공 애국투사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길 하나뿐이다.
나의 모든 생명을 바쳐서 이 민족적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리라.
천지신명이시여! 나에게 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1976년 10월 17일 (목) 맑음 어제 10월 6일 오후 3시 태국에서 무혈 쿠데타가 발생,
1973년 10월 학생들에 의해서 군정이 붕괴되고 그 후 불안과 혼미를 거듭하면서
민정의 출범을 보았으나 결국은 민정이 붕괴되고 다시 군정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개발 도상국가에 있어서 서구식 민주주의가 활착(活着)을 하자면
얼마나 힘이 들고 지난하다는 것을 또 한번 실증한 셈이다. 그 나라의 실정을 무시한 형식만의 모방은 십중팔구 실패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뼈저린 체험을 했고 또 다른 나라의 예를 수없이 보아왔다.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는 나라에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성장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유신체제는 이러한 귀중한 교훈에서 우러나
<한국적 민주주의> 라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1976년 10월 13일 (수) 맑음 10시 40분 기동차 편으로 서울역발. 영산강 유역개발 제 1 단계사업 준공식 참석차 광주로 향발. 오후 4시역 광주 도착.
기차편으로 광주행은 오래간만이다.
연도 농촌의 모습이 수 년 전에 비하여 괄목할 만큼 변모한 모습이 눈에 띈다.
새마을운동의 실적이 농촌 방방곡곡에 나타나고 있고
풍요에 넘실거리는 가을의 평화는 아름답기만 하다.
광주시내 모습도 1년여만에 보는
눈에는 깨끗하고 알뜰하게 다듬고 가꾸어진 모습 역연하다.
시민들이 내 고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씨가 구석구석에 보여 기쁘기 한이 없다. 도착 후 목욕을 하고 고건(高建) 지사를 대동하고 무등산 너머에 있는 김덕령(金德齡)장군의 사당, 충장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다.
1976 년 10월 17일 (일) 흐림 10월 유신 4주년이 된다. 유신 4년 동안에 우리 나라는 과거 10년 내지 20년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피땀흘려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 동안 73년 말부터는 유류파동으로 시작된 국제경제의 일대 불황이 있었다. 75년 초에는 인도지나 반도의 비극이 있었다. 북괴의 남침땅굴 발견도 이 기간 중에 있었다. 8.18판문점 만행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히 국력을 신장시켜 왔고
주변정세의 격변과 북한 침략집단의 집요한 도발과 위협에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안보태세를 훨씬 더 튼튼하게 다져 놓았다.
우리의 방위산업도 괄목할 만큼 발전 성장하였다.
우리의 경제발전은 국제사회에서 경이의 대상이 되고
개발도상국 중의 모범국가로서 선전이 되고 있다. 그 원인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대 자각과 단결과 땀흘려 일한 노력의 대가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이 건설의, 성장의 결과는 값진 것이고 보람있는 것! 이다.
하늘은 한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개척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을 경주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응분한 보상을 준다는 것으로 우리는 믿어야 한다.
농촌사회에서 5천년의 유산인 가난이 하나하나 벗겨져 나가고 새로운 생기 약동하는 농촌 모습으로 달라져 가는 것은 새마을운동의 성과이다.
농민들이 의지와 의욕과 노력의 대가가 농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0 월 유신은 구국의 결단이었다. 우리 국민 전체의 결단이었다.
새 역사의 출범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하는 데에서 새 역사가 하루하루 창조되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단해서는 안 된다. 계속해야 한다.
밝은 내일은 반드시 도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 1977년 일기 -
1977년 1월 12일 밤뉴스 시간에 어제 취임한 미국의 새 대통령의 의기양양 하고 즐거워하는 표정과,
임기를 마치고 시골에 돌아와서 골프를 치며 유유자적하는
포드 전 대통령의 표정을 찍은 TV화면이 나왔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포드 전 대통령이 훨씬 행복하게 보이고
인생의 전유(全有)를 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난 번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인생에서는 오히려 행복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1977넌 3월 7일 (월)
날씨가 완전히 풀려서 봄날씨다. 역시 경칩이 지나니 추위는 물러가는 모양.
밤 10시 10분 KBS에서 육영수 여사 전기 낭독을 침대에서 듣다. 1974년 5월 14일, 한국자연보호협회 회원들이 청와대에 찾아와서
아내에게 동 협회 총재를 맡아 달라고 청하던 날의 이야기가 나온다.
4시경 식당에 회원들을 초대, 다과를 대접.
나의 집무실에 아내가 와서 잠깐 나와 회원들을 격려해 달라고 하여
따라나가 인사를 하고 잠시 동안 환담을 나누는 당시의 이야기다.
엊그제 같은 이야기다.
아내가 타계하기 꼭 3개월 전의 이야기다. 아내는 남달리 자연을 좋아하고 아꼈다.
'이 다음에 이 자리 그만두거든 시골에 가서 조그만 집 하나 짓고 살아요,
그리곤 그 뒷산에는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는 맑은 물이 나오는 그런 곳에서 살아요.'
아내가 자주 하던 말이다. 아내는 그것이 소원이었다. 그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이는 갔다.
지금도 지방에 다니다가 나무 있고 바위 있는 아담한 산이 있으면
나는 유심히 그 산을 보게 된다.
그이가 저런 곳에서 살기를 원했는데 하고.
그러나 이제는 누구와 같이 그런 곳에 가서 조용히 살까.
아내는 또 우리 나라 재래식 한옥을 좋아하였다.
지방에 차로 같이 다니다가 재래식 기와집 반듯한 집을 보면
'저 집 참 좋지요! 저런 집 하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처녀시절 옥천 친정집에 살던 때 이야기도 자주 하였다.
대청마루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달빛을 바라보면 시골의 풍경을 늘 그리워하였다. 그런 생활을 노후의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이는 먼저 갔다.
1977년 4월 13일 (수) 맑음 창원(昌原)공단 시찰. 1년 만에 둘러보는 창원공단의 발전된 모습은 장하기만 하다.
대우실업, 통일산업, 기아산업을 오전중에 시찰하고 한국종합특수강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한국특수강, 제일정밀, 대한중기를 시찰,
우리의 방위산업이 1년 동안에 놀라울만큼 발전되었고 기업인, 종업원들이 열성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족감을 금할 수 없다.
1978년까지 기간부문이 완료되고 양산체제(量産體制)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연초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발표한 것을
예정보다도 훨씬 앞질러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산업 전사들의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그 땀진 얼굴, 기름진 작업복들이었지만
그다지도 값지고 거룩하게만 느껴져서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1977년 4월 19일 (화) 맑음 오후 7시 30분경 영등포구에 있는 청소년 근로자 야간학교 수업상황을 시찰하다.
영등포 공업고등학교, 영등포 여자상업고등학교, 대방여자중학교,
32개교를 구로공단 최명헌 이사장의 안내로 둘러보았다.
직장에 다니는 청소년들이었지만 여학생 남학생 다들 머리를 학생형으로
단정하게 다듬고 산뜻한 교복으로 앉아서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귀엽고 대견하다기보다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금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에게는 가정이 빈곤하다는 죄 하나만으로
남과 같이 그렇게 원하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학생복으로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부럽다기보다 나는 왜 학교를 못가느냐 하고 자기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도 하고 부모와 가정을 원망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도 한스럽던 일이 이제 소원이 성취되었다.
야간이나 주간이나 자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그들의 열성에 감동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치고 또 보람을 느낀다고 하는 말을 듣고 흐뭇하기만 하다.
이 학생과 교사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왔다.
이들의 앞날에 행복이 있기를 마음속에서 기원하였다.
1977년 4월 28일 (목) 흐린 후 맑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432주 탄신일이다. 11시 현충사 제례행사에 참석하다.
'국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굽어살피시사 이 조국 이 겨레의 앞날을 밝게 비춰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고 장군의 영전에 머리 숙여 기원하다.
오후에는 예산군 신아면 용궁리를 방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의
고택 복원공사를 둘러보고 인근에서 모여든 주민들과 담화도 나누었다.
시골 할머니들이 나의 손을 잡고 '만수무강하십시오. 늙지 마세요.' 하고 울먹이는
표정을 보고 순박하고도 가식 없는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에 감동을 느낀다.
이 착하고 어진 국민들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너무나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고온천에 들러서 온욕을 하고 일박.
연도의 농촌풍경이 퍽 아름답고 비닐하우스가 온 들을 덮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1977년 4월 29일 (금) 맑음 10시에 예산군 덕산 윤봉길 의사 45주기 의거일 제례에 참석.
윤 의사의 유족 장남 종씨를 만나서 유족들의 안부와 생계 형편을 물어 보았다.
윤 의사의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 보다.
약관(弱冠) 20여 세에 망국의 한을 품고 중국대륙에 건너가서
조국광복과 민족정기를 위하여 폭탄을 품고 사지에 뛰어 들어간 의기.
그때가 1932년, 의사의 춘추 이제 겨우 25세.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의 정기가 사라져가고 있을 때에
겨레의 가슴속에 다시금 횃불을 켜준 의열의 쾌거를 강행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충의(忠義)는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민족의 얼이 맥맥이 살아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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