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타산의 원주민인 구양봉(장국영 분)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이 그를 키웠다. 구양봉의 꿈은 유명한 검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술연마를 위해 고향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장만옥 분)과 고향에 남을 것인가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인 대신 무사로서의 길을 택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형과 결혼한다. 10년 후, 냉소적이고 돈만 알게 된 구양봉은 사막으로 가서 그곳에 여관을 개업한다. 구양봉은 황약사(양가휘 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사랑에 관한 슬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도화림을 떠나게 되었다. 매년 복사꽃이 피는 시절이면 구양봉에게 찾아와 같이 술을 마시고는 백타산으로 구양봉이 사랑했던 여인을 방문하러 떠난다. 10살난 아들을 가진 그녀는 아직도 구양봉을 사랑하고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일년전 황약사는 고소성 밖에서 자칭 모룡연(임청하 분)이라는 남자와 친구가 되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할 것을 언약한다. 그녀와 만날 약속을 했지만 황약사는 떠나가 버린다. 모룡연은 황약사가 약속을 어긴 것에 분노하며 구양봉을 찾아와 동생을 대신해 복수를 하고 싶다며 황약사를 죽여달라고 한다. 그가 떠난 뒤 그의 여동생인 모룡언이 나타나 그녀의 오빠를 죽여주면 오빠가 제시한 돈의 2배를 주겠다고 한다. 구양봉은 모룡연이 여동생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지만 대화를 지속하는 동안 모룡연과 모룡언이 내면에 두개의 인격체를 지닌 동일인임을 확인하게 된다. 어떤 젊은 처녀(양채니 분)가 구양봉을 찾아와 그의 동생의 복수를 간청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것은 달걀 한 바구니와 당나귀 한마리 뿐이었다. 구양봉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만 그녀는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한다. 도화림에서 온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영락한 검객(양조위 분)이 어느날 구양봉을 찾아와 살인청부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그는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복사꽃이 피는 것을 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돈이 필요했다. 그는 아내(유가령 분)가 절친한 친구와 부정을 저지르자 집을 떠났는데 그 친구는 다름아닌 황약사였다. 가진 것 없는 검객 홍칠(장학우 분)은 구양봉의 눈에 띄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이제는 유능한 청부검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구양봉의 뜻을 어기고 돈도 없는 어린 소녀의 복수를 대신해준다. 그가 받은 대가는 오직 달걀 한 개뿐이었다. 마적단과의 싸움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은 그는 그를 찾아온 아내와 함께 떠난다. 이렇게 가슴에 나름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세월은 흘러가고 마침내 구양봉은 형수(옛 애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여관에 불을 지르고 떠나간다.
씨네21 리뷰
백타산의 황무지 주막에 은거하는 구양봉(장국영)은 10년 전, 사랑하는 여인 자애인(장만옥)을 형의 여자로 내어주고 떠나왔다. 매년 복사꽃이 피는 시절이면 황약사(양가휘)가 찾아와 그녀에 대한 얘기를 전해준다. 그렇게 사람들이 주막으로 살인청부를 부탁하러 하나둘 찾아온다. 모룡언(임청하)은 자신의 여동생과의 결혼을 어긴 황약사를 죽여달라며 찾아오고, 검객에게 남동생을 잃었다는 완사녀(양채니) 또한 돈 한푼 없이 나귀와 달걀만으로 살인청부를 부탁하고,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검객 맹무살수(양조위)는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겠다며 살인청부 일을 자청해서 나서며, 이름을 떨치고 싶은 가난한 무사 홍칠공(장학우)도 구양봉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나타난다. 찾아오는 모두가 구양봉만큼이나 슬픈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008년 칸영화제에서 특별상영된 <동사서독 리덕스>는 창고에 처박혀 있던 15년 전의 작품을 새로 복원하고 재편집한 버전이다. 1995년 개봉한 <동사서독>은 김용의 원작을 새롭게 해석하고 당대의 스타들을 모두 불러들였으나, 제작비 수급과 촬영기간의 난항 등 우여곡절 끝에 흥행에서는 참담한 결과를 맛봤다. ‘리덕스’라는 꼬리표가 붙긴 했지만 삭제 장면이 대거 추가되거나 편집 순서가 바뀌면서 영화의 무드가 확 달라진 느낌은 없다. 세월의 흔적을 담아내는 CG 장면이 추가되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백로, 입춘 등 계절에 어울리는 절기의 소제목이 첨가되면서 순환의 의미를 덧붙인 정도다. 전반적으로 ‘시간의 재’(Ashes of Time)라는 영어 제목에 충실한 느낌이다. 물론 ‘고(故) 장국영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왕가위의 말처럼 편집을 일부 바꿔 영화의 끝과 시작을 그의 얼굴로 마무리한다. 이처럼 원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편집본이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걸까, 왕가위의 최고작이라는 느낌은 변함없다. 글 주성철 2013-11-27
제작 노트
1994년 작 [동사서독]을 감독 자신이 재편집한 버전으로, 2008년 칸영화제에서 특별상영 된 바 있다. 사막의 주막에 은거하는 구양봉은 현상금 사냥꾼들을 고용해 암살을 사주하는 중개인이다. 젊은 시절 사랑에 실패한 그는 몰인정하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구양봉의 주막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머물고 사라지는 정거장과 같다. 옛사랑의 죽음을 전해들은 구양봉은 마침내 자신을 둘러싼 고독의 근원을 찾기 시작한다. 왕가위 감독은 [동사서독]을 종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협영화로 만들고자 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을 영웅으로 그리기 보다는 그들이 영웅이 되기 전, 평범한 사람이었을 때를 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어서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운명주의’를 띌 수 밖에 없었다. [동사서독]은 감독 자신의 회사 제트톤의 첫 번째 작품이었고, 감독의 의욕에 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 관객의 외면을 받았었고 창고에 처박혀 있는 신세였다. 15년이 지난 지금, 감독은 마침내 원본을 찾아 복원과 재편집 과정을 거쳐 마음의 빚을 덜었다.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