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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 노벨상 제정
노벨상이 1901년 11월 27일 제정됐다.
노벨상이 제정된 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 스웨덴 스톡홀름에선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노벨상의 가장 큰 역설은,
물론 폭약으로 번 돈이 인류평화를
위해 쓰인다는 그 드라마틱한 전변이다.
또 하나는 처음엔 가족과
조국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는 것.
그러나 만약 노벨이 `국적 불문` 조건을 달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스칸디나비아 조그만 나라의 집안 잔치로만 끝났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니트로글리세린과 검은 폭약을 혼합한 다이너마이트를 포함, 평생 355개의 특허를 획득한 이 거부가 노벨상을 구상한 것은 55세 때인 1888년, 형 루드비히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잘못 안 프랑스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란 제목으로 오보한 데 충격을 받으면서였다.
▶2008년 피지서 승합차 전복 한국인 4명 숨져
▶2008년일가족 4명 살해 패륜 사건 발생
2003년 오늘,
'뽀로로'가 첫 선(방송개시)을 보이다.
▶2002년부시 미국 대통령, ‘한국 여중생 2명 사망’ 관련해 사과 표명
토머스 허버드(왼쪽) 주한미대사와 리언 J.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이 27일 오후 서울 용산 주한미대사관 공보과에서 가진 합동기자회견에서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고와 관련해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밝힌 사과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1995년윈도95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2.0 최종 버전 출시
▶1991년최첨단 ‘신경망 칩’ 국내 첫 개발
한국통신이 개발한 신경망 칩.
인간의 두뇌처럼 학습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신경망칩(뉴로 칩) 개발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는 가운데 본격적인 신경망칩이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됐다. 한국통신 연구개발단 기초기술개발팀은 거머리와 지렁이의 중간 정도 지능을 갖춘 신경망 칩 개발에 성공했다고 1991년 11월 27일 밝혔다.
인간의 두뇌가 1천억개의 뇌세포와 같은 연결고리(시냅스)를 가지고 곱셈 등이 연산을 1초에 1백조개 정도 수행하는데 비해, 한국통신이 개발한 신경망 칩은 6백40개의 연결고리로 1초간 10억개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칩이 아닌 웨이퍼에 3만개 정도의 연결고리를 집적시킨 신경망 칩을 개발했으며, 미국의 인텔사는 1천개 가량의 연결고리를 가진 신경망 칩을 개발했다. 연결고리 1천개까지의 신경망 칩은 문자(인쇄체) 인식이나 자연음 합성, 로봇제어 등에 응용할 수 있으며, 3천5백개 이상 5천개까지의 칩은 무인차량 음성적인 필기체 인식 등에 이용된다.
▶1990년존 메이저 영국 재무장관,
보수당 당수경선에서 당선
▶1990년싱가포르 새 총리에 오작통 취임
▶1989년국어학자 이희승 선생 별세
▶1984년미국 FBI, 통일교 박보희씨 납치소동
▶1983년필리핀 아키노51회
생일맞아 20만명 반정부 시위
▶1983년나카소네 일본수상, 중의원 해산
▶1983년미국 크루즈미사일 이탈리아 도착
▶1983년우루과이 30만 반정부시위
▶1982년독립기념관 건립예정지
충남 천원군 흑성산으로 확정
▶1982년나카소네 내각 출범
▶1978년관광객 유치 100만명 돌파
▶1978년북경서 사상처음으로 자유요구 데모
▶1978년부산 자유시장 화재.
점포 1,031개 소실, 50억 피해
▶1977년홍수환 4전5기 신화
1977년 홍수환 대 카라스키야
WBA 챔피언 결정전 - 4전5기의 신화
https://youtu.be/XAtM71TlW40
▶1974년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
▶1964년한국, 대만과 우호조약 체결
▶1962년교통부, KNA를 취소하고
대한항공(KAL)에 취항권을 부여
1961년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일본을 방문 이케다수상과'한일국교정상화'에 합의.
김종필-오히라 메모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중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오히라 외상 간에 이루어진 막후 협상.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상은 이미 1950년대 이승만 정권때부터 시작되었고, 4·19 이후 장면 정권 당시에도 지속되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핵심 중 하나가 한국과 일본을 긴밀히 결합시켜 반공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었고 그 영향 하에 있던 한국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간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영토, 배상 문제 등과 함께 국내정치적 문제도 얽혀 있어 협상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중심의 군부세력도 한일협상에 나섰으나 진척은 더딘 상황이었다.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별다른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집권세력은 일본자본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한일협상의 핵심 쟁점은 청구권 문제였고 한일 간의 입장 차이도 컸다. 이러한 와중에 1962년 당시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두 차례 단독회담을 하고 청구권 문제의 최종적인 합의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10월 21일 열린 첫 회담에서 오히라는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 명목으로 3억 달러를 제시했고, 김종필은 6억 달러로 맞서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김종필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도쿄로 들러 11월 12일 두 번째 회담을 가졌다. 회담 전에 김종필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금 명목 불가, 총액 6억달러 관철’을 요구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훈령을 받았다. 두 사람은 3시간 30분간의 협상 끝에 청구권 문제를 매듭지었고, 그 결과를 ‘메모’ 형식으로 작성했다.
주요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도합 6억 달러로 합의하고 이를 양국 수뇌에게 건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종필은 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남기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오히라 외상이 받아들여 메모가 작성되었다.
메모 내용은 일본이 제공할 청구권 액수와 방식만 명기되었을뿐이며 자금 명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하고 한국에서는 청구권 자금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셈이었다.
애초 일본의 입장은 청구권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7,000만 달러이며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추가 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고, 한국은 청구권과 무상원조를 합친 개념으로 양보하면서 청구권 3억, 무상원조 3억을 요구했었다. 김종필과 오히라는 이러한 입장 차이를 조율해 문제의 메모를 작성한 것이었다.
메모의 존재는 야당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극소수 야당 의원들에게 공개되었고, 이후 커다란 반향을 불러와 김종필은 또 다시 외유를 떠나야 했다. 1964년 한일협상 타결은 실제로 이 메모와 거의 차이가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음으로 보아 김종필과 오히라 간의 이 회담이 한일협상의 실질적 타결이라 할 수
있다.
http://naver.me/F4eSBK64
▶1959년임화수 반공예술인단장,
희극배우 김희갑 폭행
▶1959년효창공원 국제축구경기장 착공
▶1955년소련, 서베를린 자유시화(自由市化) 제안
▶1954년제2차 개헌(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등) 부결
헌법개정안 투표 실시(사사오입개헌) -1954년11월29일
1954년 오늘!
국회 민의원 2백여명이 투표를 실시한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에 대한 투표다.
투표 결과 135명이 개헌안에 찬성했다.
재적의원 3/2에 해당하는 136표에 한표가 모자라는 숫자로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헌법개정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나 사사오입을 도입하면 203명의 3/2는 135명이라는 자유당측의 강력한 주장이 제기된다.
마침내 헌법개정안은 부결된지 이틀만에 번복돼 개헌안의 가결이 선포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헌법개정안 변칙통과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큰 오점으로 남게 됐다.
제2차 헌법개정 -1954년11월29일
제2차 헌법개정은 1954년 11월 27일 이루어진 이른바 '四捨五入개헌'이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의원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이리하여 자유당의 발의로 9월 6일 헌법개정안이 제출되였다. 이에 대한 표결 결과가 국회 재적의원 203명중 135명만이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찬성의원이 헌법개정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인 재적의원의 2/3인 136명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곧바로 부결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집권여당측은 '사사오입'원칙에 의하면 203의 2/3는 135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1월 29일 부결선언을 취소하고 야당의원들이 총퇴장한 상황에서 125명의 여당의원들이 의사록을 수정하여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해 버렸다. 개정은 30개 조항에 걸친 것이었는데 주요한 내용으로 이 헌법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 '중임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하도록 한 것, 주권의 제약ㆍ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중대한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제를 도입한 것, 국무총리제를 폐지한 것,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ㆍ공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ㆍ사영의 원칙으로 전환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1953년이승만 대통령 대만 방문해 장개석과 회담(28일)
▶1953년극작가 유진 오닐 사망
▶1953년부산 대화재. 건물2천여동 소실
▶1951년휴전회담, 30일간 잠정적 군사경계선 확정 합의. 전전선(全戰線)에 공격중지령
▶1950년중국군 60만 한국전 개입
- 아래는 1993년8월7일 관련기사
1950년 장진호 전투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1950. 11. 27~12. 11)
이 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이 북진 중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후 그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하여 실시한 전투이다. 미 제8군이 서부 전선에서 중공군 제13병단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에 예속되어 있던 미 제1해병 사단이 서부 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에 걸쳐 치른 철수 작전으로 이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가 넘는 협곡 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유엔 공군의 항공 근접 지원하에 과감한 돌파 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 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 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 때의 피해로 유엔군의 한반도에서 철수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던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 공세는 후속 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 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1950. 11. 27~12. 11)
장진호 전투는 미 제8군이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제13병단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에 예속되어 있던 미 해병 제1 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쳐 치른 철수작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유엔 공군의 항공 근접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미 제1해병사단은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후, 11월 2일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중공군을 물리치고 진격을 계속하여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하였고, 11월 16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달하였다.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로 정하고, 미 제1해병사단에게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여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미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 26, 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곧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하여 있다가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하여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미 제1해병사단 2개 연대에 투입된 부대는 4개 사단이었다. 이로써 장진호 전투가 전개되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인해 미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유엔군사령부는 11월 30일 전면철수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11월 30일 미 해병사단 주력은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하여 12월에는 2일에는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하였다. 하갈우리에는 스미스 장군 휘하에 약 1만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에게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하였다. 계속하여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중공군은 미 해병 2개 연대에 4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에 대하여 종전의 4개 사단에다 추가로 5개 사단을 투입하였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이에 유엔군측에서는 공수 철수를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육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 때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대와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 때 해병대는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전사 2,500명과 부상 12,500명이 손실당했다. 이에 중공군 제9병단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 때의 피해로 유엔군의 한반도에서 철수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던 중공군 3차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50년대한적십자사 창립
▶1946년주48시간 노동제 실시 발표
▶1945년강원일보 창간
▶1943년카이로선언 채택(12.1 발표)
연합국 지도자 장개석, 루스벨트, 처칠(왼쪽부터)이
일본과 관련된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에 모였다.
▶1940년홍콩 영화배우 이소룡 출생
1932년 오늘.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 (Benigno Aquino)필리핀루손 섬 콘셉시온 에서 출생(~1983년 8월 21일 필리핀 마닐라국제공항에서 피격 사망) 1950년 《마닐라 타임스》의 기자로 6·25전쟁 때 종군하였다. 1958년 타를라크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코라손아키노의 남편. 마르코스 정권에 투쟁하다가 귀국길에 암살당했다.
▶1925년제1차 공산당 사건
▶1921년체코슬로바키아 정치가 알렉산더 둡체크 출생
▶1921년시인 김수영 출생
▶1921년최초의 신문-잡지 기자단체인 무명회 결성
▶1920년미국대통령에 하딩 당선
▶1919년일본-불가리아 평화조약 조인
▶1910년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 순국
▶1901년노벨상 제정
- 스웨덴의 발명가겸 기업가, 알프레드 노벨
▶1894년일본의 사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 출생
1874년 오늘,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 하임 아즈리엘 바이츠만(Chaim Azriel Weizmann )러시아 제국 모탈(현재는 벨라루스 영토) 에서출생
(~ 1952년 11월 9일 이스라엘 레호보트 에서 사망)
이스라엘의 제1대 대통령 임기1949년 2월 17일 ~ 1952년 11월 9일 영국의 총리로 재임 중이던,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로부터 아세톤의 제조법을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ABE 발효를 이용해 옥수수를 사용해 아세톤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세톤을 만든 후 대통령이 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운데
▶1598년임진왜란 종식(선조 31년)
▶1095년교황 울바누스 2세,십자군 제창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교황 울 바 누스 2세(라틴어: Urbanus PP. II) 십자군 소집을 제창/ 제159대 교황(재위: 1088년 3월 12일 ~1099년 7월 29일)이다 1035년 프랑스 왕국 라 주리 에서 출생~1099년 7월 29일 교황령 로마에서 사망
클레르몽 언덕에서 십자군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우르바누스 2세 [verenoflood]
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 언덕에 오른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은 기독교인의 가슴에 열정을 지피는 계기가 된다.
이슬람 교도와 싸워 성지를 회복하자.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명하는 것이다.
이 가슴 뜨거운 종교에 대한 신념과 이교도에 대한 분노, 그리고 신의 명령이라는 세가지가 합치된 이 연설에 대중들은 열광을 했고 여기에 교황은 한 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싸우다 죽으면 천국의 영광이 보장된다.
이들의 가슴은 뜨겁게 타오르다 못해 폭죽처럼 터져버렸다. 이 연설을 계기로 이듬해 바로 성지탈환을 위한 군대가 조직되고 이 전쟁은 200년을 지속된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다.
정식 군대가 아닌 어중이 떠중이 민중들이 모인 교도들의 무리집단이 무기를 장착하고 전쟁에 참여하니 자그마치 10만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군인이 아니었기에 전쟁을 몰랐고 전술을 몰랐으며 전략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보급을 위해 약탈을 일삼았고 이교도라 여겨지면 무조건 죽이고 보았다. 이들을 이끄는 영주들은 약탈한 영지를 자신의 영지로 삼으며 점차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고, 군대가 머무는 곳에는 시장이 형성되면서 상업이 흥성하여 상인들이 돈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1차를 제외하고 모두 실패하였으며, 이로 인해 교황의 권위는 추락하였고,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영지를 확보하게 된 황제들은 상인, 즉 부르주아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하여 절대왕정을 구축하게 된다.
중세를 180도 바꿔놓은 우르바노스2세가 십자군 전쟁을 하기로 선포한 날이 1095년 11월 27일이었다
https://youtu.be/mQlsIupOx_g
출처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길거리 인문학도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