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배추 한 포기에 15,000원소리가 날때부터 김장걱정을 하던 아내는 12월하고도 두주째가 되어서 더 못기다리고 나를 재촉해서 시장으로 끌고 갔다.
11월 월급을 타야 김장을 할 때가 있었다. 월급날자가 미뤄지는게 다반사였던 시절에 보통 12월 초에 하기가 일수였다. 그때는 김장김치가 겨울 양식이어서 할수만 있으면 무조건 많이 해야 했다. 김장을 해서 묻어놓고 연탄을 몇백장 들여놓으면 일단은 겨울준비가 됐었다. 지금은 핵가족시대, 또는 일인가구세대가 늘어나면서 김장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많이 희박해 졌다. 언제든 시장에 가면 배추가 있는 시대에 살고, 젊은 세대로 갈수록 김치소비가 전같지 않다.
나도 김치세대지만 식생활이 많이 바뀌는데 따라 김치소비가 부쩍 줄었다. 김치에 대해서 애착이라기보다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난하게 넘어갈수 있을만큼 너그러워졌다. 식당에 가서도 김치는 별로 손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얼마나 먹는다고 김장이라는 거창한 일을 벌리는게 귀찮아졌다. 김치라는게 맛있게 먹을 수 있을때는 잠깐이고 지나면 금방 시어터진다. 맛이 간 김치를 냉장고에 재어두고 냄새를 피우기보다는 때마다 조금씩 사먹던가 한두포기 소리없이 하면 딱 좋은데 굳이 김장을 하겠다고 보채는게 못마땅해 이제까지 이핑게 저핑게를 대며 피하다가 오늘은 걸려들었다.
결혼 40년 늘 붙어살아서인지 아내는 내가 거들지 않으면 좀 큰일(?)은 벌리지 않는다. 요리하는데도 내가 옆에 있어야 맛이 난다고 쉬고 있는 사람을 주방으로 불러댄다. 배추를 고를때도 같이 가야한다고 오늘까지 기다렸다(실은 운전수가 필요했다). 물건 좋고 값도 좋다는 진X마트라고 두꺼비가 연상되는 간판이 달린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가까운데 사는 큰딸네와 인천에 사는 막내딸네도 주어야 한다고 배추와 김장 부속품들을 셈해놓는다. 배추나 파 등은 눈에 익숙한데 무우는 조선무라고 심하게 뭉툭하게 생겼다. 좀 길쭉하고 늘씬해야 맛있어보이는데 아내는 상하좌우 비율이 영 불편해 보이는걸 골라담았다.
차 뒷좌석에 싣고 집에 풀어놓으니 정말 예상대로 어수선하다. 혼자 다 해서 혼자 다 먹어라 하고 내빼뻐리고 싶지만 그럴 용기도 없어 팔짱끼고 째려보았다. 그래도 베란다에서 일년 내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고무다라를 꺼내서 씻어주었다. 아내는 배추를 다듬어 반으로 쪼개면서 날더러 무우좀 욕실로 가저가서 씻으라고 밀어놓는다. 기왕 시작한거 맘잡아 걷어부치고 무총을 잘라내고 수세미로 무우를 씻으며 칼로 잔 털을 다듬고 움푹 들아간 곳을 긁어냈다. 거지반 끝나가는데 하나가 검은 흠이 보인다. 칼끝으로 후벼보니 속에도 검다. 무우를 반으로 잘라보니 속이 상해있었다. 아내에게 보여주니 가서 바꿔오란다. 조용히 없애버릴걸 잘못했다고 후회하면서 버린 영수증을 찾아가지고 상한무우를 비닐에 담아들고 문을 나섰다. 일하던 옷차림에 검정비닐을 덜렁덜렁 들고가는 내 모습이 영 말씀이 아니다. 심술도 나고 이런 상품을 판매한 상인이 밉기도 하다. 가서 다부지게 한마디 해야되는데 뭐라고 해야할지 잘 생각되지 않는다. 그냥 불쑥 내밀면 되나? 표정을 어떻게 하면 기를 죽일수 있을까? 휘발유값은 보상해 주려나? 죄송하다면서 한개 더 얹어줄까?
이런 잡스런 생각을 하며 그 두꺼비같은 이름을 가진 마트에 들어가서 유니폼을 입고서있는 좀 나이들어 보이는 중년남자 앞에 말없이 검정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봉투안을 들여다보고 “아 상했군요” 하며 가까이 있는 여자 점원을 불러 “이거 바꿔드려” 하고는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상한 무우를 받아든 여직원은 따라오라는 듯이 눈을 맟추고 앞서가고 나는 여직원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는 무우가 쌓여있는 곳에서 이것저것 들어보더니 내가 반품한 무우보다 결코 크지않은 한개를 집어 내가 가저온 검정 비닐에 담아 건네준다. 그걸 받아들고는
“그냥 가면 되나요?” 정말 어이없는 질문을 그에게 했다.
그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다는 듯이 나를 보며 “네”하고 대답한다.
갑자기 모니터가 꺼진 것처럼 눈앞이 하얘졌다. 생각의 메모리도 다운된 것 같다.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 멍 하니 서있는 나를 두고 점원은 어디론가 가고 나는 그 뒤에다 대고 소리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질렀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오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했는데”,
“기름을 태워가며 멀리서 왔는데”,
“한 개를 더 보태줘도 성이 차지 않는데 내꺼보다 더 작은걸 줬잖아?”
혼자 식딱거리고 서있는 지금의 나의 무게가 손에든 무우 한개의 무게처럼 초라하게 느껴진다.
매장안에 사람이 내 입안에 말들을 다 들은것 같이 나를 돌아보고있는 것 같아 주변을 돌아다봤다. 쭈그러진 나와는 상관없이 그 안에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
뭔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힘없이 돌아 나왔다.
사람의 감정이 이 작은 무우 한개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씁쓰름하다.
돌아오면서 스스로 위로가 될 이유를 찾았다.
“야! 고장난 새 냉장고 딴것으로 바꿔주면서 선풍기 끼워주는거 봤냐?
“토요타 리콜하면서 자전거 덤으로 주는거 봤냐?
“아무리 그래도 이놈의 집에 다시 오나 봐라.”
저_장미꽃위에_이슬_(완)[1].mp3
첫댓글 작은 거 하나에 말한마디에.. 감정 상하고,, up되기도 하는데.. 장사하는 사람들은 저래서는 안되는데.../ 세상에 저것뿐이겠는지요.. / 대강대강 넘어가버려야되어요.. 혼자 씩씩대봤자.. 내 맘만 안좋고 내 입만 더러워지니까요..
돌아오면서 스스로 위로가 될 이유를 찾았다.
“야! 고장난 새 냉장고 딴것으로 바꿔주면서 선풍기 끼워주는거 봤냐?
“토요타 리콜하면서 자전거 덤으로 주는거 봤냐?
“아무리 그래도 이놈의 집에 다시 오나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