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대부터 당대의 문화적 지표로 떠오른 패션, 미술계에서 인정받기 시작
잡지에 실리는 상업적인 패션 사진들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관점에서라면 상업적인 사진 그리고 패션 화보들은 예술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패션과 미술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미술관에서 패션, 혹은 패션 사진 전시들이 열리면서 점차 미술의 영역이 확대되는 지금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실 패션과 미술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지요. 미술 작품 속에 당대의 패션 경향을 담는다거나 의상에 미술작품의 패턴을 사용하는 것 등이 그것인데요. 하지만 미술과 패션 간의 관계는 현대에 들어서 특히 사진을 통해서 더 긴밀해지고, 한 단계 더 고양됩니다. 80년대부터 패션은 당대의 문화적 지표로 떠오르면서 미술계에서 인정받으며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되기 시작하였고, 90년대 들어 패션 사진들은 단순히 의상을 찍은 사진 그 이상의 것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패션 사진의 종류는 크게 초상, 초현실주의, 스냅 샷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요, 실제 사진은 이 중 하나를 택하거나, 둘 이상을 다양하게 혼합하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초창기에 패션 사진은 스튜디오에서의 정교한 세팅과 사전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초상 사진이 주를 이루었지요. 하지만 카메라가 간편해지고 거리 촬영이 가능해지자 스냅 샷이 등장하여 패션사진에 움직임과 역동성이 가미되었고 사적이거나 서사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욕망과 환상을 전제로 하는 패션을 찍은 사진은 초현실주의 미술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최근 가장 인기를 누리는 경향입니다.

만삭의 데미무어 등 헐리우드 배우들을 찍은 사진으로 잘 알려진 애니 레보비츠
패션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을 단번에 씻어 줄 사진작가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애니 레보비츠’(1949~ ), 그녀의 이름은 생소하실지 모르지만, 만삭의 데미무어가 누드로 등장했던 사진이나, 알몸의 존 레논이 오노 요코에게 매달리듯 포옹하고 있는 사진들은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그녀는 이렇게 잡지 사진이나 헐리우드 배우들을 찍은 사진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그녀의 작업의 폭은 매우 두텁습니다.
그녀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중음악 잡지 <롤링스톤즈>에서 사진기자로서의 길을 시작했는데요. 그녀는 강렬한 잡지 표지 사진으로부터 유명 인사들의 초상 사진,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르포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그 사진들은 곧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후 <베니티 페어>라는 본격적인 패션 잡지에서 인상적으로 연출된 초현실주의적인 패션 사진들을 찍으면서 독보적인 명성을 얻게 되지요. 이러한 행보라면, 여느 상업 작가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그녀는 이러한 상업적인 사진과는 아주 다른 경향의 보도사진들을 보스니아 내전을 통해 다루게 됩니다. 그녀를 보스니아에 보내 사진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게 함으로써 그녀의 작업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수잔 손택(1933~2004)이었지요.

지적인 에세이와 소설로 미국적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랑받아온 수잔 손택은 이미 레보비츠를 만나기 전에 사진에 관한 중요한 에세이들을 저술했었지요. 이 두 사람은 각별한 연인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의 관계는 예술 실제와 이론적 비평이 교류하는 장이었습니다.
애니 레보비츠의 이러한 사진 작업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애니 레보비츠 :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본 삶>(2006)은 사진, 패션, 그리고 미술에 대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통해 그녀가 평생 동안 작업해 온 사진들을 분류해보고 사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면, 상업적인 사진과 예술적인 사진의 경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인물 사진, 패션사진, 보도사진, 그리고 사적인 사진 등 이 모두가 하나의 뿌리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더 나아가 패션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글/최정은
(서울시립미술관 '찾아가는 미술감상교실' 강사, 서울대 미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