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사
대법사에는 사명대사가 50대에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 잎을 피웠다는(직접 심었다는 설도 있음) 아름드리 모과나무 한그루가 대법사 경내 보광전 앞 마당에 서 있다. 높이가 2m20cm, 굵기는 3m20cm로 나무 밑둥이 어른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야 마주 잡을 정도로 우람하다.
이 사찰은 신라시대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후 900년이 지난 어느날 부터 사명대사가 10여년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한데, 열반 후 그 영정을 모신 곳이라 해서 조정에서 표충사(表忠詞)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표충비를 세우고 사당을 세웠다가 후에 영정이 단장면의 현 표충사로 모셔지는 바람에 원래의 이름을 뺏기고 말았다.
초창 당시 학 3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해서 백하암(白霞庵)이라는 사명으로 불리던 이 사찰은 사명대사의 위상 덕에 오랜 세월 국가의 관심 속에서 중건을 거듭해 왔느나 국난의 영향과 조선조의 억불숭유 정책 등으로 인해 폐사되었다가 1968년 현 조실 지혜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시작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통해 오늘날의 사격을 갖게 되었다.
사명대사의 정신이 깃든 이 대법사에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한편이 전해지니 바로 모과나무에 관한 실화이다.
해발 6백m 고지에 자리하고 있는 대법사의 중창불사가 한창이던 더운 여름 , 사명대사의 지팡이 나무라고 알려진 모과나무가 대웅전을 지으려는 자리 바로 앞을 가로막고 있어 모과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나무 옮기는 것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스님은 1주일간 기도까지 드려가며 공사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인부들이 일하러 오기로 한 그날 새벽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요사채에서 잠을 자던 지혜스님은 갑자기 산천이 울리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 보니 적막하기만 한 산중에 갑자기 바람이 부는가 했더니 이내 잠잠해져 다시 방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내가 4백년을 지켰는데 네 마음대로 하려느냐. 나는 절대 안간다."
지혜스님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목소리는 분명 모과나무쪽에서 들려왔다. 후닥닥 밖으로 나가보았더니 8월 한여름철인데 모과나무에서 아주 차가운 바람이 씨익--불어왔다. 이토록 기이한 일을 겪게 된 스님은 새벽 6시 공사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나무 옮기는 일을 취소시켰다.
바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1993년 8월 10일의 일이었다.
이 같은 이야기를 그냥 무시해버리기에는 현재의 대법사 구조가 참으로 이상하다. 대웅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선방이 들어섰고 모과나무는 그대로 놔둔 채 주전각인 대웅보전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수십억원을 들여 대규모 불사를 하면서 본존불을 모시는 주전각을 경내중심에서 뚝 떨어진 곳에다 짓는, 전통사찰 건축양식에서 보면 크게 어긋나는 불사를 한 대법사의 이야기는 사명대사의 원력이 작용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궁색하다.
대법사 천왕문
대법사 사천왕도
대법사 사천왕도
대법사 전경
대법사 오층석탑
대법사 요사및 사명대사가 심어논 모과나무
대법사 범종루
대법사 대웅보전
대법사 대웅보전 문살
대법사 대웅보전 벽화
대법사 대웅보전내 삼존불
대법사 대웅보전내 후불탱
대법사 대웅보전내 지장보살상과 후불탱
대법사 대웅보전내 신중탱
대법사 전경
대법사 삼성각
대법사 삼성각내 산신탱
대법사 삼성각내 칠성탱
대법사 삼성각내 독성탱
대법사 찾아가는 길
밀양시 방면에서는 무안 소재지를 거쳐 중산마을을 경유하여 고라리에 중촌마을로 가면 된다. 인교방면에서는 무안소재지 입구 문화마을에서 좌회전하여 중산마을을 경유, 사명대사 생가지를 지나 영취산 중턱으로 오르면 된다.
첫댓글 종성스님의 은사스님이신 지혜스님의 원력으로 이렇게 대법사가 여법한 도량으로 가꾸어졌지요.
도량이 꽤 커던걸요,,,,깔끔하게 정돈이 되어진 아주 넓은 도량 으로 기억에 남아 있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