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의 일생
글 박성표
펄 벅 선생님의 삶은 결코 ‘대지의 작가’라는 하나의 틀에 묶이지 않습니다.(펄 벅을 ‘펄벅’으로 표기) 펄벅은 소설과 강연을 통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참모습을 서구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 민간 외교관이자, 아시아 관련 잡지에 깊이 관여한 언론인이며 국제관계 전문가였습니다. 또한,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여성과 소수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인권 운동가였으며,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가족을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소수자의 편에 섰던 만큼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주류 문단에서도 의도적으로 비판받거나 무시당했습니다. 하지만 펄벅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자신이 중국에도, 미국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펄벅은 당시 아주 드물게도 중국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미국 사람이 전혀 무지한 중국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펄벅의 성취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두 세계 모두로부터 이방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어진 두 개의 세계
펄벅이 여성이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것은 그녀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에 ‘주어진’ 조건이었습니다. 1892년 6월 26일,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보로에서 열렬한 기독교 구도자 부부인 압솔름 시던스트라이커와 캐롤라인 스털팅 사이에서 펄 시던스트라이커Pearl Sydenstricker가 태어났습니다. 펄벅은 태어나자마자 선교사 부모님을 따라 다섯 달 만에 중국으로 가게 됩니다.
어린 펄벅은 종종 중국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했습니다. 자기들과 달리 금발에 하얀 피부, 푸른 눈동자를 지녔기 때문이죠. 중국에서 백인의 존재란 명백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인’이 소수자의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매우 드문 사례였습니다.
펄벅은 집에서도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펄벅의 아버지는 철저하게 성경의 말씀에만 따라야 한다는 교조주의자였고, 가정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펄벅의 아버지는 중국인뿐 아니라 여성의 인권에도 무관심했습니다.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펄벅의 어머니가 향수병과 질병에 시달려도 무관심했고, 펄벅의 교육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펄벅은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10년 펄벅은 어머니의 강력한 주장 덕분에 미국으로 돌아가 랜돌프-메이컨 여대에 입학합니다. 펄벅이 자신의 고향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느끼는 생경함이 얼마나 컸을까요. 대학에 입학하자 펄벅은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을 전혀 모르는 촌티 나는 아이 취급을 당하고 맙니다. 어린 시절 중국 아이들에게 겪었던 따돌림을 대학생이 되어 자기 고향에서도 겪어야 했습니다. 펄벅에게는 두 개의 고향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중국, 민중, 대지
대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펄벅은 한 남자를 만납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온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이었습니다. 1917년 둘이 결혼하면서 펄 시던스트라이커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펄 벅Pearl Buck이 되었습니다.
펄벅은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난쉬저우(南徐州)로 갔습니다.
첫 딸 캐롤이 태어날 때까지 결혼 생활은 겉으로 문제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캐롤이 발달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펄벅은 절망합니다. 장애아를 낳는 것이 부모의 탓으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펄벅은 자궁에 종양이 발견되어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펄벅이 이런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남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업과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형식적인 부부로만 남게 됩니다.
펄벅은 난징 대학에서 교육학 강의를 하고, 딸 제니스를 입양해 그녀를 통해 삶의 위안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7년 3월 펄벅의 가족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칩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군대가 난징 앞까지 당도했고, 난징 방어군이 패배하자 도시는 아수라장이 돼버렸습니다. 선교사들을 폭행하고, 돈과 목숨까지 빼앗는 군인들이 펄벅을 발견하기 직전, 미국과 영국 군함이 난징으로 들어와 상황은 겨우 정리됩니다. 펄벅은 자신이 평생을 보낸 중국에서 백인이란 이유만으로 죽을 뻔했지만, 외국의 착취로 인한 중국인의 분노를 이해했습니다.
펄벅은 비록 중국에서 이방인일 뿐이지만, 중국 민중의 삶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혁명이란 추상적인 이상향으로 보았습니다. 민중의 현실적인 삶을 바꾸지 못하는 이상 혁명이란 도리어 정치적 혼란만 가중시키고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벨문학상과 문단의 분노
《대지》는 사실 중국의 황량한 시골 난쉬저우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낳은 딸 캐롤에 의해 쓰여진 소설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생에 갑작스럽게 이어진 불행을 감당할 수 없어 글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았습니다.
펄벅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중국 여인들의 고달픈 삶을 소재로 《동풍, 서풍(East Wind:West Wind)》이라는 첫 소설을 썼습니다. 이름 없는 소설가가 쓴 데다 중국이라는 낯선 소재로 인해 많은 출판사가 외면했습니다. 그러다 신생 출판사인 존 데이John Day가 가능성을 보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동풍, 서풍》이 예상외로 성공을 거두자 이에 고무된 펄벅은 다음 소설을 빠르게 탈고하여 보냅니다. 그녀가 소설을 쓰는 데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펄벅은 캐롤을 보호기관에 맡긴 상태였습니다. 딸이 보호기관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펄벅은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왕룽》 원고를 출판사로 보냈습니다. 출판사에서 《왕룽》이라는 제목을 극구 반대하고 대신 《대지》를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왕룽》은 《대지》가 되었습니다.
《대지》는 좋은 책을 추천하는 ‘이달의 북클럽’에 선정되면서 폭발적인 판매량을 올렸습니다. 생소한 중국 이야기로 조금 주목받던 작가가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입니다. 여전히 중국에 있던 펄은 자신의 성공을 피부로 느낄 수는 없었지만, 《대지》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1932년 펄벅은 퓰리처상을 탑니다. 《아들들》, 《분열된 일가》 등 《대지》 3부작을 완성한 후 1938년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펄벅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문학계는 펄벅의 수상 소식에 거의 분노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들은 펄벅의 작품이 생경한 중국을 무대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벌어지는 이야기에 불과할 뿐, 진지하게 인간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고, 미학적인 문장으로 소설의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지 못한다고 폄하했습니다.
한 편 노벨상 위원회는 《대지》 때문에 노벨상을 수여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중국을 다룬 여러 가지 소설들이 선구적이며, 특히 그녀의 부모에 대한 전기가 가장 섬세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인권 운동가, 펄 벅
주류 문단의 평가와는 별개로 펄벅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아시아 문제 전문가이자, 여성 및 인종차별 인권 전문가, 강연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나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극심해졌습니다. 펄벅은 강연과 투고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로비 활동을 하거나, 직접 자선 단체를 만드는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전개합니다. 혼혈아를 입양하는 웰컴하우스도 전쟁고아 입양을 위해 이때 만듭니다.
사실 펄벅은 스토리텔링 전문가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훌륭한 행정가나 경영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펄벅이 설립한 단체들은 이내 운영에 난항을 겪곤 했습니다. 펄벅은 동시에 대가족을 운영하는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로싱 벅과 이혼한 펄은 존 데이 출판사 대표인 로버트와 재혼합니다. 펄벅은 여러 아이들을 입양했고, 농장을 사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펄벅과 함께 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대화 중인 펄 벅 ]
펄벅의 전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사람들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급격하게 식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새롭게 부각되는 냉전 시대와 러시아와의 관계에 촉각을 세웠습니다. 마오쩌둥을 비판했던 펄은 중국 비자를 거절당하고 영원히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펄벅은 정치적 이슈와는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펄벅이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1960년이었습니다. 첫 방문 때 총 9일간 한국에 머무르며 강연 및 문인들과 만남을 가졌고, 사람들로부터 미국에 한국을 소개해달라는 요청도 받았습니다. 이러한 요청과 한국에 대한 남다른 인상이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Leeds)》를 쓰게 된 계기였습니다. 65년에는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열었고, 67년에는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 ‘소사희망원’이라는 복지시설을 지어 전쟁고아들의 교육과 복지에 힘썼습니다. 펄벅은 소사희망원에 몇 달씩 머물며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았습니다. 소사희망원은 75년까지 운영되었고, 지금 그 자리에는 부천펄벅기념관이 서있습니다.
1973년 3월 6일 아침, 그토록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펄벅도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폐암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건강했지만, 말년에는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각종 매체들이 그녀의 죽음을 보도했으나, 여전히 펄벅을 ‘위대한 소설가’로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자라지 않는 세상의 어머니가 되어
펄벅이 평생에 걸쳐 싸웠던 여성 인권, 인종 차별, 전쟁고아 등의 문제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개인의 선택이 아닌 주어진 조건에 따른 차별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인종이나 성별, 부모를 고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어집니다. 특히 전쟁통에 태어난 혼혈아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미국인 아버지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아이들은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혼혈아라는 이유로 거지들 사이에서도 멸시를 당하며 심하면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펄벅은 이런 아무런 잘못도 없는 생명을 위해 싸웠습니다. 펄벅은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현실의 삶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펄벅은 소설가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사회 운동가로서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편견을 습득하게 되는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개인 차원에서 노력을 강조했던 점도 아쉬움을 남깁니다. 펄벅은 소설가였지 사상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편견의 벽 때문에 고통받지 않도록 기꺼이 울타리가 되고자 했고, 자신의 노력과 재산을 들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던 그녀의 정신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비록 편견의 높은 벽을 완전히 허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것은 참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펄벅의 잘못이 아니라, 사랑의 참모습을 보고도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이 세상의 탓일 것입니다. 자라지 않는 아이로 인한 고통만큼이나, 자라지 않는 세상으로 인해 받은 고통을 모두 잊고, 자신의 대지에서 살아갈 펄벅 선생님이 고이 잠드시길 바랍니다. 남은 대지에서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은 이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펄벅의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