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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묵상글 (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 어긋나는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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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6 03:47
- 어긋나는 사랑
간혹, 아니, 흔히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인데도
눈감아 주거나 심지어 두둔하고,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옳은 일을 해도
어떤 식으로든 헐뜯거나 글러 먹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행위는 참사랑이 아닐뿐더러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왜 참사랑이 아닐까?
누구 또는 한쪽을 배제하기에 참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참사랑인데 배제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참사랑이 아닌 더 큰 이유는 이것이 아닙니다.
내 편만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불과하거나
그가 내 편에 서지 않거나 돌아서면 즉시 미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가 정의롭지 않은 것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는 불편부당해야 하고 늘 옳은 것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러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오늘 주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 요한이
주님의 제자답지 않은 짓을 하고 태도를 보입니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 추방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아닙니까?
그리고 물론 어떤 제자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했겠지요?
그런데도 그는 주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짓을 합니다.
동족이나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주님의 사랑을 독점하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긋나는 사랑.
그렇습니다.
주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랑을 우리도 요한처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이웃을 사랑하더라도 내 편만 사랑하거나,
주님과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는 사랑을 할 수 있지요.
이웃 사랑은 잘못해도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 하진 않는다고요?
이웃이 나보다 뭘 더 잘하거나 선한 일을 하면 시기 질투하고,
이웃이 주님께 칭찬받는 것을 시기 질투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겁니다.
어쨌거나 오늘 얘기를 남 얘기처럼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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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적 설교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2월 25일 화요일 (호명환 번역) 아홉 번째 주간: 라인랜드(독일)의 신비주의자들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씨앗은 자라나 빛을 냅니다.
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는 독일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소개해 줍니다:
서구의 모든 신비주의자 중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토보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과 다시 하느님에게서 세상으로 나가는 여정을 더 심오하게 표현한 사람을 찾기란 힘들 것입니다. 그의 영성은 열정과 동정의 영성입니다. 도미니코회 형제요 설교가였던 에크하르트는 1260년에서 1329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깨우침이 우리에게 정의의 구현과 이 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이끌어 주는 동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자신이 설교한 바를 실행한 사람입니다.... 두 가지 예를 들자면, 첫째로 그는 14세기의 여성 운동이었던 베귄 운동을 지지해 준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농부들을 도운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설교 중 절반은 당시 농부들 방언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가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농부들이 모두 "귀족"이나 "왕족"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의 심장부 그 자체이자, 창조 영성에 대한 성서 전통의 심장부입니다. 인간들은 신적인 권능과 아름다움의 축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고귀한 인격성을 특징지워 주는 정의 구현과 동정 어린 책임감의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그토록 깊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으며, 또 우리의 책임감을 그토록 깊이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우리의 의식함과 우리의 깨어남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것, 혹은 "겉뿐인 자아"에서 참 자아 혹은 "내면의 자아"로 옮겨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내면의 자아가 과연 누구일까요?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논문집 "귀족에 대하여" 혹은 "왕족에 대하여" 안에 이 질문에 답합니다.
폭스는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내면적 인간은 하느님께서 신적 유사함과 모상의 씨를 뿌리신 땅이며, 하느님께서 좋은 씨, 즉 온갖 지혜와 모든 기교, 모든 덕, 모든 선을 뿌리신 땅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적 본질의 씨앗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좋은 나무는 언제나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열매를 절대 맺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의중에 두셨던 좋은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는 선을 갈망하고, 선을 향해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만일 이 씨앗이 선하고 현명하고 근면한 농부에 의해 관리된다면 그 씨앗은 하느님의 씨앗으로서 하느님을 향해 더더욱 잘 자라날 것이고, 그 열매도 하느님의 본질에 맞는 모습으로 열릴 것입니다. 배나무의 씨앗은 배나무로 자라나고, 개암나무 씨앗은 개암나무로 자라며, 하느님의 씨앗은 하느님으로 자라납니다.... 이 씨앗이 너무 많이 뿌려져서 숨겨진 것이 생겨 경작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씨앗은 절대 제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씨앗은 자라나고 빛을 비추고 빛을 내고 불타오르고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폭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이 씨앗을 경작하고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기에,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은 성장하고 자라나고 번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여정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 영적 여정의 과정에서 우리 모두 안에 있는 하느님-씨앗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물도 주며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남편 더그(Doug)는 뇌출혈을 일으킨 후 신체적으로 약해졌고, 말하는 것도 어눌해졌습니다. 그는 조용히 앉아서 고요한 기도를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일종의 평화와 만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그는 그의 삶 대부분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데 할애하였습니다. 내과의사인 그는 누구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를 의사라고 부르지 말고 "더그"라고 부르라고 고집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다양한 배경과 종교 그리고 문화의 사람들이 수 백명 참석하였는데, 대개는 더그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준 이들이었습니다. 신비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일부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더그는 그에 대한 대표적인 본보기일 것입니다.
—Ann F.
Matthew Fox, Passion for Creation: Meister Eckhart’s Creation Spirituality; Selections from Breakthrough (Doubleday, 1995), 1–3. Fox’s full translation is in Breakthrough: Meister Eckhart’s Creation Spirituality (Doubleday, 1991), 510–51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gustin Fernande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과 더불어 이 땅의 식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우리도 이 위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관문에 발을 들여 놓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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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언제나 초심으로~~~
2025.02.26. 05:4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루카 복음에도 같은 같은 내용을 전하면서 '주어'만 바꾸어 똑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듯이, 루카 복음 다른 곳에서는 이 말씀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마태 12,30).
그러나 이 두 가지 상황 안에는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 상황 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상황(오늘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사람들이(루카 복음, 마태오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라고 꼭 집어서 말함) 예수님더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판하지요? 그때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말씀과는 상치되는 듯한 말씀입니다.
이 두 상황에서의 두 번째 공통점은 두 상황 다 마귀가 예수님에 의해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직접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이름]이란 존재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어떤 사람을 드러내 주는 하나의 말이 아니라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성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도 성경을 읽다 보면 이 [이름]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모세가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I Am Who I Am. 혹은 I Am Who Am.)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하느님은 존재 그 자체요, 모든 존재와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마칠 때마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하고 청하지 않습니까?! 그 전에는 이것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였는데, 바뀐 것입니다. "이름으로 빈다"는 것은 곧 그분의 존재성 전체를 통해 빈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만 히브리 사람들이 아닌 우리가 이해할 때는 '이름으로 빈다'는 것이 무슨 '주술' 같은 같은 것을 바치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었기에 본래의 의미대로 바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관점을 전제로 해서 성찰해 보면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 주셨을 때 사람들(바리사이들)이 예수님더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판하자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맥이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 즉 나를 지지하는 자"는 당신의 존재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당신을 비판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신 "내 편에 서지 않는 자, 즉 흩어 버리는 자"는 당신의 존재성을 전적으로 배척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성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19-20).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 하느님의 손가락을 하느님의 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사람들도 하느님의 손가락, 즉 하느님의 성령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이라고 확언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이들, 즉 당신을 지지하고 당신 편에 서는 이들은 삶의 여정에서 늘 깨어 있고자 노력하며 하느님 사랑의 힘을 신뢰하고, 그 사랑의 힘에 의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오늘의 화두로 삼아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에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인가?" "나는 정말로 하느님 은총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고 또 믿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초심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초심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초심이 우리의 존재의 떠받쳐 주는 든든한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것이 바로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는 유일한 근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자랑해도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구원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구원되과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일치요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선하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하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힘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우리의 잘못도, 어제의 우리의 실수도, 바로 방금 전의 우리의 몰이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니가 우리가 회개 혹은 하느님 사랑으로 전환하는 것도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내 힘으로 죄를 다시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회개는 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손가락이 아니고서는 하느님께로 돌아설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결국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궁극적인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 말씀 때문에 간과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지금 내가 육신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래서 오늘 독서인 집회서의 말씀이 저에게는 깊은 영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는 기쁨에 넘치리라!"(집회 4,12).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오늘은 (내 힘으로) 이렇게나 저렇게 살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나는 약하디 약한 존재이지만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찾으며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지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이 늘 이래야 하겠지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초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초심은 초발심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작하는 자의 자세, 즉 초보자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늘 겸허하게 인정하고 청하고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청하여 물위를 걷다가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의 부족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으면서 "내가 해냈구나!" 하고 자만하면서 물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어라고 말합니까?!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였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변화 파트너 이미현]이라는 사이트에 나오는 글이 참 좋아서 함께 나누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아껴야 할 마음은 초심입니다.
훌륭한 인물이 되고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셋째는 뒷심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음이 초심입니다.
그 이유는 초심 속에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초심에서 열심이 나오고, 초심을 잃지 않을 때 뒷심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첫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순순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배우는 마음입니다.
견습생이 품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동심입니다.
피카소는 동심을 가꾸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우리가 점검해야 할 마음이 초심입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초심을 상실했을 때 찾아옵니다.
초심을 상실했다는 것은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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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26 06:30
스마트폰에 소변이 튀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1) 손으로 쓱 문질러 닦는다. 2)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둔다. 3) 물티슈로 깨끗이 닦는다.
아마 기겁하면서 3번을 대부분 선택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방금 만들어진 소변에는 세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스마트폰 표면에서는 7,000여 종이 넘는 세균이 득실거립니다. 스마트폰이 화장실 변기보다 500배 더럽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만지는 것은 주저하면서도 스마트폰 만지는 것은 전혀 망설이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2,000번 이상 맨손으로 만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으면 당연히 변기보다 스마트폰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 판단이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이 먼 훗날 크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요. 요한은 자기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누구보다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어디에서 나오든 그 궁극적인 원천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울타리 밖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움직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세상의 역사 안에서 영적 체험을 한 많은 성인 성녀의 말씀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참 진리 안에서 참 기쁨에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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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부당한 이득을 얻지 말라. 그것은 손해와 같은 것이다(헤시오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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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앞 장면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이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인 것이지, ‘우리’라는 자신들의 양들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 9,39)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 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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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끼리끼리의 이기주의를 넘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편협하지 않고 모두를 품습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독점적이어서도, 배타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않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로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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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혼자 하는 말은 ‘독백’이고, 상대가 있는 말은 ‘대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하고 나면 기분이 좋고,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를 통해서 뭔가 문제를 해결하고, 배운 것 같은데, 다음에 또 만나고 싶지 않고, 기분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대화에서 조심해야 할 6가지 태도를 들었습니다. 이 6가지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어렵다고 합니다. 첫째는 ‘판단’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선입견을 품고 판단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리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은 들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잘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피부색으로, 외모로, 직업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곤 합니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한다면 상대방과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비난’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 학자들의 비난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왔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저도 비난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신부님들과 차를 나누어 타고 강화도로 연수 갈 때였습니다. 1호차에 탄 신부님들이 2호차에 있는 신부님들의 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휴게소에서 2호차를 타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1호차에 있는 신부님들의 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화장실 가기도 겁났습니다. 제가 없을 때 저의 허물을 이야기할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자주 입에 올린다면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비교’입니다. 자녀에게 ‘네 형을 보아라. 얼마나 잘 하니. 내 친구를 보아라. 힘든 가운데서도 공부를 얼마나 잘 하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이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입니다.
넷째는 ‘강요’입니다. 자녀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지 않고, 부모님이 원하는 걸 요구하면 자녀에게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 집안은 모두 법대를 갔으니, 너도 법대를 가야 한다.’라고 말하면 아이의 재능을 가로막게 됩니다. 부모의 강요 때문에 법을 공부하지만, 사법시험에 실패하면 부모도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강요는 당장은 효과가 있겠지만 창의력이 사라지면 경쟁력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다섯째는 ‘충고’입니다. 자녀들에게나, 부하직원에게 ‘나 때는’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아직 미혼인 자녀에게 일찍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큰 부담이 됩니다. 저는 ‘주민등록증’이 나온 사람에게는 웬만하면 충고하지 않는 편입니다. 성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운전할 때도 충고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충고를 잘못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여섯 번째는 ‘합리와’입니다.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교하고, 강요하고, 충고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네가 잘했으면 내가 이렇게 말했겠니.’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화는 상대방과 소통하는 거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며 합리화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대사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도 ‘합리화’를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국회의원들이 의회 독재를 해서 경고 차원에서 했다고 합니다. 비상계엄은 국민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했기에 계몽령이었다고 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합니다.
“지혜는 자기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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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맞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예전 영화 중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산중 마을인 동막골을 배경으로 영화의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한 사람이 동막골 촌장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촌장님! 촌락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보입니다. 또 촌장님의 말을 잘 따릅니다. 그래서 그런데…. 촌장님은 이 촌락을 어떻게 다스리고 계시는가요?’
촌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스린다고 말할 것이 있나…. 만약 있다면 잘 먹이고 또 잘 먹이는 것이지.’라고 말입니다.
촌장의 말과 주님의 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얻고, 또 좋은 일이 이루어졌다면 우리를 나쁘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통해 좋은 것을 얻었다면 그중 누군가는 우리를 도울 것이고 우리의 지지자가 되어줄 것이며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 주세요. 그 사람은 그대를 나쁘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대 쪽에 서서 그대를 지지할 것입니다.
⭐연포탕
한 교우분이 무심히 낙지를 건네 주십니다.
신부님! 연포탕 해 드세요.
머릿속으로 냉장고 안 재료들을 둘러봅니다.
배추
무
청양고추
육수
국간장
다른 재료도 있으면 좋겠지만 위의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재료를 손질하고
육수에 채소를 더합니다.
마지막으로 낙지 입장….
추운 날엔. 뜨끈한 연포탕 어떨까요?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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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지혜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사랑의 지혜뿐이다”
“주님,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넘치고,
그들 앞에는 무엇하나 거칠 것이 없나이다.”(시편119,165)
얼마전 수도공동체가 선물로 받은 책들 제목이 언뜻 눈에 띠었습니다. 어느 영성심리 상담 사제가 쓴, “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루카복음서에서 찾은 진짜 나로 살아가는 힘”이란 책이었습니다.
진짜 나를, 바로 참나를 살아가는 이들이 지혜롭고 겸손한 자들이요 내적 부요의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부단히 참나를 깨달아 발견해 갈 때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이러 지혜에 있음을 봅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지혜 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를 뽐내기 위해 세상을 걱정하는 척하지 마라. 어른의 근심은 과시가 아니라 귀감이 되어야 한다.”<다산>
읽는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과시하는 어른이 아니라, 귀감이 되는 어른임을 깨닫습니다.
“덕을 수양하지 못하고, 학문으로 사리를 밝히지 못하며, 의를 듣고도 전하지 못하고,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이다.”<논어>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공자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즉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써놓고 자족하며 나눴던 ‘바다와 산’이란 글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고 넓은 바다예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은 산이예요”
가만히 산같은 자세로 바다같은 마음으로 주님 안에 머무는 묵상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바다가 지혜를 상징한다면, 산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요 분별의 지혜도 사랑에서 나옵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의 사람’은 바로 사랑과 지혜의 사람입니다. 산같이 어진 사람이 바다같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둘이자 하나인 참 좋은 상호보완관계에 있는 ‘바다와 산’입니다. 풍수지리에서 명당의 조건중 하나가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집이 남쪽을 향하고 있을 때 북쪽에는 산이, 남쪽에는 강이 있는 것을 뜻하는데 역시 지혜와 사랑이 함께 함을 봅니다. 제 요셉수도원의 경우 배경의 불암산에 넓게 열린 전방의 푸른 하늘은 바다로 생각하며 자주 자족하곤 한적도 생각납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라는 수도좌우명도 이를 노래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사랑과 지혜를 추구하는 이상적 삶을 향한 갈망을 노래한 시입니다. 오늘 집회서 말씀도 지혜 찬가처럼 들립니다. 이 모두 역시 깊은 사랑에서 나온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지혜를 사랑합니다. 지혜를 사랑할 때, 사랑의 지혜가 되어 갑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이런 사랑의 지혜뿐입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지혜를 사랑하는 어질고 관대한 자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께 그대로 해당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옹졸하고 편협함과 예수님의 관대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스승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다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바다같이 넓은 마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랑입니다. 사랑이, 섬김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아무도 심지어는 교회도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진리를, 사랑을, 정의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누구나에게 차별없이 열려 있는 하느님의 나라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평화와 지혜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당신 구원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당신 가르침이 저의 즐거움이옵니다.”(시편119,1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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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불어 함께>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믿음은 믿음을
막지 않으며
믿음은 믿음과
맘껏 어울립니다
희망은 희망을
막지 않으며
희망은 희망과
맘껏 어울립니다
사랑은 사랑을
막지 않으며
사랑은 사랑과
맘껏 어울립니다
믿음은 믿음과
다투지 않으며
믿음은 믿음을
한껏 북돋웁니다
희망은 희망과
다투지 않으며
희망은 희망을
한껏 북돋웁니다
사랑은 사랑과
다투지 않으며
사랑은 사랑을
한껏 북돋웁니다
믿음은 믿음을
시샘하지 않으며
믿음은 믿음을
오롯이 믿습니다
희망은 희망을
시샘하지 않으며
희망은 희망을
오롯이 희망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시샘하지 않으며
사랑은 사랑을
오롯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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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마르 9,38)
위대한 보편성
구원의 세례가 가톨릭교회 안에만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그러나 가톨릭교회 밖에도 가톨릭적인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밖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그분을 따르지 않던 이도 그분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쫓았습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 안에도 가짜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세상을 끊어버리지만 행동으로는 끊어 버리지 않습니다(참조 로마 12,2; l요한 2,15 ; 5,4), 그러나 가짜는 가톨릭이 아닙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이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하듯, 가톨릭교회 밖에도 가톨릭적인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내가 여러분을 때린다면, 나는 철수나 순자, 곧 “구체적인 한 사람’을 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 자입니다. 이련 이유로 우리 주님은 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건드리는 것은 하느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이다”(즈가 2,12).
이제 나는 “모세는 그의 주 하느님께 애원했다” 라고 되풀이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달라고 애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덜 귀중한 것을 하느님께 드리려고 하며, 그것도 아주 조금만 드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가장 먼저 주시는 것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소유하면, 여러분은 하느님과 더불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하느님과 만물을 소유한 사람은 하느님 한 분만을 소유한 사람보다 못하다고 누누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에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영원 속에서는 수천 명의 천사나 한두 명의 천사나 매한가지라고. 왜냐하면 영원 속에는 수(數)가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은 수를 초월해 있습니다.(339)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2절: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전사(前史):
자진 사임 또는 양 교황의 타협의 길을 통하여 일치를 재건하려는 30년 동안의 시도가 무위로 끝난 후, 이제는 공의회만이 미해결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교회법학은 긴급한 경우를 위하여 이 방법을 오래전에 시사하였다. 그런데 중세 초기 이래 교
황은 누구로부터도 재판받아서는 안되고 - 교회의 최고좌는 누구로부터도 재판되지 않는다 - 다만 하느님 앞에서만 책임이 있다는 원칙이 점점 시행되었다. 이 원칙은 무엇보다도 황제에 의한 교황의 폐위(수트리에서의 1046년)를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암흑의 세기에 로마귀족들의 전횡도 겨냥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와 인노첸시오 3세를 거쳐 보니파시오 8세에 이르기까지 수위권의 상승 발전 과정은 교황의 지위를 점점 불가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황도 사인(私人)으로는 이단이나 정신병 등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자각되었고,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하여 교회법규에 이단 조항이 첨가되었다.
즉, 만약 어떤 교황이 이단에 떨어질 경우에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결론을 끌어낼 심의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단자가 참된 교황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교황에게서 이단이 확인된다면, 그는 이미 교황이 아니므로 교황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 확인은 공의회가 할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추기경들에게, 또는 로마 교회의 보호자로서의 황제에게도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엄격히 교황의 입장에 섰던 교회법학자들, 예컨대 「우남 상탐」 칙서에 결정적으로 관여하였던 에지디오 로마누스(+1316) 또는 아우구스티노 트리움푸스(+1328)와 알바루스 펠라지우스(+1349) 같은 보니파시오 8세 궁정의 “교황주의자들”까지도 이 원칙에 찬성하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즉 교황 없는 공의회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동방에서 비잔틴 황제들에 의하여 소집된 천 년 동안 8회의 공의회들과는 달리, 중세에는 새로운 서구형의 공의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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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더불어 만드는 세상 복음화를 /
박윤식 [big-llight] 250225. 18:29 ㅣNo.180327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이가 스승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이가 아니므로,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는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그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살레시오 소속 이태석 요한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라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지역에서 교육과 의료 봉사를 헌신적으로 펼치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는 많은 이에게 대단히 깊은 감명을 주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의 제안으로 관련 여러 종단 지도자들 약 이백여 명이 조계사에 한데 모여 이 영화를 보는 자리에서 원장님께서 그 취지를 밝히셨는데, 그때 하셨던 인사 말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찐한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영화를 우리 종무원들에게 보여야 할지를 두고 많은 고민했습니다. 영화가 가톨릭의 선교 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감동적이어서 우리들 중 몇 명은 개종하지 않을까도 생각까지 했습니다.” 순간 이 인사말은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지만, 원장 스님은 말씀을 차분히 이어 나가셨다. “불교에서 지향하는 ‘이타행’(利他行)과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천주교 신부님께서 구현했습니다. 우리 몇 명이 개종하더라도 이러한 스님과 불자들이 나온다면야 참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꼭 성불하십시오.”
참으로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어르신께서, 자신의 믿음을 떠나 허심탄회하게 옳고 선한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당신을 모르는 이들도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이라신다. 신앙인으로 살다 보면, 다른 공동체에 이질감들을 갖는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될게다. 그러나 그 이질감만으로 그들을 거부할 게 아니라, 그들과 연대하여 함께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만이, 오히려 예수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참 바른 길이리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어떤 모르는 이가 당신 이름으로 마귀 쫓는 이를 보고, 제자들이 그를 못하게 막는 것을 막지 말라 하셨다. 이는 선을 일으킨 것이 어떤 종파의 것이냐는 식의 옹졸함을 갖지 말라는 거다. 자신만이 옳다면서 타종교에 배타성이면, 인색한 하느님만을 만드는 것이니까. 우리 역시 타 종교와 비신자에게도 하느님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두자.
사도로부터 이어 온 오랜 전통과, 하느님에 의한 영생 구원설은 분명히 안아야 하겠지만, 타종교에 대한 형제적 사랑과 존중심 또한 우리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임을 예나 지금이나 결코 잊지는 말자. 사실 종교는 다르지만 믿음으로 굳건히 사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우리 주위에 쾌나 많다. 예전엔 모른 척했을지라도, 이제는 함께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도 더불어 살라신다.
아무튼 누가 선을 행하는지 보다는 행해지는 그 선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 그 행위가 명시적으로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에 공동선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이름이기에 그렇다. 진리 안에서 더불어 여기라는 말씀일 게다. 무시하며 사는 것은 은총을 막는 행위일 게다. 자신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면 시야는 좁아질 수밖에. ‘다 함께!’라는 큰마음으로 ‘세상 복음화’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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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우리 가운데 자기 집단 중심의 사고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수에게 유익한 일이나 공동선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집단이 그 선을 행하고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다른 집단을 견제하고 비난하는 이른바 진영 논리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승을 자기들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듯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견제하는 제자들의 옹졸함과 반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지지자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관용이 대조적입니다.
사실 누가 선을 행하는지보다는 선이 행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이, 공동선이 실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은 명시적으로 예수님의 일행이 아니라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이름입니다.
칼 라너가 말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그리스도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신론자라고 해도 삶으로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에 대한 가르침에 이바지하기도 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종교나 종교적 신념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복음과 예수님을 위한 실천으로 인간의 구원에 협력하는 이는 예수님께 지지자로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을 드러냅니다.
누구에 의해서든 복음의 가치가 널리 퍼져 가기를 바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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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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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는데
그가 제자들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은 그를 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말을 들으시고
그런 사람을 막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표현은
요한의 말에 있는 '따르다'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제자로서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는 예수님의 제자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행동은
마르코복음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그는 아직 듣지도 않은 제자들의 사명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으로 제자의 모습이 새롭게 이야기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속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모두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속하려는 이유도
예수님의 뜻을 보다 더 잘 알고,
보다 더 잘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한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그리고 그 안정감 때문에
때로는 그 공동체에 속해 있으려는 이유를 잊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서
우리보다 더 우리 공동체의 정신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우리에게 또다른 자극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오늘 복음의 요한처럼
질투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하지 못하는 것을
제자도 아닌 사람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제자임에도 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경우에는
그의 행동이 우리를 비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부정적인 자극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더 열심히 우리 공동체의 정신을 살아가라는
일깨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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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막지 마라."(마르 9, 39)
그 어떤 것도
고집하거나
독점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다양한 빛깔과 향기로
하느님 사랑을
드러냅니다.
우리들또한
서로의 좋은 점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장과
주장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들은
함께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니편 내편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향하는
성숙된 삶이 중요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언제나 힘들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끕니다.
사랑의 실천을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마십시오.
유대와 연대를 통한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막지 말고
응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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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집회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지혜로움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여기며
지혜를 찬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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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도 가짜는 얼마든지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삶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은 갖지 않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이들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조건 편견으로 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과 평화와 진리를 거스르는 교설을 비판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분단과 분열을 일으키고 평화를 거스르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결국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인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이기에 사랑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 안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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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왜 요즘 우리나라엔 존경받는 ‘어른’이 나오지 않을까?
며칠 전에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저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따지기 위해 찾아왔었습니다.
저를 알아서가 아니라 가톨릭 전체를 좌파 편향으로 보고 따지러 온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는 게 아니라 더 좁은 시각으로 편을 가르는 시각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나 혹은 넬슨 만델라처럼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소위 ‘어른’이 요즘에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속 좁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마귀를 쫓든 마귀가 쫓겨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넓으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포용력이 있는 어른이 될까요? 이는 유명한 예화가 떠오르게 합니다.
두 하인이 자기가 옳다고 싸우다 한 하인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말이 옳구나!”라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인이 와서 또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가 옳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당신의 말도 옳구려, 허허!”라고 웃었습니다.
이 주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대의’(큰 뜻)에 손해를 끼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컴퓨터에 깔린 안 좋은 프로그램을 제거하면 좋은 것들까지 함께 제거되어 결국엔 윈도우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안 좋은 것은 뽑아내지 말고 함께 두는 게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대의를 위해서.
19세기 초, 미국 예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사냥이
이루어졌습니다.
목축업자들은 늑대가 가축을 해치는 주범이라 생각하여 늑대를 몰살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늑대가 사라지자, 오히려 사슴과 엘크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초원이 황폐해지었습니다.
초목이 사라지자 가축들도 먹이를 구하지 못했고, 강물의 흐름까지 변하는 등 생태계 전체가 붕괴하였습니다.
큰 뜻을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다가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모두가 대의를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포용력이 전혀 없는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진 어른이 꼭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천년 된 산삼을 더덕인 줄 알고 우연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더니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고 몇 년은 더 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피가 아픈 사람도 낫고 몸도 젊어지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드릴 피를 조금 받아서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중간 관리가 “내가 당신의 피를 좀 마셔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하며 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피를 조금 마셨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하며 “임금의 것을 탐한 저자를 당장 처형하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옳으신 분이시다면 임금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저에게 준 저 사람도 함께 처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그의 현명한 말에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임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건강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훔쳐먹은 신하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당에도 그렇게 나라에도 그렇습니다.
웬만하면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영혼 구원이라는 뜻에 집중할 때만 그런 능력을 갖춘 포용력 있는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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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귀들을 쫓아내는 싸움에 중립이란 없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8-40)”
1)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사도들이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빌려 드린 사람(마르 11,5-6), 최후의 만찬 때에 방을 내준 사람(마르 14,15) 등이 그 예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또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 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요한 19,38-39).”
아마도 사도들은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함께 다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박해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숨기는 일이 훨씬 더 많았고, 신자들끼리도 누가 신자인지 아닌지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자에게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을 때 암호 같은 것을 사용했는데, 그 암호들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바로 물고기 그림입니다.
물고기 그림을 사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라는 말의 머리글자를 모으면,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2)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요한 사도가 그것을 막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에 무슨 마법 같은 힘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함부로 사용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 19,13-16).
또 요한 사도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기억하고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은, 우상숭배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을 금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우상숭배자들이 성사를 모독하는 것을 막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권한이 없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성사 집전을 한다면, 그것은 성사 모독죄가 됩니다.
요한 사도의 행동을 편협하고 옹졸한 집단 이기주의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계명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라는 계명은 ‘예수님의 이름’에도 적용되는 계명입니다.>
3) 요한 사도는 ‘좋은 의도’로 행동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라는 말씀은,
그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켰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신자라는 것을, 당신의 권한으로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과 같은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귀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쫓겨나기는커녕 그 사람에게 덤벼들 것입니다(사도 19,15).
그런데 그냥 순순히 쫓겨났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을 나쁘게 말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부인한다.’, 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부정한다.’, 또는 ‘자기는 예수를 안 믿는다고 공언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에는 중립이 없다.”, 또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싸움에는 중립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편이 아니면 마귀들 편입니다.
이 말씀을, 세례를 받지 않아도, 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반대하지만 않으면 다 신앙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그렇지만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신앙인이 되지 못했더라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착하게 살고,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하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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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어제 복음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기도가 부족하여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했던 제자들이, 그런 일을 겪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지 믿음이 깊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이 더 옹졸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는 질투심과 자격지심이 생겨서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조치를 취할 정당한 이유도 명분도 부족했기에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에 마음이 상한 요한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그 상황에 대해 ‘고자질’하기에 이릅니다. 또래 친구와의 싸움에서 진 어린 아이가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어머니에게 달려가 자기 대신 그 친구를 좀 혼내달라고 청하는 것과 비슷한, 참으로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그 사람에 대해 성토하면서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강조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 뒤를 따르는 자기들이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감히’ 우리 편도 아닌 이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수고도 고생도 하지 않는 이가 자기들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구마에 성공했으니 그 모습이 아니꼽게 보였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즉 교회에서 ‘우리’라는 특정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주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면 교회는 ‘나만 옳다’는 교만과 독선,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아니지요.
비단 교회 공동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표출되면 ‘스포츠’가 되고, 부정적인 에너지로 변질되면 ‘패싸움’이 되는 겁니다. 끊임 없이 편을 갈라 상대방을 증오하고 싸우는 패싸움은 우리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지요. 그러니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차별과 배척의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누구 편에 서는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분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와 너희라는 구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같은 믿음 안에서 구원과 참된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동료이자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팍팍한 우리 삶에 동료와 형제는 많을수록 좋지요. 그러니 편 가르고 싸우는 일은 이제 제발 그만하고 마음과 뜻을 모아 우리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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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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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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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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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연중 제 7주간 수요일.
주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의 삶
<2025.2.26> 아침을 여는 묵상 (눅 7:1~17절)
❝주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의 삶❞
❚ 겸손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순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 진정성이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1~5절).
예수님이 평지 설교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어떤 백부장이 ‘소중한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종을 낫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였습니다.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4~5절,새번역)..
백부장은 당시 식민지 나라에서 군대 100명을 거느린 로마 군대의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역에 회당을 지어줄 만큼 피지배인을 존중했고, 또한 그만큼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일개 종에 불과한 사람까지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리고 진정성 있게 종을 소중하게 대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러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세상은 그런 자들을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평등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진정성은 내가 최고로 가치 있고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에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기꺼이 제물로 바쳤을 때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뺏기고, 모든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다 잃어버려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 때문에 행복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때, 진정성 있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백부장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은 종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 속에서 그의 믿음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성이 있는 믿음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겸손함이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6~10절).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에 가까이 가셨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아뢰게 하였습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 주십시오..’(6~7절,새번역). 백부장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절)라며 그의 믿음을 극찬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겸손한 믿음이 종의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겠다는 또 다른 고백입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믿음은 결코 계급이 아닙니다.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먼저 믿었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에게는 로마의 군인으로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의 겸손한 믿음의 행동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백부장과 같은 착한 성품과 겸손함이 있는 그의 믿음을 우리 마음에 담아두고, 삶으로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함이 있는 믿음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애통함이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11~17절).
예수님은 나인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슬픔 가운데 나오는 나인 성 과부를 보셨고, 불쌍히 여기사... 친히 다가가셔서 ‘울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생명의 행렬과 죽음의 행렬이 성문 앞에서 맞닥뜨려질 때, 생명이 죽음을 삼켰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 여겼고, 그의 존재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심’의 증거라고 인정(16절)했습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속으로 울고 있을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 자신의 울음소리를 들으십니다. 스스로가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일 때, 절망적인 상황일 때 그리고 기도할 기운조차 없을 때 우리 주님은 먼저 우리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애통함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완전함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불의함에 대하여 애통해하는 눈물을 귀하게 보십니다. 진정 주님 앞에서 애통해할 때, 주님의 위로가 임하게 되고, 죄 사함의 은총과 온전한 평안을 얻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과 신령한 기쁨을 회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천국의 위로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함은 다른 사람을 위한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과 열방에 대한 애통함으로 흘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애통함이 있는 믿음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진정성이 있는 믿음과 겸손함이 있는 믿음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신실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연약한 자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므로 자신과 타인을 위해 애통함을 갖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7:1~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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