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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는 오해를 주장하기 위해
쯔빙글리가 시작한 "개혁주의 언약신학"
이지끼을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는 쯔빙글리의 주장은
재세례파의 주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재세례파(Anabaptist)는 유아세례를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세례로 여겼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무효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받는 유아세례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아세례 받은 것을 세례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고백과 의지로, 처음으로 한번, 세례를 받으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재세례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아세례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들이,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을 재세례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재세례파가 유아세례를 반대한 이유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막 16:16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아에게 적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세 카톨릭의 신부였던 쯔빙글리는 처음에는 카톨릭의 교리를 따라 유아세례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쯔빙글리와 함께 했던 재세례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이러한 반대가 더욱 거세져 봉기로 이어질 것 같으니
쯔빙글리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개발하여 유아세례를 옹호했습니다.
쯔빙글리는 두 언약, 곧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각각 시작된 두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단 하나의 은혜언약만이 있다고 생각해 낸 것입니다.
하나의 언약이므로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었던 것처럼
신약에서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세례에 관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 자신이 한때 따르던 중세 카톨릭의 신학, 루터의 신학,
그리고 재세례파의 신학 모두를 부정하는 새로운 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는 쯔빙글리의 주장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는 주장은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약의 세례가 시작되면서 구약의 할례는 멈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장은, 할례와 관계없는 이방인(Gentile)의 관점으로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할례와 세례의 관계를 이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구약의 유대인은 할례를 받았고 신약의 이방인은 세례를 받는다 라고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쯔빙글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우리와 같은 이방인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할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할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대체되었는지 아닌지 알아 보려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처음 세례가 시행된 오순절(AD 30년) 이후
유대인 기독교인들(할례자들)이 할례를 계속했는지, 더 이상 하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유대인 기독교인들(할례자들)이, 계속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제가 알기로 두 군데 있습니다.(사도행전 11:1-3절, 21:15-24절)
사도행전 11:1-3절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할례자)들이 세례(water baptism)를 받아 기독교인들이 된 날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AD 30년) 이었는데, 이날 삼천명의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등(사도행전 10장)에게 복음을 전한 때는 AD 37년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3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할례자들, 곧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베드로가 할례자로서 무할례자인 고넬료 등과 함께 먹은 것을, 곧 교제나눈 것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자신들을 "할례자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곧 이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은 "할례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오순절의 세례 이후에도
계속 유아에게 할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오순절(AD 30년) 이후, 이때(AD 37년)까지,
자신들에게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은 무할례자들입니다.
그러면 무할례자들인 자신의 아이들과 같은 집에서 생활하면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가서 한 번 교제 나눈 것을 비난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할례자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때(AD 37년)까지,할례를 계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신약의 세례가 시작되면서 구약의 할례는 멈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오순절 이후에도 유대인 기독교인들(할례자들)은 계속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행 21:15-24절을 봐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할례를 계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 21:15-24절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They have been informed that you teach all the Jews who live among the Gentiles
to turn away from Moses, telling them not to circumcise their children or live
according to our customs.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19절은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라는 말씀인데,
바울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자신의 3차 전도여행에 대한 보고를 한 것입니다.
보고를 들은 야고보와 장로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유대인 중에 믿는 자들 곧 기독교인들이 수만 명이 있고, 그들은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인데.(20절)
그들이 "바울이 외국(이방)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들었다고 말해 줍니다.(21절)
한글성경을 보면, 행 21:21절에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라고
세가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서, 모세를 배반하라고 바울이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른 거짓 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위와 같이 가르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장로들은,
마침 서원한 네 사람이 있으니 바울이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여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주라고 한 것입니다. (23-24절)
이 말씀(행 21:15-24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들이 된 후에도,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주면서 또한 자신들의 관습을 지키면서,
모세의 율법, 곧 토라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AD 59 년 경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오순절(AD 30년) 이후, 최소한 이때 (AD 59년경)까지는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계속 할례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대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쯔빙글리는 유아세례를 옹호하기 위해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개발하여
세례가 할례를 대체했다고 주장했고
칼빈 또한 세례가 할례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는데
위의 말씀들(사도행전 11:1-3절, 21:17-24절)과 맞지 않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는 주장은
곧 신약의 세례가 구약의 할례를 대체했다는 주장은
할례와 관계없는 이방인의 관점으로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할례와 세례의 관계를 이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구약의 유대인은 할례를 받았고 신약의 이방인은 세례를 받는다 라고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서 받는 마음의 할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가 가리켰던 마음의 할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는 같은 기능을 가진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는 쯔빙글리의 생각은 오해였습니다.
하지만, 쯔빙글리는 바로 이런 오해를 주장하기 위해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쯔빙글리는, 위와 같은 오해를 근거로,
막 16:16절
믿고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음과 세례의 관계를 끊고 또한 세례와 구원의 관계를 끊어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을
. . . . . . . . . .(세례를 받는다). . . . . . .
(믿음으로. . . . . . . . . . . . . . . . 구원을 얻는다) 라고 둘로 나눴습니다.
이렇게 나눠야 세례는 믿음과도 상관없고 구원과도 상관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의 경우는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고
성인세례의 경우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5백년간 개혁주의 신학은,
막 16:16절,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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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골로새서 2장 11-12절, "마음의 할례"
https://cafe.daum.net/1107/Y4PX/1415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대한 이해 (먼저 마음의 할례를 받고 그리고 세례를 받는 것인가?
세례를 통해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인가?)
https://cafe.daum.net/1107/Y4PX/1632
"세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 (세례에 대한 초대교회 교부들, 중세 카톨릭,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세대들의 이해)"
https://cafe.daum.net/1107/Y4PX/1111

@四季 朴埰同
(11)
사계님
저는 님과 토론하기 싫습니다.
님의 주장에 반박을 못해서가 아니라 님이 토론상대가 되기에는 정직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님이 쓴 글들을 보지도 않았고
보지도 않았으므로 님의 글들에는 아무런 댓글을 달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많이 댓글들을 주고 받는 것은 님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을 넣은 게시글을 쓰시니 댓글을 단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부터는 제가 무슨 글을 쓰더라도 상관하지 마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개한 것은 회원들도 아셔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양해바랍니다.
@이지끼을 <이지끼을 님, 답변 드립니다.>
이지끼을 님 글들 거의 모두가 이창모 목사 방언론을 비평한 이지끼을 님 글처럼 어지간한 인내 없이는 독해하기 힘든 문장들로 이뤄졌을뿐더러 무척 긴 글들입니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이창모 목사 방언론을 비평한 이지끼을 님 글을 읽은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것입니다. 아니, 저 혼자일지 모릅니다.
{개혁주의 마을}에서 방언 은사 토론이 2016년 10월에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이창모 목사 방언론을 비평한 이지끼을 님 글을 교정해 {개혁주의 마을}에 올리면서 이지끼을 님 글에 독자들 이해를 도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120 문도”를 더해 올렸습니다. 10 년이 돼 가는 이 일을 두고 이지끼을 님은 “님은 도대체 어떤 영을 받으셨습니까? 님은 성령이 말씀의 씨앗을 품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주장하는데, 말씀의 씨앗을 품고 님 안에 들어간 영이, 제 글을 인용하면서 조작하라고 시켰나요?”라는 엄청난 소리, 망령스러운 소리를 하셨습니다.
@이지끼을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10 년이 지난 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10 년이 지났더라도 저와 이지끼을 님이 주고받았던 메시지, 독자들이 독해하기 쉽도록 교정을 허락하신 메시지를 생각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교정을 하더라도 이지끼을 님이 의도하신 원문을 훼손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원문과 제가 교정한 교정문을 비교해 봤습니다. 제가 원문에 “120 문도”를 더했을지라도 훼손하거나 조작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시 12 사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이지끼을 님만의 해석은 이지끼을 님이 목숨을 내걸고 매달리신 문제이더라도,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10 년이 지났더라도 선후를 따져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선후를 따져봅시다.
@이지끼을
제가 이지끼을 님 허락을 받고 ‘독해하기 힘든 이지끼을 님 글’을 교정해 {개혁주의 마을}에 올렸을 때, 이지끼을 님이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120 문도가 아닌 12 사도다.’는 주장을 이미 하신 때였습니까? 이 주장을 이미 하셨는데, 제가 “120 문도”를 넣었습니까?
“님의 말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님은 남의 말을 인용하면서 조작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님 안에 들어간 영이, 제 글을 인용하면서 조작하라고 시켰나요?” 이런 소리 함부로 하는 것 아닙니다. 제발 정신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지끼을 <이지끼을 님, 감성팔이 그만하십시오.>
이제 보니, 댓글들을 많이 남기셨군요.
재세례파가 피해자입니까? 그 당시 재세례파는 피해자가 아닌 법을 위반한 죄인, 피고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인혁당 사건처럼 조작에 따른 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재세레파가 조작에 따른 죄인들이었습니까? 침례교는 그들 죽음 두고 순교라고 하겠지만, 저는 체제 전복의 내란죄를 저지른 죄인으로 봅니다.
칼빈 선생님을 “제네바의 독재자, 제네바의 살인마”로 음해하는 자들은 세르베투스 죽음을 순교를 보겠지만, 그를 피해자로 보겠지만, 제 관점에서는 제네바 체제 전복을 노리고 제네바에 침투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지끼을 <이지끼을 님, 이제 보니 저주까지 하셨네요.>
세례 요한 제자들이 바울 사도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을 두고는 복잡한 문제이니, 한 가지만 짚고 넘어 갑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기독교 세례와 그 본질에서 다르다면, 무엇이 발생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받은 세례는 무효가 됩니다. 우리 부활과 영생을 낳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의’가 사라집니다. 물론, 이지끼을 님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시니 큰 상관은 없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기가 막히는 엉터리 해석들인데, 사계 님이 보기에는 정통적인 해석들로 보이시나 봅니다. 이런 엉터리 해석들로 개혁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님은 자랑스러우신가 봅니다. 위와 같은 엉터리 해석들로 재세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그들을 죽게 했는데, 님은 그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위와 같은 해석들이 옳다고 계속 두둔하시면, 제가 보기에는, 재세례파들이 흘린 핏값을 함께 치르실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 봅니다.”???
@이지끼을
“위와 같은 엉터리 해석들로 재세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그들을 죽게 했는데,”??? 재세례파가 세례 문제나 유아 세례 문제만으로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가 내란범들인 재세례파들이 흘린 핏값을 함께 치를 일 없습니다.
부탁드리는데, 음해 그만하십시오. 그리고 저주까지 하셔서 적습니다.
불후의 바보, 이단 박창진 씨와 같은 벽창호 짓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이지끼을 <피해자 코프레스 그만두십시오.>
“이번에 이렇게 많이 댓글들을 주고 받는 것은 님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을 넣은 게시글을 쓰시니 댓글을 단 것입니다.”???????
제가 시작했습니까? {도르트 신조}를 고백하는 카페에 {도르트 신조}를 부정하는 글을 올리신 이지끼을 님이 시작하신 것 아닙니까? 이지끼을 님이 먼저 도발하신 것 아닙니까?
피해자 코프레스가 있으셔서 적습니다. 구원의 서정을 뒤바꾸는 재주와 함께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꾸는 재주가 있으셔서 적습니다.
신본주의 화란 개혁신앙 선조들께서 ‘군대를 조직해 내란을 일으킨, 인본주의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 후예 알미니안들’에게 학살을 당할 위기에서, 하나님 기묘한 섭리로 건짐을 받으신 화란 개혁신앙의 선조들께서 피땀으로 세우신 신조가 {도르트 신조}입니다.
@이지끼을
그런데 {도르트 신조} 건물에 강도가 긴 칼을 차고 들어왔습니다. {도르트 신조}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해치고 {도르트 신조} 건물을 난장판으로 만드려는 목적을 가진 강도입니다. 물론, 그 강도는 ‘인본주의 펠라기우스와 세르베투스와 알미니우스 후예’인 강도입니다. 또한 ‘뮌스터 내란 폭동’ 후예입니다. 그 강도를 발견한 저는 가만히 보고 방관해야 할까요? 칼을 방어할 수 있는 몽둥이를 찾아야 할까요?
그 강도가 한 사람을 해치려는 순간, 저는 몽둥이를 휘두릅니다. 제 몽둥이에 뒤통수를 맞은 그 강도는 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세상 법정은 그 강도인 이지끼을 님이 피를 흘렸다는 까닭으로 저를 가해자로, 이지끼을 님을 피해자로 판결할까요?
적반하장 그만두십시오. 저를 저주하신 것, 그 저주는 저에게 합당치 않은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이지끼을 님에게 돌아가야 하는 저주입니다.
저를 저주하신 것, 하나님께 회개해 핏물을 씻으십시오.
@四季 朴埰同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시네요
"10 년이 지난 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10 년이 지났더라도 저와 이지끼을 님이 주고받았던 메시지, 독자들이 독해하기 쉽도록 교정을 허락하신 메시지를 생각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하셨는데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저의 글을 바꿨겠지요? 안그렇습니까?
저는 그때 이미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120 명이 아니라 12 사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제가 방언 연구하신 것은 아시지요?
방언연구의 끝이 바로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120명이 아니라 12 사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저의 글을 "120문도"라고 교정하는 것을 허락했다고요?
간단하게 거짓말을 하며 넘어 가려는 것을 보니
어떤 영을 받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