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31
11월4일[성 가를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연중 제3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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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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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2mBvhjYNTE
[의정부교구 김정일 안드레아(대신학교 지성양성 의정부교구 대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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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같이 식사합시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 어린 시절 걸인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다리 밑 같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 좀 주이소!’라고 외쳤습니다. 재수가 좋아 마음씨 좋은 마나님을 만나면 밥과 반찬을 좀 얻어서 대충 요기를 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기쁜 날은 혼례 날이나 회갑, 칠순 잔칫날이나 아니면 상이 난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잔치의 주인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오가는 행인들이나 걸인들에게도 넉넉한 한 상을 차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인들은 나름 달력을 하나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 잔칫날을 미리 메모해서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식사 한끼 함께 나눈다는 것, 별것 아닌 듯 하지만 엄청난 위미를 지닙니다. 식사를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주로 가족들과 함께 합니다. 살짝 범위를 넓히면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과 마음 편히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식사(食事)에는 아주 큰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잔치나 축제 때에는 ‘ㄷ’자 모양의 식탁이 준비되었고, 3면에는 의자가 놓였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으로는 종들이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포크나 나이프같은 식사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기에,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식사 전후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별도의 개인 접시는 준비되지 않고, 큰 그릇에 빵이나 요리가 담겨나오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스프나 국은 빵에 적셔 먹었습니다.
잔치집에서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큰 친밀함과 친교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잔치상에 이왕이면 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3~14절)
사실 과거 유다인들에게 있어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될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규정으로 인해, 당시 장애인들이 받았던 싱처와 고통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지체장애인들은 꿈란 공동체에 편입될 수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바오로 사도께서 크게 분노하신 흔적이 서간 안에 남아있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경우, 만찬 식탁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벌어졌습니다. 폭식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코린토 전서 11장 20~22절)
잔치집 식탁에서 벌어지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직접 보신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초대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심없는 봉사를 실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심없는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라는 은혜로운 선물이 상급으로 부여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피안(彼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부단히 이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 고정시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때가 오면 약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약함은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힘에 의해 큰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고 부족해보이는 사람들이 내적,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훨씬 부유한 능력자 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을 강하게 해주시고, 신앙의 빛은 그들에게 참 지혜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도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피정 센터가 가장 환대하고 극진히 모셔야 할 첫 번째 VIP 손님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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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BDhl9zpO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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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갚을 수 없으므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보답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습니다. 선행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못했다면 부모는 10배로 더 칭찬해 줍니다. 우리가 선행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자선 활동은 그의 거대한 부와 성공에서 비롯된 ‘책임감 있는 부의 사용’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 철강산업을 이끌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는 결국 역사상 가장 큰 자선 활동 중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평생의 재산을 교육, 예술, 도서관 건립, 과학 연구 등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자선 활동으로는 미국 전역에 약 2,500개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한 것과 카네기 멜런 대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자선 활동이 단순히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여러 건물과 기관을 설립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기억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카네기 홀(Carengie Hall), 카네기 재단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그의 자선 사업은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남기려는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의 자선 활동은 한편으로 그가 축적한 부의 이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네기는 대규모 철강 회사인 카네기 스틸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극도로 착취했습니다. 그가 철강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는데, 그는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을 강요하며, 심지어 무력으로 파업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쌓은 부가 진정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자선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카네기는 평생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지만, 그의 자선 활동은 여전히 자기 명성 추구와 도덕적 갈등이라는 논란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자선가’와 ‘냉혹한 자본가’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기업가들이 제일 존경하는 롤모델로 꼽을 때 앤드류 카네기보다는 찰스 피니(Charles ‘Chuck’ Feeney)가 많습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자신들이 기부하게 된 롤모델로 주저 없이 척 피니를 듭니다.
피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며, 그의 삶과 자선 활동은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 간호사로,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고 항상 남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은 어린 피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신의 부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남을 도울 때 가톨릭 신자답게 자신이 한 행동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어린 피니가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다운 선행은 드러내는 게 아니야.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잖아.”
피니는 성인이 된 후 듀티 프리 쇼퍼스 그룹(Duty Free Shoppers Group)을 공동 창립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과시하지 않고, 철저히 검소한 삶을 살며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기(Giving While Living)’라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하기 위해 1982년 애틀랜틱 필랜스로피스(The Atlantic Philanthropies)를 설립하고, 교육, 과학, 의료 분야에 약 8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피니의 기부는 대부분 익명으로 이루어졌고, 1997년 우연히 나라에서 감사받게 되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집과 차도 없었습니다. 집도 임대 주택이었으며 시계도 2만 원짜리, 비행기도 이코노미석만 탔습니다.
그가 이렇게 살면서 행복했을까요? 피니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다면 불행하다.”라고 말하며,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의 행복의 원천임을 강조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럽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굳이 자선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부러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어머니가 보고 계시고 하느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플 때 부모는 그 아픈 자녀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도 보상받지 못한 선행에 대해 직접 당신이 나서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 맛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선행을 알림으로써 성령의 보상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됨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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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알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아름다움이 관련된 감정이나 개념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아름"은 "너그러움" 또는 "품격"을 의미하는 옛말로, 넓고 포용력이 있는 아름다움을 뜻했다고 합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외형적, 내면적으로 훌륭하고 고귀한 것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주로 자연경관, 사람의 외모, 마음씨 등 다양한 상황에서 긍정적이고 감동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름다움은 시각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의 따뜻함이나 인격의 훌륭함과 같은 내적인 측면도 강조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아름답다"라는 말은 단순한 외형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과 본질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발전한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많이 노력합니다. 성형, 피부, 보톡스, 화장품, 운동, 다이어트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방법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내면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사람, 지난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김민기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람’의 가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꽃, 별, 구름, 개여울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천진한 아이의 웃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 하루 일 마치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 이상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겁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사제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의 글에 진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묵주 반지도, 시계도 끼거나, 차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묵주 반지나 시계를 선물해도 도로 주면서 대신 기도할 때, 시계를 볼 때 사제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손에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해 줄 때, 반지나 시계가 먼저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온전히 성체를 먼저 볼 수 있도록 시계나 반지를 착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이 미사를 정성껏 집전하시니 좋습니다.’라고 말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부족함에도 미사를 정성껏 집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생의 마지막 미사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부모님의 장례미사라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사제가 봉헌하는 미사는 비록 사제의 인품이나, 사제의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성사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성사가 된다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으므로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하객들에게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가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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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2-14: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바로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형제애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 하신다.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며,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다. 이 지상의 삶에서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이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뜻에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잘 사용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매 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을,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더 큰 성숙을, 기쁨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랑과 봉사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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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지역에서 암브로시오 성인과 함께 크게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이 활동하던 때 교회 밖으로는 프로테스탄트가 부흥하고 있었고, 교회 안으로는 부패와 불의가 넘쳐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가롤로 성인은 밀라노 주교로서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교회를 쇄신하고자 민감한 문제들도 두려움 없이 다루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무질서하고 나태해진 것이 무지하고 게으른 성직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성직자의 윤리와 생활 태도를 개선하고자 힘썼습니다. 성직자 교육을 위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평신도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서도 애를 썼습니다. 또한 교구와 본당 운영에 대한 행정 체계를 재조직하고 사목 방문을 정례화하였습니다.
과감하고 엄격한 방식의 개혁은 당대 권력자들과 교회 내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 들에게 반발을 샀습니다. 이러한 반발에도 흔들림 없이 개혁을 실행하여 교회의 쇄신을 이룰 수 있게 한 덕목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주교 문장을 “Humilitas”(겸손)로 삼을 정도로 이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겸손함을 인정하고 존경할 정도였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이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롤로 성인은 세상에 올바른 신앙과 윤리적 생활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가 그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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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편 가르기와 차별 대우는 ‘큰 죄’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ㄴ-14)
1)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참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편 가르기’ 라는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2)
부자들끼리만 어울려서 배불리 먹고, 가난한 이들은 배고픈 상태로 소외된다면, 그것은 공동체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라는 말씀은, 그들‘만’ 부르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보답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지 마라. 보답을 받을 생각으로 베풀지 마라.”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그들‘도’ 초대하라는 뜻입니다.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소외계층 사람들을 ‘먼저’ 초대하여라.”, 또는 “함께 초대하여라.”입니다. <‘나중에’는 결코 아닙니다.>
내가 부유한 이웃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함께’ 초대해서, 나의 집에서 그들이 모두 함께 어울리고, 함께 기뻐하게 된다면?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나의 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부유한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차별이나 소외 같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3)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는,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겠지만, 너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소외계층 사람들을 초대한 일은 ‘의로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로운 일’을 실행한 사람들은 의인들이고, 의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일 하나만으로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고, 진짜 의인이라면 평소에 늘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사랑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실천하기’입니다. 내가 차별을 당하고 소외당하는 입장에 있다면?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모습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한 마음과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모습인가? 베푸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형식적으로 조금 하고 나서, 자기들은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지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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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만일 누군가에게 맛있는 식사를 한 끼 대접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누구를 초대하고 싶은지 떠올려 봅시다. 그동안 이래저래 신세를 져 온 은인들이 아닐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움을 준 형제나 친척, 업무와 관련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직장 동료,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조언해 준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한편 내가 잘 보여야 할, 또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 상사, 영업에서 매우 중요한 고객, 존경하는 스승님, 그 밖에도 사회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위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상호적 관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을 받았으니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또 무엇을 받을 기대감에 먼저 주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은 그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일 뿐, 그에게 무엇을 주거나 베풀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우리식으로 바꾸어 봅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하지 말고, 오히려 보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곧 ‘나와 상관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주문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논리에 따르면, 보답이 예상되는 초대는 그 보답을 받음으로써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보답은 더 크고 유익하므로, 차라리 그것을 얻고자 현세의 보답을 포기하는 편이 훨씬 복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이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 결과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느님 나라의 보상 점수는 그렇게 계속 쌓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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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우리가 잔칫상에 초대할 사람은>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기를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끼리, 또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려고 하는 사회적 흐름이 강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른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네들 수준과 맞는 친구들끼리는 잘 지내지만 처지가 전혀 다르다거나 자기들보다 뒤쳐지는 친구는 소위 왕따시켜버리는 경우들을 봅니다.
왕따를 시킬 뿐만 아니라 주변을 힘겹게 만드는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이 바른 모습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들을 과연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그에 대하여 오늘 복음은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한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하면서 평상시에 친분이 있던 친구들과 형제들, 또 친척들만을 초대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늘상 자기들끼리 왕래를 하면서 내가 한 번 내면 다음 번에는 네가 한 번 내는 식의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잔치에 초대했다는 자체가 아주 큰 파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끼리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초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위기와 아랑곳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계시지요.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지 말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같이 소외된 사람을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그것을 갚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주고받으며 지내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대하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하겠는가를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편한 이웃들을 만나 친하게 왕래하며 지내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런 극단적인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친구들과 즐길 줄만 알았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나눔이나 베풂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나누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그리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죽은 후에도 빛이 되고 우리의 죄를 보속해 줄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이웃에 대해 얼마나 내 것을 나누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사회입니다.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가치관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잘난 사람들끼리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또 가난하고 삶이 힘겨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능력이 그것뿐이라고 비하하며 자기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외면하지요. 이는 너무나 복음적이지 않은 삶의 태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는 우리 사회는 참으로 비복음적이며 신자들 역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며 친교를 맺는 일이 해서는 안 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또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성당 공동체에서조차도 그들을 배척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 구역 사람들끼리만 모임을 만들고 친교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도 복음적이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배려하며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차별 없이 대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이웃을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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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끌리고, 나하고 관심과 취미가 맞는 사람과 어울리기 마련입니다. 남녀가 서로의 차이를 매력으로 느껴 평생의 동지가 된 부부도 있겠지만, 그 서로의 다름이 쉽게 상처가 되고 다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나 우리 시대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하며 친교를 다지는 일은,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그도 나에게 잘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고, 밥을 한 번 사고, 선물을 줄 수 있는 여유도 그와 관계를 이어 가면서 내가 얻게 될 보답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꼭 그것이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더라도 정서적인 위로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쉽게 끊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관계의 정석을 깨십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조건 없는 나눔과 베풂이고, 그 사랑의 행위 자체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들은 결코 나의 호의를 같은 방식으로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 보답은 못해도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칭찬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진정한 사랑의 소통을 이룹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기심이나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남을 돌볼 것을 바라십니다. 오늘날 혼례와 장례 때 부조를 하는 일이 마음의 진정한 표현이 아닌, 채무 형태로 바뀌는 세태를 생각하면, 내 주변에서 정말 힘든 이웃과 애정과 동정을 나누는 일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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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14,13)
오래전 성악가 김청자님은 정년퇴임을 하고 아프리카 말라위로 떠났습니다. 그곳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아이들을 돌보고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음악적인 탈렌트를 바탕으로 그들에게 봉사하며 인생 2막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뿌린 결실과도 같은 「루수빌로 희망 밴드」를 이끌고 귀국해서 음악회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인터뷰에서 그녀는 담담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장 많이 받은 자가 가장 많이 나누어야 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저는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기에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달려온 길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완전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마음도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영혼인 듯싶어서 부러움마저 듭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그녀는 실행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우리의 초대를 받고, 그 보답으로 우리를 다시 초대할 수 없겠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베푼 모든 것은 그들을 대신해서 의인들이, 아니 하느님께서 훗날에 보답해 주신다고 암시하십니다. 사실 우리네 삶의 경험으로 볼 때, 보답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게 축복이고 행복이라고 봅니다. 예전 베트남에서 양성지도자로 생활할 때, 제가 살았던 수도원 인근의 심신 장애우들을 매년 성탄 때 초대해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함께 식사했었죠. 가난한 이들을 초대한다는 것은 많은 음식이나 선물을 준비하고 초대하는 것도 좋지만, 닫힌 문을 열어 집을 개방하고 들어오고 싶었던 수도원의 손님으로 초대받았다는 사실과 수도자들과 함께 미사도 봉헌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고자 하는 저희 수도자들의 따뜻한 마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나눔으로 정작 큰 기쁨과 행복은 초대받고 환대받은 그들보다 오히려 베푼 저희 자신들이 더 행복했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가장 큰 기쁨은 자신들이 받은 음식이나 선물보다 자신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해 주고, 자신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함께 공감해 주려는 저희의 마음이었으리라 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이 저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어떤 사람을 초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초대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정치적이다, 고 말하더군요. 그러기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행위의 이면에는 허기진 이해득실을 동반한다고 말입니다. 이 경우 초대는 향응이며 대접입니다. 이처럼, 대인관계에서 초대와 초대의 수락은 이러한 이해득실의 계산에 기초합니다. 이런 초대는 복음적 초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에서 기인한 초대는 아무런 계산도 없이,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사랑을 필요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거나 보답받기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는 것이고 나누는 것이며,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나눔은 본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상적인 사랑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식탁에 초대한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되받기 위해서나 보답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저 공짜로 무상으로 베푼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의 정신이 우리들의 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김청자 교수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에게 나이 들어가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아름다운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를 실제 자기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받은 것을 움켜 지지 않고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러기에 줄 수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아낌없이, 대가 없이 베푸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먹는 것이 남는다는 표현처럼 베푸는 것이 사실 인생에 남는 것입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갈 인생살이 베풀면서 하늘에 보화를 쌓아둡시다. 그날에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맡기면서.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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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건축가는 건물을 만들지만, 완성 후에는 집주인에게 열쇠를 내주고 떠납니다.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정작 그는 제때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기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잘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직업이 바로 이런 모순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남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과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누구 때문에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분이 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나는 손님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이제는 자기 일이 싫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리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어느 청년이 어느 유명 식당에 취직했습니다. 이 식당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서 성장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요리사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했습니다. 신입이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선배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이 청년을 혼냈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요리 자체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 청년의 행동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먼저 모든 일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싫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 때, 자기가 사랑하던 일조차도 싫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더구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에서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원래 이런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뿐이 아니라 사람들이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소외받는 사람도 따뜻한 손길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들에게 보답받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 보답받는다고 하시지요.
우리 삶에서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미워할수록 하느님께 받는 보답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큰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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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초대>
루카 14,12-14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초대>
너의 것을
초대하였더니
너의 것을
가진
너마저도
오지 않더니
너를
초대하니
당신 닮게
널 빚으신
하느님께서
함께 오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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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으로 나설 때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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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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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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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이타적 사랑의 삶>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 131,3)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에 대한 간소한 삶에 대한 소개에서 성숙한 일면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술도 안마시고, 커피도 끊었고, 여행도 거의 않는다. 좋아하는 이들과 대화하고, 동네를 산책하고, 차를 마신다. 그의 삶이 더 좋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삶이 흥미롭고, 행복하고, 가치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에도 견주지 않고, 존재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는 삶, 과잉의 시대에 갇힌 우리는 간소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저항이 되지 않을까?”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성화의 여정을 택하여 하루하루 본질적 깊이의 단순한 삶을 사는 것도 지혜이자 행복입니다. 옛 어른의 지혜입니다. 마음공부는 성인공부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마음공부란 본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방향을 나은 쪽으로 돌리려는 노력이다.”<다산>
이래서 성화의 여정에 결적적 도움이 되는 마음공부입니다.
“욕심이 적다면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잃는 것이 적고, 욕심이 많다면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더라도 보존됨이 적다.”<맹자>
무욕의 지혜입니다. 욕심은 부단히 진리추구의 청정욕으로 전환시킴이 지혜입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평신도 시절 22세 교황청의 강력한 신임을 받았으며 교황이 된 비오 4세 삼촌은 그를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임명합니다. 교황 비오 4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 그는 강력한 교황 후보직을 내려놓고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주교문장의 "겸손(humilitas)"이란 말마디 그대로 겸손히 그의 책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교회차원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했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진정한 종교개혁과 쇄신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주교좌 성당안에 있던 화려한 무덤들과 부유한 장식품들, 깃발 등을 사치로 규정하여 철폐함으로 성당 내부를 간소화했으며, 당시 교회가 무질서하고 세속화된 이유가 성직자들의 무지와 무능에 기인함을 깨달아 훌륭한 성직자들의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합니다.
주술과 이단과의 싸움에 온힘을 다하면서 교회를 수호했고, 말년에는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귀족들이 흑사병을 피해 모두 도망쳤을 때도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병자들을 보호하고 치유하는데 온힘을 다했고 밀라노도 평온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보로메오는 오랜 극기와 과로로 소진되어 1584년 11월3일 밀라노에서 46세로 선종합니다.
“주님, 저는 여기 대령했나이다.”
주교님이 선종하기전 마지막 남긴 임종어입니다. 평생을 주님 앞에서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제 요즘 애송하는 단풍물든 장엄한 불암산을 보며 쓴,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짧은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주님앞에서의 행복한 삶이면 참 좋겠습니다. 보로메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1610년 11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성됨으로 그의 성덕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입증됩니다.
오늘 복음이나 독서 말씀도 주님 중심의 이타적 삶을 추구하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서로 주고받는 유유상종의 세속화된 이기적 삶이 아닌 온전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아낌없이 나누는 이타적 아가페 삶을 살라 하십니다. 보로메오 성인도 이런 사랑으로 사목했음을 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말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발적 이타적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도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누며, 같은 마음, 같은 사랑을 지니고, 서로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는 사랑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권고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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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일치와 친교를 원한다면>
오늘 독서는 필리피 교회 신자들에게 하는 바오로의 간절한 권고인데 내일 듣게 될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의 서문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일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듣게 될 텐데 그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고, 그렇기에 이 공동체는 가장 완벽한 일치와 친교를 사는 공동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치와 친교를 사는 공동체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점에 주목합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라고 하는 점 다시 말해서 ‘하라’가 아니라 ‘받으라’라고 하는 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였다면 이것은 인간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인간적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라고 하니 이는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 받기보다 그리스도에게서 받으라는 것이고, 혹 인간의 위로와 격려를 받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라는 뜻이 됩니다.
위로와 격려를 우리가 서로 나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서 받으려고 하면 받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받더라도 그 위로와 격려는 충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서 충분히 받지 못할 때 구차하게 계속 인간에게 매달리지 말고 즉시 주님께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옛날 제가 관구장 할 때 공부 때문이나 선교 때문에 외국에 있는 형제를 방문하면 혼자 있는 형제들이 둘이 있는 형제들보다 더 잘 지내곤 했는데 그것은 그가 의지할 사람이 없기에 힘들 때마다 주님께 위로와 격려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둘이 있는 형제들은 위로와 격려를 서로 받으려고 했는데, 둘 다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서로 받으려고만 했기에 서로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으며 그래서 서로 미워했지요.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서’를 얘기한 바오로는 ‘성령 안에서’를 얘기합니다.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쉽게 얘기해서 계 모임 같은 친교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성령 안에서 친교와 사랑을 나눠야 완전한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지 계 모임 같은 친교와 사랑을 나누면 끼리끼리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로 겸손할 것을 얘기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겸손한 마음, 이것이 내일 우리가 보게 될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친교와 일치를 살게 하는 우리 인간 편의 덕목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장 노력해야 할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 곧 가난한 자기를 아는 겸손에 늘 머물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그리스도의 겸손을 닮으려고 무진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노력에 상응하는 보답을 은총으로 주실 것입니다.
사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 덕이고 사랑은 완성의 덕입니다. 겸손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덕도 쌓을 수 없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은, 시작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친교와 일치도 근본으로부터 불가능하게 됨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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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영원한 생명!>
오늘 복음(루카 14,12-14)은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너무나 힘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마음)이 예수님의 생각(마음)과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너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더 높아지고 싶고, 더 소유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감추고, 더 낮아지고, 더 비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잘 아는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고 싶은데,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에게 보달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참으로 우리의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다른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이 부활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ㄴ) 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 생각을 죽이고,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가는 이유는 영원한 생명 때문입니다. 죽음 저 너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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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 13)
예수님의 초대는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향합니다.
예수님의
첫자리에
소외된 이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교감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가장 필요한 교감은
언제나 정직한
사랑임을 만납니다.
누구도 폄하하고
침범할 수 없는
예수님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삶이
어떠해야할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이 됩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이렇듯 지고지순한
사랑의 초대임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하루되십시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맞이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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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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