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길
원제 : One Potato, Two Potato
1964년 미국영화
감독 : 래리 피어스
출연: 바바라 바리, 버니 해밀턴, 리처드 멀리간
해리 밸레버, 마티 메리카, 로버트 얼 존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미국사회의 흑백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 부터일 것입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스타배우인 시드니 포이티어는 이미 50년대에 '흑과 백' '흑아' 등의 영화를 통해서 인종문제 영화 전문 배우역할을 했는데 60년대에 출연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 '밤의 열기속에서' '푸른 하늘' 같은 영화들은 흑백인종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물의 대표작들입니다.
이 외에도 그레고리 펙 주연의 '앵무새 죽이기/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이나 '엉클 톰' '슬픔은 그대 가슴에'같은 영화들이 인종문제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1964년에 만들어진 '이별의 길'은 우리나라에 개봉된 작품으로 독립영화에 가까운 소품이고 유명배우가 등장하지 않고, 오락성도 높은 영화는 아니지만 보기 드물게 국내에서 상영된 작품입니다.
'이별의 길'을 보기 전에 이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아이를 빼앗기는 내용' '흑인 차별 내용'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대략 그런 소재인 만큼 어떤 내용으로 전개될지 짐작이 갔지요. 영화를 막상 보니......예상과 크게 벗어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뒤집어 볼 여지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처절한 비극이었지만 오히려 '희망적인 세상'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뒤집어 볼 수 있었습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줄리(바바라 바리)라는 이혼녀가 5살짜리 딸을 혼자서 힘겹게 키우고 있었는데 나름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프랭크(버니 해밀턴)라는 흑인 남자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지고 둘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합니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지만 어느날 줄리의 딸 엘렌의 친 아빠인 조(리처드 멀리간)가 나타나게 되고, 조는 친딸이 흑인의 가정에서 자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소송을 제기하여 양육권을 빼앗는 내용입니다.
일종의 우리나라 신파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나 '사랑하는 사람아' 처럼 가련한 한 여인이 금쪽같은 아이를 빼앗기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좀 더 내면을 들여다보면 뒤집어 볼게 많이 있습니다.
우선 이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의 위상이 다른 흑백차별 영화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여주인공 줄리가 좀 특별해서 흑인을 사랑한 것이라고 쳐도, 프랭크 역시 흑인이지만 나름 좋은 직장에 다니고 오너 드라이버이며 백인 친구들도 제법 있습니다. 특히 프랭크가 백인절친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여럿이 춤을 추는데 함께 어울리는 장면은 나름 위상있는 흑인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줄리의 딸 엘렌이 노는 놀이터에 보면 흑인 아이도 섞여서 있는 장면이 보입니다.(물론 아주 소수지만), 프랭크의 부모도 나름 농장으로 성공한 흑인입니다. 즉 노예해방 이후에 심하게 차별받았던 흑인들이 나름 사회에 진출하고 극복해나가고 있는, "느리지만 바뀌어 가는 사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악역 포지션이어야 할 줄리의 전남편인 조의 역할도 의외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오랜만에 나타난 조가 친딸인 엘렌과 놀이를 하는 장면이 꽤 오래 나오는데 아마도 아이와 노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장면중에서는 역대급으로 길고 디테일합니다.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가족영화에서 아버지가 자녀와 이렇게 세심하게 놀아주는 장면이 보여진 것은 드물었습니다. 즉 조는 딸에게 꽤 자상하고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입니다. 더구나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된 것은 1965년이었습니다. 당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던 부모를 둔 아이들이나 자녀를 둔 남자라면 이 장면이 어떻게 와닿았을까요? 제법 길게 전개되는 이 장면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도 했던, '가장'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우리나라 아버지들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업는 장면이었습니다. 옛날 한국영화에서 자녀와 이렇게 놀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적이 있었던가요? 이 장면 하나만으로 이 영화는 한국 가장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주인공 줄리의 포지션 역시 생각과는 좀 다릅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나 '사랑하는 사람아'같은 영화, 그 외에 아이 빼앗기는 엄마를 다룬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 여주인공에게는 오로지 그 아이가 전부입니다.(심지어 아이 빼앗기는 남자를 다룬 "아이 엠 샘"도 그렇죠) 그런데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이용해서 아이를 빼앗아 가죠. 즉 주인공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줄리는 나름 단란한 가정을 가진 여성이고 아들 하나도 있습니다. 남편, 가족, 그리고 생존권을 가진 안정적인 여성입니다. 아이를 빼앗아 가려고 나타난 조가 오히려 오직 아이 하나만 바라보는 떠돌이 신분이고, 그리고 악덕 아빠가 아니라 굉장히 아이에게 잘 하는 장면이 보여지고 있습니다.(단지 물질공세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아이와 정성껏 놀아주는) 즉 소송에서 지면 조는 혼자 떠나야 하지만 줄리는 그래도 남편과 아들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엄연히 큰 비극이고, 줄리의 큰 아픔과 좌절을 다룬 영화입니다. 프랭크가 흑인이 아니었다면 줄리는 소송에서 확실히 이겼을 것이고. 다만 유사한 국내 영화들에 비하면 그나마도 '희망의 빛'은 있는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거의 강압적으로 아이를 강제로 데려가는 한국 유사영화들과 달리 조는 정당한 소송을 통해서 양육권을 획득했고, 아이를 데려가면서도 줄리-프랭크 부부에게 꽤 미안함을 표했으니까요. 심지어 '선역 포지션'에 있어야 할 프랭크에게도 감정적인 단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면서 지극히 '인간화'시기고 있습니다. (가령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성질을 부리는 장면, 자동차 극장에서 인디언이 백인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서 사이코패스처럼 흥분하는 장면 등)
'이별의 길'은 즉 자극적인 내용으로 관객을 선동하려는 영화가 아닙니다. 누구를 악당으로 만들어서 선과 악 구조로 흥미를 돋우려는 영화도 아닙니다. 이 영화에 과연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이 있었던가요? 이 영화는 그 당시 미국 사회의 지극한 '현실' 즉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문제점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자극도,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억지로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쁜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서 가해자와 비해자가 생기는 설정입니다.
영화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마무리가 되고 있지만 그 이후의 삶에서 줄리에게도, 프랭크에게도, 엘렌에게도, 조 에게도 더 나은 후속의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회는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뿌리'라는 외화는 흑인 차별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세계적인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이별의 길'은 부당함을 선동하거나 드라마틱한 뭔가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현실적인 이야기이고 현실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피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요 인물인 줄리, 프랭크, 조, 엘렌은 모두 피해자입니다. 특정 악당의 가해에 의한 피해자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정서나 분위기때문에 만들어진 피해자입니다. 영화는 이런 잘못된 현실을 보여주면서 바꾸어 나가야 할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실제로 바뀌어가는 세상에 대해서 메시지를 던지는 느낌입니다. 극단적 과장보다는 차분하게 현실적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고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아마도 당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난데없이 끝나버리는 내용에, 좀 개운치 않았고, 다른 오락영화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느꼈을 것 같습니다. 제목에서도 이미 '결말'에 대한 암시가 있었지만. 권선징악, 선과 악, 극단적 묘사 등에 익숙한 당시 관객들에게 아마도 '이별의 길'은 꽤 생소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었던 영화였을 것 같습니다.
ps1 : 국내 개봉작 중에서 꽤 희귀작 중 하나입니다. 방영, 출시의 흔적이 없으니까요 유튜브에 전체 영상이 있기는 하지만.
ps2 : 감독 레리 피어스는 TV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로 이 영화가 극장용 영화 데뷔작입니다.
이후에도 주로 TV에서 많이 활동했고 우리나라에는 '저 하늘에 태양이'라는 영화로 알려진 감독입니다. 찰톤 헤스톤 주연의 '2분 경고'라는 영화도 비디오로 출시되기도 했죠. 아마도 엘리아 카잔 같은 감독이 만들고 시드니 포이티어급의 배우가 등장했다면 훨씬 볼만한 영화가 되었겠지요.
ps3 : 프랭크의 아버지역으로 등장한 로버트 얼 존스라는 나이든 흑인배우는 제임스 얼 존스의 친아버지더군요. 제임스 얼 존스는 뿌리에서 '알렉스 헤일리'를 연기하기도 했고, 1970년 '복서(위대한 백인의 희망)'라는 영화를 통해서 인종문제를 다루기도 했지요.
ps4 : 감독이 TV출신이라서 그런지 여주인공 바바라 바리도 거의 TV에서 활동한 배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로 대뜸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출처] 이별의 길(One Potato, Two Potato 64년) 인종문제를 다룬 사회물|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