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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3b 울산강의-창세기 1,2장
(강의: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아까 잠시 복습하면, 빛이 있으라 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빛만 빼놓고 나머지는 없어질 창조는 임시방편적이에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하고 땅도 없고 모든 게 다 없어져요.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제가 천지를 주께서 주의 손으로 만들었지만 그거는 멸망하게 돼요. 다 없어질 것이라고. 없어지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물으신다면, 주의 손이 하시는 그 다음 일을 보라고. 주의 손이 주님의 손이 그 다음에 어떤 작업에 또 들어가시는가를 알기 위해서 배경으로 깔아놓은 것이 돗자리로 깔아놓은 것이 창조인데, 그것을 빛만 남기고 나머진 없어지지요. 밑 돗자리가 끊어지고 요한계시록 천국에는 빛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이걸 '광채'라 하지요. 광채는 어느 정도 되어야 광채라 하는 말을 하느냐 하면, 눈부심. 이걸 복음의 광채라 하는데. 고린도후서 4장 4절. 복음의 광채, 그러니까 복음의 눈부심의 이러한 세계를 주께서 주의 손으로 하시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깔아놓은 어떤 자리, 그러한 배경, 그러한 연극의 뒤에 있는 무대장치,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의 광채가 제일 먼저 어디에 들어오느냐 하면, 이게 중요해요. 사람의 마음에 들어옵니다.
담배냄새 나는 것 같은데. 난 담배냄새에 민감해서 매일 주위 사람과 싸워요. 우리교회 밑에 세상사람 하는 화장실이 따로 있어서 담배냄새나면 내가 막 뛰어 내려가요. 그건 딴 이야기고. 강의할 때 딴 이야기 자주 합니다. 그거는 뭔가 어려운 이야기할 때는 한 템포 쉬어가자는 뜻에서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눈부시게 임하게 되면, 그때 그 순간에 이 사람은 눈에 피조세계가 날아가 버려요. 안 보입니다. 신기하죠. 이게 고린도후서 12장에 있지요. 삼층천에 올라가니까 심지어 올라간 당사자가 나냐, 아니냐? 그것조차 분간 안 될 정도로 하늘의 복음의 광채에 들어가 버리면, 앞에 빛 때문에 깜깜해지죠. 앞에 게 안 보이니까.
갑자기 조명 스포트라이트가 쫙 비춰 버리면, 너무 밝기에 이게 뭐야? 도대체 높은 데야 낮은 데야 분간 안 될 정도로, 너무 밝아서 이쪽이 생각 안 될 정도로, 창조세계가 생각 안 될 정도로.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갈 때에 너무 휘황찬란해서 도대체 거기 사는 사람이 나, 맞기는 맞는 거야? 라고 의심이 들 정도로 황홀에 빠지는 겁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의도했던 빛의 세계에요.
요한복음에 보면, 빛이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에는 창조 전체를 육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루로 보는 게 아니라 뭐로 보느냐? 속성으로 봐요.
이 세상이 어떠냐? 이 세상의 길이가 몇 키로입니까? 어둡습니다. 어허, 이 지구가 넓이가 몇 평이냐 이 말입니다. 어둡습니다. 어허, 높이가 몇이냐 하니까. 어둡습니다. 속성으로 성질로 이야기해요. 우리들 양의 크기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성질로 이야기한다고. 그럼, 나는요? 어둡네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것은 천국을 목사님, 천국이 여기서 몇 키로입니까? 빛의 세계입니다. 어허, 몇 키로냐니까? 안드로메다 성운 그 바깥에 있어요? 빛의 세계입니다. 로켓 타고 며칠 가야 돼요? 빛의 세계입니다. 제자가 물었어요. 예수님,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너희 안에 있느니라. 어디 있냐고요? 어느 장소에, 몇 미터 앞에? 너희 안에 있느니라. 도대체 말이 안 통해요.
천국은 속성으로 성질로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아는 이쪽에선 뭐냐? 물체의 세계, 사물의 세계는 우리가 거리를 재거든요. 아까 하나 빠뜨린 게 있습니다만, 사일 째 만든 게 뭡니까? 해와 달과 별 아닙니까? 해와 달과 빛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순간부터 우리는 시간 속에 갇히게 돼요.
왜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해와 달과 별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 감각에 매여서 살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생체시계도 마찬가지고 우리 몸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도 생체리듬이 있어서 자기 내부에 시계 같은 것들이 있어서 해와 달과 별의 그 운동에 의해서 그 결의 진동수에 맞춰서 살도록 되어 있어요. 해와 달과 별에 맞춰서 살게 되는 겁니다. 부엉이가 무슨 지가 아이큐가 높다고 밤인지 낮인지 알겠습니까? 다 생체리듬이 조화가 되니까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지면, 빛의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작용하는데 그게 뭐냐? 먼저 들어와요. 왜 먼저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 나중에 복음의 광채가 들어오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이렇게 들어오는 이유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아, 이거 어렵습니다. 이거 어려운 이야기에요.
먼저 여러분들이 기존의 신학에서 다른 쪽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먼저 해 볼게요. 다른 쪽에선 이겁니다. 사람은 흙으로 되어 있다. 사람은 왜 짐승과 다른가? 코끼리 같은 경우에. 사람은 왜 코끼리하고 다른가?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짐승하곤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만이 짐승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짐승하고 차이점이 뭐냐? 네 가지를 이야기해요. 첫째는 직립보행. 문자 써서 죄송합니다. 서서 걷는다는 뜻이에요. 두 번째, 도구사용. 세 번째, 언어사용. 네 번째 불사용.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짐승보다 월등하고, 언어 사용하기 때문에 짐승보다 낫고,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낫고, 직립보행, 낫고. 이것이 바로 다른 짐승하고 차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런 독특한 것의 특징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겉이고, 내부적으로는 뭐냐? 내부적에서는 다스릴 때는 이런 기계적으로만 다스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된 품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 품성이 뭐냐? 의와 거룩과 선함. 이런 것이 여기 들어와서 이것과 더불어서 그걸 다스리게 되어 있다. 의와 거룩과 이것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직립보행, 이것도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됐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간주하자. 라고 기존의 신학은 이야기해요.
따라서 죄를 지었다는 말은 형상이 없어진 건 아니고, 아니 사람이 죄 지었다고 해서 벌벌 기어 다닙니까? 죄 지었다고 말을 못하고 그렇습니까? 죄 지어도 막 자동차 몰고 날아다니고 그렇잖아요. 조폭 세계에 의리가 없습니까? 심지어 성경에 보면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기 집안에서는 자애로운 어버이 아닙니까? 아무리 악할지라도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대목 나오지요. 아무리 악할지라도 의와 양심이 살았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기존의 신학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진 건 아니고, 있는데 이게 죄가 들어와서 고장이 난 거예요. 고장이 나서 뭘 무너뜨렸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고장 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수리를 해서 이걸 다시 회복시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도 있고, 모든 이 세상을 지배도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빛의 입장이 아니고, 제일 막내, 제육일째 만든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또다시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의 형상론을 볼 때 이런 형상론이 나와요. 자기중심으로. 이 형상론의 문제가 뭐가 있느냐? 이 문제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뭐가 없어야 되느냐 하면, 지옥이 없어야 돼요. 지옥이 없어야 됩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만약 이 비타500, 비타500 또 이야기하자. 내가 만약 비타500 제가 산 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비타500이 잘 열리지 않습니다. 비타500이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비타500에다가, 아참, 비타500의 내용물이 맛있는 음료수가 나와야 될 텐데 맛없는 게 나왔어요. 이게 상했어요.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던 직립보행, 도구, 언어, 이거는 문제없는데 이 안에 내용물이 잘못되었거든요. 그러면 진짜 좋은 음료수를 넣었으면 그걸 사용해서 먹어야 된다는 것이 방금 제가 설명한 거죠? 방금 설명 또 하나 되지요. 껍데기는 문제없는데 알맹이가 지금 제조해서 문제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럼 알맹이만 바꿔버리면 껍데기는 하나님이 받는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지옥이라는 게 뭡니까? 이것 자체를 내가 이걸 패는 거잖아요. 때리는 거잖아요. 여호와증인 단체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어떻게 지 자식을 왜 패느냐 이 말입니다. 왜? 자기가, 누가 만들었는데? 신이 만들어놓고, 우리가 만들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신이 직접 만들어놓고, 왜 그것도 영원토록 형벌을 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쪽에서 하는 말은 지옥은 없다. 그럼 지옥이라는 말은 왜 하느냐? 겁주려고. 어이, 떽, 겁주려고. 겁주면 정신 바짝 차려서 가는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것 중에서 어떤 것은 지옥 보내놓고 즐거워하는 그런 하나님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지옥 보내놓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은 변태에요. 자식 열 명 낳았는데 그중에 다섯 명은 천국 보내고, 다섯 명은 못 살게 굴면, 나는 네가 지옥 갈 때마다 즐겁더라. 하면 완전히 변태 부모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입니다. 천주교 신학이에요.
사랑의 하나님이 빛이 되시는 분이 있기에 빛이 있는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몸속에 뭐가 피어오른다? 사랑의 감정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사랑의 감정이 떠오르는 우리를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을 집어넣었는데 자기가 집어넣은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저주 할 리가 있느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생명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고, 신이 우리에게 부어준 거다. 그러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저주할 리가 있느냐? 없다. 이것이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혹시 이 땅에 살면서 성당에 자주 안 다녔다든지, 부모한테 불효했다는 것은 너무 철이 없어 그랬으니까 한번 기회를 더 주자는 입장에서 패자부활전을 줍니다. 그걸 천주교에선 뭐냐? 연옥이라 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연옥이 있는 천주교를 더 좋아하죠. 왜? 한번 실패한 것은 있을 수 있으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자비로우면 이 땅에서 철딱서니 없어서 함부로 구는 것, 나중에 연옥 가서, 연옥이 상당히 힘들거든요. 연옥에서 고생 좀 해보면, 이렇게 고생되는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잘하겠습니다. 잘할 거야? 잘할 겁니다. 싸우지 마? 예. 우유 줄게. 안 싸우면 우유주는 그 CF처럼.
그러니까 달래서 기어이 좋은 나라에 가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자비로우냐? 이러한 자비가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것은 이거는 신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의심할 수 없다. 우리 마음에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은 신도 동일하게 그런 마음의 사랑이 있다. 이렇게 천주교에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이냐 하면, 이미 범죄해서 사고방식 중심이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다 나 좋아라고 존재하는, 그러니까 나를 위한 하나님이지, 하나님을 위한 나는 아닌 상태에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고 나를 위해서 세파트 있는 것처럼 나에게 봉사하는 하나님이 있는 것이 우리 죄진 적성에 딱 들어맞아요. 이게 맞춤 같아. 맞춤목 같아. 우리 본성에 저항성도 느끼지 아니하고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고 딱 들어맞아요. 이게.
다들 동의하는 눈을 하니까 제가 강의하기가 겁나는데. 맞잖아요. 그런 것처럼.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은, 이거는 인간의 어떤 지혜로 캐낼 수 없다 했어요. 그 지혜가 얼마나 놀랍던지 하나님은 듣고 싶어도 추방해 버린다는 겁니다. 듣고자 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알고자해도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해 주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예상 밖의 소식을 접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것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나신 능력으로만 알 수 있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철저하게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모른다는 겁니다.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그 무엇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사야에 보면,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짜 본 뜻은 이미 인류 전체가 아담 안에서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든 앞에 뭐가 등장해도 딱 자기 좋아라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왜곡된 신으로 수용해요. 인간은 기껏 그것 밖에 안돼요. 나 좋으면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그게 아니잖아. 하는 식으로 나타나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나 엉뚱하다는 겁니다. 우리를 오히려 그런 생각을 비껴가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걸 설명해 드릴게요.
창세기 1장 27절 한번 봅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모양을 만들고” 맞지요. 여러분 맞지요. 여기서 누구의 형상입니까? 여기 우리는 누굴 말합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누군 빠집니까? 사람은 빠지지요. 그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사람이 관여할 수 없지요. 처음부터 관여가 안 되었다 말이에요.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안 됐다 말이죠.
자, ‘우리의 형상대로’ 말이 빠졌다고 그게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번 봅시다. 갑자기 어려워져 버렸는데. 처음부터 우리의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 속에 뭐가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지요. 내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면 진흙 그 자체가 남아 있잖아요.
진흙으로 컵을 만들었다하면, 컵이 있다는 말은 그 안에 뭐가 있다? 진흙이 있다는 말이잖아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으면, 인간이 있다는 말은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 자체가 뭐란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되잖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말이죠.
그게 저는 틀렸다 이 말입니다. 왜? 여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우리의 형상이 들어갑니다. 우린 누굽니까? 인간이 포함됩니까, 포함 안 됩니까? 우리는 인간이 포함 안 됩니다. 누구 뿐입니까? 하나님 자기들 밖에 없어요. 하나님 자기들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빠지는 거예요. 현재 우리는 무슨 형상이냐? 죄 짓고 난 뒤에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 형상 없어요. 우리의 형상 없습니다. 무슨 형상입니까? 물체가 들어와요. 물체를 한 자로 하면 우리는 뭐로 변합니까? 흙.
목사님, 저 흙 아닌데요. 한 팔십년 기다려 보겠습니다. 흙 되는지 안 되는지. 흙, 맞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름도 아예 흙으로 지었습니다. 날 때부터 흙으로 지었습니다. 감히 흙인 형상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우리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그렇게 깝죽대느냐 말이죠. 기가 찰 일이 다 있네. 기가 찰 노릇이죠.
여기의 형상은 골로새서 1장 16절의 누구 밖에 안 돼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자체를 이야기해요. 예수라는 성자님 자체를 가지고 형상이라고 한 거예요. 신약에 성자 예수님, 구약에는 하나님의 형상. 그럼 목사님, 우리는 뭡니까? 우린 죄 짓고 아담의 형상이죠. 아담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흙이잖아요. 흙의 형상이에요. 우리는 흙의 형상입니다. 이게 창세기 5장에 나오죠. 아담의 형상대로.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오해하기를, 죄 짓고 난 뒤에 그런 오해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다니까 마치 하나님을 물체로 봐서 물체로 물체 만들면 맨 물체 있는 것 맞아요. 주신 물체와 남겨진 물체가 일치 된다는 것은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 수제비 안 끓여봤습니까? 덩어리 수제비하고 뚝뚝 끊어지는 수제비. 아아, 먹고 싶다. 감자 넣어서. 수제비 밀가루 덩어리하고 떨어진 밀가루 하고 다른 겁니까, 같은 겁니까? 같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죄 짓고 난 뒤에 창세기 1장을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늘어져서 인간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있다는 건 뭐냐? 하나님 형상이 있다는 겁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이미 돌아가셨지만 원장 된 사람, 김 장로라는 그 사람이 이렇게 했어요. 불신자들 교육시키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기로 거울 가져와라. 거울 가지고 거울보고 이게 하나님 형상이다. 창세기 1장 25절,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아이고, 신학교 거기 가서 강제로 거기 입소해서 훈련받으면서 기가 차서. 그러니 참, 장로지, 제가 생각했는데. 그거는 흙의 형상이 되기 직전의 모습이죠. 해골이 되기 직전의 모습이에요.
우리의 모습은 전도서에 나옵니다. 니 모습 알려면 결혼식에 가지 말고 잔칫집 가지 말고 어디 가라 했습니까? 초상집에 가라. 거기에 니 모습 나와 있다. 초상집에 돈 받는 사람 말고 관 속에 누워있는 사람, 나란히 같이 포개 누워 보세요. 같이. 어이, 푹신하네. 푹신하진 않겠다만. 그게 얼마 안 남았어요. 몇 년, 몇 십 년만 지나면 우린 눕습니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눕지만. 저는 기증했습니다만, 기증하든 뭐든 불 태워 하겠지만.
그렇게 없어져요. 왜? 흙에 미련 둘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제대 날짜 가깝다고 얼마나 좋았다고. 사도 바울이 죽는 게 좋아서. 죽는다는 것이 삶의 용기를 삶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언젠가는 떠난다는 게, 늘 살지 않는다는 게 자기의 사는 하나의 보람이었습니다. 이미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으니까.
다같이 성경 한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다같이 읽어 봅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 다음에 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맞잖아요. 이렇게 나오잖아요.
몸이 현재 있는 몸은 교체될 대상이에요. 이게 고물이거든요. 이게 중고라. 우리 몸이 지금 중고에요. 앞으로 세월가면 갈수록 중고 될 겁니다. 이제는 온 몸이 안 아픈데 없을 거예요. 머리 훌러덩 다 빠질 겁니다. 남자나 여자나 머리 다 빠집니다. 하이에논가 뭔가 뿌려도 얼마 되질 않아요. 암웨이 샴푸 해봐야 효과 별로 안 좋아요. 다 빠집니다. 점차 흙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지금 연세 많은 사람들이 제일 괴로운 게 뭐냐 하면, 변한다는 거예요. 왜 나는 이십대로 그냥 못 있느냐? 생각하면 할수록 화딱지 나는 거예요. 잡아당겨도 안 되고, 부셔도 안 되고 왜 나란 놈은 가만있질 못하느냐 말이죠. 왜 자꾸 안 좋은 쪽으로 변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자기 혼자 안 변하니까 그것도 기분 좋지만 다같이 변하지만.
젊은 사람들 보면 화가 나는 것이 나도 저때는 예뻤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지금은 그때 그 자리에 고정되지 못하게 도대체 누가 나로 하여금 이십대 이 스물다섯 살, 여섯 살로 고정되지 못하게 하느냐 말이죠. 지금.
이거는 일반인들은 심각하지 않아요. 특히 연예인들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에요. 나이 사십, 오십 되어서 뭐, 유지인이 옛날 예뻤다 하지만 지금 젊은 애들 하면 막 반대할 거예요. 어데 아줌마가 나와서. 난리날 겁니다. 이게 돈과 직결된 문제에요. 왜 늙느냐 말이죠. 왜?
왜 나는 지금 사십 대냐 말이죠. 왜 이십대 안 되느냐 하면, 뒤에서 뒤통수 날아옵니다. 누가? 육십 대가. 사십 대도 괜찮았다. 그 정도만 해도 나도 참, 나는 이십 대는 말고 사십 대만 되도, 육십 돼 봐라. 이제는 산송장이라. 뒤에 또 호통을 치는 팔십 대가, 육십이 그것도 청춘이지, 그것도 늙었다고. 누구신데요? 나, 영감. 나, 산송장.
차라리 처음부터 육십 대 같으면 추억이나 얻지. 그놈의 추억과 기억은 왜 그렇게 나는지. 하여튼 시월 때 말만 되면 생각나는 것이,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 노래, 이용의 노래가 삼십 년, 삼십오 년째 써먹고 있어요. 시월달만 되면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 노래 나오면 그때 나올 때 누굴 사귀었더라. 그때 나올 때 뭐하고 있었더라. 또 기억나는 거예요. 추억이 사람을 우울증 나게 만들어요. 괜히 남자들 낙엽 떨어지면 깃 딱 세우고 혼자 돌아다니다 바람이나 피우고. 분위기 잡는다고. 괜찮은 카페에 앉아서 괜히. 그게 다 추억 때문에.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람은 뭐냐? 한 마디로 기억이다. 사람은 기억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왜 화가 나는 줄 알아요? 과거와 자꾸 비교가 되니까. 그놈의 기억이 나를 비교하니까. 현재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해 하지 못하고 과거와 견주니까 이건 있는 것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불행해져요. 갑자기. 불행해지고 눈물나고 우울해지고 괜히 술 한잔 더 먹게 되고.
하나님은 이 사정을 아십니다. 변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큰 것 때문에. 여기 45절, 46절. “신령한 몸 때문에” 47절 시작,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하고 의논 안 하고 위치를 바꿔버렸어요. 흙에 속한 형상이, 형상이라고 우기던 인간에게 닭 쫓던 개 돼버렸어요. 주여, 이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아닌데. 이거 하나님의 형상 맞습니다. 창세기 1장 25절 댈까요? 하나님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가, 아닌데. 그럼 어디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데. 언제 그리로 갔지.
흙에 속한 형상에서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흘 동안 직접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인간이 가는 코스, 사실은 전체 인간이 아니고, 성도지만. 성도가 가는 코스를 첫 열매로써 미리 시범조로 보여주신 겁니다. 그걸 모델하우스라 하지요. 모델하우스 보고 내 살 길도 짐작이 됩니다.
예수님 가신 코스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우리 가는 코스입니다. 육신으로 왔기에 육신 때문에 죽어야만 하고 동시에 우리도 육신으로 왔기 때문에 죽어야만 하고, 그 육신에서 어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부활된다면 그 약속을 믿는 자도 주와 함께 더불어 영원히 살리라.
이것은 흙이 없는 이상 이야기 안 됩니다. 이 이야기하려고 구약 창세기 1장부터 우리를 지금 이 앞에 앉혀 놓게 만들었습니다. 부활이 뭔지, 왜 예수님이 육신으로 와서 십자가에 죄를 치러야 하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배경조로 임시방편적이지만 창세기를 우리보고 이야기하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형상이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지음 받았어요.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또는 나를 왜 죽이십니까? 라는 말조차 우리는 할 수 없어요. 왜 지옥을 만드십니까? 라고 말할 처지에 놓여 있질 않습니다. 그 소관은 처음부터 만드실 때부터 하나님, 세분이 쏙닥쏙닥, 수근수근 자기들끼리 일을 하자는 계획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 좀 엿들읍시다. 하면 쫓겨나갑니다.
하나님의 회합에 우리가 끼어들 수 없는 이유가 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보겠습니다. 3장 22절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고 그 사람을 내 보내지요. 내어보낸다는 말은 누구는 남기고, 누구는 쫓아낸다? 우리는 남기고, 누굴 쫓아내요? 선악을 아는 일에 합세된 그 인간은 떠나지요.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처음부터 인간은 알았어야 됩니까, 몰랐어야 됩니까? 몰랐어야 그게 정상적인 인간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인간입니다.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건방 떤 거예요. 감당도 못하면서 알아버린 거예요. 감당할 기회를 얻은 게 아니고, 마귀가 그걸 알았지요. 감당 못할 기회를 얻어서 감당할 못할 지경에 빠진 겁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무리 착해도 악이 나를 앞서 질주합니다. 사람이 괴로운 것은 속에 선과 악의 충돌 때문에 괴로워요. 선과 악이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죄라고 느끼기 때문에 죄책을 느껴요. 참, 교묘하지요. 사람이 자기 죄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때부터 죄가 주는 괴로움에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옛날 저희 집이 소위 양반 집이에요. 그러나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혀 양반하고 상관없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우겼어요. 우린 양반 집안이다. 경주 이씨 양반 집안이다. 이렇게 우겨서 우린 양반인 줄 알았어요. 양반 같으면 양반에 걸 맞는 행동해라. 그게 뭐냐? 문을 여닫을 때 절대로 여자나 남자나 엉덩이를 비추면 안 되고, 신발을 할 때는 돌아서서 나란히 이렇게 놓아야 된다.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어른 말씀에 잘 보이려고 어른이 있으면 신발 딱 놓고 문도 이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제 행동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두 개를 지키면 백점이 기분 나쁘잖아요. 세 번째, 네 번째 업무를 줘서 미션을 줘서 계속 못 지켜야 미션주신 권위가 살지 않습니까? 많이 시달렸어요. 제가. 저도 한 완벽 하는데. 누가 이기나 시합한 거예요. 니가 어느 정도 완벽하나 두고 보자. 계속해서 힘든 과제, 미션을 주고 그거 따라 붙인다고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그렇게 성장하다가 다른 집에 가니까 문 열 때 엉덩이를 보여도 아무 상관없었어요.
만약에 엉덩이를 보여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왔다면 할아버지가 호통 쳤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이 집이 어떤 집안인데 엉덩이를 보여. 어른 앞에 보인다 말이야. 막 이렇게 호통을 치고. 굉장히 무서웠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자기 집에 가서도 지울 길이 없어요. 뭐?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율법을 주었다는 말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부터 선악구조에 있었는데 무엇이 죄인 줄 몰랐기 때문에 죄를 못 알다가, 율법이 가입됨으로 말미암아 죄책이 쫙쫙 늘어나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젊은애들 때 죽는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육십 넘은 때 죽는 이야기하면 실감납니다. 제가 아침마다 새벽마다 산에 산책하는데 산책하면 전부다 저보다 연세 많은 육십 대, 칠십 대 노인네들이 쭉 새벽 다섯 시에 경쟁하듯이 어떤 사람은 네 시에 일어나 경쟁합니다. 대화가 뭐냐 하면, 걔 있잖아. 옆 동 319호. 링거 맞고 있단다. 얼마 가겠노. 그래. 어느 한의원 가면 .... 전부다 죽는 이야기, 아픈 이야기 많아요. 화제가. 그게 죽음에 가까운 거예요.
그런데 십대, 이십대 하면, 삼성 이번에 어떻고 우승했고, 전부다 스포츠 이야기, 연애이야기 밖에 안 해요. 죽음 하곤 거리가 멀다 이 말입니다. 죽는다고 하면, 제가 왜 죽어요. 제가 뭐 나쁜 짓 했다고. 제가 왜 죽어요. 제가 얼마나 착한데. 아직까지 인생을 덜 살아서 자기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를 맛을 못 봤어. 맛을 보질 못했어요.
그래서 젊은애들은 정의를 보고 못 참습니다. 차간에서 휴대폰 크게 해도 못 참고, 플랫폼에서 담배 피워도 못 참고. 누구 이야기냐 하면, 제 이야기입니다만 도저히 아직 어린애라서 못 참습니다. 그런데 연세 많으면, 뭘 해도 그럴 나이다. 그럴 수도 있다. 이러거든요.
예를 들어서 젊은 아주 순박한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해도 되는지. 이런 이야기하면 그 사람 들으면 기분 나쁜데 또 괜히 했다가 누구처럼 이 무슨 광 무슨 목사 시비 걸 텐데. 그 이야기하면 누구 녹취하면 그것도 녹취하기 때문에 곤란해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 교회에서 너무 여자 분이 순진한 거예요. 같은 연배의 남자분이 약간의 호감이 있어서 약간 으슥한데 가서 손을 잡았답니다. 그런데 그 여자 분이 신고했어요. 치한이라고 경찰에다 신고를 했어요. 경찰에 붙들려갔습니다. 취조 당했어요. 그 여자 분은 성장과정에서 그런 걸 용납이 안 되는 그런 집안에 태어난 겁니다. 어떻게 외간 남자가 내 손을 만지느냐 말이죠. 왜 음산한 곳에 몰아넣은 의도가 뭐냐?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여자 분도 상처를 많이 받았지요.
만약에 그 여자 분이 팔십 일곱이고 남자분이 구십이라면 경찰 신고 안합니다. 만지든 주무르든 니 마음대로 해라. 아직도 인생의 때가 덜 묻어서 그 천사 같은 순수함을 자력으로 유지하려는 거예요. 그저 갖고 놀다 제자리만 좀 갖다 노. 이정도만 하지 그거 심각하게 생각 안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부부간에 살아봐야 살 때는 니 잘 났니 하지만 살아보면 니 꼬라지나 내 꼬라지는 똑같다. 못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살면서 절실하게 느끼라고 똑같은 인간 둘이 붙여 놓은 거예요.
사랑은 복음의 광채가 비춰버리면 이걸 사랑이라 합시다. 상대방을 사랑해 버리면 자아가 안 보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게 전세방인지 사글세인지 보이질 않아요. 왜? 그대 안에 내 있고, 내 안에 그대 있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아무 당신만 있다면 지금 우리가 하루 한 끼만 먹어도 관계없다. 이거 육 개월 갑니다. 도파민의 작용이 육 개월 갑니다.
육 개월 가고 난 뒤에 그 다음 소유로 바꿔요. 저 인간, 나 가지고 난 뒤에 내 무슨 이익 봤나? 드디어 자아가 생겨요. 자아가 생기면 저 인간 만나서 내 얼마나 이익 봤느냐? 그걸 계산 해보니까 부아가 나거든요. 부아가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보상에 들어가요. 보상을 하는데 보상을 제 때 안 해 주니까 밉잖아요. 미우면 아예 찢어지는 거예요.
처음에 복음의 광채, 사랑의 광채지요. 사랑할 때는 정신도 없어요. 결혼식 같은 것, 거 뭐로 하는데 우리끼리 살면 되지. 정신도 없어요. 완전히 혼절한 상태에요. 당신 보기만 하면 기절초풍할 지경할 정도, 너무 예뻐서. 기절초풍할 지경이에요. 이거 몇 개월 간다 했어요? 육 개월 가면, 도파민, 육 개월 갑니다. 그래서 젊은애들 육 개월 살아보고 결혼한다 하는데.
처음에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 했어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아요. 자기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 건 없어요. 상대가 있음으로 행복한 거예요. 나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고, 그대가 나를 사랑하든지 안 사랑하든지 그대 있다는 자체만 해도 천사 같은 그대만 있다는 자체로 사랑해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장점이에요. 단점은 없어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아가서에 나옵니다. 아가서는 바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뿜어내는 그 사랑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게 아가서입니다. 그야말로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다 말이죠.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랑을 계속 지속하지 못하는 이것은 뭐냐? 이미 독자적인 소유의식이 있을 때 생기는 겁니다. 니만 하나님의 형상인가, 나는 아닌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도 하나님의 형상 맞는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여, 하나님이여, 하나님, 당신이 만든 하나님의 형상 책임지라고 내미는 거예요. 책임지라고. 왜 인생을 힘들게 하느냐 말이죠. 왜 내 청춘을 허송세월하게 만드느냐 말이죠. 당신이 자비롭다면 내가 원하는 건 들어 달라 이 말입니다.
이것이 이런 오해가 어디서 생기느냐? 창세기 2장에 넘어갑시다. 그 중간에 뭐 여러 가지, 안식일이야기 있는데 그 안식일이야기는 나중에 또 신명기 안식일 할 때 이야기하고 그냥 넘어갑시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원래 강의는 진도 팍팍 나가줘야 맛이 나요. 하나 가지고 붙들면 맛이 안나요. 지루하다 하니까. 모르든 알든 넘어가요. 또 하면 되니까.
창세기 2장 봅시다. 여기에 에덴동산 나오지요. 에덴동산이 왜 있느냐? 에덴동산의 뜻은 완벽하게 즐거운 동산입니다. 완벽하게 즐거운 낙원. 이게 뜻이 에덴동산이에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에덴동산이 완벽합니까? 완벽합니다. 목사님? 예.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완전합니까? 완전합니다. 에게, 완전 안 한 것 같아? 왜? 마귀가 왜 침투했습니까? 완전 안 하잖아요. 이렇게 질문해요. 인간이 왜 타락했습니까? 타락했다면 타락 가능성 있다는 말은 불완전하다는 뜻인데 그게 무슨 완전입니까? 지금 목사님 거짓말하지요. 이렇게 따져요.
지금 그 사람이 뭘 모르느냐 하면, 죄 짓고 난 뒤에 죄진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개념과 그 완전개념은 자기 위주로 완전개념이고, 하나님의 완전개념하고 지금 이미 갈 데로 가버려서 그런 거예요. 각자각자 미리 갈라져서 찢어져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완전개념은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완전개념이라 하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로 손으로 만든 것을 하나님의 완전이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은혜가 안 끼어들어야 그걸 완전이라고 보는 거예요. 죄 짓고 난 후에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은.
아, 어려운 눈치인데. 첫 번째 죄 짓고 난 인간이 완전이라는 개념은 어떤 개념이냐 하면, 자기가 미흡하다는 걸 천하가 다 알잖아요. 본인도 알지요. 자기 미흡하다는 걸. 그러니까 미흡함이 다시는 미흡함이 안 생기도록 해줘야 이게 완전이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나라는 인간으로부터 이걸 확대하고 확대해서 완전개념을 추궁해서 그래서 신이시여, 내가 원하는 이런 자리에 있어야 진리입니다. 신이시여, 완전은 내가 원하는 완전이 있어야 완전입니다. 자기가 지 마음대로 신을 만들어놓았어요. 만들어놓고 거기다 완전개념을 뒤집어씌운 겁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강제로 막든지 어떤지 선악과나무 위에 철조망을 치든지 해서 안 따먹도록 해줘야 완전입니다. 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자기가 불완전하니까 이걸 메워 보려는 그런 심보, 욕망에서 나온 가짜 신의 개념이에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하니까. 우리를 대표하는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냥 주신 것만 있어도 완전이에요. 여호와증인은 그걸 몰라요. 예수님이 주신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예수님 입장에서 완전성에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됩니까? 지옥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뭐가 있어야 되느냐? 심판이 있어야 돼요. 정죄가 있어야 돼요. 심판이 없는 완전은 없어요.
왜 하나님 하는 일에 심판이 있고 지옥이 있느냐, 왜 저주가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쪽 사람들, 이쪽 사람들 하지 말고 기분 좋게 저와 여러분들만 구원하는, 기분 좋지요. 저와 여러분들만 은혜로 사랑으로 구원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랑받지 않는 쪽이 반대편에 대조해서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사랑이 삐까삐까 빛이 나잖아요. 둘 다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잖아요. 한쪽은 완전히 미워하기로 작정하고, 한쪽은 이건 사랑받기로 작정했을 때 그 사랑은 온전한 은혜로만 사랑이죠.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완전은 뭐라고요? 자신의 은혜로 100% 은혜로 주신 것만 값없이 주신 것만 완전이라고요. 그 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완전히 은혜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저주를 해줘야 이쪽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느끼지요. 그래서 지옥이 있는 것이 완전이고, 심판이 있는 것이 완전이고, 마귀가 있는 것이 완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각하기를 죄 짓고 난 뒤에, 마귀가 설치면 나 또 다가가잖아. 마귀 왜 만들어놨어. 당신 불완전하네. 자기 입장을 생각해서 날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완전치 못한 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그리고 완전한 신 같으면 사랑의 하나님 같으면 저주가 없어야지. 지옥 없애 버려. 심판? 심판도 없어. 이게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이 생각한 완전한 신이라는 겁니다. 이게 철학적 신이에요.
그러면 그 철학적 인간의 죄진 상태에서 상상해서 환영에서 만들어진 그것과 완전한 신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언약으로 나타나요. 내가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알려준 그 언약에 의해서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점차점차 드러냅니다. 그 점차점차 얼굴을 드러내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그 기초가 에덴동산에서 두 가지 나무로 설명합니다.
자, 에덴동산은 어떤 동산이라고 했습니까? 완전한 동산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세요. 마귀가 침투 안 해야 완전이라든지, 선악과 못 따먹도록 막아놔야 완전, 그런 개념은 우리가 잘못된 개념입니다. 은혜로 주신 선악인데 그 은혜 중에 어디서 은혜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가 은혜에요.
다른 말로 번역해 볼까요? 선악을 아는 지식은 네가 몰라도 돼. 선악을 몰라도 되는 인간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놓으시고 선악을 못하게 하라. 하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사람이라는 것은 선악을 몰라야 돼. 라는 피조물을 사람이라고만 간주하고 선악을 아는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은 사람으로 간주 안 합니다. 복음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은 사람 취급을 안 해요. 그건 지옥 보내버립니다.
사람은 만들어놓고 부탁한다, 제발 부탁한다. 선악과 몰라도 돼. 이게 아니라 처음부터 선악을 몰라야 되는 인간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거기에 누구 의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까? 우리의 의견은 개입이 안 됩니다. 태어나지도 안했는데. 저, 선악과도 따먹는 쪽으로 갑시다. 이런 식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없지요. 그때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선악, 너라는 인간은 보기에 심히 좋은 인간인데, 그리고 완벽한 나라에 사는데, 어느 정도 완벽 하느냐 하면, 너는 선악을 몰라도 돼. 그 다음에 생명나무는 따먹어. 그래서 영생을 얻어. 요 두 가지 조건 하에서 인간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하고 성령 오게 되면 뭐는 빠집니까? 선악은 몰라도 돼. 이건 빠지고, 뭐만 알아요? 생명나무 마음대로 따먹어. 그게 요한계시록 22장입니다. 천국입니다. 천국에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때마다 열려요. 열두 과실이 열립니다. 뭐는 없습니까? 선악나무는 거긴 없어요. 없습니다.
이거 좀 더 설명하면, 선악을 몰라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가 있는데, 선악과를 몰랐을 때 이때만 완전하지요. 완벽하고 은혜롭다고. 자,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따먹지 말라하는 그것이 선악을 알아선 안 된다는 그것이 창조하신 분과 우리 사이 피조물과 완전히 분리되는 거죠. 그렇다면 마귀가 와서 선악 따먹으라고 할 때 무엇을 조건으로 겁니까? 니가 따먹으면 뭐가 된다 했습니까? 신이 된다 했지요.
그러면 지금 하나님의 신이 모자라서 신을 더 추가해서 생산하려고 마귀를 허락했습니까? 하나님은 삼위일체 세 분과 심심해서 야, 이번에 신을 한번 만들어보자. 어디 취직시키려고 그렇게 했습니까? 세 분이 모자랄 것 같으면 네 번, 세 번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확정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피조물 같으면 무엇을 어디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러한 하나님의 완전을 존중할 때 그게 피조물이 피조물다운 피조물되는 겁니다. 그걸 존중해 줄 때. 그게 인간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선악을 따먹지 말라 했는데 이걸 선악을 따먹어 버리면, 하나님께서 다시 뭘 만들어야 돼요? 다시 인간을 새로 만들어야 돼요. 새로 만들기 위해서 선악을 아는 인간을 어떻게 됩니까? 창조 이전으로 돌려야 돼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되돌려 보내야 돼요.
되돌려 보내놓고 흙으로 이렇게 해놓고, 그러면 인간 만든 작업은 누구 소관 됩니까? 흙이 일어나서 간섭합니까? 저는 갈빗대 바꿔주세요. 간섭 못하거든요. 우리는 완전히 배제시키고 누가 다 해요? 이제는 저쪽 분들, 하나님께서 저쪽에서 다 처리를 해야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 자체를 완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금 생명나무는 아직 안 따먹었습니다. 선악 따먹은 것을 이걸 취소시키고 추방시켜버리고 암세포 자르듯이 잘라버리고, 뭐가 남았어요? 생명나무 남았지요. 생명나무를 확장시켜서라도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요. 그 생명나무가 확장해서 눌러버릴 때 그 생명이 눌러서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우린 가만있는데.
이걸 제가 설교시간에 아주 천박하게 예를 들었어요. 우리교회에서. 우리교회는 원래 좀 천박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뭐냐 하면, 지하철에 뚱뚱한 아줌마가 들어와서 자리 이것밖에 없는데 불쌍한 청년이 허약한 청년이 이렇게 오 목사님처럼 허약하게 쭈그리고 앉아있는데 자리 이것밖에 없는데 들어와서 눌러버린 거예요. 눌러버리니까 꽉 끼지요. 생명나무가 확장하다 보니까 우리 머리에 우리 허락도 안 받고 우릴 눌러버렸어요. 누구고? 나, 예수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생명이 빛이 비치매 빛의 자녀가 생명이 우리에게 오매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가 주었으니, 능력이 있다 말이죠. 이거는 사람의 뜻으로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다. 그냥 눌러버린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눌렸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자신의 힘으로 구원됐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그럼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자신의 힘으로 구원됐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구원받은 거예요. 당신의 힘으로 천당 갈 생각합니까? 아니요. 그럼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굉장히 쉽지요.
그런데 요즘 목사들한테 크로스빌리지 목사들은 그게 안 믿어요.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 사람들은. 십자가 은혜 구원받는 걸 거부해요. 누가요? 목사가요. 목사가 거부한다니까. 기가 찰 노릇이에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느냐 하면, 처음부터 생명을 받아 본 적이 없어 그래요. 처음부터 난데없이 당했다는 생각이 없이 열심히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달달 외워서 목사 되고 구원받았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선악을 포기를 안 하는 거예요.
선악 중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 믿어주는 선 있잖아요. 이게 문젯거리 아닙니까? 예수 잘 믿어주는 선. 이런 자기 입장에서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겁니다. 예수 잘 믿는 선. 세상에 예수 잘 믿는 선이 어디 있어요.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문제인데. 예수님도 누구보고 선하다고 하느냐? 이 땅엔 선이 없어요. 선한 분은 누구 밖에 없다? 하나님 밖에 없다 했어요. 우리 아버지 밖에 없다.
그것이 나중에 바울 서신 되면 개념이 바뀌어서 바울 서신 되면 확장됩니다만, 공관복음에서 마태복음에서는 선한 분은 누구보고 선하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만 선하다 말이죠. 어디서 니가 감히 선을 논하느냐? 어디서. 선을 논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거는 네 힘으로 구원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제자들이 놀래서, 그럼 누가 구원받습니까? 하니까 누가 구원받습니까, 말 자체가 잘못됐잖아요. 주께서 하신 말씀이 답답해서 못한다는 거예요. 못하는데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할 수 있으면,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말이 성립되는데, 구원받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닌데, 구원받을 수 있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다 이 말이죠.
부자가 천국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 속에 들어간다. 한번 밀어 넣어 보지요. 보통 구멍에다. 안 들어갑니다. 제가 실험해 보려다 취소했습니다. 그만 두었어요. 해보다 이거 낙타 대가리도 안 들어갑니다. 이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이상은 이거는 폐기처분돼야 될 대상이지, 거기서 꿈질꿈질 움직여서 구원될 대상이 아니에요.
그러면 누가 합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너희들이 바로 그 대상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대상이다. 내가 지금 안 놀고 하잖아. 네가 열심히 하나님 자신이라고 애쓰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예수님이 안 놀잖아요. 그래서 여러 번 모였었잖아요.
베드로가 말하기를 제가 주께 따라가겠습니다. 네가 백날 기도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기도해줘야 베드로는 마귀의 시험에 안 걸리고 거기서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백날 기도해 봤자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님이 기도해 준 덕분에 여러분들은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기도 많이 한 사람한테는 안 돼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서 기도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기도 안 할 때가 아니고, 집안에 문제 있어서 사십일 동안 철야기도 했는데 응답 안 될 때 그때 비로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해 본 사람은 주께서 기도하신다는 걸 잘 못 느껴져요.
실컷 그것도 철야하고 그것도 양식 아끼는 게 아니고, 진짜 밥 먹을 마음이 안 나서 금식했는데 응답 된 게 하나도 없을 때 비로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은 은혜다. 그때 이야기해요. 아하, 주께서 기도해서 구원받지, 내 기도 열심히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구나. 그때 안다고. 그땔 위해서 열심히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똑바로 보고 주의 생명나무를 왜 따로 빼돌려서 그 생명나무 자체 되시는 분이 왜 우리에게 밀려왔는지 그래서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우리 속에 새로운 피조물이 형성되었는지 이 모든 것이 완전하신 값없는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완전을 위한 일인 줄 압니다. 우리가 완전을 추구 하지 말고 완전하신 분에게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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