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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제 원문보기 글쓴이: 달과6펜스
역사의 뒷면읽기와 빈 공간 채우기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 카의 결론 속에서 출발 해본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나름의 정의를 내렸지만 제법 많은 관심을 갖다보니 그 결론에 찬성하기로 했다.
여기서 세분하여 <과거>란 변하지 않는 <있었던 사실>의 현재 이전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역사란 <문자에 의한 기록이나 유물, 유적 등의 증거물>에 의해 형성된다
기록의 불완전성이나 기록자의 자의적 판단이 있을 수 있다. 이 점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물이나 유적들에 중점을 두는 실증사학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검증자의 자의적 판단, 그리고 인위적 창조물이나 조작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슴을 역사학계의 빈번한 위작이나 모조품 소동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불완전성이 <끊임없는 대화>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을 것이다
역사를 구성하는 많은 일들을 모두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어떤 범주나 기준에 의해 규정을 짓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기록이나 보존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달라짐으로써 그 기준이나 보편성의 정의가 변하고 해석의 차이도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일지 모른다
보편성의 변천이 곧 역사의 개편작업이냐 하는 것은 단적으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역사기술의 기준과 보편성 확립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고 판단되며 역사란 현재를 포함한 모든 시대의 연장선이므로 현재를 들이대어 과거를 함부로 재단하는 괴물을 탄생시킬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것이므로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역사의 기술적 문제를 초월하여 <역사의 효용성이나 유용성>의 문제로 접근하면 그 대상이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의 공급자와 수요자로 말이다. 원칙적으로는 인류 구성원 모두가 공급자이고 수요자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기술의 실례에서도 나타난다. 소수 영웅중심의 역사서술방식이 있는가 하면 사건별로 서술된 역사방식도 있다. 또한 <정사>나 <야사>의 개념도 존재한다. 따라서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작업임에도 분명히 의지를 가진 소수자들에 의해 역사는 왜곡도 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목적은 무엇이며 연구방향과 도구와의 관계는 무관한 것인가
이 점은 매우 중요하며 다른 곁가지에 한 눈을 팔면 중대한 오류에 직면하게 된다.
역사란 동시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이 망라된 총합의 보편의 기록이어야 할 것이다
몇몇의 인물에 기댄 영웅주의 중심의 기록은 동시대의 호흡을 같이한 사람들의 기록이 누락되기 쉽다.
역사기록의 수단으로 왕조시대에는 왕권중심과 신권중심의 역사개관이 수 천년 이어왔다. 그런 영향으로 대중들은 쉽게 이러한 서술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또한 당연시하는 습관에 젖어있다. 근대이후의 역사기술의 방향은 인물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대중의 호흡을 기록하는 것이 뼈대가 되어야 하고 영웅적 명망가는 살붙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국민주권이고 대중적 민주주의다
역사기술의 도구성이 악용되어 파쇼와 군국주의 그리고 1인 독재자 등 소수통치자 중심의 역사를 재생산하는 우를 범함은 세계사에서도 그 예를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특히 식민지화 초기의 통치과정에 “독재”라는 수단이 반드시 삽입되는 과정과 “우상화 작업”을 가미하는 것은 막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과정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필연>이라 주장함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역사기술의 테마도 여러 가지 소재가 사용되었다. 제도중심, 사상의 변천과 문화중심, 전쟁을 테마로 엮기도 하고 근대이후에는 막스의 영향으로 경제중심의 주제로 논하기도 한다. 따라서 원시공산-고대노예-중세봉건-근대자본-사회주의의 경제체제로 변이되는 과정을 역설하였고 이를 원용한 역사학자들은 특히 중세봉건사회를 거치지 않은 국가는 선진국으로의 이행조건을 갖추지 못함을 공식화함으로써 역사과정에서 억지로 봉건사회를 끼워 넣는 헤프닝을 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역사기술과 회전력의 동력은 대중 중심의 국민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짐이 곧 근대화의 인문적 바탕이며 보호해야 할 중요한 가치다
한국의 역사기록은 대단히 엷다. 특히 조선시대 이전에는 기록이 없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근접국가간의 학술적 교류가 빈약하고 외부로부터의 기록문화 약탈이 빈번한 관계로 국내에 남아있는 사적기록이나 유물등이 적은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고조선 시절부터 조선의 역사까지의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는 영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고려 말이 그랬고 일제시대가 그랬다.
단절이 있음으로써 외부침략세력의 입맛에 맞게 삭제도 이루어졌을 것이고 조작도 있었을 것이란 추론은 가능하다. 또한 완전한 자주국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 시대도 상당한 기간을 할애 당함으로써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설계되었으리란 추측도 가미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 가능할까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주춤거릴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물과 유적은 세월을 따라 희미해져 가고 매장물들은 더 깊은 곳으로 묻히고 있기 때문이다. 영속적이지 못한 과거와 현재를 토대로 자유로운 대화가 폐쇄된 상태에서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호사로 느껴진다
다른 부분에서는 혹 몰라도 역사에 대한 진실 찾기에는 한반도 전체가 대화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상과 이념과 체제를 넘어 선조의 기록을 찾는데 걸리는 장애물은 역사숨기기의 예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고대는 기록과 증거물이 남의 땅에 위치한 사정상 연구가 부족하다고 치더라도 근세이후로는 제대로 기록해야 했는데 그 기록이 대단히 왜곡돼 있는지 단순한 상식으로 비춰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역사학계의 혹자들은 고려시대 김부식의 사대적 모화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위 자주적 사관을 버린결과 자기발전을 꾀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경향 때문에 몽고의 침략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고 자기모순 속에서 <부원세력>을 잉태시켜 국체의 극복과정을 놓치면서 도 다른 중원세력의 명을 스스로 끌어넣은 결과를 낳았다고 논한다
또 다른 혹자들은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보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상 완전한 종속보다는 자율적 종속을 취한 실리주의에 의존했다고 본다 하더라도 국가 내부적 정체성이 원활한 견제와 토론문화에 의해 건전하게 유지되었으나 서인의 인조반정에 의해 일당독재화 되고 발전 동력을 상실한 채 독선적으로 표류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구한 말 외세가 점증하던 시절 대처능력을 잃고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허황된 이이제이를 부르짖다 일본이라는 가장 가까운 세력에 농락당했으며 집권세력들도 강제해체 당하거나 <부일세력>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중심에는 이와 같은 시각들마저 일본이라는 식민지 종주국의 영향아래서 제기된 문제라 볼 수 있고 더러는 최근에 와서 주장되긴 했으나 워낙에 강한 친일사관의 터전에서 반대논리로 생산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사의 연구는 미증유의 과제이기도 하며 질기고 질긴 <방해의 장애물>을 배제한 시각에서 같은 결과가 도출 된다고 해도 다시 검증해보아야 할 역사이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느냐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먼저 철저한 자기반성과 잃어버린 과거를 찾고 그 실체의 토대위에서 더해야 할 것과 빼야할 것의 민족정신의 선택이 있어야 미래를 향한 길이 훤하게 트일 것이다
의문을 향한 집요한 추적의 시간은 길었다. 아마 앞으로 남은 시간도 진실과 비슷한 무
엇을 찾는데 주어질 것 같다.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다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한편으로
는 곡학의 부작용에 끔찍하기도 하다. 보편성이란 기준 앞에서 개인의 지식은 재단되
어야 하므로 어쩌면 <지록위마>의 자기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 시각을 너무 보편성에 기댄다면 내면을 가리는 기준에 의해 글을 쓰
는 것이 자기검열에 걸려 자유롭지 못함을 경계하여 이하 느낀 바를 가감 없이 서술하
고자 한다.
현재의 역사기록은 도무지 인과관계의 앞뒤가 맞지 않기에 “사람이 살아 온 기록인데
연결이 되지 않는 모호함"을 향한 분노와 의문에서 출발한 역사공부가 자료만도 수 백
건에 달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서양의 검은 세력들이 넓혀가는 침략의 지평에 <기독교
>라는 핵심어가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였고 역사와 현재에서 기독교를 삭제한다면 사
건의 주행위자와 보조행위자의 위치가 바뀜에서 오는 이해의 난삽함에 아래와 같은 미
완성의 개연성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읽기를 함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면 <빠져있는 단어. 기독교의 그림자>가 있
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다. 물론 종교 본연의 자세와 임무로 돌아가자는 양심적 외
침도 없는 것은 아니며 그런 측면에서의 기독교는 타 종교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함이
옳다고 본다. 오히려 정교가 분리된 종교인의 구도에 긍정적 의미를 두며 그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검은 세력들에 수단적 도구로써 제공된 기독교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 역기능을
파헤치면서 이러한 시각이 옳다 라는 당위성보다는 개연성에 무게를 두며 또 다른 측
면의 시각도 있을 수 있슴에 의미를 둔다. 기존 역사 서술의 집요한 반복에 의해 굳어
진 형태를 깨기가 쉽지 않으며 자료도 두텁지 않아 전후 사정을 참고하여 주관적 추정
이 많다. 이하 역사에서 배제된 단어 중 한 단어인 <기독교>를 복원하여 서술한다.
세계역사의 현재시점까지를 짧게 요약하면
" 기독교라는 도구를 무기로 유럽의 종교세력과 세속군주들이 지구를 강탈한 범죄카르
텔을 국제화라 읽는 것" 이라 정의해 본다.
먼저 기독교의 성립과정에는 많은 설들이 존재하나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국가는
단연 로마였다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이
사상의 다양성이었다. 그래서 당시 로마에 저항했던 유대교도들의 응집력의 힘을 차
입하여 “기독교”란 종교를 축으로 사상통일을 강제하였으며 유대교들의 저항은 통합
의 속도와 강도를 높여주는 <안티기제>로서 활용되었고 그 프레임은 이후 지금까지
유용하게 도구화 되었다
.
기독교로 사상이 통일된 침묵의 천 년동안 자산과 기록의 독점으로 세속군주들과 종교
권력들은 <카르텔>을 구성하게 되었고 그들만을 위한 <황금의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점차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중세 기독교 사상통일로 유럽 털어먹기- 17세기 전후로 남아메리카 대륙 털어먹기- 18
세기 전후로 북아메리카 털어먹기- 19세기 전후로 인도와 아프리카와 이슬람의 서아
시아 털어먹기- 20세기 전후로 아시아 털어먹기
전위부대로 항상 기독교 선교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교도의 땅으로 생명연장기술
인 의료(심벌이 십자가인 것은 우연이 아님)와 문명의 과학이기들을 가져다주면서 교
육을 빙자로 그들의 문화를 이식시켰다
유럽의 중남부 카톨릭 그룹, 상대적으로 기독교의 종교적 색채가 세속군주들 세력에
밀려 파를 달리한 유럽북부와 영국, 미국의 개신교그룹, 카톨릭의 로마멸망 후 마지막
황손녀 소피아를 이반 3세의 왕비로 맞아들여 로마 정통계승자라 주장하는 모스크바
공국 주변의 정교회그룹.....이들은 속으로는 야합하고 겉으로는 정쟁관계이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색깔을 띠며 세계인민들을 3분할 시켜왔
다.
AD 800년 프랑크의 칼대제와 교황 레오3세는 서로마 멸망이후 왕권과 교황권의 우위
다툼을 종식하고 성속의 담합을 성사시켰다. 명실상부한 유럽의 통합적 헤게모니가 완
성되고......로마 고전문화, 기독교, 게르만 정신의 3요소를 내건.
그 이면에는 그들의 뇌리속에 박힌 “아틸라의 동방 트라우마” 가 자리잡고 있다.
기마민족이었던 훈족의 왕. 수 차례에 걸친 아비규환의 살육에 대한 원한으로 서양 정
신적 지주인 로마를 욕보인 철천지원수, 세계 제 1의 악마란 호칭을 붙여 기독교 세계
의 사탄으로 규정하여 집단적 저주를 퍼 붙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맺
어진 사상적 담합이후 또 다시 분열된 상황 앞에 맞이한 칭기스칸의 유럽습격
.
그들은 신, 구교 갈등을 봉합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성속의 재결합을 이루었다. 그
이후 급속히 진행된 유럽단일화 나아가 세계단일화 작업은 합스부르크가가 중심이 되
어 진행되었으며 합스부르크가의 대리인이었던 메테르니히의 직접적 노력의 결실은 1
차 대전 후 국제연맹을 발단으로 오늘날 국제연합으로 승계되었다. 이것이 바로 범죄
자들의 세계정부다.
제 1차 성속 결합시점 이후로 그들은 세속의 세금, 종교의 헌금으로 돈을 향한 야합된
질주가 시작되었다.. 세속은 황궁에 재물을 쌓고 기독교는 교회에 재물을 쌓았다.
그 이후로 서로의 영역침범이 있었으나 이교도나 기독교 외적인 요소에는 똘돌 뭉치면
서 이반되는 자들은 마녀사냥이라는 제목하에 가차없이 제거하게 되었다. 그들 속의
비판이라는 것은 <성서테두리 내에서의 비판>이어야지 벗어난 대가는 화형이었다. 기
독교라는 사상독재 후 <암흑의 1000년>이란 엄살과는 달리 거대교회와 왕궁지하실에
서 <세상을 털어먹을 꼼수>를 연구하였고 그 실행의 시발점이 곧 <르네상스>(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그들의 속내를 봄)
서양에서의 학문과 예술 모든 것은 기독교로 통하기에 오늘날도 그 한계선은 지켜지고 있다
그들이 주장했던 합리론 자체도 기독교를 뛰어 넘지는 못한 것이고 베이컨 주교가 설
파한 경험론조차도 그 한계 내에서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반면에는 존재자체를 사유방정식의 괄호밖에 끌어내어 공통인자화 시키면
서 존재의 회귀성이 “태초의 창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즉, <존재>에 방점이 찍
힌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앞세워 심지어 찰스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우생학조차도 학
문으로 포장된 침략의 도구로서 활용되었을 뿐 현재에도 절대자에 의한 창조의 개념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이 동양의 관념을 원용해서 생산한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사상적 배경
에는 헤겔의 변증법이 뇌관역할을 하고 뒤이어 여러 유파들이 난해한 말장난을 덧붙이
고 마르크스적 해석이 첨가되어 마치 존재론적 현상인 것처럼 위장하면서 전 세계를
프로파간다의 대상으로 노벨상을 미끼를 삼아 각종 모방트로피를 증정하면서 세상을
덧칠해 온 것이다.
철학이나 사상에서도 이와 같은 양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시기에 맞춰 필요에 따라
그들의 목소리는 변한다. 롤스의 효율적 정의와 센덜의 배분적 정의가 <같은 정의의
개념>이지만 180도 다른 각도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또 말해 무엇 할까. 조건 값의
미세한 조작으로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기술적으로 유도해 내는 스킬은 사기술의 정수
라 할 만하다.그 배후에는 철저한 목적론적인 학문적 조작이 감행되면서 말이다.
종족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유대교를 가상의 적으로 설정하고 기획된 목적을 위하여
항상 전쟁전면에 내거는 짝패의 속임수도 자행되어 왔다. 로마에서부터 시작된 이 프
레임은 현대에 와서 “일루미나티”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용어들도 그들이 만든 “연
막”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을 비롯하여 그들의 반대편에 세워 적개심을 일으켰던 유발인자인 유대교
는 서서히 유태인이라 변형되어갔고 늘 사냥감으로 전장에 풀어졌으나 그 이면에는 사
냥을 핑계로 대다수 민중들만 희생되었다. 그 방식은 20세기 과장된 홀로코스트를 지
나 오늘날에도 유전되고 있다. 흔히들 언급되는 “국제유태자본” 이 바로 21세기 사냥
을 위한 인공제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들이 악의 축으로 몰아가는 국제유태자본의
본질은 그들이 만든 하수인에 불과한 위장유태인들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그들의
원초적 행각을 유태인이라는 장막 뒤로 감추는데 있다.
그들의 본격적인 강탈욕구를 불지른 것은 성경 다음으로 베스트 셀러가 된 마르코 폴
로의 <동방견문록>이며 이 유혹은 외부세계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위서인지는 불
문하고.
동양의 <황금의 나라>(동방견문록에서는 찌빵고라 함)를 찾기 위해 기독교의 일념으
로 죽음을 불사하고 대양을 건너 "일확천금"을 노린 강도떼들에게 동방의 기독교 천국
을 건설하였다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과장되게 주입시켜 결합시킴으로써 강도짓
을 종교적 신념으로 포장하여 주었다.(契丹, 거란의 야율아보기동생 야율대석의 중앙
아시아 침략으로 당시 로마와 전쟁을 벌였던 이 지역을 약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기
독교 문명을 지켜줌으로써 동방의 존이라는 왕이 세웠다는 기독교왕국의 전설을 생산
시켰다.....계단이라는 이름에서 동방기독교인들을 기리시탄으로 부른는 유래가 됨)
그리하여 중간에 발견된 중남미 대륙의 "엘도라도"를 강탈하여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
으키고 여기에 맛을 들인 그들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기
독교를 심어 1차적인 정신적 동화를 만들어 놓으면서 무역이라는 명분으로 세계 곳곳
에 상관을 설치하면서 후일의 무력침탈을 위한 스파이 행각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의 해외거점이었던 <뉴 암스테르담>은 이후 <뉴요커>로 개명되면서 일반적
으로 알려져 있는 역사의 영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유럽패거리들이 신대륙 독립전쟁
과는 달리 1억 5천만명에 달하는 원주민 대학살의 전쟁은 전쟁으로 포장된 원주민 살
육만행이었다 몇 차례의 약속된 전쟁으로 미대륙을 싹쓸이 청소를 한 다음 그들의 식
민지에 이주민을 심기위한 교묘한 작업은 시작된 것이다.
신, 구교 전쟁, 나폴레옹 전쟁, 세계 제 1,2차 전쟁의 피난민과 유태인들을 신대륙으로
몰아넣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530만 명의 미국 내 유대인 헤게모니집단을 만들
었고 소련의 유태인 박해라는 사실과 달리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는 극동의 유태인
자치구(구글어스에서 검색. 이스라엘 건국으로 돌아갔던 유대인들이 최근 유태인 자
치구로 귀환하고 잇슴)를 만들어 전쟁으로부터 보호했다.
간도와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시베리아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폐한 땅에 버려졌던 것(구글어스에서 검색요함. 현재 중국 랴오
닝 성 “환인만족자치구”라는 지명으로 존재하고 있는 한국역사속의 고조선 건국기에
등장하는 “환인”의 흔적은 오녀산의 전설을 품고 조선말 연해주와 간도강탈의 한을 간
직함) 은 한민족에 국한된 아픔이 아닌 전 세계 인민들의 고통이었고 2차 대전 후 아시
아에 광풍을 일으켜 아메리카 대륙으로 자본이동을 동반한 이민정책을 썼던 일명 “아
메리칸 드림”을 불어넣어 무늬만 국가인 <검은 손들의 제국식민지 아메리카>가 완성
된 것이다.
그들은 기마민족들에 의해 막힌 대륙을 해양이라는 개방된 공간으로 침투노선을 변경
했으며 그 도구로 <대양함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하여 거대자본을 형성
키 위해 세속과 종교는 한 몸이었으며 십시일반으로 국가단위로도 감당키 어려운 거대
자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주식회사와 은행>이었다
영란은행의 시초가 된 배경이 대양함대 건설이며 스페인 무적함대로부터 영국을 거쳐
오늘날 미국의 <제 11 항공모함 선단>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양함대>와 <핵>이란 무력수단이 전 세계를 피동화 하는 첫 번째 수단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것이다. 미국의 맨해턴 계획에 의해 제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핵의 제조도
영국을 시초로 다국이 참여한 협력 프로그램이었고 <위험스런 물건>의 직접제조는 미
국의 사막 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기반삼아 최초 해양선단의 가능성을 열었던 바이킹 함대가 용병으로 지중해까지
진출했던 관계로 맺어진 오스만투르크와 스웨덴의 끈끈한 역사적 관계를 선제적으로
해체하고 1차 대전에서 이슬람권인 오스만제국을 침몰시켜 서아시아를 전리품으로 낚
아채 막대한 황금과 “석유”라는 화수분을 획득했고 일본우익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2
차 대전으로 아시아 전역을 도륙질 했던 것이다
2차 대전의 아시아 공략을 위해서 일본의 사무라이들을 기독교 물방울로 적신지가 300
년....예수회란 이름으로 일본에 상륙하여 풍신수길을 꼬드겨 기독교의 다른 이름인 유
대교 탄압에 대한 명나라의 응징을 목표로 (만주로 지목되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실
현키 위한 잠재적 의도를 실현할 목적) 조선에 기독교 씨앗을 뿌린게 임진왜란이고 난
이 끝난 후 벌어진 “시마바라의 난”뒤에 스페인계가 식민지를 도모한다는 네덜란드계
의 속삭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페인계를 이어 네덜란드계와 손잡음으로써 막
부체제의 쇄국통치를 거들게 되었던 것이다.
쇄국통치란 일절 서양을 받아들이지 않은게 아니라 임진란으로 막부의 정권을 중국의
황제수준으로 권위를 향상시킨데 고무되어 네덜란드의 독점무역을 승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정기적으로 <화란 풍설서>란 국제정세 보고서를 막부에 제공하고
대신 자신들의 독점권에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후일에 있을 동양침략의 밑그림을 그리
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막부는 점점 동화되어갔고 다이묘들 중에는 기독교 교도
들이 급속히 늘어갔다. 베어백 주교에 의해 막부의 다이묘들을 이합집산 시켜 주도면
밀하게 기획된 명치유신 그 뒤에도 어김없이 기독교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었다.
이리하여 기독교에 물든 막부휘하 다이묘들은 군국주의자로 변신하게 되고 일본천지
는 서양기독교 세력들과 손잡은 깡패들에게 접수 당하게 되고 그 화는 동양전체를 악
마의 소굴로 빠지게 했고 동양 12개국이 수 천 년 동안 축적한 금, 은 ,보물, 서적 등 도
대체 얼마의 재산을 강도질 했는지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의 악랄한 짓을 저질렀던 것
이다.(“야마시타 금괴의 비밀” 이란 자료와 조선말 “왕궁의 사금고였던 ”내탕고“재산,
고종의 금괴, 천문학적 국채발행한 돈을 빼돌려 국가를 해체해 버린 친일파와 반일파
들의 사기행각은 후에 그들의 발판을 굳히고 검은 세력들의 프로젝트를 돕는 기지역할
을 수행한 기록도 찾아보아야 함)
무엇보다 뼈아픈 건 수 천년 축적된 지식인 역사기록을 빼돌려 자신들의 진화와 동양
통치술의 교본으로 재활용하면서 “극동인민들을 다스리는 <분열과 이간의 이이제이
>”를 위하여 거짓 역사로 포맷시켰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양세력들은 대륙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고 해양세력의 공격에 노출되어
대양함대의 공수전략이 용이한 일본을 전략적 요충지로 하고 필리핀, 대만을 전술적
거점으로 삼아 그것을 지렛대로 이용하여 단순한 사무라이들에게 “아시아 전체의 일본
제국주의화” 사탕을 물렸고 그런 상황적 논리를 이용한 이토 히로부미류 등의 “기독
교에 물든 서양 유학파”에 의해 아시아 전체가 강탈되었으니 기독교는 서양의 스파이
였던 셈이다.(“일본권력 배후의 지하조직” 이란 자료 참조)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행동대장으로 내세우고 검은 자본을 유태인으로 변장시켜 당시
미국계 유태인 야콥 시프의 천문학적인 자금지원으로 청일, 러일전쟁을 후원하였고 상
해의 사슨가 등의 유태인, 일본의 닛산 콘쩨른, 현대의 영상문화의 창조격인 닌텐도의
뿌리등 아시아 전체의 전진기지로 만주국을 건설하겠다는 프로젝트는 드러나지 않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륙침략의 전초기지육성 역할을 담당했던 일본육사는 육사출신들을 중심으로 야스쿠
니 신사의 주인공인 요시다 쇼인을 비롯하여, 료마, 후쿠자와 유기치, 이토 히로부미
등 개화파들을 내세워 기독교 아편을 맞은 조선의 개화파들과 중국의 강유위,증국번,
장개석,손문,원세개,등소평등의 조력자들을 키웠다.
이들은 후일 극동아시아의 국가를 강탈한 일본 군국주의자와 개화파, 조선 골통수구와
개화파, 중국 상하이방과 친 서방 코뮤니스트로 연계된 범죄자 클러스터를 형성하게
되었고 서양세력들이 던져주는 신식민지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고의범적 범죄
실행자가 되었던 것이고 대리인들을 통해 아시아를 공략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구도>를 그 중심부인 한반도에 배치시키면서 20억에 달하는 동아시아의 인민들
을 옥죄어 오고 있다.
현재 동아시아의 계보가 2012년을 변곡점으로 하여 박정희-박근혜, 김정일-김정은, 시
중쉰-시진핑, 기시 노부스케-아베, 아키노 1세-아키노3세, 이광효-리센룽으로 승계되
는 것이 우연이라고 보는 바보는 없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대중들과는 남다른 <정치적 스킬>을 상속한 세습자들이란 시각으로 바라보기
를 한다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의 울타리>에서 던져주는 <분열재료>를 물고 끝
없는 설전에 세월을 소비할 것이다.
그들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세계사. 누적된 기록은 전쟁의 생산이며 수요자는 늘 99% 인민들이었다. 범죄자 카르
텔은 기독교를 앞세워 앞으로는 평화와 사랑, 믿음, 소망을 외치지만 그 구호의 당위를
위해 확대 재생산된 성전이란 이름으로 전쟁은 계속될 것이며 공산주의, 테러 등의 소
스를 계발하고 경제적으로는 “디폴트”를 제조하며 유혹과 공포는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달러>를 만들고 세계의 곳간를 턴 황금과 보물을 바탕으로 금본위제로 기축
통화를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불태환으로 전환하여 종이를 황금으로 만드는 꿈의 연금
술을 완성한 것이다. <유로>와 <엔>은 명칭만 다를 뿐 또 다른 달러에 지나지 않는 것
이다
국가를 범죄에 동원되는 숙주로 이용하고 전쟁에 소비되는 돈을 부의 원천으로 삼는
검은자들의 정체. 다국적 기업을 만들어 국가를 장악한 클러스터들의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금융의 대차거래. 그것은 완벽한 국제범죄인 내부거래이자 순환출자이다. 마지
막 완결판은 무엇이겠는가. 신의 예정에 의한 것 같이 체념적으로 받아들인 자본주의-
공산주의-사회주의 도식의 마지막 프로세스. 순환 출자된 다국적 기업들에 의한 영원
히 지구의 세금 털어먹기 그리고 헌금 강요하기. 프로그램에 강제참여로 개별주체들을 <렌트화> 시키는 것.
이미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광고는 세뇌됐고 사회주의로 가는 이정표에는 “복
지국가”라 적혀있다. 다국적 기업 재화의 수요자이자 세금공급자로서 영구히 노예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이 이루고 싶은 불멸의 제국인 것이다. 목적을 위한 스타인물
만들기, 광고에 의한 명품 만들기 뒤에는 <맹목적 믿음>에 기초하는 기독교 문화의 터
전. 엄밀히 말하면 사람과 물건에다 <의식의 중앙집권>을 불어넣어 그들의 통치를 효
율화 하는데 있다.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조성될 듯한 <기본소득제>가 과연 누구를 위
하여 울리는 종소리가 될 런지 매우 우려스러운 이유다
.
그들에게 있어서 국가란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인민들에게 강요된 <독점적 정
체성>을 만드는 도구에 불과하다. 인민들이 깨어나야 한다. 즉, 각각의 국가가 애국심
을 강요하게 되면 그들의 독과점적 이익만 늘어난다. 예로 다국적 자본인 삼o 과 소0
가 서로 애국심 경쟁을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한일 양쪽 국민들이 독과점 피해자가 되
는 것이며 전체로 확장되면 지구전체가 애국심에 기댄 독과점 시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의해 기획된 애국심은 국가의 세금으로 범죄자 클러스터의 자본인
다국적 기업의 광고일 뿐이다. 국민이 주인되는 세상이 되어야 애국광풍에 의한 독과
점의 피해가 줄어들 것이고 국가 간 배타적 이익을 제거해면서 세계전체의 공리적 후
생이 증가한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제로섬 게임이란 공갈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선은 어떠했는가
임진왜란 전부터 유태인이란 족속들이 원나라의 패망과 함께 명나라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여 한반도로 넘어오게 되는데 그들이 성씨를 세탁하여 조선에 기생하게 되고 임
진란 이전부터 서서히 유입된 기독교도들이 임진란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대량유입하
게 되면서 이들은 은밀한 접촉과 함께 내부의 간자노릇을 담당하였다..
역사학자들도 원인을 규명할 수 없어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임진란 직전에 발생
했던 조선 최대의 정여립 모반사건. 강직하던 선비들 1000여명이 죽어갔고 정유재란
직전에도 꼭 같은 내용과 방식으로 이몽학의 반란이 있었던 것은 우연일까.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자로 불렸던 정여립의 평등사상. 300년 후에 경주의 동굴에서
영적체험을 얻었다는 최제우로부터 <평등사상>의 해명을 들어야 할 것 같다. 국난을
앞에 두고 <만인평등>이 등장하여 순진한 이들이 희생되었고 나라가 통째로 털렸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 당시 정여립 사건의 키워드에서 빠지지 않았던 인물이 유성룡. 점점 조여 오는 손가
락질을 피해 사직서를 내고 잠시 낙향하였다가 임진란이 발발하자 다시 등장하여 이순
신, 권율, 원균 등을 기용시키면서 조선병권을 장악하게 된다. 물론 임란 전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던 대마도 도주 쇼 요시토시를 중개인으로 하여 조선과 일본의 막후
조정 속에서 이루어진 <통신사절 문제>에서 발생한 김성일과 황윤길 논쟁의 진실은
더 많은 연구를 기다리며 조선 선비의 표상 유성룡이 터 잡은 안동 하회마을에 기독교
가 절반이라는 의아한 사실 확인을 위하여 일부러 여행을 다녀온 뒤에 착잡한 심정으
로 며칠 동안 정신이 산란했었다.
개전 초기에 상부의 명령도 거역하고 원균의 구원을 뿌리친 채 몰살당하게 방관했던
전투. 정유재란 마지막 결전. 노량에서 총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왜선 500여척을 수
장시켰다는 불멸의 영웅 이순신. 순천왜성에 거주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군사 1만 5천
여 명의 퇴로를 끊어 전멸했고 고니시는 부장 몇몇과 도주하게 되고 명분을 잃은 고니
시는 임란 후 일본의 권력쟁탈에서 도쿠가와 이예야스 편에 섰던 카토 키요마사에게
무장해제 당함으로써 이를 기화로 토쿠가와는 당시 흐름이던 스페인계를 물리고 네덜
란드계로 옮겨간다.
임진왜란 전후 많은 애매한 부분이 시간의 격차로 묻어가기에는 상당히 매끄럽지 못하
다. 많은 연구가 더해져 좀 더 환하고 뚜렷한 역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임진란 후반 조선에 항복한 왜인들( 항왜라 지칭함)이 공식적으로 1만여명이고 비공식
적으로는 이보다 훨신 많았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의 기록)
투철한 크리스찬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카의 조선병영에 포르투칼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파견되어 전쟁 중에도 설교를 할 정도였으니 당시 일본군의 종교성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항왜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경상북도(청도, 대구, 안동, 포항, 울산 등)와 청으로부터
유입되던 문화의 가장 가까운 기착지가 산동반도 건너편 충청남도 남양만이었고 하여
조선중기와 후기 기독교도들이 주로 충청남도와 경상북도에 다량 분포했다.
항왜들을 평가하는 시각은 조총의 제작에 기여하고 군사작전능력을 높이 산다는 측면
과 전쟁 중에도 적진에 스파이 노릇을 했으며 임란 후 북방으로 배치한 결과 이괄의 난
을 유발하여 청(청이 단위국가로 탄생하기 전 임진란때 누르하치는 포르투칼에서 수입
된 조총으로 무장하였었고 조선에 군사파병을 제의하기도 한 부분은 명나라에서 피신
했던 유대교도들의 역할이 있엇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함. 이 부분의 역사도 연구되어
야 함) 을 조선에 불러들여 인조의 남한산성 굴옥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다는 역기능적
인 측면이 대립하고 있으나 근본적 자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항왜들은 해방이 되자 우록동, 청도 등 집단 취락지를 알고 있는 조선민중들의 보복이
두려워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남쪽으로 일부는 북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으
나 친일을 물려받은 정권이 식민지 상태를 단죄하지 못하고 친미로 용해시키게 되자
다시 귀환하게 되었던 것이다.(일본태생으로서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 등에 상당수
가 포진됨)
기독교에 감염된 항왜들과 일찌기 명나라의 보복을 피해 잠입하여 기생하고 있던 원나
라 색목인 출신의 유대인 기독교도들(안, 장, 이, 김, 조, 석, 문, 고씨 등으로 위장)은
조선말 적절한 시기에 일본의 사주에 의해 동학( 유일신, 시천주 앞에서 만민평등의 교
리는 천주교....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란 말은 후에 손병희가 덧붙임)으로 창건되고
외세를 끌어들이기 위한 고의분열에 협조하게 된다
그 당시에 동학의 접주들과 토벌의병들이 한 통속을 유지하며 분열과 약탈 ,난동을 전
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며 아시아를 식민지 골짜기로 밀어 넣은 청일전쟁을 유
발케 하였던 그 지도자들 중에서 “무력항일 의병” --해산군대와 더불어 전국 15만명이
참가하여 6만명의 희생을 낳았던 -- “정미의병에 참여하지 않았었고 후일 겉치레 3.1
독립선언에 동학의 후신 천도교와 개신교가 주축을 이루어 민중들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던 아이러니 뒤에는 이러한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역사에 굵
직한 이름을 올린 "그들만의 선민"이라 할 만한 일명 "귀태"들이 바로 이들 상속자가 대
부분이다.
일본 흑룡회의 전신 “천우협”이 지원한 자금과 총기로 무장된 동학과 토벌의병들에 의
해 고의적 분열확산은 서양세력에게 이용당한 대원군과 개화파들의 자기 속셈으로 인
하여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급기야는 아시아 전체로 화약 냄새가 진동하게 만들
어 버렸다. 이와 동일하게 유대인의 추정을 받고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인 스촨성 객가
(유대인들로 추정 받고 있슴)출신들에 의해 아류기독교로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켜 중
국을 흔들고 그 이후 등장하는 중국개화파들이 꼴라보 역할을 함으로써 국토가 해체되
어갔고 종국에는 할양되는 비극적 공식과 등식을 이루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미 민중의 친구인 듯 정적노릇을 하는 속임수의 프레임은 시작되었고 <친
일파>와 <반친일파>란 이분법 구도속에 교묘히 숨어듦으로써 감쪽같이 사라진 <민중
의 역사>로부터 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내민 증거 - 고난 속에서 문명을 장악해가는 유태인의 진화 -<시온의정서>를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탐독하게 되며 확신하게 되었고 자신들도 <선민>이 되고자 국민
들을 인간이하 취급을 하게 됨으로써 검은 세력과 유태인들의 위장된 짝패공식은 후일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자신들이 점령한 땅은 기독교의 성전을 위한 것이고 살육은 그런
과정을 이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조선말 동학에서 본격적으로 목적을 드러낸 기독교는 그들의 자식이나 젊은 인재들을
찍어 기독교의 후원으로 유학을 보내서 그들의 생각을 접목하게 되었고 조선 청년들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던 유럽과 미국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내용보다는 겉치레에 익숙해
진 청년들은 귀국하여 점점 양식의 거드름을 피고 기독교에 감염되며 <선민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종교적 맹신이 없었더라면 전쟁 중의 각종 잔인한 대량학살은 없
었을 것이다
일제시대에도 기독교 세력들은 편을 나누어 친일과 반일의 선봉에 섬으로써 진정 나라
를 위한 충정의 인민들이 낄 자리는 없었다. 물론 식민지 통치프로그램상 모조된 적의
역할이 그들의 편에서 친일하는 역할보다 더 중요한 존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민
중들의 울분과 저항을 녹여내고 등을 두드리는 척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엔 <비폭력.
무저항> <실력양성론>등을 내세우면서 민중의 뇌리에 현실적 체념을 심어주는 역할
을 담당하기에.
해방이란 단어로 희망에 부푼 대한민국은 이제 같은 피부의 황색대리인 통치를 접고
본격적인 직접통치시대로 접어든다. 일제시대의 통치술은 미군정청을 통한 색깔바꾸
기 작업에 성공하여 친일은 반공애국으로 반일은 용공진보로 재편된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수립의 근저에 기독교는 도 등장한다. 이승만 정권 초기 장면특사는 교황청을 방
문하여 남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게 되고 교황청은 유엔을 움직여 최초승인을 한 미국
을 시초로 각국의 승인을 받는데 성공한다. 마치 이승만 정권의 노력에 의한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데 세뇌된 기억을 정면으로 도전할 용기가 부족
하다. 동학난 때 동학접주를 지냈던 김구와 토벌군으로 참여했던 안중근의 관계, 동학
접주였던 박성빈(박정희의 부친) 과 토벌군에 참여했던 윤치소(윤보선의 부친). 국정
역사교과서대로 해석하면 민족과 국가의 신념에 터잡아 서로의 목숨을 거두는 사이였
었는데 어떻게 공존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친일과 반일>, <반공과 용공>, <
민주와 반민주>의 본질은 외면한 채 투쟁으로 일관된 진영프레임 속에 빠지게 하여 민
중을 해체시키고 분열시키는 <공모적 적대관계>의 대칭적 관계는 계속해서 이어간
다.. 지나온 역사의 궤적을 삭제하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하다.
5.16 군사정변을 두고 윤보선의 이상했던 행적, 그리고 장면의 방관 등이 그냥 독자적
인 행동으로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태도이지 않았는가.
유엔군의 점령하에 놓여있었던 상황하에서 독자적 구데타라?
유엔이 막지 못한 이유가 구데타와 반구데타 세력이 다툰다면 북한의 침략을 유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중국 비밀외교문서 공개로 드러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북한은 1963년까지 경제부흥정책에 관심을 가지다가 남한의 구데타에
의해 국방정책으로 급선회하는 정책을 택했다는 역설을 읽을 수 있다. 변명은 좋은 이
유가 되지 못한다.
서양의 검은 세력들이 수세기 동안 인접지역을 식민화한 공식을 알제리아 독립운동가
<프란츠 파농>은 1950년대에 <대지에서 저주받은 자들> 이란 책에서 말한다. 제일 먼
저 <사이비 민족운동가>를 그들의 하수인으로 세우고 순차로 <군부세력> <사이비 민
주주의자> <노동조합>이라는 공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은 이 공식에서 자유로운가
오늘날 동아시아의 흐름은 그 연장선에 서 있슴을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이며 영혼을
빼앗긴 핫바지들만 설쳐댄 지나간 역사와 오늘의 시간들을 망각의 기억 속에 감추면서
“현실”이란 이름으로 순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잃어버린 100년을 잘라내면 현실의 시
작은 100년전 그 시점이 될 것이며 잃어버린 시간들은 그들이 만든 “가상의 시공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그들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회복할 것인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들을 극복하겠다는 것인가
한 번도 타국을 지배해 본 경험이 없었던 일본이란 나라가 아주 정교한 식민지 통치프
로그램으로 아시아의 광활한 지역, 특히 조선을 꼼꼼하게 단계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
던 배후에는 로마로부터 답습해 온 서양세력의 제국식민지 원본프로그램이 있었고 검
은 세력들의 비밀조직(당시 CIA의 전신 OSS를 비롯한 제국들의 비밀조직들이 아시아
판 식민지를 위한 비밀활동)들이 간접적인 협조를 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전 세계를 강탈한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정치 외교 경제는 그들의 현란한 요설이며 세계
정부를 구성하기위한 예비적 행위라는 터무니없는 음모론 등은 그들의 행위를 숨기고
마치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사를 <신의 예정설>로 이를 받아들이라는 그들
의 사기술을 구체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서양암흑자본 0.01% 세력들에게 농락당한 지구의 재앙. 그 조력자인 아시아의 꼴라보
들. 그들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 철저히 교육받은 매뉴얼에 입각한 의도된 변장술.
기독교에 의한 영원한 세뇌. 자기 암시에 빠져서 그 굴레를 벗으려고 하는 자발적 몸짓
조차도 사탄의 행위로 규정 지워버리는 조직문화....군국주의 파쇼의 조직문화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음이다.
그들의 지배를 벗어나 참된 자유를 회복하고 미래를 향한 행복을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는 세뇌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다. 특히 기독교에 젖어있는 순수한 교인들, 기독교로
가장한 1%를 위해 동원된 좀비들에 가까운 이들이 자기본질을 정확히 꿰뚫을 때 비로
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A-MAN의 진실이 혹여 인민들을 억압하
는 가상의 수단인 Z-MAN이 될 수도 있슴을 알았을 때 말이다.
검은 세력의 협력자들이 조성할 언론의 편집된 과학과 수학적 패러다임의 유혹, 그리
고 총구의 공포를 극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직접적 모멘트 보다는
지금까지 세뇌된 지식을 버리기가 더 두려워서 말이다. 습관에 젖은 타성으로 인하여
코끼리가 바늘구멍을 유유히 지나가는 것보다 힘들겠지만. 99%가 진실을 자각하게 되
면 남는 것은 1%의 거품으로 위장된 <허장성세>의 범죄자만 남을 뿐이다. 그들의 정
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차치하고 개미가 터널을 지나가듯
아주 쉬운 일인데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귀태>들에게 고한다.
종족의 피를 이어왔든 종교로써 물들었든 수 세기에 걸쳐 세탁으로 얼굴은 황색으로
바꾸어 그들의 조력자로서 동아시아를 피폐케 하고 검은 세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아시아 국민들을 농락하였다. 그들이 내민 약탈의 면죄부가 너희에겐 바이블일지언정
세상 어디에도 인민위에 군림할 수 있는 <선민>은 없다.
그런 요망스런 미신이 지배를 위한 거짓임을 알면서 인민을 벌레 취급한 너희 귀태들
은 오늘도 온갖 요사를 떨면서 그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달을 떠는 꼴들을 보니
역겨움에 치가 떨린다.
최근까지 <신천지>, <십자군 알바단> 등의 이미 몸속의 기생충이 된 기독교를 이용하여 이 땅을 파먹는 살인 진드기.
니들이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은 수 천년의 집적된 자산을 털고도 모자라 미래의 부마저
털기에 혈안이 된 작금에 계속하여 인민을 배신한다면 그 마지막은 비참하게 될 것이
다. 더러운 짓을 멈추어라. 아무리 숨기고 왜곡해도 깨알 같은 역사의 흔적은 이 땅위
에 뿌려진 인민들의 피와 뼈속에 그대로 녹아있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 그것은 오늘의 거울이며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다.
과연 우리는 “역사라는 과거와 끊임없는 통화는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래전에 끊
긴 신호 없는 수화기에 대고 계속 넋두리만 해대고 있는가”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많은 역사가들이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 모두가 침묵해버린 <기독교> 코드가 삭제된
역사를 이해하기란 수학이나 물리학보다 더 어려웠다. 곳곳에 삭제된 역사의 금칙어를
복원해야할 의무는 오늘을 사는 세계인민들의 공통된 책임이라 본다. 의문에 대한 의
심 없이 혹은 민족이나 국가 나아가 세계전체의 정의를 세운다는 건 엘리트로 가는 길
에 방해물이라는 걸 미리 전수받았던지 이러한 교본들을 암송하여 100점의 완벽을 추
구하는 소위 “엘리트”들이 너무 존경스러워 불쌍해 보인다.
세계를 약탈하는 검은 세력을 타도하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추구해왔던 방
법을 역산하는 것이다. 그들이 수단으로 삼아 온 기독교에서 순수 교인들을 해방시켜
서 수단의 족쇄를 풀고 목적의 위치로 돌려 본래적 의미의 종교로 귀환시키는 것.. 그
리고 가상의 적을 만들어 인민들을 매스 미디어를 활용하여 <이념의 세계>로 끌어 들
이고 편을 갈라 서로 싸우게 하였으므로 그 가상의 적에 매몰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늘
짝패들을 경계해야 할 이다.
<역사>란 개념을 단지 <지나온 궤적>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하여도 결론은 같을
것> 이라는 체념적 태도를 지양하고 적어도 <인위적 목적>이 제거된 인민의 자발적인
역사동인을 구축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 세기가 흘러 현재와 같은 질서가 반복되는 우
가 있더라도 말이다.
8.15 해방은 독립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약간은 수치스럽지만 해방이다. 독립이란 개
별적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인데 8.15이후 독립은 없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진정한 독립은 지금부터 시작이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 동, 서양의 진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살육과 약탈이라는 1%만을 위한 공
모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특히 선진국 G20이라는 그들만의 강제적 초대에 응하고 있
는 소수 그룹들의 <고의적 침묵>에 의한 세계인민의 약탈을 멈추게 하고 인민들도 <
진실에 접근할 권리>를 포기치 말아야 한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짝패의 프레임>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고 자칫 <
어떤 사람이 통치하더라도 인간 사는 세상은 같을 것이다> 라는 양비론의 체념으로 굳
어버릴 염려는 있지만 더 늦기전에 여기서 빠져나와<강제로 조작되지 않는 투명한 삶
>을 위한 <인민들의 세계적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투쟁의 원천이자
수단>임을 인식하면서 <역사주체는 곧 99% 인민이 되어야 한다>라는 <시대정신>을
목표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전 세계 인민들의 과제임을 상기하면서
“자각을 위한 몸살”을 앓아야 할 것이며 새로운 세상의 21세기를 여는 시작의 종소리
는 <제국의 실험실>인 이 땅에서 울려야 하지 않을까
* 많은 자료를 첨부하여 사실성을 추가하려 하였으나 각종 사진들이 올려지지 않아서 자료들의 객관성을 저해하고 또한 저자들의 저작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많아 보는 이들이 자료를 찾아보는 수고를 함게 하면서 진실에 다가서는 계기가 되엇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