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법통정부인 상해임시정부를 한 달 여간에 수립했던 애국지사이며 한국 기독교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 제 5대 담임자로 이 땅에 성령화 운동을 처음으로 주도했던 부흥목사이며 역사가요, 문인이기도 했던 현순(玄楯) 선생의 문건 중 자사(自史) 원본이 공개되었다.
현순 문건은 그가 살아온 연대(1885년-1968년)가 말해주듯 파란만장했던 한국근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증거자료로 구한말 군수(괴산, 군위)로 독립협회 발기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부친 현제창 선생의 증언 자료와 그 생애에 있었던 모든 사건을 관련 자료와 함께 정리되어있어 한국근대사를 바로 잡는 최고의 문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문건은 현순목사의 막내아들로 유일한 생존자인 현경섭(미국 명 David Hyun)옹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1991년 UCLA 한국인 교수인 양은식 박사가 전체문건의 정리와 해설과 함께 당시 생존가족의 증언을 녹음 기록으로 남겼으며 1998년 USC 한국 전통문화 도서관에서 이를 CD로 제작 보관 관리 중에 있다. 이 현순자사(육필기록)는 현순 문건의 백미로 현순목사는 생전에 같은 내용의 자사를 세 번 쓴 것으로 최초의 원본과 말년(1960년대) 다시 쓴 제 2본과 제 2본을 토대로 한 영어 본이 있다. 이번에 공개되는 것이 첫 번째 것으로 현순 목사는 말년에 본인의 자사를 영문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최초 본인 원본이 분실된 것을 발견하고 기억을 더듬어 다시 정리 한 것이 지금까지(UCLA, USC copy본) 알려진 자사 부분이다.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자사 제 1권(조상의 내력, 1919년 직전까지)은 애당초 장녀 엘리스 현(현미옥)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차녀 엘리자벳 현(현옥순)이 받아 보관 중이었으며 엘리자벳의 손자가 할머니의 유품에서 이를 발견하여 전해옴으로 공개하게 된 것이다.
본 자사를 부친으로부터 받아 간직했던 엘리스 현은 하와이 이민 통역이었던 현순 목사가 하와이 도착 2개월 후에 태어난 최초의 한국 소녀로 공교롭게도 한국 땅에서 최초로 태어난 백인 소녀인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녀 엘리스 아펜젤러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1930년대 그녀는 부친의 천거로 콜럼비아 대학으로 가 당시 그곳에 개설되어 있었던 School of America에 입교, 전 세계 차세대 지도자로 양성되는 훈련을 받게 되며 종전 직후 그는 특수요원으로 미 극동사령부에 배속되어 특수한 임무를 받고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정국의 주역이었던 여운형, 박헌영과 연루되면서 해방 후 제 3국을 통해 월북했던 엘리스 현은 월북 후 미국 스파이 혐의가 발각되면서 박헌영과 함께 처형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그가 해방 직후 모종의 임무를 수행했던 종로구 옥인동 58번지(현순 목사 사택)에 김수임이 살았고, 따라서 김수임에게 임무를 부여 했던 C.I.C. 한국 책임자인 베어드 대령 또한 이곳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어 김구 주석 암살의 배후, 박헌영, 이강국의 미국 스파이 혐의 등 해방 정국의 미스터리와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좌절된 기독교 사회주의운동의 실체가 속속 밝혀질 조짐이 보인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사(육필) 일부분을 발췌해 공개한다.
1) 선조의 내력
(가) 연주 현씨 선조는 현탁(玄卓)공으로 지나은국인(支那殷國人)이며 기자(箕子)를 따라 조선에 와서 평양에 거하며 기자의 치국을 도왔다. 때문에 이 나라는 B.C. 1130년 경 서방에서 온 기독인이 세운 나라다.
※ 기자는 단 지파의 우두머리로 기자에 살았던 사람이다. 기자는 이집트의 옛 성도로 헐버트의 History of Korea(1903년) 부분과 같은 내용으로 보임.
(나) 그 후 현족의 번거지(繁居地)는 평안도 개천, 박천(价川, 博川) 지방이었으며 고려사를 추고하면 고려 명종(明宗)때 태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켜 서도 40여성을 점령하고 왕도인 송도로 진군할 때 위총은 연주(현재의 영변)에 임시수도를 정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 기세를 막을 자가 없었다.
당시 연주 관동(延州 館洞) 부근에서 농업으로 자생하던 제 26대조 현담윤(玄潭胤) 공이 두 아들 덕수(德秀, 차자는 미상)와 함께 농민군을 지휘하여 연주성에 진군하여 위총의 수문장졸을 타살하고 파죽대세로 위총의 궁중에 쳐들어가 위총의 목을 베고 이 소식을 관군에게 전하니 명종이 이 기쁜 소식을 접하고 그 공훈을 표창하여, 대장군 평장사 병부상서로 봉하시고 관동 30여리를 그 자손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담윤공의 익호는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다.
내가 순회 전도사로 전국을 순회 할 당시에 영변 관동에 가서 담윤공 묘소를 참배하고 비석 앞에 입(立)하고 속으로 고하기를 “선조께서는 국적을 토벌하신 대장군이시요. 손(孫)은 세상의 악을 토멸하는 기독군(基督軍)이 올시다.” 하였다. 당시 비문의 한 구절을 적으면 “공지충용불하금 을지문덕 양만춘”(公之忠勇不下衿 乙支文德 楊萬春). ※ 한국사 통사(通史)에 유민사를 최초로 끌어들인 사학자(史學者)로 유태계 단 지파에 의한 한반도 유입 관련 내용이 주목되는 부분이다.
특히 영변 관동비문(제 26대 현담윤)에 새겨진 양만춘, 을지문덕 장군 관련 기록과 고려 초 농민의거 사건 등은 한반도가 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를 증거 하는 소중한 기록으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중심의 한반도 역사가 가진 설화식 역사에 일침을 가하는 아주 중요한 사료로 북측과 공동답사(탁본), 확인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하 조선 태조 이성계 등극 시 현일첨 선조가 고려 충신,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 분이었다는 내용이 있고 18대조 현수공에 이르러 천연(현 경기도 여주) 현감이 되면서 천연 현 씨 가(家)를 형성, 13대조 수겸공에 이르러 조선조 최대의 역관 가문을 잇게 된다. 특히 5대조 선조 현개근공 4대조 현후(1768년 생), 3대조 현택에 이르러서는 중인 신분의 역관으로서는 파격인 당상관 관직에 오르면서 역관(외교관)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기록한 동암 일기(현개근, 1725년 생)와 석번 일기(현택, 인조 이후)를 남기고 있어 이 자료 또한 왕족실록 중심의 조선조 역사를 바로잡는 최고의 사료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조부 현익(玄謚, 1807년 생)이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대신으로 불란서 군대가 강화에 침입한 병인양요를 언변으로 막아낸 공적으로 그 세를 크게 떨치게 되면서 서울 수표교 일대 고량거각(高樑巨閣) 10여 채를 건축하고 부귀를 향락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 이후는 부친의 구술을 토대로 대소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2) 부친 제창공의 구술을 중심으로 한 기록 중 중요한 사건들
구한말 치국(治國)은 역관들이 했다. 치국의 본부는 사역원(司驛院)으로 지금의 외교부(外交部)이니 외교, 통상, 화폐, 물화의 교통을 담당했고 한학부(漢學部), 청학부(淸學部), 왜학부(倭學部)가 있었다. 조부 익공과 백숙 제승(濟昇)공, 삼숙 제선(濟善)공이 수당(首堂)으로 황력(皇曆)을 수임했다. ※ 황실의 이재를 관리했다.
① 중요 기록(부친 증언 중심) (가)임오군란(1876년-1879년) (나)갑신정변(1884년) (다)광무연호와 무녀 진령대군 사건 (라)갑오개혁(1894년, 김옥균 시해, 동학란 기록) (마)민비시해(1895년) (바)독립협회 사건(1897년, 주동자 명단 만민공동회 등 아주 상세함) (사)의병들의 봉기
② 이하 본인이 유아시절 본 기록과 실체험기 (가)마지막 과거 장면(현장) (나)서울 서대문, 한강도하 오리동, 소사, 부평동과 인천개항일대, 왜관, 미국인 타운, 정미소, 개성인 주객 등 답사기록(1895년 당시) (다)독립협회 독립문 낙성식 참관기 (라)관립 영어 학교 입학 새로운 문물 체험(당시의 학교와 학우들) (마)도일 일본 유학기록(1900년 이전) (바)하와이 이민(대쉬리 이민 사무소) 시작과 귀국까지, 포아 유람기 필사본)
③ 이하(귀국 후 배재 총 교사, YMCA 영어 강사, 상동 공옥학교, 정동교회 시무 등) 중요 사건 기록(미공개) (가)헤이그 밀사 사건의 전모 (나)강화도 의병 사건(기록)
1907년 광무제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아 이등이 왕과 고관을 협박 왕위를 태자에게 양위하게 되니 국토가 의분으로 들끓었다. 이때를 타서 이등이 황실수비대와 시위대(恃衛隊) 강화에 주둔한 진위대(鎭衛隊)의 해산을 단행했다. 이에 병사들은 의거 보국코자 했다. 해산을 집행하던 당시 시위대 대대장 박성환 참령이 권총으로 자살, 의분의 불길을 돋우었다. 이때 일군 교체 순사(巡査)와의 교전에서 아군 100여명이 순국했고 일 순사 피살자 516인이었다.
당시에 나는 배재학당 총교사와 정동회당(정동제일교회) 부목사의 직을 맡고 있었다. 8월 중순 경 강화도에서 해산을 당한 진위대 병사들이 궐기하여 군수 정경수와 일본순사를 사살하고 갑곶포에서 일병과 접전하여 일병 십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강화읍내로 패주, 민가로 숨어들었다. 강화읍내로 진임한 일병은 진위대와 함께 궐기한 민중을 총검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난민병 수십 명이 미 감리교회당내에 은복하였다고 하여 일 순사가 회당 사방을 포위하고 방화하겠다고 하였다. 그 시에 강화교회 목사 손승용(孫承鏞)이 허진일(許進一)을 급히 경성에 보내 급보하니 조원시(존스) 선교사가 나에게 달려와 강화에 내려가 불행을 막아달라고 청하였다. 부친께서는 위험천만이라고 하시면서 만류했으나 나는 곧 응락 하고 신임 일인 경무사 丸山重俊(환산중준)과 함께 인천에서 소형 배를 타고 당일 저녁 갑곶에 도착했다. 그 시에도 강화 산곡 이곳저곳에서는 조선 병사가 저항하는 총탄이 난사되고 있었다.
丸山(환산)이 총격이 두려워 강화읍내 진입을 거부하여 그날 밤을 배 안에서 숙박했다. 당시 나는 丸山에게 “용감과 충의는 조선병사이나 일병사의 전투에는 따를 수 없다. 즉 일병은 조선 병 보다 전투능력이 우월하다”고 다둑인 후 “격전하던 병사가 도주타가 교회당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그 안에 있는 신도들은 한 사람도 격전에 참가한 일이 없으니 회당을 접수한 순사들을 철수시켜 더 큰 불상사가 없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이튿날 일 순사 수 십 인이 丸山과 나를 안내해 읍내로 들어갔다. 즉시 강화 미 감리교회당에 들어가니 손승용과 다수의 신도가 급화를 막아 달라고 간청했다. 丸山이 일 순사에게 전날 밤 내가 전한대로 그들을 설득, 지휘하여 회당 내에 진주한 일병들을 철거했다. 당일 나는 丸山과 귀경했고 수일 후에 전해진 소식에 의하면 강화교회 권사 김동수(金東遂) 형제가 가로에서 일진회 4대 강령을 공격하여 연설한 혐의로 일 순사들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였다고 하더라.
이후 해산을 당한 병사들이 궐기를 하여 의병을 지어 일병과 격전하니 의병장들은 원주에 민긍호(閔肯鎬), 기호에 허갈, 이강오, 김준, 김해산, 교남(嶠南)에 이은찬이 의병을 지휘 일병과 맞섰다. 또한 이천 읍내에서 대격전이 있었는데 일병이 양민의 가옥을 방화하고 미 감리교회 전도사 구춘경(具春景)부자를 사살했다.
국세가 파접난마 한 중 9월 초순을 맞아 다년간 폐교하였던 배재학당이 문을 열고 일시에 학생을 모집하니 해산당한 군인과 비분을 먹음은 의혈 청년 400 여명이 일시에 입학하였다. 당시 학당장은 방거(벙커)였고 학과는 영어로 보통학을 교수했는데 나의 담임과목은 수학, 이화학(理化學), 영문전(英文典), 독본, 지리, 역사였다. 또한 황성 기독청년회관(서울 YMCA)에서 부기와 이과를 개설함에 조교로 도왔다.
10월초 학부(현 교육부) 주최로 훈련원에서 관공사립 남녀학교 연합대운동회가 열렸다. 참가한 남녀 학도가 2만이었고 참관객이 10만이 넘었다. 학무국장 윤치호가 운동순서를 지휘했고 나는 배재학도 400여인을 인솔하고 참가하여 다수의 우등상을 받았다. 산회 시 400여명의 건아들이 의기양양, 국가와 군가를 부르며 대한문 앞을 위세를 부리며 복교했다. ※ 국가(國歌)는 현재 애국가와 가사가 동일함.
3) 정동교회. 상동교회 관련 중요 내용
1908년 1월부터 학당장 방거의 요구로 청년회(YMCA)에서의 수업을 중단하는 대신 배재학당에서의 영어 야학과 정동교회에서의 종교적 활동에 주력했다. 정동교회당에 유년 주일학교를 창설하고 주일 아침마다 성경을 교수했다. 그 당시 교사로 협력한 사람은 조원시 부인, 이화학당 여학생 다수와 박동완전도사, 윤선욱, 신상우 등이었다. 재적 학생이 5백여 명 이었고 평균 출석이 400명 이상 이었다. 한국 내 최고의 주일학교였다.
음력 정월포 정동회당과 인천 용동회당에서 개최된 사경회에 성경을 교수하고 저녁 부흥회 설교를 해 수 백인의 신입 신도가 있었다. 또한 종로 청년회 종교부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주일 오후 회관에서 복음집회를 인도했다.
1910년 봄 상동청년학원장 유일선(柳一宣)이 사직하고 통감부 주구로 한국에 와 종교를 어용화하려는 도번상길(渡煩尙吉)과 부동하여 소위 한양 연합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에 상동학원 이사 전덕기, 양기택, 여준 등이 회합, 나를 원장으로 선임했다. 춘기 학기 말에 상동학원 학생 60명을 대동하고 도보로 개성 박연폭포를 구경하고 귀경할 때 파주 산협 불사(佛寺)에서 1박하고 돌아왔다. 당시 졸업생 제자로 기억에 있는 원생은 중국 북경에 사는 박건병, 미주 가주 이종소, 로서아 이병휘, 본국 서상규가 있다.
1911년 봄, 백만의 신도를 모집하는 기독교연합 대 전도운동이 전개되어 나는 경성, 인천, 해주, 은율, 연안, 백천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했다. 동년 10월 10일 중국 남방 무창에 황요, 설원홍, 손문이 주동이 된 민주혁명이 일어나 청조(淸朝)를 폐하고 중화민국을 건설했다.
1914년 6월 연회에서 정동교회 목사로 20년 긴 세월 연임했던 최병헌 목사가 인천지방 감리사가 되고 내가 그 후임자가 되었다. 정동교회는 1883년 미 감리교회 외방 선교부에서 선교사로 올링거를 한국에 파송, 경성에 주거하게 하여 선교를 시작했고 그 후 스크랜튼과 아펜젤러 등이 내한하여 더욱 노력한 결과 전국에서 최선두로 설립된 교회이다.
교회 좌우측에 남여학교가 있으니 남학교는 배재요 여학교는 이학학당이다. 최초 신도들은 다섯 가정이었으나 을사, 정미의 국운은 신사, 관리, 학생, 상인, 외국 유학생 등 모두를 정동교회로 몰려들게 했다. 표면으로는 광대한 회당에 수천의 신도가 있고 예배의식도 관람할 만한 기세가 있었다.
4) 현순 목사의 한국최초 성령체험 기록(원문)
나는 강도(講道)에 전력하여 영어 및 일어 서적들을 탐독하여 시대정신에 적응할 강도를 강설(講說)하였다. 그러나 청중의 감동을 볼 수 없었고 또한 목사의 신금(薪金)을 주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지력(智力)을 버리고 영력(靈力)을 구했다.
1914년 7월 초 전도사 김종우를 끌고 이른 새벽에 남산에 올라 송림(松林) 속에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나의기도 제목은 “영력”이었다. 당시의 정세는 6월28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가 오스트리아 육군의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의 범슬라브주의 비밀 결사에 속해 있던 프린치프라는 19세의 청년(학생)에게 구몰(俱沒)된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7월28일)의 도화선이 되었다.
8월 중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연합하고,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 연합하여 흔천동지(掀千動地)의 격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지구의 반편(半片)이 부비(浮飛)할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8, 9, 10월, 3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른 새벽 남산 송림을 찾아가서 영력을 기도했다. 영력은 전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력에 도체와 부도체가 있음같이 영력에도 도체와 부도체가 있다. 전력이 철에는 잘 통하다가 유리(琉璃)를 만나면 불능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력은 사람의 마음에 잘 통하는 것인데 욕심(慾心)과 악(惡)을 만나면 불통하는 것이다. 그럴진대 내 마음에는 욕심과 악으로 충일했다. 재욕(財慾), 음욕(淫慾), 탐욕(貪慾), 영욕(榮慾), 허욕(虛慾)이 충일(充溢)했고 위악(僞惡), 시악(猜惡), 간악(奸惡), 포악(暴惡), 교악(驕惡)에 충일했다. 3개월간에 걸친 기도의 제목은 “욕심과 악을 뽑는 것”이었다.
10월 말에는 남산 송림 속에서 욕심과 악을 뽑기 시작했다. 그러나 욕심과 악을 뽑는 묘방도 자력에는 없었다. 기독교의 기초적 진리는 예수의 십자가 정살(釘殺)이다. 이를 믿고 나는 욕심과 악을 정살 하기 시작했다. 순간 나의 심성에는 혁명이 일어나 욕심과 악을 파괴했고 그 자리에 선과 애(愛)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산(下山) 시(時)에 남산을 들어 북산에 옮겨 놓을 듯한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일부터는 이른 아침에 정동회당 내에서 효천(曉天) 기도회를 열었다. 제 1일 아침에 모인 사람은 김종우, 정승봉, 김성근, 이원송, 홍에스더, 현순이었다. 여전히 계속하여 가는 동안 강도를 연속하여 강설했다.
그 제목과 대지는 다음과 같다. 제 1주일 아침 제목 - 죄악의 가치(죄악의 가치는 사망이니 죄악은 사람의 신(神)과 마음과 육체를 죽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 제 2주일 아침 제목 - 죄악의 세력(죄악의 세력은 사람의 기관(機關)을 파괴하며 사람의 행복을 말살(抹殺)하며 사람의 지능을 위미(萎靡)하며 사람의 진보를 조락(阻落)케 한다고 했다) 제 3주일 아침 제목 - 죄인의 지위(죄인은 고독한 지위에 서며 암흑한 지위에 임하며 위험한 지위에 임하였다고 했다) 11월 21일 새벽 회당에 들어가 묵도하고 성경을 낭독했다. 당일 회당에 가득히 모여 기도하던 대중이 홀연히 방성대곡(放聲大哭)하며 기도하니 심폐가 찢어지는 자복과 참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개인에게 위안을 주는 성경구절을 읽어주었다. 참회 기도회는 여전히 계속하여 3 주야를 가졌다. -끝-
※현순(1878. 3.21-1968. 8.11)목사는 최병헌,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협성신학교 (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제1회 졸업생(1911. 12.20)이다.
서대문교회 이주익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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