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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본문에서 정체성(identify)이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예수는 스스로 누구라 하는가, 예수는 우리가 누구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의 답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다뤄진다.
이 질문들의 답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가 돌아온 것이다,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하고, 베드로는 메시아라고 했다. 예수는 이 모든 것에 더해서 당신이 권력자들에 의해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신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의 틀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예수의 3번의 “ 수난” 예고(8:31, 9:31, 10:33-34)는 그 속에 부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
마가복음의 원래 텍스트가 부활 이야기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가복음에서 부활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셨고, 영광 중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5:35-42; 8:38; 9:9; 14:28; 14:62) 십자가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영예와 영광과 권세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스스로를 권력자들에 의해 버림을 당한 후 사흘 만에 영광중에 부활할 메시아로 규정하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자신들보다 더 사랑하고, 예수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가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아버지 앞에서 인정을 받을 자들. 제자들로서는 십자가보다 부활이 믿기 힘들었다. 인간의 유한성, 죽음은 우리가 자연의 질서로 수용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일면 나름대로 상식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영광에 대한 이해와 반응은 상식을 초월한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영광스런 모습이 3번 나온다. <1> 5000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실 때 (6:47-52) <2> 변화산 <3> 부활 (16:1-8). 모든 경우에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fear)이라기보다는 공포(horror)이다. 용기를 내어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는, 어떤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영광은 인간 세계의 수평적인 차원을 수직적으로 찔러 쪼개며 들어와 인간 세계에는 영구적인 것도 확고한 것도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이 추진하는 어떤 대단한 것들이라도 (문화, 사회 구조, 목표 등) 더 넓고, 월등하고, 휠씬 더 실제적인 틀 안에서 다시 자리매김을 하여야 한다. 예수가 보여준 영광스런 모습을 통해, 모든 인간적인 시도들은 종이 호랑이나 굳어버린 술부대와 같아서 하나님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현실을 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제자들을 과거 선지자들처럼 핍박을 받고, 예수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만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고, 예수의 영광이 열어주는 미지의 영역으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용기를 내어 행진하는 존재로 부르신 것이다. 우리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다시는 반대쪽으로 나올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 예수의 변모는 제자들을 혼란시키고 겁에 질리게 했지만, 하늘의 소리는 예수가 베드로가 고백했듯이(8:29) 그리스도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의 십자가의 세계도 진실임을 확증했다. 이 본문의 모든 이야기-예수의 변모,
엘리야와 모세의 출현, 베드로의 호소-는 구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나아갔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제자들에게 “ 그의 말을 들어라” 명령했다.
▶ 예수의 변모는 묵시적인 순간이다. 예수의 세례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로 지명했을 때나, 젊은이가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했다고 말할 때에(16:1-8)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지각과 인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밝히고 있다. 마가는 변모이야기를 8:22-10:52 사이에 배치했는데 이것은 봄과 보지 못함 특히 제자들의 무지와 십자가의 거부에 초점을 둔 가르침과 치유이야기를 함께 엮어놓았다.
마가는 변모를 제자들을 위한 사건으로 그리고 그들의 시야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예수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산으로 인도하여 그들 앞에서 변모되었고(9:2), 엘리야가 모세가 그들 앞에 나타났고(9:4), 제자들의 반응과 감정을 묘사했고(9:5-6),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9:7), 그들이 둘러보고 본것에 대해(9:8) 묘사했다. 달리 말하면 이 모든 장면은 복음의 실재를 보고 듣고 이해하고 믿으려고 애쓰는 제자들에게 말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직접 전해졌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9:7) 무엇을 들으라고? 구름위의 음성은 전혀 새로운 계시적인 정보를 전해주지 않았고, 단지 그들이 예수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비전의 계시적
내용은 예수 자신의 말과 행동 운명에 놓여 있었다. 첫 번째 수난예고(8:31), 그리고 이어지는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각오해야 함(8:34-38), 그리고 도발적인 “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9:1) 말도 바로 변모이야기 앞에 있다.
▶ 이러한 선언들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제국의 권력에 대항하는 자들이 당면할 결과들을 수용하도록 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의 권력을 궁극적으로 한때는 로마의 헤게모니의 뚜렷한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의 절정의 표현인 십자가에서 압도하리라는 약속으로 초대한다. 변모이야기는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을 강조한다.
예수가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서 있을 때에, 그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 율법과 예언자와 함께 서 있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마가복음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변화 이야기는 예수의 세례와 부활 중간에 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하기를, “ 그의 말을 들으라” 고 한다. 즉 예수의 말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의 말은 베드로가 반박한 것인데, 버림받음, 고난, 죽음, 부활이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의 정수라는 것과 십자가의 길은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필수적인 것이고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참고 막 8:34~38)
하나님도 예수도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의 죽음이 몸값(10:45)이라고 간략한 암시 말고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절규한 것을 보아 에수도 그 이유를 몰랐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수난이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서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숨겨진 신비로 남아 있다.
이유는 감춰져 있지만, 수난이 불가피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예수의 헌신은 “ 권세들” - 공포, 원한, 탐욕, 거짓말, 폭력, 절망처럼 인간성에 스며들어서 왜곡시키는 것들 - 이 그것들의 공격적이고 살인적인 응답을 촉발시켰다. 비록 그 응답이 또한 그들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비폭력적인 사랑의 힘이 승리하는 것을 드러나게 했지만. 변화는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고, 악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비폭력적인 사랑과 정의가 영원히 진실하고 신실함을 궁극적으로 나타내게 하는 권세 있는 단어이다.
십자가의 길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십자가의 길이란, 고난을 영적인 유익 자체로 여기는 것이거나 본질적으로 구원과 구속 자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죄악되고 악한 세상에 대한 보상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비폭력적인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대한 예수의 증언을 파괴하려는 악한 권세 때문에 죽었다. 그의 수난은 악의 악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변형력, 강력하고 단호한 사랑, 악을 지배하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고 노출시키고 변형을 추구하는 사랑이다.
기독교인은 단지 선하게 되고 악을 피하는 수동적인 사랑을 보여달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십자가의 길도 예수를 위해 개인적인 고난을 개인적으로 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은 활기차고 단호하게, 지배와 착취와 탐욕과 기만이라는 세상의 권력 투쟁을 거부하는 사랑을 통해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의로움을 활기차고 단호하게 추구한다. 변화 이야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대한 상반되는 주장이 궁극적인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예수의 비폭력적인 방법이 정말로 구원과 치유와 영생의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도록 요청한다. 변화 이야기는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와 같지 않고 전적으로 독특하게 드러낸다.
오늘날 소란스러운 복음주의 운동은, 주류 교회들까지도, 예수의 신성이 공공연한 진리이고 누구나 보거나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식은 계시로 알 수 있는 것인데, 계시는 하나님이 그 자신의 방법과 시간에 선물로 오는 것이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초막을 세우기를 원한다. 다투는 제자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자아가 예수의 권세와 영광 안에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이런 식의 예수론을 거부하고, 이기적인 집착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한다. 예수의 사명은 자기 자신과 큰 거래를
하는 것이나, 그의 추종자들을 그와 동일시해서 그들의 권력과 권위와 특권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앞에 내세우고, 그의 제자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16:8을 보라).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너무 익숙한 장면이라 짐짓 놓치기 쉬운 면이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보여준다.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이 변화된 모습에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또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이 변화에 너무 놀라있어서 예수께서 만져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예수, 모세, 그리고 엘리야와 더불어 구름 속으로 들어간 후 무서워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세 복음서 모두 이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정기간동안 알려지지 않아야 할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마가복음의 중심에 놓여있는 장면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즉 이 변모는 주의깊게 성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성서에 나오는 신적 현현들(theophanies)을 떠올리게 한다.
분문에서 높은 산과 구름 위로부터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른 사건 (출 24:12-18)을,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나는 대목은 예수의 부활을 (마 28:3,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또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받을 당시를(눅 3:22) 생각나게 한다. 여기서 설교준비를 할 때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이 이야기에서 설교자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을 결정해야하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가 마가복음의 원래 청중들에게 들려졌던 것만 말하기로 한다면[사건만 설명] 이 설교는 청중들이 믿건 안믿건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전달되게 된다. 또 설교자가 이 본문을 오늘날 산상경험의 모델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청중들은 비슷한 신적현현이 일어날 때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알려고 할 것이다. 한편 설교자가 이 변화사건이 예수가 “ 인자 (Son of Man)"임을 드러내려는 단순한 성서적 편집이라고 결정하면 청중들은 오늘날 이 세상에 주는 의미를 찾으려고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둘째 단계는 이 본문을 통해 교인들에게 기대하는 반응의 정도를 설교자가 고려하는 것이다: 이 본문은 교인들의 기억, 상상, 호기심에 어떻게 작용할까? 이 본문은 교인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줄까? 본문이 교인들에게 진실된 응답을 요청하도록 하기 위해 설교자는
본문이 말하려는 중심적 내용을 전하고 이러한 신적현현이 그 내용과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설교자의 주된 과제는 오늘 본문이 말하려 하는 것 즉 예수의 감춰진 정체성을 특정인이 아닌 모두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준비에 있어 셋째 단계는 이 설교를 통해 바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다.
변화사건이 신앙공동체의 삶에 이루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변화사건을 개인적 산상경험과[영성] 산 아래 보통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일상생활] 어떻게 적용해야하나? 혹은 이 본문이 신앙공동체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인가?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와 함께 산상변화의 경험을 알기를 바란다. 그러나 본문은 또 다시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산상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종종 그 경험을 신앙공동체와 더불어 나누는 법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다. 동시에 신앙공동체는 산 위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법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다.
- 설교자가 어떻게 접근하든지 간에 설교는 그 진정성에 달려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성서해석에 교인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설교자가 성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확신시킬 때 설교자의 주장을 따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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