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마5:14-16)
1.들어가면서
기독교 윤리에 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진 이유는 최근의 한국교회가 윤리적이지 못한 모습을 세상에 비췄다는 뜻이다. 곧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지만 빛된 삶을 살지 못한 결과로 이런 논의가 많아졌다고 보인다. 기독교 윤리 실천운동이라고 하는 교회병행운동이 생긴 것도 따지고 보면 지역교회와 교단들이 이 시대의 도덕적 타락을 방지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생신앙운동의 초기 선배인 손봉호 장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산술적인 수치가 1,000만이고 인구대비 25%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윤리적인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만약 생선에 소금이 25%이라면 결코 썩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한국 교회의 원래의 전통은 한국교회가 대단히 윤리적인 교회임을 보여준다. 이는 청교도적인 영향의 선교사들과도 관련이 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곧 애국 애족하는 운동이었다. 절제운동이 그러하고, 국채보상운동이나 삼일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다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 하에 이루어졌다. 학생신앙운동의 초기 선배인 이만열 교수님이 쓰신 글에 보면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수가 2만명일 때의 남북한 인구가 2,000만이었는데(인구 대비 0.1%이다) 그 당시 어느 신문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기사로 실려 있다고 한다. 당시는 조선말의 부패한 관료들이 매관매직을 일삼는 때였다. 그런데 돈을 주고 벼슬을 사는 이들이 서북지방의 수령자리는 사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서북에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서 수령이 아무리 참혹하게 백성을 다루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뇌물을 주지 않기 때문에 벼슬을 산 돈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무너진 것은 해방후 한국교회가 자체 정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제하에서 신앙의 정조를 버린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과 공적인 자숙의 기간을거치지 않고 여전히 교권을 잡고자 했고 이는 교단 분열로 이어졌다. 한국 정치가 반민특위를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면 세상이야 어떠하겠는가? 자신이 깨끗하지 못한 자가 세상을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회가 이처럼 도덕적인 면에서 흔들리는 동안 사단은 경제부흥이란 환상으로 다가와서 6.25를 겪으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이 민족에게 돈이 최고란 인식을 심었고 이것은 사회 전체에 윤리의 평가절하와 상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교회가 성경적인 윤리관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는 동안 기존의 전통적 윤리도 무너지고 그 틈바구니로 맘모니즘과 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등이 판을 치게되었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거슬러 가는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축복을 영적인 축복과 혼동시키는 오시범을 보이기까지 했다. 아모스 선지의 외침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2.윤리의 기초와 동기
윤리란 인간관계의 도리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현대의 윤리학은 사실 윤리학의 존재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왜냐하면 윤리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왜 윤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세속 윤리학의 현실이며 어떤 행동이 윤리적이며 또 어떤 행동이 비 윤리적인가 하는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모든 가치를 상대화 시킨 인간에게 필연적인 결과이다.
다만 일반 윤리학이 겨우 붙들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윤리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살인과 같은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는 정도이다. 이것이 칸트의 주장이고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상의 윤리 개념이다. 그러므로 일반 윤리의 기초는 생명에의 경외심이다.
이정도라도 가능하다면 이는 오로지 타락한 인간을 그나마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은총이 가르치는 바는 결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족과 나라와 시대를 따라서 전혀 다른 윤리적인 표준을 갖게되며 타락한 인간의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으므로 에스키모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아내를 제공하고, 어떤 토인들은 부모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죽이는 것을 효도라고 하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1부1처의 결혼제도를 비판하는 것도 사실 하나님 없는 모든 사상이 기준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윤리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도덕 기준과 하나님의 명령이 분명하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예수게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셨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으며 10계명과 이 10계명의 신약적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산상보훈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 윤리는 윤리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이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자신에게도 유익하다는 식이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 그 행위가 자신의 이익에 상반되면 하지 않게 된다. 도심의 지하철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데서 소매치기를 만나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은 세속윤리가 이러한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윤리적 행동의 동인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책임의 강조만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 편 기독교 윤리의 동기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사랑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원래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으므로 우리가 사랑을 알고 이로써 형제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6-18)
3.기독교 윤리의 표준
하나님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보다 높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정죄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더욱 고결한 도덕적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세상이 우리를 보고 부끄러워 할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변별력이 없어져 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똑같이 거짓말하고 뇌물 쓰고 새치기 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아나니아와 삽니라는 세상적인 표준으로는 전혀 흠이 될 수 없으나 거짓말 한 번 한 것으로 죽었다. 이는 하나님의 표준이 세상의 표준보다 훨씬 높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합법적인 것이 다 윤리적이지 않다. 자기의 돈을 자기가 쓴다 해도 너무 사치한 것은 옳지 않다.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닌 것이다. 형제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윤리 감각으로는 옳지 못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기독교인의 윤리감각은 세상의 윤리 감각과는 정반대일 수 있다. 노조가 복지으 차원에 주 5일 근무를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게명이 6일동안 힘써 일할 것을 명하기 때문이다.
4.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이 우리의 고백이 아닌지 모르겠다. 기독교 윤리의 실천에 관한 두가지 해결할 점이 있는데 하나는 분명한 성경적 표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시대가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에는 우리의 윤리적 행동의 기준을 잡기가 대단히 힘든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기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셔야 하고 이는 위로부터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이 변화시키지 않고는 참된 인간성의 변화란 없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의 윤리 실천운동은 회심과 연결되어야 한다. 역으로 지속적인 복음전파 사역이 이루어지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변화가 윤리적인 면에서 나타나야 한다. 간호사가 전도는 열심히 하지만 간호는 소홀히 한다면 복음전도의 동기가 의심 받을 것이다. 사실 그의 전인을 사랑함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음전도와 윤리실천은 상승작용이 있다. 오늘날 지성인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호감을 주지 못하고 이러한 선입견이 복음전파의 장애가 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이 자신들의 증거를 증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며 이 배후에는 윤리적이지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있다.
5.사회윤리와 개인윤리
로잔언약이 밝힌 바대로 우리는 선교가 개인의 영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인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그의 영육간의 모든 문제에 관심하는 것이다. 참된 윤리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면 그의 전인을 사랑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구조 속의 모든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의의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노력과 함께 공동체적이고 조직적인 윤리 실천운동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서 윤리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인 의무를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고자 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사회윤리를 주장한다면 있을 수 없느 일이다. 우리의 윤리 의식의 확대가 사회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포함한다는 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죄를 따르고자 하며 법이나 조직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조직과 제도에 자신들의 윤리적인 책임을 떠넘기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한다.
6.윤리 실천 방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자주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잘한다. 주일 예배 참석도 비교적 잘한다. 이는 늘 강조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목회자들이 늘 정직을 강조하고 정직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인식된다면 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7.교회가 앞장 서야 할 문제들
정직의 문제 / 뇌물 문제
경제 정의 실천 - 불로소득 문제 / 부동산 투기 / 유산 안 남기기 운동
새벽종 안치기 / 주차장 오픈 / 교회당 공개 - 공공장소로
8.캠퍼스에서 할 수 있는 운동
컨닝 추방운동
대자보 함부로 안 붙이기
절제운동
교수 사랑 운동
어떤 형태로든 희생이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