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질 듯 이어지는 작은 소리에 잠이 깼다. 아파트 벽에 부딪히는 바람소린가, 거실 화초들의 수런거림인가? 남쪽 창문을 활짝 열었다. 별 하나 없는 새벽 3시의 허공은 그냥 검다. 신경을 건드리던 맞은편 교회 꼭대기의 네온도 꺼져있다. 전기스탠드와 책 틈서리와 볼펜꼭지까지 새카만 적막이 붙어있다. 내게는 미열이 있었다. 시간을 낭비한 날이나 입장료가 아까운 생각이 드는 영화를 본 날, 또는 미진한 감정이 남은 날 밤에는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깬다. 교양 있는 소리 말고, 날것의 자연소리가 듣고 싶은 날도 그렇다. 낮에는 보청기를 써도 들어야할 소리들의 반은 놓친다. 젊은 여자들, 특히 정확한 발음을 해야 하는 아나운서들도 마침표를 무시하고 두 문장을 붙여 발음한다. 빠르게 주워섬기다 어미만 길게 강조하는~다,~다가 들린다. 마이크를 통과한 강의사운드는 야속하게 주어와 목적어를 생략한다. 메모하려던 볼펜 쥔 손목이 나른해진다. 내이의 뇌 전도율에 커튼이 내려졌다. 치료방법도 없단다. 건강 상태에 따라 매번 다르게 연출하는 청각의 능력에 놀랄 뿐이다. 밤에는 보청기를 빼도 작은 소리까지 잡아낸다. 낮에 무디었던 청신경이 밤에 예민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맑아지는 공기 탓일까, 낮보다 밤에 듣고 싶은 소리가 많아서일까, 아니면 소음을 순화시키고 싶은 청각의 항성(恒性) 일까? 어릴 때는 소리에 예민했다. 엷은 잠결에서 부엌의 사기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콩깍지 타는 리듬을 즐겼다. 햇살 퍼지기 전에 가마솥 뚜껑사이를 비집고나오는 김과 아궁이에서 퍼지는 열기, 그리고 외양간 소의 콧김으로 처마의 고드름이 쏟아졌다. 중간이 뭉텅 부러져 떨어지며 댓돌에서 부서지는 차가운 비명은 내가 들어 본 소리 중에 가장 맑고 고은 음이었다. 한 밤에 잠이 깨었다. 윗목에 요강이 있는데 무엇에 끌리 듯 동생이 뚫은 창구멍에 눈을 댔다. 때마침 방안을 엿보던 달빛과 시선이 딱 맞부딪쳤다. 고무신을 신고 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사랑채 용마루 한 뼘쯤 위에서 보름달이 흐벅지게 웃고 있었다. 달빛은 안마당을 깔고 부엌문을 두 뼘이나 기어올랐다. 세상의 달빛이란 달빛은 다 내 집 마당으로 모였다. 내를 건너듯 조심조심 달빛을 밟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가장 고요하고, 가장 부드럽고, 가장 아늑한 소리에 취했다. 두레박이 기우뚱대며 우물물을 흘리는 소리였다, 달빛이 흘리는 소리는. 달도 나만치 심심했나보다. 때로 가만가만 흔들리는 완자문을 흔들어 깨웠다. 마루 끝에 앉으면 봉당의 강아지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동잎을 간지럼 태우면 웃었고, 구름 속을 들며나며 곳간 앞에 세워둔 멍석을 귀신으로 둔갑시키면 내 가슴을 졸였다. 달빛은 두레박에서 흐르는 우물소리였다. 그 해에 동리에 홍역이 돌았다. 내 몸도 열꽃을 피웠다. 천장의 연속무늬가 인절미를 나눌 때처럼 죽죽 늘어나고, 다락문의 당초무늬도, 마루로 통하는 미닫이의 완자문양도 출렁거렸다. 앞뒤를 잘라버린 가운데토막 같은 어둠 안에서 손톱이 피멍들도록 동굴 벽을 긁었다. 저승사자의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부르는 또 다른 소리도 있었다. "꼬맹아, 꼬맹아! " 아버지가 불러주시던 애칭이다. 소리를 따라 입구라고 짐작되는 쪽으로 기어갔다. 놀라웠다. 육간대청에 천상의 것인가 싶은 춤 잔치가 열렸다. 백자같이 하얀 얼굴, 흰 고깔과 흰 자루를 뒤집어쓴 내 또래의 동자들 수십 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한삼자락이 넘실댔다. "얼~싸, 절~싸” 한 동자가 왼쪽 다리를 들면 마주선 동자가 오른쪽 다리로 받았다. 둘이 얼싸안고 왼쪽으로 돌고, 뒤주 위의 모란문양 항아리를 한 개씩 안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마루청이 쾅쾅 울리고 건넌방 문 앞에 세워둔 돗자리도 겅중거리다 쓰러졌다. 놀란 분합문도 입을 한 아름 벌렸다. "쉬이~" 가슴에 가느다란 소리를 켜놓았다. 몸을 파르르 떨었던 것 같다. 동자들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강아지만큼, 병아리만큼, 청개구리만큼 작아지며 춤도 노랫소리도 잦아들었다. 스무 번쯤 눈을 깜박였더니 흰 비단 피륙이 대청에 펼쳐졌다. 동자들은 누에고치처럼 생긴 타원형무늬 안에 하나씩 들어가 번데기처럼 엎드렸다. 달빛은 명주자락 끌어당기는 잔잔한 파장으로 일렁였다. 약 한 첩 쓰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승까지 쫓아온다는 홍역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밤에 남동생 셋이 누웠고, 내가 업어주던 돌쟁이 동생은 끝내 열꽃을 피우지 못했다. 한참거리 떨어진 동네의 아홉 살 조카와 네 살짜리 삼촌, 대여섯 명 아이들이 거적에 싸여 나갔다. 이름이 불리면 난롯가에 선 세 살짜리 아이처럼 움찔한다. 거친 음과 제지하는 소리들을 너무 많이 들었나보다. 보청기는 들어야할 소리와 소음을 비슷한 데시벨로 조합해 들려준다. 거친 파도소리, 바람에 나뭇잎 뒤집는 소리, 뱃고동소리, 때로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한 새의 날갯짓소리. 청신경이 늘 피곤한 것은 소음 안에서 들어야할 소리를 잡아야하기 때문이다. 소음을 끄면 들어야하는 소리도 꺼진다. 무인도에 떨어진 적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달빛이 흘리고 간 소리를 줍는다. 소리들을 걸러내는 보이지 않는 귀걸이 덕분이다, 심성의 감응이다. “꼬매앵∼아∼∼” 생명을 확인시키는 소리에 힘이 솟는다. 그리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소음은 낭만이기도하다, 아주 가끔은.
(이경우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