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도기행 1번지로 알려진 전남 강진군의 도암면 만덕산(萬德山; 409m)은 나지막하지만,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서 산기슭에만 올라가도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만덕산은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야생으로 자라면서 커다란 숲을 이루고 있어서 만 가지 덕을 가진 산이라 해서 만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특히 산기슭에는 조선 정조 때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19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의 다산초당과 그 옆에 천년고찰 백련사(白蓮寺)가 있다(2013.08.21. 다산초당 참조).
신라 46대 문성왕 원년(839) 낭혜화상 무염 대사(朗慧和尙 無染大師; 800∼888)가 창건한 만덕사는 고려 희종 7년(1211)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 1163~1245) 스님이 중창하면서 백련사(白蓮社)라고 고쳤는데, 이때 절 이름 사(寺)가 아닌 단체 사(社)로 한 것은 1208년 최씨 무신정권이후 요세 스님이 문벌귀족체제와 결탁한 기존 불교계에 대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주창하면서 사찰 개혁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주장하는 송광사 지눌 스님의 조계종과 양대 산맥을 이룬 백련사는 이후 120여 년 동안 8명의 국사를 배출한 거찰로서 원묘국사는 마지막 국사(國師)이기도 하다.
백련사 가는길 |
백련사 요사채 |
백련결사 당시에는 승려가 1000여명, 절집은 80여 칸이나 되었다고 하지만, 고려 말 남해안 일대가 고려청자 주산지이자 곡창지대여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서 약탈을 당할 때 많은 피해를 입고, 또 조선 건국후 숭유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고 사찰은 퇴보하여 거의 폐사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세종 9년(1426) 주지 행호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는데, 특히 1430년 전국을 유람하던 세종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백련사에서 8년 동안 기거하는 동안 크게 중창했다. 효종 14년(1762) 3차 중수를 하면서 원묘국사 탑과 사적비(보물 제1396호)도 세웠다.
백련사 동백숲 입구 |
동백숲 |
사실 백련사는 천년 고찰로서 보다는 동백나무 숲과 야생 차나무 숲, 그리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백련사 주지 혜장(惠藏; 1772~1811) 스님과 차(茶)에 얽힌 끈끈한 우정으로 더욱 유명하다.
먼저, 백련사 동백 숲은 전북 고창의 선운사, 여수 오동도 동백과 함께 국내 3대 동백 군락지로 손꼽히며, 약7000그루의 동백은 울창한 숲을 이룬다(천연기념물 제151호).
대부분 높이가 7m에 달하는 거목이고,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 관목이 된 동백나무들은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붉은 동백꽃으로 탐방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또, 주차장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주변의 차나무 군락은 만덕산에 얼마나 무성했는지, 다산 정약용이 백련사 주지 혜장 스님과 우정을 맺은 이후 만덕산 야생차를 즐겨 마시면서 자신의 아호도 만덕산의 별칭인 다산(茶山)이라 하고, 또 자신이 거처하던 초가에도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고 별호를 지은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차나무 군락 |
야생차 나무 숲길 |
강진 백련사를 찾아가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끄트머리인 목포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강진나들목으로 빠져나가 강진읍에서 완도 방면 국도 3호선을 약7㎞쯤 가면 된다. 만덕산 아랫마을인 도암면 만덕리에는 다산초당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과 백련사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란히 서있는데, 다산초당, 다산기념관과 공직자 연수원에 이르기 전 오른편 길가에 백련사가 보인다. 주차비, 입장료가 거저이다.
백련사 다산초당 안내도 |
야트막한 흙길을 올라가는 백련사 일주문까지 주변은 온통 동백나무 숲과 무성한 야생차나무 숲이고, 동백나무 숲길에서 왼편으로 난 좁은 오솔길로 약800m쯤 떨어진 능선너머에는 다산초당이 있다.
백련사는 다른 절집과 달리 일주문~사천왕문~금강문~해탈문~수미산 등의 가람배치가 아니라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다른 절집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배치돼 있는데, 누하(樓下) 진입방식으로 만경루(萬景樓) 아래를 지나면 효종 12년(1760) 화재로 불탄 것을 1762년 복원한 대웅보전이 있다(전남도유형문화재 제13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인 대웅보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 1777)의 글씨로서 원교가 1755년부터 남해바다 완도 옆 신지도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중 대웅전 중건 때 백련사를 찾아와서 써준 것이라 한다.
대웅전 안에 걸려있는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社)라는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또, 대웅전 왼편의 백련사 사적비와 그 오른편 비각 안의 원묘국사 부도비는 대웅전을 중창하던 효종 때 세운 것이다.
28세 때부터 해남 대흥사에서 노스님들을 제치고 강백을 할 정도로 실력가여서 30대 중반에 백련사 주지가 된 혜장 스님은 승려이면서도 유학, 특히 주역에 능통해서 그의 강론을 들으려고 인근 강진, 장흥, 해남의 선비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다고 한다. 그의 명성이 하도 자자해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도 백련사를 찾아오게 되었는데, 혜장은 천하의 다산을 몰라보고 거침없이 주역을 떠들다가 다산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서야 그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며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강진으로 유배 온 처음 8년 동안은 강진만 포구 주막집에서 주민들의 눈총을 받으며 지내다가 호남의 명문가이자 외가인 ‘해남윤씨’의 도움으로 만덕리 귤동마을로 옮긴 다산은 음력 1805년 4월 17일 혜장과 운명적인 만난 이후 매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800m의 산길을 오가면서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혜장은 10살 위인 다산을 스승 겸 글벗으로 깍듯이 모셨지만, 어디까지나 서로가 가르침을 주고받는 학문적 관계로서 다산은 혜장에게 경학(經學)을 가르치고, 혜장은 다산에게 선(禪)과 다도를 가르쳐주었으며, 다산이 본격적으로 차를 즐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정약용에게 다산이란 아호 이외에 거처하는 집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별칭을 붙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인데, 다산은 혜장에게 아암(兒庵)이란 별호를 지어준 것은 자존심과 고집이 강한 혜장이 아이처럼 순하고 부드러워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혜장은 제자들이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을 만큼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불가의 큰 학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음주로 40살에 죽었다. 다산은 혜장이 죽자 만시(輓詩)와 제문(祭文) 그리고 탑명(塔銘)을 지어 그와의 우정을 그렸다. 혜장의 다비식에 다녀온 후 쓴 다산의 만시는 아래와 같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책 자주 읽었고/
구가(九家)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동백과 야생차로 유명한 백련사는 템플스테이와 함께 여연 주지 스님이 직접 가르쳐주는 다도교육을 하며 중생들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