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마거사
-유마에 비견된 재가불자 이침산(1827~?)-
조선시대 후반기에 재가불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 이 침산(李枕山 1827~?)이다. 그의 본명은 동환東煥, 호가 침산이며, 성은 이씨다. 그는 1827년(순조 27)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특기할 점은 이침산에 관한 기록이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나온다는 점이다. <동사열전>은 조선후기의 범해 스님이 편찬한 고승전기집이다. <해동고승전> 이외에는 별다른 고승전기가 없는 한국 불교계로서는 매우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이침산은 통도사의 관허선사에게서 선법을 배웠다. 이어 금강산의 해명대사로부터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이어서 전주 봉서사에서 정진하였고, 옥주(전남 진도의 옛이름) 쌍계사에서도 오래 수련생활을 하였다. 훗날 홍국사의 만일회에 참석하여 승속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에 대해 해박하였을 뿐 아니라 자비의 실천이 남달랐다고 한다. 궂은 일은 도맡아 처리하면서도 싫어하는 내색이 없고, 막힘없는 언변을 가졌으면서도 언제나 겸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칭송하여 말하기를 "유마거사의 화현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침산은 <유마경>을 필사하여 범해 스님에게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진불지眞佛志>라는 책의 서문을 지었다고도 하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900년대 초반 무렵으로 짐작된다.
중국의 재가불자로서는 방거사⋅부설거사 등이 유명하다. 이들은 출가한 승려들보다 신행이 더욱 뛰어났고 또 처자권속을 거느린 몸으로 도를 성취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불교 순교자 이차돈과 왕생극락한 효명孝明, 그리고 달달박박 등은 신라 때의 재가불자들이다. 고려초에는 이규보와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재가불교의 맥을 이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외형적으로는 재가불교의 맥이 끊긴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조선의 유생들 중 많은 사람이 불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조선시대의 율곡 또한 돈독한 불자였다. 그의 이기론 자체가 화엄의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율곡은 자택에서 대장경을 간행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풍조를 빗대어서 당시의 유교사회에서는 '외유내석'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겉으로만 유생입네 하고, 속으로는 불교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가불교 운동은 그 속성상 사자전승의 법맥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시대의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불교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해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침산에 관한 기록이 비록 편린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언젠가 이침산이 진도에서 공부할 때 범해 스님은 그의 먹을 찬탄하는 시를 보낸 적이 있다.
괴나리봇짐 속에 다른 것은 없고 尺布行裝何所有
금강경 한 권 보배로 삼을 뿐이다 金剛一卷自家珍
방거사의 선문답 곳곳에서 꽃피니 龐公事業頭頭顯
그대는 필시 유마거사의 화신일레라 應是維摩小化身
위의 찬시에서 보는 대로 이침산은 당당한 선객이었음이 분명하다. 방공은 바로 방거사를 말한다. 그는 마조馬祖와의 선문답으로 일약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 유명한 중국의 거사다. 또 범해 스님이 이침산을 유마거사에 비유한 것도 이채롭다. 이것은 단순한 예찬의 의미라기보다는 그의 인품을 표현해주는 기사라고 생각된다. 이침산이 원융무애의 화현, 변재와 예지의 소유자라는 표현이다. (불교사 100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