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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의 대가 한고조 유방의 ‘약법삼장’
한왕 원년인 BC206년 10월에 5대행성이 동정(東井)1)에 모였다. 5대행성은 금, 목, 수, 화, 토성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것을 각각 진성(辰星), 태백성(太白星), 형혹성(熒惑星), 세성(歲星), 진성(鎭星) 또는 전성(塡星)이라고도 했다. 이 5개의 별이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은 그곳에 성인이 나타나 천명을 바뀐다는 의미로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진다는 조짐이다. 패공(沛公)2) 유방은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의 동쪽인 패상(覇上)3)에 주둔하고 있었다. 진왕(秦王) 자영(子嬰)4)은 황제의 인새(印璽)와 부절(符節)을 끈에 매달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에 앉아서 지도정(軹道亭)5)으로 와서 패공에게 투항했다. 인새와 부절을 목에 걸었다는 것은 자살하겠다는 표시이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탔다는 것은 상복을 입은 것에 해당한다.
여러 장군들은 진왕 자영을 죽여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패공은 그들의 건의를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초회왕(楚懷王)이 나에게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관용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이 투항을 하도록 유도하라는 뜻이었다. 만약 자영을 죽인다면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투항하지 않을 것이다. 유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한왕은 함곡관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자영을 맡기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함양성에 들어갔다. 호화로운 함양성의 모습을 본 유방은 그것에 주둔하며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번쾌(樊噲)6)와 장량(張良)이 한사코 반대하자 진나라의 보물들을 창고에 넣어 봉인을 한 후에 패상으로 물러났다. 이 때 소하(蕭何)는 진의 승상부로 달려가 그곳에 문서, 서적, 지도 등을 챙겼다.
11월에 패공은 관중의 여러 부로와 재덕을 갖춘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오랫동안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에 시달려왔다. 그동안 조정을 비방하는 사람은 멸족이 되는 화를 입었고, 아무 것도 아니라도 모여서 의논을 하는 사람들은 저잣거리에서 사형을 당했다. 나와 제후들은 처음에 누구든지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사람이 왕이 되기로 약속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 법령만 발표할 것이다.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남을 다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죄에 따라서 처벌할 것이다. 셋째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은 모두 폐기한다.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은 예전처럼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부로들과 형제들을 위해 해악을 없애려고 이곳에 왔을 뿐이다. 결코 그대들에게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염려마라! 또한 내가 패상으로 물러나 주둔한 것은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사람을 파견하여 진나라의 관리들과 함께 모든 현, 향, 읍으로 다니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관중의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패공은 이렇게 말하며 모든 것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창고에는 양식이 많습니다.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더욱 기뻐하며 패공이 진나라의 왕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기 시작했다.
《사기 고조본기》와 《한서 고제기》
BC209년인 진이세 원년 7월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7)은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의 동남쪽 유촌집(劉村集)인 대택향(大澤鄕)에서 9백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기의를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대하는 기의가 폭발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지금의 하남성 회양인 진(陳)8)을 점령하고 정권을 세워 국호를 ‘장초(張楚)’9)라 했다. 진승은 초왕으로 옹립되었으며 역사는 그를 진왕이라 불렀다. 그 해 9월에는 원래 초나라의 귀족이었던 항량(項梁)10)과 그의 조카 항우(項羽)가 회계군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지금의 강소성 소주인 오(吳)에서 기의를 일으켰다. 이듬해인 BC208년에 지금의 강소성 비주시(邳州市) 서남쪽인 설읍(薛邑)을 점령한 항량과 항우는 진승이 패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회왕의 손자 심(心)11)을 초회왕으로 옹립했다. 가을에 항량은 정도(定陶)를 공격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항량을 죽인 진군은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조나라를 공격했다. 이듬해인 BC207년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북상하여 장감(章邯)이 이끄는 진나라의 주력군과 격전을 펼쳤다. 일기당천의 초군은 진군을 크게 깨뜨리고 진나라의 기반을 흔들었다. 이 때 유방은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항우의 승리에 기여했다.
유방은 지금의 강소성에 속하는 패현인으로 자가 계(季)였으며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을 지냈다. 진승이 기의를 일으켰을 때 유방은 지금의 강소성에 속하는 망(芒)과 탕(碭)12) 일대에서 100여명의 유랑민들을 모아 활동을 하다가 진승에게 호응하여 패현성을 점령했다. 진승은 그를 패공에 봉했다. 그의 부리는 순식간에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항량이 북상하여 설(薛)에 이르자 유방은 100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에게 귀순했다. 항량은 유방에게 5천의 병력을 주었다. 이로써 유방은 항량의 진영에 속하는 장군이 되었다. 그는 항상 항우와 함께 움직이며 많은 성과 땅을 점령했다.
항량이 죽은 후 초회왕은 항우를 장안후(長安侯)에 붕하고 유방은 무안후(武安侯)에 봉했다. 항우가 북상하여 거록(巨鹿)13)에서 진의 주력군과 싸울 때 그는 친히 1만명도 되지 않는 군대를 이끌고 틈을 노려 서쪽을 진격했다. 가는 곳마다 승전을 거듭한 그는 빠른 속도로 남양(南陽) 일대를 석권하고 자신의 공세를 선전하면서 진나라의 수비벽을 깨뜨렸다. 완성(宛城)은 싸우지도 않고 무너졌으며 그 서쪽에 있는 성읍들도 맥없이 항복했다. 그의 군대는 드디어 진의 본거지인 함양을 바라보는 무관(武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그는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물로 무관의 수비대장을 매수하여 점령하고 일거에 관중으로 진입했다. 관중을 점령한 유방의 군대는 특히 군기를 엄정하게 하여 재물을 빼앗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점령지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곳곳에서 버티고 있던 진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유방에게 항복했다. BC206년 패상에 주둔한 유방은 앞에서 말 한 것처럼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유방은 소지주 출신으로 정장에 불과했던 유방은 아방궁을 보자 감탄했다. 정장 출신이었던 그는 아방궁에 있는 미인, 종고(鐘鼓), 보물, 애완용 개와 말과 같은 것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진귀한 것이었다. 그는 함양에 머물고 싶었지만, 장량과 번쾌가 만류하자 미련을 버리고 과감히 패상으로 불러났다. 그는 수하의 장수에게 함곡관을 지키며 항우의 공격을 막으라고 지시하는 한편, 관중지역의 유력자들을 초청하여 앞에서 말한 조령을 반포했다.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스스로 관중을 다스리겠다는 칭왕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평안함을 보장하겠다고 고시했다. 유방은 가장 먼저 진왕조의 폭정을 성토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자료에 따르면 진왕조의 폭정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관동지역이었던 6국의 후예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진대의 주요한 사회적 모순은 계급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이었다. 민족적 모순이란 관서와 관동이라는 동서의 모순을 가리킨다. 진나라를 구성했던 주민들은 대부분 관중지역 출신이었다. 그들은 진왕조가 중국을 통일하자 법률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유방이 불러서 구구절절이 진왕조의 폭정을 고발한 관중의 부로들은 사실상 진왕조의 법령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이 그들에게 진왕조의 법령이 지나치게 가혹했기 때문에 그대들이 숱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고 성토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지방의 유력자들 보다는 그들의 하위계층에서 실질적인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발표한 소위 ‘약법삼장’은 살인자, 사람을 상하게 한 자와 도둑질을 한 자에 대한 처벌 원칙과 진조정의 번잡하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조치는 자신이 관중 사람들의 구세주라는 점을 밝히고, 그가 관중의 질서와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점을 선전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했다. 그가 반포한 조령에는 그 보다 실질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와 제후들은 먼저 관중을 차지한 사람이 관중의 왕이 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밝힌 이유는 자신이 관중왕으로 등극하는 합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가 제후들과 약속했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초에 유방이 설읍으로 항량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항우는 양성(襄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격전이 펼쳐진 후에 양성을 점령한 항우는 화가 풀리지 않아 성안에 있던 군인들과 백성들을 모두 생매장해버렸다. 항량이 죽은 후에 초회왕은 지금의 강소성 서주인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항우를 장안후(長安侯)에, 유방을 무안후(武安侯)로 봉했다. 그 후 기의군이 몇 차례 패전을 하여 사기가 꺾이자 각 방면의 장군들은 관중으로 진격하는 선봉으로 나서기를 꺼렸다. 초회왕은 장군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장군들을 모아서 누구든지 먼저 관중으로 쳐들어가 진조정을 멸망시키는 사람을 관중왕으로 칭하자는 약속을 하도록 했다.
젊어서 혈기가 넘쳤던 항우는 숙부인 항량의 복수를 위해 자신이 먼저 관중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왕이 노장들에게 이렇게 의견을 물었다.
“항우는 사람됨이 성급하고 사나우며 교활하기까지 하여 사람을 해치기를 좋아합니다. 일찍이 양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의 주민들을 몽땅 생매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그가 지나는 곳은 모두 무참히 섬멸당하고 맙니다. 또 초군이 여러 차례 진군을 공격했지만 진승과 항량이 모두 패했습니다. 아무래도 강공으로는 어려울 것 같으니, 차라리 덕망과 관대함을 갖춘 사람을 파견하여 인의를 베풀어 진나라의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진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가혹한 정치로 고통을 받았으므로, 그러한 사람이 온다면 진심으로 항복을 할 것입니다. 지금은 사나운 항우보다는 관대한 패공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유방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게하고, 항우는 차장으로 상장군 송의의 통제를 받으며 북쪽으로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한왕조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무시하고 먼저 관중으로 진입한 유방이 관중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제후들이 사전에 약속을 했다는 말을 지어낸 것이다. 유방이 패상에서 조령을 반포하면서 “내가 관중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관중으로 들어 온 제후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유방이 함양에 주둔하지 않고 패상으로 퇴군한 것고 제후들의 견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유방은 가슴에 웅대한 포부와 도략(韜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몰래 부하들을 시켜 진왕조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패상에 있던 자신의 군영으로 옮겼다. 그러나 정의의 군대라고 자칭하면서 침탈을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점을 과시하여 신뢰를 얻기 위해 ‘약법삼장’을 반포하고, 관중의 백성들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자신의 군대를 대접하겠다고 찾아오자 일부러 사양을 했던 것이다. 그는 “창고에 식량이 많으므로 백성들에게 낭비를 하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그의 창고는 이미 진왕조의 창고에서 몰래 가져온 군량미와 보물이 가득했던 것이다. 관중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기뻐했으며, 그가 관중왕이 되지 못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항우와 유방을 비교해보면 항우는 정략적인 인물이 되지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는 그를 단순한 무부에 불과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거록에서 승리를 한 후에 서쪽을 진격하다가 신안(新安)14)에서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명을 생매장시키고 말았다. 관중을 격파하고 함양으로 들어가서는 투항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아방궁을 불태웠다. 이후로 전개된 유방과 항우의 천하쟁탈전인 초한전에서도 항우는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자꾸 세력을 잃어갔고, 유방은 지면 질수록 세력이 늘어갔다. 그것은 강자로서의 관용과 아량이라는 정략적 술수를 몰랐던 항우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항우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며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선동했던 유방의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묵계는 말한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나 지방의회의원 선거 또는 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는 압승을 거두면서도 정작 대통령선거에서 초반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실패했던 이회창과 한나라당은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중간선거에서 이긴 그들은 정작 대선에 임해서는 마치 다 이긴 판이라는 식으로 자만에 빠졌던 것이 아닐까?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유방과 같은 사람이라 국민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이회창은 무엇이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아들의 군대문제나 호화빌라(?)에 아들과 딸을 불러들이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첫댓글 신년벽두부터 이 연사 묵계가 강력히 강력히 호소합니다.설 잘 보내셨습니까?
설 잘 보내셨지요? 보내주신 좋은 술은 멋진 이웃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요비니는 어제 입원해서 오늘 수술합니다.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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