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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군포산길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민들레홀씨
창세기 50:10-13, 22-26 "죽음으로 보여 주는 것!"
(주성교회 / 김영대 목사님)
신세대 엄마들이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윰차는 유모차입니다. 백상은 백화점상설매장이라는 말이고요 문센이라는 말은 문화센터를 뜻합니다. #G(샵지)는 시아버지를 말하고 고터는 고속터미널을 뜻하며 영유는 영어유치원을 말합니다.
이 말을 신세대 엄마들이 쓰는 대로 이해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의사소통이 될까요? 결코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으로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경을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나요? 성경에는 사람의 말 심지어 마귀의 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의 말, 어떤 인물의 행동, 심지어 마귀의 말이나 사람들의 범죄한 내용들까지 기록하여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 주고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한 마디로 ‘언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것을 성경에 기록하였고 우리는 그 말씀대로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도 내 입장에서 우리 마음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말씀하신 뜻을 좇아 이해하도록 합시다.
본문에는 야곱의 장례와 요셉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창세기 46:1-4을 보겠습니다.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1-4)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다가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는 문제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는 것이 왜 두려웠을까요? 창세기 12:1-3을 봅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한 마디로 가나안 땅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아버지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언약의 땅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실제로 언제 주십니까? 400년 후에 주신답니다. 창세기 15:13이하를 보겠습니다.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3-16)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이지만 지금 당장 주시는 것이 아니라 400년 후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가나안 땅 족속들의 죄가 차기까지 야곱의 가족 전체가 애굽으로 내려가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분명한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니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창 46:4)라고 하셨습니다. 즉 돌아오긴 하지만 야곱이 죽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후 야곱은 애굽에 거주하면서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요셉을 불러 유언을 남깁니다.
창세기 47:29-30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29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창 47:29-30)
또 49:29-33에서는 야곱이 임종을 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약속의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도록 유언을 합니다.
29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창 49:29-33)
왜 이렇게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두 번씩이나 강력하게 유언을 합니까? 그것은 그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땅에 묻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기까지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몇 번씩이나 강조하여 거기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그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야곱은 죽을 때에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바라보았습니다. 야곱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요셉은 형제들과 자손들에게 자신의 해골을 언약의 땅으로 반드시 메고 올라가도록 유언을 합니다(25절). 그래서 출애굽기 13:18-19에 보면 출애굽 할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갔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출 13:18-19)
그래서 여호수아 24:32에 보면 언약의 땅에 도착하였을 때 요셉의 뼈를 요셉 지파의 땅 세겜에 묻었다고 기록합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 24:32)
요셉도 반드시 언약의 땅에 묻히기를 원해서 그렇게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요셉의 죽음이 보여 주는 것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야곱의 시신은 바로 언약의 땅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지만 요셉 시신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요셉도 언약의 땅으로 바로 가서 장례를 치르면 될텐데 왜 그렇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장례를 자세히 보면 상당히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요단강 건너편 아닷의 타작마당”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막벨라 굴은 가나안 땅에 있기 때문에 막벨라 굴을 기준으로 본다면 요단강 건너 동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 행렬이 애굽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바로 가면 굳이 요단강을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질 않고 둘러서 요단강을 건너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갑니까? 요단강을 건너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야곱의 장례 행렬은 단순히 야곱의 장례 행렬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서 앞으로 가나안 땅, 즉 언약의 땅에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갈 것인지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 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로서 앞으로 그 후손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을 어떤 경로를 통해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야곱과는 달리 요셉의 시신은 그냥 애굽에 둡니다. 요셉이 죽으면서 자신의 시신을 바로 가서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땅에 올라갈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유언을 합니다. 요셉 역시 그의 소망이 언약의 땅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의 삶의 모든 중심과 목표가 하나님의 언약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 시신을 애굽에 둔 후에 언젠가 약속의 땅에 올라갈 것인데 그때에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서 언약의 땅에 묻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요셉이 이렇게 유언을 남기게 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의 숙제가 생긴 셈입니다. 무슨 숙제입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언약을 실행하실 때, 즉 언약의 땅을 차지하게 하실텐데 그때는 반드시 요셉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야 한다는 숙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가나안 땅이 언약의 땅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언약의 땅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 때에는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야 합니다.
요셉의 죽음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요셉의 해골이 애굽에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시신이 묻힌 곳을 보거나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고 그 땅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땅이기에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언약의 땅에 들어가게 하실텐데 그때 우리는 저 요셉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죽음을 통해 이곳 애굽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실 언약의 땅이 있고 그 땅에 언젠가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기억해야 하고 야곱(이스라엘)의 죽음을 통해 말씀하시고 보여 주신 것은 언약의 땅에 들어가는 경로는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왜 요단강을 건너서 들어가야 하느냐 하는 것은 나중에 밝혀지는데 그것은 곧 그들의 반역하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약속을 따라 사는 삶이고 약속에 의해 살아가는 삶의 방법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은 이것을 늘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삶의 의미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며 그분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어떤 인생이든지 보내셨다면 의미 없는 생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가 보여 주는 것이 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 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언약의 실체입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약속의 종결자입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대속의 은혜를 입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우리는 나의 의나 공로를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속의 은혜를 주시고 영생을 허락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여 주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지 못하는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죽은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십자가의 의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존재를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살아있을 때만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이 하나님의 언약에 목표를 두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 주었듯이 우리는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두고 그분만을 즐거워하며 그분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이웃들이, 후손들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 자기를 위해서만 살다가 돈만 밝히고 세상 것만 위해 살다가 갔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아니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다가 갔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나는 어느 쪽입니까?(김영대목사/주성교회 http://cafe.daum.net/joo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