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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4 / 아벨과 믿음의 삶
서론
제임스 모팻(James Moffatt)이 "의로운 사람의 생(生)에 있어서, 죽음은 결코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그가 의로운 사람이든 불의한 사람이든,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기게 된다. 그는 암이나 독과 같이 좋지 않은 어떤 것을 남길 수도 있으며, 아니면 향수의 방향(芳香)이나, 대기 중에 향기를 날리는 꽃송이 같은 무엇인가를 남길 수도 있다. 즉, 죽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고 말한다. 아벨이 이러한 사람인 것이다. "... 저가 죽었으나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아벨이 현재까지도 말하고 있다면,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가? 창조로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인간의 두번째 세대인 그가 20세기를 향하여 말해야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땅은 새로왔고 오늘날의 형편과는 전혀 달랐던 시대에 살았던 이 사람이 우리에게 말해야만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분명히 그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경영은 오늘날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은 한 단어, 즉 믿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 믿음의 멧세지야말로 아벨이 우리에게 들려 주려고 했던 멧세지인 것이다.
복습
앞에서 우리는 1-3절을 다루는 가운데 믿음의 네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 믿음은 미래 사실을 현재의 실재(實在)로 느낀다.
- 믿음은 우리 생명을 내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확신을 공급한다.
-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보증한다.
- 믿음은 우리로, 세상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며, 오감(五感)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인지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아담과 하와는 과연 믿음의 사람들이었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는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유를,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낮에 서늘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으며, 현실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체험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하나님과의 체험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에덴 동산이 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목격했다. 타락 이전에 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으며, 완전한 의미로 그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타락 이전에는 전혀 믿음의 여지가 없었다(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여지가 없기 때문 - 역자 주).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아담과 하와를 믿음의 실례(實例)로 택하여 거론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리하여 믿음에 대한 첫번째 실례로서 아벨이 언급되었다. 아벨은 에덴 밖에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그는 그의 부모들과 같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의 실례가 되었다. 즉, 그가 첫번째 믿음의 본보기인 것이다. 아벨은 첫번째 믿음의 사람이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세 개의 점진적인 관점들로 나누어진다. 아벨의 믿음은 세 가지 일 즉, 1)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일, 2) 의롭다하심을 얻는 일, 3)죽었으나 오히려 말하는 일을 하도록 그를 이끌었다.
이 일들은 점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었기 때문에 더나은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그는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그가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만대(萬代)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말하는 산(living)목소리가 된 것이다. 이제 다음의 관점들을 살펴보자.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4 상반절)
히브리서 11장의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창세기 4장으로 돌아가서 가인과 아벨의 기사를 연구해야만 한다. 4장 1절은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고 말한다.
"가인"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카나」(Qana)에서 나온 것으로 "얻다"라는 뜻이다. 이 1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다. 즉, 가인이라는 이름 대신에 그 뜻 ("얻음")을 대체해서 읽어보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얻음」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가 된다. 이제 당신이 "얻음"이라는 말을 취하여 문맥상에서 그 행간의 뜻을 파악해 본다면, 하와는 사실 그 아이를 "바로 그"(he is here)라고 명명한 것이 된다(하와가 목적어를 사용하지 않고 "얻었다"라고 말한 것은 「항상 사모해 왔던 바로 그것」을 얻었다는 말임 - 역자 주). 하와는 "나는 바로 그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하와는 그 아이가 3장 15절에서 약속된 바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열어 줄 구원자라고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옳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살인자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2-4절에는 1절에 연이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Ⅰ.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가 계시됨
우리는 이곳 창세기 4장 3-4절에서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물을 가져왔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1. 예배를 위한 정해진 장소가 있었다
가인과 아벨이 모두 자기들의 제물을 "여호와께 가져왔다"(개역 한글성경에는 「드렸다」로 표기됨 -역자 주)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어떤 장소를 정하셨으므로 그들이 제물을 그 곳까지, 가져와야만 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나는 이 장소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에덴 동산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화염검을 가진 천사들을 두셨던, 에덴동편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3:24 참조). 즉, 이곳이 하나님과 만나도록 정해진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구절들에는 그곳에 이미 제단이 있었다는 좋은 암시가 있다. 왜냐하면 4절은 아벨이 이미 죽은 제물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셨지만, 그분께선 그들이 다시 돌아와 그분을 경배할 수 있도록 시은좌(施恩座)를 마련하셨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 창세기의 시은좌는 후일 이스라엘의 성막과 성전 안의 시은좌처럼 그룹들에 의해 지켜졌다(창 3;24).
2. 예배를 위한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창세기 4장 3절은 "세월이 지난 후에..."로 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이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에 입각하여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날들의 마지막에"를 뜻하는 것이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지정된 시간의 마지막이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해 특별한 날을 가르쳐 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가인과 아벨이 와서 그분께 경배할 시간을 정하셨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그들이 동시에 왔다는 사실은 그들이 모두 이 제사에 관한 공통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점들은 예배를 드리도록 지정된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고 생각한다.
3. 예배를 드리는 정해진 방법이 있었다
하나님께는 제사에 의해서만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제사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들이 제사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가정을 믿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것에 관하여 어떠한 내용도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의 개념은 이곳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함께 왔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제물들을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 이 제물들 중 하나만을 열납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제물에 관한 규례를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에 대한 반응
1. 아벨의 반응 - 순종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듣고서 그것을 믿고 순종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자신은 제사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벨은 믿었고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
가인의 농작물 제사가 무엇이 잘못이었는가?
하나님께 온갖 종류의 과실들과 채소류, 그리고 곡물을 드리는 것이 사실상 잘못된 점은 전혀 없다. 레위기 19장 24절은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에 드려 찬송할 것이며"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농작물 제사를 받으시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첫번째로 드려지지는 않았다!
피의 제사가 항상 맨먼저 드려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기의 죄를 씻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없는 소제(素祭)도 있었지만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의 제사가 먼저 드려져야만 했다. 아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했을 때, 그는 자신의 순종을 드러낸 것이며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했던 것이다. 가인은 불순종했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말씀한다. 아벨의 제사는 피의 제사였으므로 더 나은 것이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피의 제사를 지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아벨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벨이 우연히 올바른 제사를 드렸던 것이라면, 무슨 권리로 그가 의롭다 일컬어질 수 있었겠는가? 만일 아벨은 자신이 양 치는 자였으므로 양을 가져왔고 가인은 토마토 재배하는 자이었기에 토마토를 가져왔다면, 무슨 독단적인 근거에서 하나님이 "아벨아, 너는 의로운 자로다! 그러나 가인아, 너는 그렇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셨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마치 "나는 양은 좋아하지만, 토마토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그것에 순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의(義)에 대한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선 믿음만을 열납하신다. 아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께 다가가서 "하나님, 이것은 당신께서 바라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내가이것을 가져온다면 당신께선 나의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것을 가져왔으며, 하나님 당신을 믿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지시해 주신 구속의 방법 또한 인정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2. 가인의 반응 - 불순종의 행위
가인도 아벨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동일한 모든 공통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왔다. 그는 자기 부모의 행습을 따라,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경작해 왔던 모든 농작물들을 거두어 모아, 그것들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들이 대단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에 대한 가인의 응답은 그를 시종 거짓 종교의 조상으로 증거되도록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짓 종교란 하나님이 규정하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오려고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거짓종교는 "아니다, 다른 길이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래서 선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충분한 만큼의 선행을 쌓게 된다면 나는 궁극적 선(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가인은 이러한 모든 주장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선 "내가 말한 대로 그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가인은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거짓 종교란 이러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모든 것들의 조상이 되었다. 거짓 종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잠언 16장 25절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가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위하여 지시하신 것을 가져옴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고안한 계획에 의해 스스로의 공로를 가지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선 그를 거부하셨고 그는 여호와의 면전에서 쫓겨나 놋 땅(유리하는 것 혹은 방황하는 것을 의미함)에 거하며, 자녀들을 낳고 최초로 성(城)을 쌓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단의 통치하로 떨어져 버린 세상의 제도가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인은 자기 길로 가기로 정했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났다(4:16). 가인이 불쌍하다고 유감을 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셨던 바를 알았지만,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은 임의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지시하신 뜻에 대한 순종에 기초한다. 문제는 가인의 무지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제멋대로 행하려고 하는 죄에 있었다. 아벨은 의로왔으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 이것은 요한일서 3장 11-12절에 의해 지지된다. 그 구절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말한다. 당신은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임의로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불순종하는 것이 악(惡)이며 순종하는 것이 곧 의(義)이다. 문제는 이와 같이 단순한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 제사에 대해 가르치셨을까?
제사에 관한 가르침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창세기 3장 21절에 나타났다는 몇 가지 암시가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는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행동이 제사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실에는 네 가지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 죄인들은 가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 그것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었다 - 그들은 이미 자기들을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릴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아니다. 너희의 가릴 것은 내가 만들겠다"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께선 자신이 직접 그것을 주셔야만(입히셔야만) 했다.
- 그것은 죽음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었다 - 즉, 짐승이 죽어야만 했다.
이와 같이 매우 한정된 방법이지만, 이것이 죄를 가리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중요성에 관하여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Ⅲ.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에 대한 인식
1. 믿음 생활의 근거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로 한다. 혹자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혹은 어떤 이가 "당신이 무엇을, 아니 어떤 것을 믿건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당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할 때, 「아니오! 믿음은 하나님의 표준을 전제로 하는 것이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을 믿었으며, 잘못된 것을 믿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믿든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하신 표준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17장 11절은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계시, 그것이 표준이다. 이것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요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속이 좁으십니까?"라고 말한다. 물론 나도 소위 넓은 마음이 되어 거짓들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누구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절대 변치 않는 하나님의 표준이 엄연히 있다.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2. 믿음 생활의 시작
믿음 생활은 죄를 위한 제사를 시작하도록 한다. 당신이 죄인이며, 죽을 수밖에 없으며, 그분의 용서가 필요하며, 그분이 계시하신 뜻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던 유일한 길은, 그가 나아올 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라는 규정된 제사를 통하여 오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편협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진리이기에 말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 창세기 4장에는 십자가를 향한 대로(大路)가 굳게 닦여 있다. 아벨의 양은 첫번째 양, 즉 한 사람을 위한 한 마리의 양으로 드려진 것이며, 그 후 유월절에는 한 가족을 위해 한 마리의 양이, 그보다 훨씬 뒤인 대 속죄일에는 한 민족을 위하여 한마리의 양이 드려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갈보리에서 전 세계를 위하여 한마리의 양이 드려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곳 창세기에는, 첫번째 양과 더불어 십자가를 향한 길이 닦여지기 시작한다.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제사는 순종과 믿음으로 기쁘게 자신의 가장 좋은 것(양의 첫 새끼)을 드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에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었다.
의롭다함을 얻음(4 중반절)
창세기 4장 4-5상반절은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말한다.
Ⅰ. 아벨의 믿음의 증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감추인 어떤 면모 때문에 그를 높이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아, 나는 너를 더 좋아한다. 너희 두사람을 달아 보니 네가 더 낫다"라거나 혹은 "아벨아, 나는 네가 걷는 길을 좋아하며 네가 네 자신을 절제하는 방법도 좋아한다. 그러나 가인아, 나는 네가 싫다. 너는 정말이지 우습게도 절둑거리며 걷는구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선 너무나 피상적이셔서 사람의 외양에만 관심을 가지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문에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았다고 지시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모두 죄인이었다. 아벨이 의롭다함을 얻은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을 했다는 것이며,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사실상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즉,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선한 자인가에, 혹은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인가 아닌가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방법대로 그분께로 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의 전부이다!
아벨은 가인과 마찬가지로 죄인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다. 그 까닭에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선 그를 열납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게 하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게 하는 것은 순종하는 믿음이다. 참된 믿음이란 항상 순종하는 믿음임을 알아야 한다.
1. 요한복음 8장 30-31절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얼핏보면 많은 사람들이 추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려 순종하는 자들만이 참으로 믿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순종하라.
2. 야고보서 2장 14-24절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은 항상 행위로 증명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믿는다고 말하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를 돕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항상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함으로 그의 참된 믿음을 증거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24절에서 그는 요약하여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는 모순이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가시적(可視的)으로 당신의 믿음이 행위로 나타날 때만이 그 믿음은 참된 것이 된다는 뜻이다. 당신은 행위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께 나온 후에는 행위가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것이다.
3.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벨은 순종함으로 자기 믿음의 견고성을 증거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인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질문했었다면, 그는 「예, 물론입니다. 나는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즉 그분의 아들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다(요 5:33).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도저히 존중히 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의 인정하심에 대한 증거
1. 그 증거를 아벨에게 보여줌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증거, 아니 인정을 받았다고 말한다. 당신은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아벨의 이마에 번쩍이는 황금별이라도 붙여 주셨다는 말인가? 도대체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슨 일을 하셨다는 것인가? 아벨이 어떻게 자신이 인정을 받았는지를 알았는가?"라고 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의 제물을 불사르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이렇게 믿는 이유는, 성경에 적어도 다섯 번에 걸쳐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사 제물을 사르심으로써 그분의 인정하심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은 바로 레위기 9장 24절, 사사기 6장 21절, 열왕기상 18장 38절, 역대상 21장 26절, 역대하 7장 1절이다. 만일 이러한 방법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인정하시는 데에 사용되었다면, 불은 아벨의 제물 위에만 내렸으며, 가인의 제물에는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벨이 한 일을 인정하시자, 그분께선 자신의 의(義)를 아벨에게 전가하셨다. 이것은 일종의 이적이다. 왜냐하면 아벨은 의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선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 앞에 서기에 올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義)를 전가시켜 주시는 것이다.
아벨에게 일어났던 일도 이와 동일한 것이다. 아벨도 죄된 속성을 가진 죄인의 모습으로 제단 앞에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아벨아, 네가 나에게 순종했으니 나의 의(義)를 너에게 전가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그 증거를 가인에게는 보여 주지 않음
가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의(義)를 전가받지 못했다. 사실 그 어떠한 가인식의 접근 방법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의(義)를 전가받지 못하였다.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인정하고 죄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義)에서 절연된 것은 아니다(유다서 10-11절을 보라). 스코필드(C. I. Scofield)의 유다서 10-11절에 대한 주석에 의하면 "가인은 하나님과 종교를 믿는다고 하나, 자기 자신의 의지를 따라 믿으며, 피에 의한 구속을 거절하는 종교적인 자연인의 한 사례(事例)이다.\로마서 10장 3-4절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의(義)를 세워 보려고 애쓰며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 이 때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믿는 일이며 그 때에 하나님께선 자신의 의(義)를 전가시켜 주시는 것이다.
Ⅲ. 가인의 불의함에 대한 증거
1. 분노함(창 4:5)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인정도 받지 못하자 몹시 격노했다. 5절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여"라고 말한다. 종교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자에겐 무시당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다. 따라서 가인도 자기 감정을 억제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2.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함(창 4:6-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님께서 가인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본다. 7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한다. 사실 하나님께선 "보아라 가인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만일 네가 다시 돌아와 바르게 행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바른 제사를 드리면 너도 네 동생과 같이 열납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이와 같이 아니하면 죄가, 웅크리고 있는 맹수가 너를 죽이려고 뛰어오르려 하는 것같이 네 문에서 기다릴 것이다. 너는 반드시 죄를 물리쳐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선 가인에게 돌아올 것을 제안하고 계신다.
이 얼마나 감사한 초대인가! 그러나 가인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도, 흥미있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자의적으로 그것을 거절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식대로 처결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3. 살인을 함(창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죽음이 있다. 나타난 대화로 보아서는 아벨은 그것을 전혀 예기치 못하고 있었다. 가인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 언급된 사단에게 굴복하였다.
4. 거짓말함(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하나님께 거짓말하고 자신이 행한 일을 부인할 뿐아니라 빈정대기까지 했다.
5. 회개가 없음(창 4:10-15)
10-12절에서 가인은 문책당하게 되고, 유죄로 판결되며, 저주를 받아, 자기 동생의 살인에 대한 벌을 받게 된다. 그러자 13절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 나는 이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하나님께서 너무하시는 겁니다"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참회나 슬픔, 은혜를 탄원하는 것이나, 바른 희생제사를 드리려는 욕구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이건 너무나 지독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겼다. 죄인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동정하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가는 항상 흥미로운 것이다.
14절에서 가인은 계속하여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가인은 슬퍼하기는 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 양심의 가책이 있은 다음에 회개가 있다. 양심의 가책은 자신의 잘못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회개는 돌아서서 바꾸는 처신이다. 가인은 슬퍼하기는 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6. 배도함
16절은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라고 말한다. 가인은 첫번째 배도자였다. 그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 버렸다. 그는 은혜의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이 얼마나 서글픈 비극인가!
이렇게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에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는 죽었으나 말할 수 있었다.
죽었으나 말함(4 하반절)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벨이 누구에게 말했을까?
Ⅰ. 하나님께
창세기 4장 10절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한다. 가인은 그가 자기 동생의 목소리를 그치게 하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는 무엇을 호소했을까? 그것은 복수였다(계 6:9-10참조).
Ⅱ. 가인에게
창세기 4장 11절은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라고 말한다. 가인이 딛고 선 모든 흙은 자기 동생의 피를 생각나게 하는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황무지와 잡초들 그리고 먼지들, 이 모든 것이 가인의 생(生)을 통하여 그가 죽인 동생이 부르짖으며 ... 그를 고발하고 있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Ⅲ. 모든 인류에게
아벨은 모든 인류에게 다음 세 가지 요지(要旨)의 설교를 한다.
- 인간은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행위로가 아니다.
- 인간은 자기 이성(理性)을 따라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표준을 지켜야만 하며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 하나님의 표준에 순종치 않는 자의 죄는 철저히 응징된다.
아벨은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고 하는, 시대를 초월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