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헌트>
1.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는 “조직 내 침투한 스파이를 색출하라”라는 광고 카피처럼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첩보 세계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영화는 1980년 광주항쟁을 피로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한 5공화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벌어진 암살 음모를 통해 국가의 최고 비밀조직인 ‘안기부’에 북한 첩자가 잠입해 있고 최고 기밀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해외담당 박평호(이정재) 차장과 국내담당 김정도 차장의 갈등이 증폭된다.
2. 안기부의 실질적인 실무 책임자인 두 사람은 치열한 공작과 정보 수집을 통해 서로를 의심한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 구체적인 정황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까지는 안기부 해외공작 시도와 실패를 통해 안기부 내부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극도의 긴장감이 조성되고 결국 암살범의 의해 안기부 요원이 피살되는 사건으로까지 확대된다.
3. 하지만 영화 중반 이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영화가 구성되었음을 알게 된다. 안기부의 최고 책임자인 두 사람 모두 정상적인 비밀요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한 사람은 실질적인 북한 첩자인 ‘동림’으로 국가의 중요 정보를 북한에게 전달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5공 세력의 잔혹한 쿠테타에 대한 복수심으로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정체를 서로가 알았지만, 두 사람은 현 상황을 바꾸려는 공통된 목표가 있다는 생각에 일시적인 협력을 추구한다.
4. 영화 마지막 대통령의 태국 순방 때 북한은 대통령 암살과 동시에 남한을 침공하려는 가공할 군사 작전을 계획한다. 이런 계획을 앞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간첩 ‘동림’으로 활동한 박평호는 오히려 대통령 암살을 막으려 하는 반면에, 김정도는 대통령 암살을 위해 북한의 계획을 이용하려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목적과 의도가 달랐음을 알게 된다. 박평호의 간첩 행위는 비록 국가를 배신하는 반역이었지만 그 속에는 치명적인 전쟁을 막으려는 일종의 선한 의도도 담고 있었다. 반면 김정도는 쿠테타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의로운 명분을 지녔음에도 그것은 자칫하면 북한의 침략을 이끌어내어 국가적인 재앙을 발생시킬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인 것이다.
5. 결국 태국에서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과 김정도의 집요한 살해계획이 박평호에 의해 제지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마지막, 박평호 또한 북한 세력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남과 북의 치열한 이데올로기 경쟁이 극도의 긴장을 이끌었던 시기에 개인의 신념과 희망을 토대로 시도한 계획은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는 첩보 영화의 외형을 띠고 진행되지만, 그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이 느꼈을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끊임없이 추구했던 평화에 대한 소망을 파괴시키는 냉혹한 정치적 현실의 영역을 증언하고 있다.
6. 5공화국의 특수성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전개는 매우 독특한 아이디어 속에서 진행되지만, 안기부의 핵심 책임자 두 사람이 조직의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특정되었다는 점에서, 조직 내의 음모와 핵심적 사실이 지나치게 몇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이 쉽사리 정보기관 내부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밀스런 간첩활동을 최고위 인물이 자행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북한의 남침이 준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설정은 흥미롭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대통령 암살과 함께 남한을 공격하려는 북한의 전시상황은 미국이 치밀하게 당시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흥미위주의 모험적인 가정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7. 영화는 결국 두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권력자를 제거하려는 계획도, 간첩활동을 통해 나름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시도도 흔적없이 사라진 것이다. 첩보 활동에 참여한 누구도 결국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일회용으로 소모되는 정황과 정책적 흐름 속에서 폐기되는 개인에 대한 쓸쓸한 여운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는가? 허무한 총소리가 암전 속에서 퍼져나갈 뿐이다.
첫댓글 - 조직내에서 버려지는 소모품적인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