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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창비 출판사에서 나온 정수일씨가 역주하신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보고 블로그에 쓴 글을 복사해옵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 있으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안은 제 생각.
(알렉산드리아)시에는 또한 큰 항구가 있는데,
인도의 카울람(Kaulam, 현 퀼론Quilon) 항과 깔리꾸트(Qaliqut, 현 캘리컷) 항,
터키의 쑤르다끄(Surdaq)에 있는 카파르(al-Kafar, 현 제노세Genoese) 항 그리고
중국의 자이툰(al-Zaitun, 현 취안저우) 항을 제외하고,
나는 일찍이 세상에서 이렇게 큰 항구를 본 적이 없다.
-43-44p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사람이다.
당시 이집트의 상황은 맘루크 왕조가 무역으로 번창하고 있었다.]
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당시의 시집정관(Amir)은 솰라흐 딘이었다.
그때 거기에는 폐출된 이프리끼야(오늘날의 알제리, 튀니지) 술퇀도 와 있었다.
그가 바로 라흐야니(튀니지의 하프쉬야조의 왕)로 알려진 지크리야 아부 야하이 븐 아흐마드 이븐 아비 하프쓰다.
나쉬르왕은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쑬퇀궁에 기거하도록 하고는 매일 1백 디르함씩 사급했다.
[디르함 : 이슬람세계의 은화 단위로서 1디르함의 은 함량은 2.97g이 표준이다. 매일 은 300g? ㅎㄷㄷ]
-45p
그곳에 그의 자위야(Zawiyah,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은거하여 수행하는 장소)가 있었다.
거기서 그는 시중꾼이나 도반 한 명 없이 홀몸으로 독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자들이나 대신들이 가끔 그를 예방하는가 하면, 매일같이 각계 대표들이 그를 찾아오곤 하였다.
그럴 때면 그는 으레 그들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
제철이 아닌데도 각자가 원하는 대로 음식이면 음식, 과실이면 과실, 당과류면 당과류를 먹을 수 가 있었다.
(이븐 바투타의 시대(14세기)에는 이슬람세계 도처에 이러한 수행장으로서의 자위야가 성행하였다.)
-53p
우선 파루자(Farujah) 부락에 당도하였다.
이곳은 알렉산드리아시로부터 반나절 거리에 있다.
부락은 꽤 큰 편으로써 법관과 촌장, 검찰관이 따로 있고 부락민 모두는 성품이 상냥하고 호쾌하다.
나는 법관 솨핏 딘과 설교사 파흐룻 딘 그리고 무바라크(일명 자인 딘)라는 유지와 동행하였다.
나는 압둘 와하브라는 독실하고 지체 높은 사람의 집에 머무렀다.
감찰관 자인 딘 븐 와이즈는 나를 초대한 자리에서 내 고향과 그곳엣의 세수 상황에 관해 물어왔다.
세수가 금화로 1,200디나르쯤 된다고 하니 그는 짐짓 의아해 하면서 " 이부락을 보셨지요. 이 부락의 세수는 금화 72.000디나르나 됩니다"라고
나에게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모든 자산은 국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디나르(dinar)는 이슬람세계에서 사용한 금화의 단위다.
최초의 디나르는 우마위야조의 할리파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시대에 다마스쿠스에서 주조하였다.
당시의 순도는 96~98%이고 중량은 4.25g으로서 은화의 단위인 디르함과의 환산율은 1디나르가 10디르함이었다.
꽤 큰 부락이었다고는 하지만 세수가 금 324,000g, 즉 324kg이었다니 정말 ㅎㄷㄷ 이게 정말 가능했을까? 지금의 경제력으로도 힘들 듯...
그런데 이럴 수가! 생각해보니 이븐 바투타가 이집트를 여행했을 때가 1326년인데 불과 2년 전인
1324년에 그 유명한 말리 왕국의 만사 무사가 메카 순례 중 이집트를 방문했었다.
이 만사 무사가 황금 11톤을 갖고 왔었는데(출처 - 위키백과) 매주 금요일마다 모스크를 지어줄 정도로 돈을 뿌리고 다녀서
인플레이션 때문에 지역 경제가 파탄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사 무사는 엄청 높은 이자율로 카이로에 있는 금을 다 빌렸다고 한다.
역사상에서 기록된 지중해 세계에서 한 사람이 금값을 조정한 유일한 사례.
어쨌든 저당시 이집트에 금이 많이 유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금을 저렇게 걷었던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53-54p
여기로부터 아브야르(Abyar) 시(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흐르는 나일강 상의 바니 나스르(Bani Nasr) 섬에 있다)에 갔다.
이곳은 고도이지만 향기가 그윽하고 사원이 많으며 아주 아름답다.
나흐라리야에서 가까운데, 그 사이로 나일강이 흐른다.
아브야르에서는 예쁜 옷가지들이 많이 봉제되어 샴(오늘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이을 포괄)이나 이라크, 이집트 등지에서
호가로 팔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까이에 있는 나흐라리야 시민들은 이 아브야르산 옷을 별로 알아주지 않고 즐기지도 않는다.
-57p
행렬은 시외에 있는 붕긋한 곳까지 이르는데, 그곳이 바로 초승달 관망지다.
땅바닥에는 주단이나 깔개가 쭉 깔려 있다.
벌관과 그 일행은 그 위에서 내려서 초승달을 지켜본다.
그리곤 저녁예배를 근행하고 나서 저마다 손에 촛불이나 횃불, 초롱 따위를 들고 돌아온다.
시내 상가들도 일제히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법관을 따라 그의 저택까지 와서는 헤어진다. 해마다 이런 행사를 치른다.
그리고 나서 나는
마할라툴 카비라(al-Mahalltu'l Kabirah)시(다끌라, 아불 하이상, 마누프, 샤르끼윤 등 여러 읍이 모여 이루어진 집성도시)로 향했다.
이 도시는 요지로서 고적도 찬연하고 인구도 많으며 명실상부한 선행가품의 집결처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고등법관과 고등행정관이 상주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으 때의 고등법관은 시에서 2파르싸흐 떨어진 화원별장에서 쉬고 있었다.
[이집트인들도 촛불 시위 가능했었겠네. 통일 신라처럼 고위층은 별장 소유하고 있었는 듯.]
-58p
이곳에서부터 모래톱을 거쳐 딤야트(Dimyat, 팃니쓰와 카이로 사이에 있는 고도로서 면직업으로 유명)시에 당도했다.
이 도시는 부지가 넓고 과실이 다종다양하며 구획 정리가 특이하고 나름대로 좋다는 것은 다 갖추고 있는 성싶다.
... 딤야트는 나일강 강안에 있다.
강 기슭에 늘어선 인가에서는 곧장 물통으로 강물을 퍼올리고 있으며, 많은 집들은 계단을 설치해 강가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곳에는 바나나 나무가 많은데, 바나나는 배에 실려 미스르(Misr, 현 카이로)까지 운반된다.
양은 밤낮으로 놓아 기른다.
그래서 딤야트에서는 "성벽이 곧 당과이며, 수호견은 양이다"
(무성한 바나나 나무가 곧 성벽을 이루고, 양이 곧 수호견 노릇을 한다는 뜻)라는 속담이 있다.
... 이곳에는 굉장히 살찐 바닷새들이 많으며 물소젖은 맛깔스러움이 일품이다.
이곳에서 나는 부리(buri, 숭어의 일종)는 샴이나 룸(al-Rum, 소아시아(현 터키)지방) 지방 그리고 미스르에 반출된다.
-59-61p
여기에서 간 곳은 파라쓰쿠르(Faraskur, 딤야트 부근에 있는 마을)시다.
이 시는 나일 강 강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나는 교외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딤야트 시장 무하씨니가 파견한 기사가 여기까지 나를 뒤좇아왔다.
그는 나를 보자 "시장님께서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당신의 향방을 아시고는 이렇게 노자를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글면서 시장 - 알라께서 그에게 보상을 - 이 나에게 보낸 은화(디르하) 뭉치를 넘겨주었다.
이어 나는 아슈무눌 룸만(Ashmunu'l Rumman)시에 들렀다.
이곳은 석류(rumman)의 성산지이기 때문에 도시 이름이 여기서 연유되었다.
석류는 미스르까지 실려간다.
이 도시는 꽤 큰 고도로서 나일강의 한 물굽이가에 있다.
여기에는 나무다리가 하나 있어 배들이 정박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신시 예배 때가 되면 이 다리가 걷혀 배들이 드나들 수 있다.
이 도시에 고등법관과 고등행정관이 상주하고 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이 싸맛누드(Samannud, 딤야트에서 카이로로 오는 방향에 있는 도시로서 나일강 강안에 있다.) 시이다.
이 도시 역시 나일강 강안에 있어 배들이 북적거리고 장터가 볼 만하다.
이곳에서 마할라툴 카비라까지는 3파르싸흐의 거리다.
여기로부터 배를 타고 나일강을소항하여 카이로에 이르는데, 양안에는 도회지와 고을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승객들은 식량을 휴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강안에 내리고 싶으면 내려서 부분세정도 하고, 예배도 드리며, 식품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까지, 또 카이로에서 상이집트의
아쓰완(Aswan, 상이집트 끝자락에 있는 큰 도시로서 옛부터 대추야자가 유명하다. 지금은 유명한 아쓰완댐이 건설되어 있다.)까지
즐비하게 이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방 장시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게 조선 후기인걸 생각하면 대단하다.
정말 이집트는 나일강빨인 듯
옛 비잔티움 제국이 통치했을 때도 제국 내에서 언제나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63-64p
카이로에는 낙타로 물장사하는 물장수가 1만 2천 명이고,
관개수 물장수는 무려 3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나일강에는 관민용 각종 선박 3만 6천 척이 위로는 상이집트로,
아래로는 알렉산드리아와 딤야트까지 오르내리면서
여러가지 재물과 기재를 실어나른다고 한다.
카이로를 마주한 나일강 강안에는 라우돠(al-Raudah, 아랍어로 '목장', '화원')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유람지로서 수려한 화원들이 많다.
카이로 사람들은 쾌활하고 낙천적이며 놀기를 즐긴다.
한번은 나쉬르 국왕의 손 골절상이 쾌유되었다고 하여 한바탕 즐기는 장면을 본 일이 있는데,
상인들은 시장을 울긋불긋하게 단장하고 상점에는 갖가지 장식품과 비단옷을 걸어놓았다.
이런 일이 며칠간 계속되는 것이었다.
오마르 븐 아쓰(이집트의 정복자) 사원은 존엄성 있는 사원으로서 규모가 크고 유명하여 여기서 금요예배가 근행된다.
사원 앞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사원 동쪽에는 이맘 아부 압둘라 앗 샤피이가 연찬하던 자위야가 있다.
카이로 시내에는 마드라싸(일종의 교육기관)가 하도 많아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다.
두 궁전 사이의 만수르 깔라운(몽골군의 침략을 격퇴한 깔라우니야조의 왕) 왕릉 가까이에 병원 하나가 있는데,
그 병원이 갖고 있는 이점에 관해서는 이루다 형언할 수가 없다.
병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설과 약품을 갖추고 있으며 하루 수입만도 1천 디나르나 된다고 한다.
-65-66p
[물장수가 저렇게 많다면 전체 인구는 얼마나 많았을까...
마드라싸는 기부금으로만 운영되는데 그 수가 하도 많았다니 돈을 그렇게 많이 기부하고도 많은 부가 남았나 보다.
참고로 마드라싸에서의 교육 기간은 10년에서 20년 정도다.
1천 디나르는...금 4.25kg... 중세 이집트의 경제력은 정말 무서울 정도다.
이 때가 후추 장사도 전성기였을 듯. 15세기 일려나?]
카이로에는 많은 자위야가 이는데, '하니까'(Khaniqah, 복수는 하와니끄Khawaniq)라고 부른다.
아미르들은 앞을 다투어 이러한 수행처를 세우고있다.
각 하니까는 수행자들이 소속된 종파에 전속되어 있다.
수행자들의 대부분은 외래인이며 수피즘으로 지덕을 갖춘 사람들이다.
각 하니까에는 샤이흐와 문지기가 한 사람씩 있으며, 그들의 생활질서는 특이하다.
그들의 식사습관은 아침에 배식원이 와서 수행자 각자가 선호하는 식단을 주문받는다.
식사는 한데 모여 하는데, 매 사람에게 빵 하나와 국 한 그릇을 각자의 전용 식기에 담아준다.
식기는 절대로 더불어 쓰지 않으며[급식보다 낫네요] 식사는 하루에 두 끼씩 한다.
그들에게는 겨울옷과 여름옷 두 벌과 일인당 월급으로 20~30디르함이 지급된다.
또한 매주 금요일 밤에는 당과류와 빨래 비누, 목욕비, 등유 등도 지급된다.
이것은 독신자들에 한해서이고, 기혼자들에게는 하니까가 따로 있다.
-66-67p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 시설은 잘 먹고 잘 살음. 아 물론 국교에 한해서...
월급이 20~30디르함이란 것은 은 60~90g 정도 줬다는 건데... 당시엔 지금보다 금이나 은 값이 훨씬 비쌌겠지?]
나일강은 6월부터 물이 불기 시작하는데, 그 수위가 16완척만 되면 쑬퇀(국가)의 지조는 전액 징수되며,
여기에 1완척만 더 높아지면 그해는 따놓은 대풍년이다.
만일 18완척에 이르면 그해 농사는 망쳐버리고 역병이 만연한다.
그런가하면 16완척에서 1완척이 낮아지면 쑬퇀의 지조는 삭감되고 2완척 낮아지면 사람들이 물고생을 하고 큰 재난이 닥치는 것이다.
-72p
[이집트의 부의 원천 나일강... 인줄 알았는데 매년 범람한 양에 따라서 달라지는구나...]
나는 카이로를 떠나서 상이집트 길을 따라 성 히자즈로 향발하였다.
길 떠난 첫날밤은 솨히브 타줏 딘 븐 하나가 다이룻 튄(Dairu'd Tin)에 지은 객정에서 보냈다.
객정은 아주 호화스럽게 지었으며, 거기에는 진귀한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솨히브는 10만 디르함[은 300kg...]을 주고 이 귀중하고 서스러운 유품들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객정을 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이 성품의 관리원에게는 급여를 톡톡히 준다.
알라께서는 그의 이러한 적성이 늘 효험을 발하도록 해주시 옵소서.
...그 다음에는 부시(Bush) 시에 이르렀다.
여기는 이집트 최대의 아마 산지이다.
아마는 이곳에서 이집트 각지와 이프리끼야까지 반출된다.
부시를 떠나서 얼마 안 가 달라스(Dalas) 시에 도착하였다.
앞에서 이야기한 곳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도 역시 아마가 많으며, 이집트 각지아 이프리끼야에 수출된다.
여기로부터 비바(Biba) 시로 갔다.
비바에 이어 도착한 곳이 바흐나싸(al-Bahnasa)시다.
큰 도시로서 화원도 많으며 질 좋은 털옷을 만든다.
...바흐나싸에 들른 다음 문야 이븐 후솨이브(Munyah Ibn Khusaib, 현 미나 시) 시로 갔다.
나일강변에 건설된 이 도시는 공간과 부지가 상당히 넓은 도시다.
상이집트에서는 유수의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곳에는 많은 학당과 유적, 자위야와 사원이 있다.
그 옛날, 이집트는 이곳이 있기에 그토록 풍요로울 수가 있었다.
-82-83p
나는 문야 이븐 후솨이브에서 만라위(Manlawi)로 갔다.
이곳은 나일강에서 2마일 떨어진 자그마한 읍이다.
이곳 법관들은 샤피이야파 법학자인 샤라풋 딘 앗 다미리다.
고관들은 모두가 바니 파딜이란 가문 출신이다.
그중 한 사람이 순 사재를 털어서 사원 한 채를 세웠다.
이 읍에는 11개소의 제당소가 있다.
그들의 관행으로는 수행자가 제당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
수행자는 따뜻한 빵을 들고 와서는 당즙을 끓이는 가마 속에 집어넣는다.
좀 있다가 꺼내면 당즙이 제법 흠뻑 묻어 있다.
그러면 수행자는 그것을 들고 가버린다.
-85p
[베네치아가 키프로스 섬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짓기 전까지 전 유럽의 설탕 공급은 이슬람 세계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가 불확실.]
이 도시(만팔루트Manfalut)에서는 밀에서 추출하여 제조한 꿀 비슷한 니다(al-nida)라는 것을 전국 시장에 출매하고 있었다.
[물엿?]
만팔루트로부터 간 곳은 아쓰유트(Asyut) 시다.
아쓰유트는 고결한 도시로서 시장도 번창하다.
...원래 이집트나 샴 지방의 법관들은 과객들을 위해 얼마간의 종교기금(auquf)이나 회사금(al-sadaqah)을 항시 손에 쥐고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어느 도시에나 이르면 일단 그곳 법관에게로 찾아간다.
그러면 법관은 필요한 것만큼 꺼내준다.
그러나 이 도시의 법관은 수행자가 찾아가기만 하면 입버릇처럼 "재고소진이요"라는 한마디만 뱉는다.
말인즉 걷어들인 제정이 바닥 나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서 줄 것이 없다는 뜻이다.
-88p
[적당히 좀 나눠주지.. 걍 생각없이 퍼준 듯.]
이곳을 출발해 꾸스(Qus) 시에 도착하였다.
큰 도시로서 물산도 넉넉하다.
화원은 녹음이 우거지고 시가는 우아하다.
사원이 많고 마드라싸도 흔하다.
여기는 상이집트 집정관들의 기거지다.
...욱수르로부터 이른 곳은 아르만트(Armant)란 작은 도시이다.
나일강 강안에 자리한 이 도시에는 많은 화원이 있다.
...이 도시로부터 아쓰나(Asna) 시로 갔다.
큰 도시로서 거리는 넓고 물산은 굉장하다.
자위야와 마드라싸, 사원이 많고 훌륭한 시장과 갖가지 화초원도있다.
-90p
여기서부터 장장 15일간 걸어서 아이자브[홍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 이븐 바투타가 이곳에서 배를 타고 메카로 가려고 했다]시에 도착하였다.
큰 도시인데 물고기와 우유는 흔하나 농산물과 대추야자는 상이집트[나일강 상류]로부터 가져온다.
..그들은 누런 천으로 몸을 가리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매는데, 그 수건 너비는 한 우스바아(usba', 1우스바아 = 3.12cm)나 된다.
여자는 유산 승계권이 없다.
그들은 낙타젖을 마시며 마하리(al-mahari)종 낙타를 타고 다니는데, 솨흐브(sahb)라고 한다.
이 도시의 3분의 1은 나쉬르왕이, 3분의 2는 부자족 왕이 소유하고 있다.
-91-92p
얼마후 솰리히야(al-Salihiyah)에 도착하였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사막에 들어가는 셈인데, 도중에 싸와다(al-Sawadah), 와리다(al-Waridah), 톼이브(al-Taib), 아리시(al-Arish),
후루바(al-Khurubah) 같은 고장에는 숙박지가 있어 투숙할 수 있었다.
숙박지마다에는 '한'(Khan)이라는 주막집이 있다.
여행자드은 가축과 함께 여기서 유숙한다.
한마다 바깥에는 음료수용 무자위가 있고 점포도 있어 여행자나 가축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할 수가 있다.
숙박지로서 유명한 곳은 까트야(Qatya)다.
거기에서 장사꾼들은 자카트(Zakat)와 귀중품세를 납부하는데, 검색이 여간 엄하지 않다.
거기에는 관서와 세무관, 사사, 공증인들이 상주하고 있다.
일당 세수액만도 황금 1천 디나르에 달한다.
이집트 당국의 허가증 없이는 누구도 샴에, 마찬가지로 샴 당국의 허가증 없이는 그 누구도 이집트에 들어 갈 수가 없다.
이것은 재산을 보호하고 이라크 밀정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다.
연도의 안전은 원주민들이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92-93p
[이집트... 정말 보면 볼 수록 대단한 나라...
아 그나저나 거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 한 챕터를 통째로 갔다가 베낀... ㅠㅠ 괜찮겠지?
이집트가 저런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이런 것을 써서 기록으로 남겨 현재 역사학에 큰 이바지를 한 이븐 바투타도
참 대단하다.]
첫댓글 숭배하라 나일강 ㅎㅎㅎ
이집트는 원래 고대에서부터 부유하기로 이름난 부국이잖습니까... 나일강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