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대표: 서영선)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7동 337-2번지 목동2차 우성@ 101동 / 핸드폰: 010-4736-6047
□문서번호 : 2005-04-06
□수 신 : 제 시민 사회단체
□발 신 :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 인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담당: 김강연 032)428-2230/ 019-590-9134)
□제 목 : 54주기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위령제 참가 및 후원 요청건
1. 이 땅의 정의와 평화, 통일을 위해 애쓰시는 귀 단체에 경의를 표합니다.
2. 한국전쟁 당시 강화도 옥계 갯벌과 갑곳 나루터, 초지 야산, 교동 등 강화도 전역에서 우익단체(강화도 향토방위 특공대)에 의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500~7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4년에는 강화도에서 한국전쟁 때 우익단체에 의해 최소한 200여 명의 양민이 학살됐음을 입증하는 미 국방부의 비밀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3. 그동안 강화 유족회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명예회복 범국민위원회를 비롯한 전국의 유족회와 함께 양민학살 진상규명․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왔습니다. 작년 말 민간인 학살문제를 포함한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과거사법’ 제정이 무산되어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습니다.
4. 고령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투쟁해 오신 유족분들은 좌절하지 않고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과거사법’ 제정 투쟁을 다시 한번 결의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54주기를 맞이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신 양민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영혼을 달래주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취지에서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5. 많은 분들이 양민학살 진상규명투쟁에 관심 가져주시고 함께 격려해 주시길 바라며 귀 단체의 위령제 후원(단체별 20,000원 이상) 및 참여를 요청 드립니다.
<<54주기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위령제>>
▶일 시 : 2005년 4월 23일(토) 오전 11시 30분
▶장 소 : 강화 구대교
▶후원계좌 : 농협 149-02-385477 (예금주: 김강연)
[별첨자료 1]
■ 행사 기획안
위령제
○ 사회 정동석(인천평통사 사무국장)
○ 피학살자 영령들에 대한 묵념
○ 내빈 소개
○ 추모사 1
○ 추모사 2
○ 추모사 3
○ 추모시 낭송
○ ‘과거사법’ 제정 투쟁보고
○ 연대사
○ 강화양민학살 실태
○ 추모노래
○ 추모 춤
○ 헌화
○ 폐회
○ 점심식사(12:30~)
■ 약도
- 자가용 이용시 : 강화대교 건너서 좌회전(강화역사박물관 방향)하여 좌회전
- 버 스 이용시 : 강화 터미널에서 택시 이용(기본요금 나옴)
[별첨자료 2]
■ 강화 양민학살의 진상
1951년 1․4후퇴부터 2월 말까지 강화 향토방위 특공대(대장 최중석)에 의해 강화 전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1살박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약 500~700여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다.
1951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 갑곳 나루터와 옥계갯벌에서는 45명(여자 15명)이 학살되었다. 1951년 1․4후퇴를 겪으면서 향토방위 특공대원들은 가볍게 부역한 사람들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강화읍 양조장에 가두었다가 관청리 옛 곡물검사소로 데려가 가두었다. 경찰이 1951년 1월 2일 후퇴함에 따라 경찰서를 장악하고 양민들을 어떤 법적 절차도 없이 무참히 학살하였다.
월곳과 돌미루, 철산리 등 해안에서 약 300여명과 길상면 온수리에서 수 십명을 학살했다. 이들은 대개 강화주민으로서 9․28 수복시 잠시 피란갔다 돌아오던 사람들이었다. 1951년 1월 7일 인천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오는 사람들 60여명을 창고에 가두었다가 밤 1시경에 끌어내어 길상면 사설재에서 학살하였다. 이당시 특공대와 소년단의 수는 500여명으로 늘어났고 무기가 부족하면 낫, 몽둥이, 곡괭이 등 흉기도 동원하였다. 1월 2일 청방과 터기부대, 경찰이 모두 후퇴하였고, 후퇴하면서 경찰에서 인수인계한 총기 44정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하였던 사람도 인수인계를 받았다. 1월 7일 돌미루와 철산리에서 450명을 학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이때는 면별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1월 17일 석모리로 후퇴하는 중 내가 지서에 30~40명을 연행하여 하루종일 가두었다가 저녁에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어디 후미진 곳에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2월말이 아니만 3월초에 여맹위원들은 모두 죽였고 월북한 가족 40~50명을 학살, 이틀에 걸쳐 삼산면 어류정에서 학살, 서도에서도 부역자 가족을 웅구지에 끌고가 학살하였다. 하점에는 약 30가구가 북으로 갔고 그 가족들은 강화읍 유치장에 모아서 대전 형무소에 가두었다가 죽였다고 한다. 교동도에서는 상용리 앞산에서 50여명을 집단학살, 이들은 상용리 화동초등학교 자리에 본부를 두고 중대본부는 조휘돈씨댁으로 하고 소대본부는 이석범장로 집으로 하고 각 해안에서 약 100명을 학살하였다로 한다. 교동 특공대는 대개 연백에서 피란나온 사람들로 구성됐고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활동했다. 이렇게 강화 전역에서 학살당한 수는 500~700명에 이른다.
【강화도 양민 학살지역】
- 강화 본도
갑곳 나루터, 옥계갯벌, 월곳, 돌미루, 철산리, 길상면 온수리 서설제, 선원면 지서자리, 강화경찰서 유치장
- 교동도
상용리 앞산, 원해(해안) 인현나루, 황산골, 고구리 해안, 사태골, 돌부리
- 서도
주문에 있는 나루터(느리)에서 학살
- 삼산 석모도
어류정(63초소 아래) 갯벌 약 40~50명 학살
■ 유족회 활동
- 1993년 10월부터 양민학살에 대한 자료(강화 특공대의 역할에 대해)를 수집하면서 가해자 3인을 만나 보았고 그 중 관청리에 살고 있는 김동환씨를 만나 사건 전모를 듣게 되었다. 이어 1997년 7월호 말지에 강화 양민학살 사건을 보도하게 되었다.
- 2000년부터 강화양민학살 위령제를 시작으로 매년 4월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2000년 7월에는 국방부, 강화군청, 강화경찰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 행자부, 청와대, 국회, 인천시의회에 강화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2000년 5월 17~18일 개최된 동아시아 인권 평화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화양민학살 사건을 발표하였다.
- 2001년 위령제를 지내고 강화 구대교 앞에 강화 학살사건에 대한 표지판을 설치하였다. 2000년 8월부터 2002년까지 매월 강화군청 앞에서 강화 양민학살 진상규명과 추모비 건립을 촉구하는 집회를 인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 진행해 왔다. 2001년 9월부터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투쟁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와 인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전개해 왔다. 그리고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 찾기와 증언채록 등 강화 양민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으며 매년 4월에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다.